Chapter 777 - #96. 진해솔 (81)
"안녕하세요. 의외로 흔쾌히 받아주시네요. 문전박대 당할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는데."
"...그대를 내칠 이유가 없으니 받아준 것이다. 거기다 내 쪽에서 먼저 그대를 부르려 했는데, 그대가 나를 먼저 찾아 올 줄 몰랐다."
황후와 비앙카 사이에서 보이지 않는 견제가 오갔다.
황후는 비앙카가 오늘 황제의 잠자리를 데웠다는 것을 궁인에게 전달 받아 알고 있는 상태였기에 심기는 더더욱 불편할 수밖에 없었다.
"오늘 몇 명의 궁인들이 제 뒤를 따라다니더군요. 아! 들켰다고 뭐라 하시지는 마세요. 제가 워낙 이런 쪽에 일가견이 있는 지라 못 알아보는 게 이상한 거랍니다."
"...내 아이들이 그대를 불편하게 했나 보구나."
"폐하께서 이곳에선 어떻게 지내시나 궁금했는데, 궁금증을 풀 수 있어서 참 좋았어요. 다 좋았는데, 딱 하나 미련이 남는 게 있더라고요."
"미련? 앞으로 황궁에서 지내려고 하는 게 아니었나?"
"에이~ 제가 후궁이 되면 너무 아깝죠. 사실 저는 황후님과는 정말 잘 지내고 싶었거든요. 생각처럼 되지는 않았지만 말이에요."
비앙카가 마음 만큼은 진심이었다며 너스레를 떨었다.
하지만 황후는 냉랭한 표정을 바꾸지 않았다.
그녀가 자신에게 납작 엎드렸어도 황후는 그녀를 결코 받아 주지 않았을 것이다.
제 주인을 물어 뜯고 싶어 하는 개를 굳이 키울 이유가 없지 않은가?
"저는 이제 새로운 임무를 받아 떠날 거에요. 오늘 황후님을 보니까 저를 엄청 견제하시려고 하던데, 그럴 필요 없다고 알려드리고 싶었어요."
"새로운 임무를 받아 떠난다...그대는 폐하의 곁에 남아 있고 싶다 하지 않았나? 나는 그대가 후궁이 되는 것을 기다리고 있었다. 나를 돕고 싶다고 했던 그 마음을 살펴볼 생각이었지."
황후는 혹 자신 때문에 새로운 임무를 받아 떠나는 선택을 했는지 묻는 것이었다.
"에이, 좀 건방진 말이겠지만 황후님이 뭐라고 제가 그런 선택을 하겠어요. 여기서는 주인님께서 절 감시하며 막을 게 뻔해서 다른 곳에 가겠다고 한 거에요. 주인님이 워~~낙에 저를 걱정하시거든요."
"보아하니 걱정하는 대상이 다른 것 같은데."
"호호호! 맞긴 해요. 근데 절 걱정한 것도 조금은 있어요. 오늘도 얼마나 많이 걱정해주셨는데요. 제가 황후님께 건방지게 굴어서 혼이 날까봐요."
"...그대는 주인을 곤란하게 하는 걸 즐기는구나."
"여기서 살기에는 너무 위험한 성격이죠?"
"그래. 폐하께서 왜 널 이리로 불러들이고 싶지 않았는지도 충분히 알겠다."
비앙카의 시원시원한 말투는 귀족들이 듣기에 천박한 수준이었다.
아마 황후도 그녀가 황제의 사람이 아니었다면 말도 섞으려 하지 않았을 것이다.
"그러니까요. 그래서 그냥 떠나려고요. 마음껏 날뛰어도 되는 곳으로요."
"미련이 남지 않겠는가? 폐하에 대한 마음이 가벼워 보이지 않던데."
"그 짧은 시간에 그것까지 보셨어요?"
"지금 가면 또 몇 년간 폐하를 만나지 못하겠지. 넌 그리 살아도 좋은 게냐?"
"애초에 제 손에 붙잡힐 분이 아니시지 않습니까? 예전이면 몰라도. 아무튼 저는 깔끔하게 포기했어요. 그냥 가끔 이렇게 만나면서 위로 받는 거죠. 그리고 남은 시간은 제가 할 수 있는 곳에서 폐하를 위해 움직이는 거에요."
비앙카의 꼬리가 살랑살랑 흔들리고 있는 줄도 모르고, 황후는 자신의 이익보단 폐하에게 충성하는 비앙카를 처음으로 긍정적으로 보고 있었다.
분란을 일으키지 않기 위해, 순순히 황궁을 떠나겠다고 하지 않았는가?
황후가 보기에 비앙카는 황제에게 많은 영향을 미치는 여자였다.
'순순히 떠나주겠다고 한다면 굳이 나도 건드릴 필요는 없겠지.'
그렇다고 완전히 그녀에 대한 경계심을 놓은 건 아니었다.
그녀가 당장 황궁에서 떠나는 것은 아니지 않은가?
눈 앞에서 사라지기 전까지, 황후는 비앙카에 대한 경계심을 완전히 놓지는 않을 생각이었다.
'...전보다는 경계심이 많이 수그러들긴 했지만.'
경계심이 누그러진 효과는 곧장 나타났다.
황후가 비앙카와 제법 괜찮은 대화를 나누기 시작한 것이다.
화기애애하다는 표현은 할 수 없었지만, 적어도 대화 다운 대화를 나눌 여건이 갖춰진 것이었다.
그리고 그 과정에서 황후는 비앙카가 평범한 백성은 아니라는 걸 눈치 챘다.
"혹 몰락 귀족 가문 출신인가?"
"제가 귀족 출신으로 보이셨나 보네요."
"은연중에 보이는 기품은 숨기기 어려운 법 아니겠나?"
"자세히 묻지 마셔요. 말씀드릴 수 있는 건 없답니다."
비앙카는 황후의 질문을 두루뭉술하게 넘겨버렸다.
다만 황후가 오해를 할 수 있도록 여지를 주면서.
평범한 백성 출신이라고 대답하지 않았기에 황후는 몰락 귀족 출신이라는 확신을 얻었다.
'이 정도면 확실하게 정리 됐지?'
일찍 움직인 보람이 있었다.
이제 자신은 주인님을 사랑하지만 그의 곁에 있으면 괴로울 것이기에 가까이에 있는 것을 포기하고 먼 곳에서 그를 위해 일하는 절개 있는 신하가 되었을 것이다.
자신이 저질러 놨던 일을 모두 수습했으니 이제 주인님한테 게오스 제국으로 향하는 걸 지원 받는 일이 남아 있었다.
"폐하아~~앙~꺄~!"
황후 궁에서 나오는데, 마침 주인님이 그녀 앞에 나타났다.
아마 뒤늦게 궁인에게 그녀가 어디로 갔는지 듣고 허겁지겁 달려온 걸 거다.
'귀여워.'
그녀가 사고 쳤을까 전전 긍긍 하는 모습을 보니 짜릿하다.
자신 때문에 주인님이 잔뜩 곤란해져서 힘들어 해줬으면 좋겠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신을 구하기 위해 애써준다면...
'그게 사랑이지♡'
비앙카에겐 자신이 주인님에게 사랑 받고 있음을 증명하는 일이 될 것이다.
하지만 주인님은 야속하게도 그렇게까지 확인하지 않아도 자신을 소중하게 생각한다는 걸 알 수 있게 행동하곤 했다.
'너무 다정하달까.'
그래 놓고 그녀가 휘두르려고 하면 휘둘려 주지도 않는다.
주인님이 너무 쉬웠다면 흥미가 금방 떨어졌을 테지만, 너무 휘둘려주지 않는 것도 서운하다.
"황후는 갑자기 왜 만났어? 깜짝 놀랐잖아."
"어제 보니까 황후님이 절 되게 못 마땅해 하시더라고요. 그래서 알려주고 왔어요. 저 금방 다른 곳으로 간다고요."
"그냥 둬도 알게 됐을 텐데, 굳이? 네가 가서 알려줄 필요 없었어."
"황후님이 절 어떻게 삶아 먹을까 고민 중이신 게 뻔히 보였는데요? 괜히 방치했다가 곤란해지는 것보단 미리 말해서 사전에 차단하는 게 낫다고 생각했어요."
"황후가 그렇게 섣불리 움직일 사람은 아니야."
잘못을 저지르지 않은 후궁에게 먼저 손을 댈 사람이 아니라는 순진한 주인님이 귀여워 비앙카가 배시시 웃었다.
남자라서 그런지 여자 마음은 조금도 모른다.
"여자 마음이 그리 간단하게 결론이 나는 줄 아셔요? 여자 마음 고생 시켜봤자 주인님한테 좋은 일도 없다고요. 제가 괜히 일찍 움직인 게 아니랍니다. 주인님을 위해서였다고요."
자신이 이 고생을 한 건 오로지 주인님을 위해서다.
어제 화끈했던 밤의 보답이랄까?
그런데 그녀의 배려도 모르고 왜 그런 불필요한 일을 했냐고 하니 절로 눈이 뾰족해졌다.
"아무튼 저는 주인님을 위해서 열심히 일했으니까 보상해주셔야 해요."
"게오스 제국 가는 일 말이야?"
"네~!"
"거기서 얼마나 있으려고?"
"1년?"
"그렇게나 오래?!"
주인님이 게오스 제국에 가는 것까지는 허락하셨지만, 그녀가 머물 수 있는 시간은 아직 결론이 나지 않았다.
주인님은 최소 1년은 있고 싶다는 비앙카의 요청을 너무 길다며 만류했다.
"배고픈데 맛있는 거 먹을래요."
결국 비앙카는 배가 고프다며 한 발 뒤로 물러났다.
"널 아무 준비 없이 적국에 보내지 않을 거야. 위험한 곳에 혼자 보낼 생각도 없어."
"준비를 잘 해주시면 저도 좋죠. 안전할 테니까요. 근데 혼자 안 보내면요?"
도움을 받는다면 게오스 황제를 손아귀에 넣는 게 더 빨라질 테니 마다 할 이유는 없었다.
"이제부터 너한테 뭐가 필요할지 생각해봐야지."
"음?"
"나를 따르는 믿을 만한 귀족들에게 너를 소개 시킬 거야."
"귀족들한테요?"
"그쪽에 널 소개 시킬 위장 신분은 상인이 적당하지 않을까 하거든. 그때 겸사겸사 널 보좌 할 사람들을 붙여줄 참이야."
"나쁘지 않네요. 상인이라면 원래 하던 일이라서 잘 할 수 있을 거에요."
주인님은 어제 말했던 일을 한층 구체화 시켜둔 상태였다.
"일단 네가 게오스 황제를 만나게 하는 것까지는 내가 해줘야 할 것 같거든."
"만나기만 한다면, 나머지는 제 힘으로 할 수 있어요."
"최대한 많이 챙겨줄게. 먼 곳에서 교역을 하러 온 대상인. 어때?"
"좋아요!"
"그래, 그 정도 신분이어야 그쪽에서 함부로 널 해하려고 하지 않을 거야. 거기다 기사를 붙여줄 거다."
주인님이 자신을 보호해주기 위해 꽤 많은 것들을 생각해둔 모양이었다.
"기사를요? 되게 멋있는 갑옷 입고 있던 그 사람들 말하는 거죠?"
"황궁에 들어가서도 널 지켜주고 도와줄 사람은 필요할 테니까."
이렇게까지 진심으로 밀어줄 줄은 몰랐다.
가볍게 생각했던 취미 생활이지만, 주인님은 꽤 진지하게 위험한 곳에 보낸다고 생각하는 모양이었다.
"대신, 몇 가지 반드시 지켜야 하는 명령을 내릴게."
"어떤 명령인데요?"
어떤 명령인지 묻긴 했지만, 사실 뭘 명령할지는 알고 있었다.
"네 신변이 위험해지면 무조건 나한테 연락하는 거. 그리고 본인의 신변을 그 무엇보다 1 순위에 둘 것. 너를 이런 곳에서 허무하게 잃는 건 말도 안 되는 일이잖아."
"...너무 다정하게 구시니까 적응이 안 되려고 해요."
살짝 소름이 돋고, 가슴도 간질간질 거리는 게 딱 그녀가 싫어하는 분위기였다.
"네가 거기 가서 무슨 짓을 할지 뻔히 아니까 그런 거잖아."
허나 주인님은 그녀가 질색하는 걸 보고도 아랑곳 하지 않고 계속해서 걱정을 드러냈다.
"근데 주인님, 그건 아셔야 해요. 이 몸이 죽는 거지, 제가 진짜 죽어버리는 건 아니라는 거요."
죽는 건 '비앙카'라는 몸뚱이다.
몸뚱이가 죽으면 그녀의 정신은 다시 인형으로 되돌아간다.
비앙카의 몸을 삼켰던 것처럼 다른 이의 몸을 또 다시 삼켜낸다면?
그녀는 여전히 주인님의 곁에서 살아갈 수 있을 것이다.
물론 이 몸이 갖고 있는 권력을 포기하는 건 아쉬우니 최대한 몸을 사리긴 할 것이다.
애초에 취미 생활을 하는데 목숨을 걸 생각도 없었다.
"그러니까 만약 제가 잘못 돼도 절대 인형을 버리시면 안 돼요."
"그 인형, 네가 보관하고 있잖아."
"집에 제 금고 안에 넣어뒀죠. 거기 비밀번호 알려드릴까요?"
"됐어. 그런 거 알 필요가 왜 있는데?"
그녀가 죽을 일이 없으니 비밀번호를 알고 있을 필요도 없다는 의미였다.
그녀도 주인님의 생각에 동의했기에 비밀번호를 굳이 알려주지는 않았다.
'주인님 생일이니까, 안 알려줘도 영영 못 찾지는 않겠지.'
비앙카는 얼마 후, 주인님이 챙겨주신 각종 금은보화와 기사들을 대동하고 게오스 제국으로 떠났다.
이동 수단으로는 커다란 배를 이용했으며, 신분 세탁도 완벽하게 마친 후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