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hapter 786 - #96. 진해솔 (90)
자기 여자들을 임신시켜주는 대가로 80만 코인을 걸 수밖에 없었던 남자.
그 남자가 살아가고 있는 세계가 아포칼립스였기에 위험성이 고려 되었을 것이고, 생활하는데 들어갈 어려움 때문에 코인의 보상이 한 번 더 치솟았을 것이다.
"이 사람이랑 대화를 나눠보고 싶은데 가능할까?"
[공짜로?]
"얼마 주면 해줄 건데?"
우선 이 미션을 하겠다고 하기 전에, 당사자와 대화를 나눠 봐야 할 것 같았다.
[농담이야. 공짜로 해줄 테니까, 기다려봐.]
그리고 웬일로 포니가 순순히 내 부탁을 들어주겠다며 부지런하게 사라졌다.
이렇게 적극적으로 도와주는 걸 보면, 이 미션이 저들 사이에서 꽤 가치가 높은 모양이었다.
얼마 후, 포니가 그 남자의 핸드폰 번호를 알아와 나와 통화를 시켜주었다.
여기서 사용 된 핸드폰은 당연히 코인으로 구매해 비앙카과 연락을 주고 받았던 그 핸드폰이었다.
-안녕하십니까.
"어...안녕하세요."
남자의 목소리는 굉장히 매 마르고, 허스키했다.
단순히 목소리가 그랬다는 게 아니라 남자의 목소리에서 느껴지는 감정이 굉장히 텁텁하다고 표현하는 게 맞을 것이다.
'아포칼립스 세상...'
소설이나 영화로 보아왔기에 낯설지는 않은 세계관이다.
적어도 판타지보다는 현실적으로 다가오니 말이다.
-저와 대화를 나누고 싶다고 들었습니다.
"네, 미션을 받아들이기 전에 물어보고 싶은 게 몇 가지 있어서 요청 드렸습니다."
-얼마든지, 궁금한 게 있다면 말씀하십시오.
"의뢰 내용을 보면 제가 의뢰인의 몸에 빙의해야 한다고 들었습니다. 그런데 이 빙의라는 게 정확히 어떤 방식으로 되는 건지 알 수가 없더군요."
-일정한 시간을 정해두고, 그 시간이 되면 저는 잠이 들고 당신이 깨어나게 될 겁니다.
남자는 덤덤하게 내 질문에 대한 대답을 해주었다.
"생각보다 간단하네요."
그 시간을 비워두고 빙의해서 그의 여자들과 잠자리를 가진 후 내 몸으로 돌아오는 것.
그곳에서 24시간 생활 할 각오를 갖고 있었던 나한테는 매우 편한 일이었다.
-그래요. 생각한 것보다 간단할 겁니다.
"오지랖일 수 있지만, 이게 80만 코인을 주실 만큼 어려운 일로는 안 보이는데 어쩌다가 그 많은 금액을 내놓겠다고 하신 겁니까?"
혹시 내게 숨기는 것이 있지는 않은지, 미션을 받기 전에 알아 둘 필요가 있어 보였다.
-80만 코인을 전부 제가 지불하는 건 아닙니다. 그 중 50만 코인은 위 쪽에서 지원금으로 내준 거죠. 그리고 내 몸에 아무나 빙의를 할 수 있는 게 아니라서 그 정도 값은 지불 해야 한다고 들었습니다.
"아무나 할 수 있는 게 아니라고요?"
-내 몸에 빙의한 사람이 이곳에서 어떤 짓을 할지 모르지 않습니까? 아무에게나 맡길 수 없는 일이었습니다.
"아...확실히 그런 걱정이 안 될 수가 없겠군요."
-그런 점에서 당신은 신뢰도가 매우 높군요. 이 정도로 높은 신뢰성을 가진 분은 처음인 것 같습니다. 지원 자격이 까다로워서 그런지 꽤 오랫동안 구인 했는데도 하겠다는 사람을 찾기가 힘들었거든요.
나도 썩 착하게 살아오진 않았던 것 같은데...
물론 그래도 그가 따지는 자격에 내가 부합하지 않을 리는 없을 것이다.
내가 저 남자의 몸에 빙의해서 엄한 짓을 할 리가 없지 않은가?
"저는 그냥 할 수 있는 의뢰 목록에 있어서 선택한 거였는데, 조건이 까다로울 줄은 몰랐네요."
-거기다가 섹스 실력도 중요하게 보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당신은 그쪽 스탯이 굉장히 높더군요. 신뢰성이 높은데도 섹스 실력이 뛰어난 분은 처음 봅니다.
신뢰성도 높은데, 섹스 실력도 뛰어나야 한다라...
본인도 기준이 너무 까다로운 것은 알고 있었다며 남자가 한숨을 쉬었다.
-그래도 80만이나 걸었으니 그 정도 까탈은 부려도 된다고 생각했습니다. 동료들에게 못 할 짓을 해야 하는데, 그 정도는 예의라고 생각했으니까요.
못할 짓.
본인 스스로가 섹스를 감당하지 못하고 다른 사람에게 맡긴 것.
굳이 집요하게 묻지 않아도 해석할 수 있는 말이었다.
나는 잠시 고민하다가 좀 나중에 언급하자 생각하고 말을 돌렸다.
"그쪽이 아포칼립스 세계라고 들었습니다. 생활 수준은 어느 정도까지 복구하셨습니까?"
고작 하루에 몇 시간 정도에 불과 할 지라도, 그곳에서 생활하긴 해야 하니 알아 둘 필요가 있었다.
어느 수준으로 문명을 복구했는지 말이다.
'적어도 먹고 싸고 입는 수준은 알아야 하는 거잖아.'
남자도 내 질문을 기분 나빠하지 않고 순순히 대답을 해주었다.
-문명을 많이 회복하진 못했습니다. 하지만 인간이 살아가는데 있어서 반드시 필요한 부분은 복구해놨습니다. 아시다시피 우리 같은 사람은 '코인'을 이용하면 얼마든지 비정상적인 혜택을 누릴 수 있지 않습니까?
이 남자는 나와 같이 코인을 이용할 자격을 갖고 있는 사람이었다.
"문명의 대부분을 코인으로 복구하셨군요."
-만약 코인이 없었다면 우리 세상은 이미 멸망했겠죠.
"코인은 어떻게 수급하십니까?"
내가 이 사람 몸으로 코인을 수급하면 그 코인은 어떻게 되는 거지? 하는 궁금함이 생겼다.
알다시피 나는 섹스를 통해 코인을 수급한다.
저 남자의 몸으로 섹스를 하는 것이니 코인이 제대로 지급이 될지 알 수 없었다.
-저는 좀비를 잡습니다. 좀비의 수준에 따라 코인이 지급 되죠.
역시 아포칼립스 세계관인가.
좀비를 잡아서 코인을 얻어 문명을 개척한다라...
이거 어째 소설 속 주인공이 내 앞에 있는 거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
-그럴 일은 없겠지만, 혹여나 당신이 좀비를 잡아서 코인을 번다면 그 코인은 당신의 것입니다.
"아뇨. 제가 좀비를 잡을 일은 없을 겁니다. 사실 제가 코인을 버는 방법이 섹스거든요."
-...섹스...말입니까?
"네, 그래서 궁금했어요. 빙의를 해서 하는 섹스에도 코인을 받을 수 있을지 말이죠."
-그것까지는...잘 모르겠습니다.
음...섹스 얘기가 나오자 남자의 목소리가 확 죽어버린다.
이 남자가 섹스라는 것에 얼마나 큰 공포를 느끼고 있는지를 어렴풋이 느낄 수 있는 순간이었다.
그리고 지금이 아까 잠시 미뤄뒀던 화제를 꺼내기 좋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흠흠, 의뢰 내용을 보면 미래를 위해 여성분들을 임신 시켜 달라고 하셨는데, 그 여성 분들과 관계는 어떻습니까?"
아무런 호감도 없는 사이인데 덜컥 임신을 시켜 달라는 의뢰면 곤란하다.
꼬시는 것까지 내가 해야 하니 말이다.
-관계는...하아~ 아마 밤을 보내는데 문제 없을 겁니다. 다들 제가 다가와 주기를 기다리고 있으니까요. 인류를 위해서라도 우리는 아이를 낳아야 합니다. 그걸 다들 인정했고요. 하지만 제가 결심이 서지 않아 지금까지 미루고 있는 상황입니다.
그가 여자들을 외면 했던 시간이 길었기에 아마 다가가면 다들 거부하지 않을 거라고 확신을 담아 말했다.
-요즘에는 은연 중에 저를 재촉하고 싶었는지 위험하니까 좀비를 잡으러 바깥으로 나가지 말라고 하더군요. 유일하게 남은 남자가 저 하나 뿐이니까요.
인류가 멸망하지 않을 수 있는 유일한 희망.
그게 의뢰인의 위치였는데, 모두의 기대를 외면하고 있으니 마음이 굉장히 무거웠을 것이다.
'여자랑 섹스 하지 못하는 이유에는 트라우마가 깊게 연관이 되어 있을 것 같은데...상점에 있는 상품들로 고칠 생각을 안 하는 건 왜 일까?'
굉장히 궁금했다.
도대체 무슨 사정으로 다가오는 여자들을 거부하고, 귀한 코인까지 내걸어서 빙의라는 어처구니 없는 짓을 계획했는지.
하지만 이유를 물어보면 대단히 실례를 저지르는 것 같았기에 침묵을 하기로 했다.
"여자 분들께는 제가 다른 사람이라는 걸 말하지 않으실 거죠?"
-예, 그게 서로를 위해서라도 좋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다른 남자에게 안길 거라면 진작 그랬을 겁니다.
남자가 다 죽은 게 아니었나?
-물론 저를 하염 없이 기다리다가 남자가 다 죽어버릴 줄은 그녀들도 몰랐겠지만요.
"......"
아포칼립스 세상에서 살아가는 시간이 결코 쉽지 않았을 것 같다.
남자의 목소리에서 진한 피로감이 느껴진다.
"이 정도면 어떤 상황인 건지 어느 정도 파악이 된 것 같네요. 근데 제가 빙의 하지 못하는 시간에는 어떻게 하실 생각이신가요? 밤에 있었던 일을 모르시면 이상하다고 생각할 텐데요."
섹스를 통해 마음이 이어졌다고 생각할 테니, 본래의 그가 되었을 때도 변화가 생길 거다.
좀 더 친근하게 대화를 나누고 싶어 할 것이고, 한결 편하게 스킨십을 나누고 싶을 거다.
'원래 늦게 배운 도둑이 날 새는 줄 모르는 법이거든.'
섹스라는 단어 자체 만으로도 목소리에 피곤이 묻어 나오는데, 점점 바뀌어 갈 여인들을 어떻게 감당할지 걱정이 됐다.
-...인류를 위해 어쩔 수 없이 하고 있는 일입니다. 제 몸을 다른 분께 맡기기까지 했는데 더 희생을 해야 하겠습니까?
"!!"
인류를 위해 희생하고자 이런 의뢰를 넣기까지 했는데, 그 이상의 희생을 강요받아야 하는 거냐고 하니 할 말이 없었다.
'쓰읍ㅡ'
의뢰인의 태도가 이렇다면 나도 조심해서 의뢰를 실행할 필요가 있었다.
괜히 내가 여지를 줘서 진짜 몸의 주인인 남자를 곤란하게 만들 순 없지 않은가.
"뭘 바라는지 어느 정도는 이해가 됐습니다."
80만 코인을 받을 수 있는 의뢰인 만큼, 너무 날로 먹는 건 안 될 모양이었다.
여자들과 감정적으로 얽히지 않는 섹스를 해야 한다는 건데...
'이 미션을 지금 받은 게 다행이네.'
이걸 먼저 받았으면 다가오는 여자들을 쳐내는 게 쉽지 않았을 것이다.
여러 후궁들을 경험해보면서 나는 살을 섞는 여자의 일방적인 관심을 무심하게 넘기는 방법을 확실하게 익힌 상태였다.
나는 마지막으로 남자에게 주의 사항을 물어보았다.
반드시 지켜야만 하는 규칙 같은 게 있다면 따라 줄 생각으로 말이다.
"제가 빙의하기 전에 알아둬야 할 중요한 정보가 있을까요?"
-저는 공평하게 모두에게 존댓말을 하니 다른 사람에게 모두 존댓말을 사용해주시면 이상하다고 생각하지 않을 겁니다.
"그렇군요."
-우리는 오랫동안 사선을 함께 해쳐온 동료입니다. 아마 당신이 제 몸에 빙의해서 대화를 나누다 보면 이상함을 느낄 수 밖에 없을 겁니다. 그러니 최대한 대화를 피하고, 곧장 침대로 데려가서 섹스를 하십시오.
"...아무래도 대화를 하면 아는 게 없으니 답하기가 쉽지 않긴하겠네요."
그가 결국 하고 싶은 말은 '쓸데없는 행동 하지 말고 빙의하면 할 일만 해라.' 인 것 같았다.
생판 남을 자신의 몸에 빙의 시키는 것이니 얼마나 찝찝하겠는가?
남자의 불편함을 충분히 공감하고 있었다.
물론 그 뾰족한 태도가 썩 마음에 드는 건 아니었지만 말이다.
-부디 잘 부탁 드립니다. 그녀들에게 아이를 안겨주십시오. 오랫동안 저만 보며 기다려온 사람들입니다.
"알겠습니다."
그렇게 빚을 갚기 위한 두 번째 미션이 시작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