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남녀역전 세계의 아이돌-787화 (771/849)

Chapter 787 - #96. 진해솔 (91)

아포칼립스.

좀비.

드라마 영화 속에서 꽤 좋은 소재로 이용 되는 허구의 이야기.

하지만 우리에게는 단순히 허구가 아닌 현실이 되었다.

그어어ㅡ 그어어ㅡ

어...으.....어....어어...으....

도로 위를 돌아다니는 건 사람이 아니라 '좀비'.

핏자국이 눌러 붙고, 죽어 있는 시체 주변에는 구더기와 파리그리고 쥐들이 살 판이 나서 돌아다녔다.

도로를 꽉 채우고 있는 버려진 폐차들과 오물들.

비어진 건물들 사이사이로 거미집이 쳐져 있고, 우거지게 자라난 풀들이 세상의 멸망을 알려온다.

이곳은 아포칼립스.

좀비 바이러스가 인류를 멸망 시킨 세계.

물론 그곳에서도 소수의 인류는 살아 남아 어떻게든 생명줄을 이어가고 있기는 했다.

"오빠?"

"......."

"여기서 뭐해요?"

살아 남은 인류는 좀비들이 접근하지 못하도록 커다란 성벽을 쌓았다.

좀비를 죽이는 것도 힘겨워 하던 이들이 어느새 좀비들을 일정 구간까지 모두 몰아내고 '터'를 잡는데 성공한 것이다.

도로에 깔려 있는 벽돌을 이용해서 하나하나 쌓아 올린 성벽은 사람 답게 살 수 있는 생활 공간을 만들어주었다.

"좀비 보고 있었습니다."

"지겹게 보던 건데 굳이요?"

"시간 때우는 걸로는 이것 만한 게 없으니까요."

초반에 사람들이 많이 살아 있었을 때는 좀비 바이러스를 해결해보겠다며 연구를 했었더랬다.

하지만 수백 년간 쌓아오던 문명은 사라진 지 오래.

더 이상 좀비 바이러스의 백신을 만들어보겠다고 나서는 사람은 없었다.

요즘 사람들의 최대 관심사는 '농사'였다.

먹고 사는 게 가장 중요한 문제가 되어버렸기 때문이다.

"요즘 많이 심심하죠?"

"......."

"미안해요."

그녀의 잘못은 아니다.

자신이 인류를 위해 반드시 해야만 하는 일을 할 수 없어서 생긴 일인 거지.

"아닙니다."

"제가 다시 한 번 건의해볼게요. 오빠 실력은 다들 모르는 사람이 없잖아요. 지금까지 오빠 덕분에 살아남을 수 있었던 거기고 하고요."

그의 전투 실력은 아마 이곳에 모인 사람들 중 최고일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바깥에 나가는 것이 불가능해진 것은 그가 이곳에서 살아남은 유일한 '남성'이기 때문이었다.

갈색의 단발머리를 하고 있는 한나래.

깊게 파여 가슴골이 훤하게 드러나고, 엉덩이 아래를 겨우 가려주고 있는 짧은 핫팬츠를 입고 있는 그녀를 힐끔 본 남자가 말했다.

"옷이 너무 얇은 거 아닙니까."

정확히 말하고 싶었던 건 옷이 너무 짧은 것 아니냐였다.

"여긴 안전하잖아요. 적어도 집에서는 좀 편하게 있고 싶어서요."

"...네."

한나래는 남자의 지적에도 태연하게 다른 핑계를 댔다.

요즘 들어 집 안에서 생활하는 여자들의 옷이 유난히 얇고 짧아지고 있었다.

정확히는 자신에게 '섹스어필'을 하고 싶은 것일 거다.

하지만 여자들이 이러면 이럴수록 그는 점점 자신이 있을 수 있는 자리가 줄어든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차라리 좀비를 보고 있는 게 마음이 더 편해.'

그런데 그 마저도 이젠 하지 못할 모양이었다.

한나래가 이곳까지 꾸역꾸역 알아내서 찾아 왔으니 말이다.

이런 노골적인 유혹에 화가 날 때도 있었다.

싫다는 사람을 끈질기게 귀찮게 굴고 있는 것이니까.

하지만 이젠 분노를 넘어 체념을 해버린 상황이다.

'그래도 이런 걱정은 오늘이 마지막이겠지.'

드디어 자신을 대신해서 인류를 위해 여자들과 섹스를 해줄 사람을 구했다.

그는 섹스 자체를 혐오 할 뿐이지 동료들을 싫어하는 게 아니다.

그들에게 사랑을 느끼고 있었다.

그저 그는 플라토닉 사랑을 바랄 뿐이었다.

'아무도 알아주지 않지만.'

인류를 보존하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지 잘 알고 있었다.

하지만 섹스를 해야 한다는 상상만 해도 구토감이 밀려왔다.

상점에서 약을 상용한다면 억지로 성기를 세워서 섹스를 어떻게든 할 수도 있긴 할 거다.

허나 그건 본인에게도, 상대를 해야 하는 여성의 입장에서도 상처를 주는 일이었다.

그래서 선택한 것이 의뢰를 넣는 것이었다.

다른 사람이 자신의 몸에 빙의해서 동료들과 관계를 갖게 하는 것 말이다.

'한 사람 당 한 명씩. 그럼 자유로워질 수 있어.'

시달리는 것도 하루 이틀이지.

이젠 지겨웠다.

지긋지긋한 압박감에서 벗어나고 싶었다.

♧ ♧ ♧

"오늘 어때?"

절레절레-

질문에 한나래가 고개를 저었다.

"안 될 것 같아."

"에휴."

그녀들이라고 마음이 있는 남자를 다른 여자와 공유하는 게 처음부터 좋았던 건 아니었다.

하지만 한 명 밖에 남지 않은 남자가 아무리 유혹을 해도 끄떡도 하지 않으면서 분위기가 점점 달라졌다.

'누구 한 명이라도 성공해야 돼!!'

무언가 섹스에 대한 트라우마를 갖고 있는 것 같긴 했다.

하지만 그 트라우마를 해결해주고 싶어도 굳게 닫힌 입술을 열 생각을 하지 않는다.

항상 거리감을 유지하면서 가까이 다가가려고 하면 다가 온 만큼 멀어진다.

여자들은 시간이 흐를수록 그에게 '벽'을 느끼고 있었다.

하도 쳐내지니까 이젠 다가가는 것도 무서울 지경.

오늘 차례는 한나래였는데 역시나 실패했다고 한다.

"하아...나이는 점점 더 먹어가는데 어떡해야 할지 모르겠네."

"이러다가 진짜 덮쳐질까 걱정이에요."

아무리 유혹을 해도 먹히지가 않다 보니 몇 명의 여자들 사이에서 그를 강제로 덮쳐야 하는 거 아니냐는 의견이 나왔다.

하지만 그건 가뜩이나 힘들어 하는 그에게 너무 못할 짓이라며 그런 의견을 제시했던 여자들에게 잔뜩 욕을 했던 그녀들이다.

'초반에는 분명 쓰레기 취급 될 만큼 욕을 먹은 의견이었는데...'

지금까지 아무도 그와 잠자리를 가진 여자가 없다 보니 시간이 흐를수록 그들의 말도 안 되는 주장에 동조하는 사람들이 생기기 시작한 것이다.

"약을 먹고 덮침 당하고 나면? 그 이후는 어떻게 책임지려고! 절대 안 돼. 어떻게 해서든 막아야 해."

가뜩이나 인류의 재건이라는 점 때문에 바깥에 나가지 않고 집에서 지내주고 있는 사람이다.

그런 짓을 하면 마음의 문을 완전히 닫아버릴지도 모른다.

'우리가 살아 있는 건 그 사람 덕분이잖아. 그런데 왜 하나만 알고 둘을 모르는 거야?'

이곳에 그가 투자한 게 많다 보니 그가 떠나지 않을 거라 믿고 있는 것 같은데, 어림도 없는 소리였다.

그녀가 아는 그 사람이라면, 몇 명을 데리고 이곳을 버린 채 훌쩍 떠나버릴 남자였다.

다른 곳에 가서도 언제든지 이 정도 문명을 재건할 수 있는 사람이었다.

"밤에 한 번 더 가볼까?"

"...그래. 그 사람한테는 미안한 일이지만, 요즘 분위기가 좋지 않아. 이러다가 누가 급발진이라도 해서 사고를 치기라도 하면 끔찍한 결과가 나올 거야."

한나래는 반드시 성공 시켜야 한다는 무거운 책임감을 어깨에 얹고 시간이 흘러가기를 기다렸다.

달이 떠오르면 다시 그를 찾아가 설득을 해볼 생각이었다.

"이번에 사냥하러 바깥에 갔을 때 좋은 거 주워왔거든? 내가 쓰려고 했는데 너한테 빌려줄게."

"정말? 그래도 돼?"

"응. 네가 잘만 써주면 돼."

"고마워, 언니. 꼭 해내볼게!"

그도 거부하는 것에 나름 필사적이겠지만, 여자들도 그와 잠자리를 가지는 것에 필사적이었다.

트라우마를 갖고 있는 유일하게 생존해 있는 남성.

인류를 위해 아이를 낳아야 하는 여성.

누구의 잘못이라고 확실하게 말할 수 없는 애매하기 짝이 없는 상황이었다.

한나래가 찾아왔던 게 독이 되었는지, 그가 어디에 있는지 찾을 수 없을 정도로 꽁꽁 몸을 숨겨버렸다.

이렇게 숨어버리면 한나래 입장에서는 찾을 방법이 없었다.

'설마 잠도 밖에서 자는 건 아니겠지?'

불안감과 걱정을 억누르며 시간이 흐르고...

마침내 밤이 왔다.

"후우...가자!"

언니에게서 받은 옷을 입고, 겉에는 망토를 둘렀다.

이 옷을 입은 채로 바깥에 나갈 수 없었다.

'바, 반응이 좋아야 할 텐데...'

싫어하면 어떡하지?

사실 아침에도 너무 얇게 입은 거 아니냐면서 한 번 힐끔 보더니 이후로 보려고 하지도 않았던 그이지 않은가?

이런 노출을 그가 싫어할 수도 있다는 생각이 문득 들었다.

'그래도 나름 몸매에는 자신 있었는데...'

한나래는 세상이 멀쩡했을 무렵 꿈이 모델이었다.

그런 만큼 어릴 적부터 몸을 가꾸는데 신경을 많이 썼다.

세상이 이렇게 변한 이후로 관리 할 시간이 없어서 많이 거칠어지긴 했지만, 한나래는 나름 외모와 몸매는 자신이 있었다.

'오빠 앞에서는 다 소용없는 것 같지만. 하...내가 이렇게 자존감이 낮은 사람이 아닌데.'

오빠의 숙소 앞에서 한나래가 한참 동안 망설였다.

거절을 당하는 게 익숙하다고 해서 상처 받지 않는다는 건 아니지 않은가?

차곡차곡 쌓아 올린 기억들이 선뜻 인기척을 내지 못하게 만들고 있었다.

끼익-

그때, 기름칠을 하지 않아 삐걱거리는 문이 소리를 내며 열렸다.

"!!!"

깜짝 놀란 한나래가 입술을 질끈 깨물고 안에서 나온 그를 바라봤다.

"오, 오빠."

"...들어와요."

그녀를 내려다 보고 있는 오빠의 시선이 너무 낯설어서 심장이 덜컥 내려앉았다.

"죄, 죄송해요. 제가...네?"

오빠가 문을 열어두고 안으로 들어가 버렸다.

황급히 변명하려고 했던 한나래는 평소와 다른 오빠의 태도에 당황하며 눈을 깜빡였다.

'안으로 들어오라고? 진짜? 이렇게 쉽게?'

자기 생활 공간에 함부로 누군가가 침입하는 것을 싫어해서 안으로 들어가려면 명분이 필요했다.

'옷을 보여주고 밀어 붙이려고 했는데...'

바깥에서 입고 있기엔 무리가 많은 복장인지라 그걸 보면 오빠가 자길 안으로 들여보내 줄 거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오빠한테서 너무 선뜻 안으로 들어오라는 허락을 받은 것이다.

"시, 실례합니다아..."

이런 좋은 기회를 허무하게 날려 보낼 수는 없었다.

'일단 들이밀자!'

뭐 때문에 이런 갑작스런 행운이 온 것인지는 모르겠으나, 기회를 허무하게 놓칠 수는 없었다.

'얼마 만의 기회인데 어버버하다가 놓칠 수 없지!'

한나래가 황급히 방 안으로 들어가 문을 잠궜다.

달칵-!

'아씨, 문 잠그는 소리가 왜 이렇게 큰 거야?'

등을 돌리고 서 있는 오빠에게 부디 들리지 않았기를 바라며.

한나래가 흠흠 헛기침으로 목을 가다듬었다.

"왜 왔습니까?"

"어...오빠가 보고 싶어서? 아~물론 아침에도 보긴 했지만요. 헤헷."

"......."

무심하게 바라보는 눈빛에 침이 꼴깍꼴깍 삼켜진다.

"그러니까...음..."

분명 여기까지 오면서 할 말이 되게 많았는데, 막상 그를 앞에 두고 있으니 입술이 떼어지질 않았다.

아무래도 장소가 장소다 보니 긴장이 안 될 수가 없었다.

'말해야지, 멍청아! 뭐하는 거야!'

떼어지지 않는 입술을 억지로 열기 위해 어색한 미소만 지어보였다.

"...뭐하고 계셨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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