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hapter 791 - #96. 진해솔 (95)
사정을 받고 바깥으로 도망치듯 달려 나와 방으로 들어간 한나래는 한동안 멍하니 앉아 넋을 놓았다.
아래에서 느껴지는 욱신거리는 통증에 진짜 했구나 하는 현실감이 몰려온다.
그녀는 망토를 빼내고 자신의 꼴을 다시 한 번 확인했다.
'미친년..이 꼴로 도망친 거야?'
지퍼가 내려가서 음부가 고스란히 보였다.
그 안에는 정체 모를 오물들이 묻어 있었다.
아니, 사실 그 정체 모를 오물들은 그녀에게, 이 세상에 아주 중요한 가치를 가진 것이었다.
'임신...할 수 있을까?'
배란 일을 따지면 시기는 썩 좋지 못했다.
하지만 임신이라는 것은 언제든 불쑥 인생에 찾아올 수도 있는 축복이지 않겠는가?
"후아...!"
뒤늦게 심장이 쿵쾅쿵쾅 뛰었다.
방금 전의 일이 꿈만 같다.
그녀는 재차 자신의 아래를 확인하며 꿈이 아니라는 사실을 확인 받았다.
그녀는 씻어야겠다고 생각하면서도 한참 동안 자리에서 일어나지를 못했다.
그렇게 새벽 종이 울리고 나서도 한참 멍하니 있다가 졸음기가 몰려오고 나서야 미적미적 자리에서 일어났다.
솨아아아ㅡ
오빠의 신묘한 능력으로 수도 시설을 복구하는 기적을 보여주었을 때, 그는 모두의 메시아가 되었다.
그가 멸망한 세계를 다시 재건해줄 사람이라고 믿어 의심하지 않는다.
그리고 그런 남자의 씨앗을 자신이 가장 처음으로 받았다.
남자가 그밖에 없으니 인류를 위해 희생해야 한다고 했지만, 사실 다른 남자가 있었어도 여자들은 그 남자와 관계를 하지 않았을 것이다.
어떻게든 오빠를 노렸겠지.
능력 없는 평범한 남자보단 믿을 수 없는 기적의 힘을 갖고 있는 남자의 씨를 받는 것이 훨씬 이득이었다.
아무튼 자신은 그런 오빠와 가장 처음 씨를 받는데 성공한 여자가 됐다.
'이걸...말해야 하나?'
이번 한 번으로 임신이 됐다면 몰라도, 오빠가 여자를 안았다는 소식이 퍼지면 그에게 달려들 여자가 한 둘이 아니었다.
모두 그에게 목숨 빚을 지고 있는 만큼, 그의 옆자리를 차지하기 위해 노력할 것이다.
'내가 이뤄낸 건데!'
이런 형편없는 꼴로 오빠 앞에서 온갖 교태를 부려서 얻어낸 성과다.
그걸 다른 여자들이 아무런 대가도 바치지 않고 얻어낸다?
자신의 자리를 대신 차지하기까지 하면서?
'그런 꼴을 어떻게 두고 봐? 생각만 해도 열 받는데.'
숨기자.
어차피 그녀가 아는 오빠라면 자신과 밤을 보냈다는 얘기를 다른 사람에게 굳이 하지는 않을 것이다.
'찾아오는 여자들은 어떻게 막지?'
그녀가 생각하기에 오빠는 더 이상 다가오는 여자들을 막지 않을 것 같았다.
자신처럼 오빠를 유혹하기 위해 방문을 두드리는 여자라니.
상상만 해도 이가 갈린다.
그가 자신만의 남자가 되어 줄 순 없다는 걸 알지만...
한나래의 욕심이 뿔뚝! 튀어나왔다.
♧ ♧ ♧
아포칼립스 세계로 빙의해 있을 때.
겉으로 보면 내 본체는 잠들어 있는 상태로 유지가 된다.
우리가 서로 시간을 결정할 때, 가장 문제가 됐던 건 시차였다.
내가 밤이라고 해서 저쪽도 밤일 리가 없지 않은가?
하지만 참 다행스럽게도 이쪽과 저쪽의 시차가 그리 크지 않았다.
덕분에 내가 잠을 잔다고 하고 방에 들어가서 빙의를 해도 아무 문제가 생기지 않을 수 있는 것이다.
빙의를 끝내고 내 몸으로 돌아와 눈을 떴을 때.
짹짹-
아침의 해가 떠오르고, 참새가 짹짹거리면서 날이 밝았음을 쩌렁쩌렁한 목소리로 알려주고 있었다.
눈을 한 번 깜빡이는, 아주 찰나의 순간에 차원을 뛰어넘는 것이다.
'살짝 어지럽네.'
빙의 후유증이라는 것이 있다고 들었는데, 몸을 일으키니 확실하게 알 수 있었다.
몸이 평소보다 무겁고 힘들다.
멀미도 살짝 나는 것 같았고.
하지만 걱정하던 것보단 그리 심하지 않은 후유증이었다.
나는 다시 되찾은 몸에 적응하고자 스트레칭을 했다.
"역시 내 몸이 좋아."
내가 빙의해서 들어간 몸이 신체적으로는 훨씬 뛰어난 몸인 것은 사실이다.
외모를 위해 가꾼 근육질 몸매와 실전을 뛰면서 저절로 만들어진 근육은 생김 자체부터가 달랐다.
하지만 그런 몸에서도 나는 무언가 맞지 않은 옷을 껴 입은 것 마냥 답답했다.
뿐만 아니라 여성과 잠자리를 가졌을 때는 잠깐 방심하면 평소 습관이 불쑥 튀어나올 것 같아서 잔뜩 긴장하느라 제대로 하지도 못했다.
기세 좋게 달려들어서 부끄러운 결과를 만들어낸 것이다.
'나한테 도망을 가다니...내 섹스가 그렇게 형편 없었나 싶고.'
섹스에 한해서는 어디 가서 부족하다는 소리 들을 사람이 아니었다.
하지만 아무래도 몸이 다르다 보니 어색할 수밖에 없었다.
평소 사용하던 몸이 아니지 않은가?
적응 할 시간도 안 줬다.
문 앞에 여자가 떡하니 서 있었으니까.
근육 두께도 다르고, 키도 다르고, 다리 길이, 팔 길이 등등.
그 뿐인가?
능력도 사라져서 평소처럼 행동하면 여자가 아프다며 울 기세였다.
그걸 적응하기까지가 결코 쉽지 않았다.
'몸 주인은 괜찮을지 모르겠네.'
핸드폰 번호를 알고 있기에 서로 언제든 연락을 주고 받을 수 있긴 하지만, 어제 안았던 여자가 밤의 일을 너무 티 내서 몸 주인을 당황하게 만들지는 않기를 바랐다.
하지만 내 바람은 애석하게도 잘 들어 먹지 않은 모양이었다.
부우웅ㅡ
문자가 왔다.
꽤 오랫동안 쉬었기에 이번에 황제로 활약했던 경험을 살리고자 퓨전사극 판타지 로코에 출연을 해서 촬영을 하던 중이었다.
마침 촬영 대기를 하고 있는 중인지라 연락을 받는 게 어렵지는 않았다.
다만 연락이 온 핸드폰이 내가 평소 사용하는 일반적인 기기가 아니라 코인으로 구매했던 그 핸드폰이라는 점이다.
평소라면 당연히 황제 행세를 하고 있는 분신체가 들고 있었겠지만, 새로운 미션을 받게 되면서 내가 직접 챙겨서 들고 다니는 중이었다.
[의뢰인 : 도대체 무슨 짓을 하신 겁니까?]
문자 메시지는 의뢰인 A로 저장해둔 '몸 주인'이었다.
몸 주인으로 저장해두면 기분이 좀 묘해져서 의뢰인으로 바꿔뒀다.
그런데 그 사람한테서 바로 항의 연락이 온 거다.
[나 : 왜 그러십니까? 제가 종이에 거기에서 있었던 일은 모두 적어뒀는데요.]
[의뢰인 : 그건 봤습니다.]
[나 : 거기 적혀 있는 일 이외에 다른 문제가 있었습니까?]
[의뢰인 : 예. 문제가 생겼습니다.]
[나 : 어떤 문제죠?]
뭔 문제가 생겼다는 거야.
[의뢰인 : 여자들이 계속 달라붙습니다. 거절을 했는데도 막무가내입니다.]
[나 : 여자가 달라 붙는 게 왜 제 잘못인 건지 모르겠습니다만. 평소에도 그런 일에 시달린다고 하지 않으셨습니까?]
[의뢰인 : 평소와 너무 다릅니다. 어젯밤 한나래씨와 밤을 보내셨더군요. 문제는 그걸 모르는 사람이 없다는 겁니다.]
그게 벌써 소문이 다 났다고?
여자가 입이 싸네.
[나 : 어쩔 수 없는 일 아닙니까. 아예 안 했을 때는 몰라도 한 번 시작했으니 두 번은 쉬울 거라고 생각하는 게 당연하죠.]
여태까지 죽어도 못한다며 버티던 사람이 드디어 여자를 안은 거다.
벼르고 있던 여자들이 눈이 뒤집혀서 달려드는 게 당연하다.
[의뢰인 : 그래도 이 정도로 사리 구별 못 하는 사람은 아닙니다!]
그럼 사람들이 사리 구별 못하고 달려드는 게 나 때문이라고?
[의뢰인 : 어제 한나래씨와 하실 때, 사람들이 그 소리를 다 들었답니다.]
방음?
"어...."
그건 생각 못했네?
하지만 내가 언제 그런 걸 신경 써봤겠는가?
가족들과는 항상 집에서 했고, 황제였을 때도 방음에 신경 써 본 적이 없다.
궁인들이 듣고 있는 걸 알면서도 당당하게 섹스를 해왔으니까.
[나 : 방음 때문에 소문이 다 퍼졌고, 그 소리를 듣고 자기도 해달라고 달라 붙는다 이거군요.]
[의뢰인 : 애초에 어제는 상황만 살피겠다고 하지 않으셨습니까?]
의뢰인은 갑자기 선을 지키지 않고 달려드는 여자들 때문에 스트레스를 잔뜩 받은 눈치였다.
[나 : 그랬죠. 근데 제가 빙의했을 때, 여성 분이 문 앞에 서 있었습니다. 제가 해야 하는 일은 섹스를 하는 거고, 직접 찾아오기까지 했는데 거절을 할 이유는 없었습니다. 방음은...확실히 고려하지 못했네요. 설마 소리가 적나라하게 다 들렸을 줄은 몰랐습니다.]
내가 보낸 긴 장문의 문자를 보고 생각이 많아졌는지 한동안 대답이 오지 않았다.
마침 촬영이 시작 돼서, 그 촬영을 마치고 돌아오니 문자 두 개가 시간차를 두고 와 있었다.
[의뢰인 : 죄송합니다. 제가 너무 당황해서 해솔씨한테 책임을 전가한 것 같습니다. 다시는 이럴 일 없을 겁니다.]
[의뢰인 : 기분 나쁘셨을 텐데, 다시 한 번 사과드립니다.]
내가 촬영을 마치고 오는 동안 그는 당황스러웠던 머리를 식히고 온 것 같았다.
'사과 안 했으면 따지려고 했는데, 그럴 필요까진 없겠네.'
바로 사과를 하니 나빴던 기분이 가라앉았다.
계속 나한테 이번 일의 책임을 전가 했다면 가만히 있지 않을 생각이었으니까.
내 입장에선 무척 억울한 거다.
'방에 방음이 전혀 안 된다는 걸 내가 어떻게 알겠냐고.'
거기다가 이런 부작용은 의뢰를 받기 전에 이미 경고 한 바가 있었다.
여자를 안기 시작하면 몸 주인에게도 영향이 갈 것임을 말이다.
이 정도 홍역은 몸 주인이 감당해야 하는 일이었다.
내 책임으로 몰아서 화낼 게 아니라.
'꽤 차분하고 냉정해 보이던 사람인데, 이렇게까지 당황하는 걸 보면 여자들이 육탄공격이라도 하나 보네.'
그쪽 세계는 남녀역전 세계도 아닌 것 같던데...
[의뢰인 : 제발 도와주십시오.]
[나 : 예?]
[의뢰인 : 이 여자들 좀 말려주십시오. 제 힘으로는 불가능합니다.]
그리고 내 걱정은 현실이 되어 의뢰인에게 살려 달라는 도움 요청을 받게 되었다.
나도 스케줄이 있는 사람인지라 정해진 시간 이외의 잔업을 부탁하는 의뢰인의 문자가 달갑지는 않았다.
하지만 도대체 어쩌다가 제발 도와달라는 말까지 하게 됐는지는 궁금했다.
빙의 하고 고작 하루 만에 무슨 큰일이 벌어지고 있는 것인지...
자세히 얘기를 듣기 위해 잠깐 시간을 내서 통화를 걸어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