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hapter 796 - #96. 진해솔 (100)
미칠 것 같다.
대답을 강요하는 그의 고문과도 같은 자극에 그녀는 모든 걸 포기하고 싶어졌다.
분명 어설픈 구석이 있어야 할 남자인데, 왜 이렇게 섹스에 능통한 것인지 모르겠다.
그나마 다행인 건 정신이 하나도 없는 와중에도 그녀의 입은 쉴 세 없이 돌아가고 있다는 점이다.
"우린 안정감이 필요했어. 엄청난 희생으로 겨우 쌓아 올린 공간이잖아. 안전하게 발 뻗고 살 수 있는 우리 땅 말이야."
그를 설득해야 한다.
이대로 우리에게 실망해서 떠나겠다고 해선 안 됐다.
멸망 속에서 겨우 새싹을 튀어낸 '인류'인데, 고작 감정 싸움 때문에 망하게 할 순 없었다.
"지금도 충분히 안전하고 발 뻗고 살 수 있는 공간입니다."
"그렇게 보이는 거지!! 밤마다 벽 바깥에서 울어 대는 좀비들에, 우울증 걸려서 하하호호 웃다가 갑자기 자살하는 애들도 있고, 죽어버린 사람들이 그리워서 미치려고 하는 애들도 많아. 다들 후유증에 시달리고 있는데 어떻게 이게 안전한 공간이야? 거기다가 이곳은 네가 없으면 더 이상 유지 될 수도 없잖아."
최고의 무력을 갖고 있는데다 정신적인 지주 역할을 하고 있는 남자.
정을 주지 않는 그가 떠날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은 당연히 가질 수밖에 없었다.
"우리는 너 없으면 안 되는데, 너는 그게 아니잖아. 그래서 불안한 거야. 이렇게 해서라도 붙잡을 수밖에 없는 거고."
모두가 느끼고 있는 불안감을 투정하듯 말하니 그가 기가 찬다는 듯 어처구니 없어 하며 말했다.
"왜 제가 여길 떠나려고 한다고 생각하시는 겁니까? 저도 이곳에 애정이 있습니다. 솔직히 여기 아니면 갈 곳도 없잖아요."
사방이 좀비인데 갈 곳이 어디 있겠는가?
하지만...
"애정이 있다고? 너는 마음을 안 주려고 애를 쓰던 아이였잖아. 애정 한 톨 안 보여줬으면서 우리가 그걸 어떻게 믿어."
"......."
그가 말했던 '애정'을 여자들은 조금도 느낄 수가 없었다.
그냥 자신들이 열심히 조르고 졸라서 마지못해 들어준다는 식이었으니까.
사람이라면 누구나 서로 얼굴 맞대고 지낸 시간 만큼 감정이 쌓이기 마련이다.
"적어도 누군가를 싫어하는 티라도 냈으면 우리가 이 정도로 불안하지 않았을 거야!"
"......"
그녀의 외침에 그가 말문이 막힌 듯 입을 꾹 다물었다.
♧ ♧ ♧
'상황이 복잡하긴 하네. 그래서 저런 감정에 얽히기 싫어 선을 긋고 있었던 건가?'
정확히는 모르는 척 외면하고 싶었던 게 아닐까 싶다.
사람 한 명한테 인류의 전부를 맡기고 있는데 어깨가 무겁지 않으면 사람이 아닐 것이다.
그런데 여자들은 계속 그에게 기대고, 무언가를 바라니까 관심을 갖는 것도 피곤해졌을 거다.
'그렇다고 여기서 아무 말도 안 하면 관계가 완전 파탄 날 것 같은데.'
어쩔 수 없이 수습을 위해 말을 좀 더 얹어보기로 했다.
"저는 오히려 반대로 생각했습니다. 감정이 섞이면 이곳이 엉망이 될 거라고 생각했어요."
"바보야! 그런 게 어딨어!"
"전 충분히 우려할 만한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여기도 결국 사람 사는 곳이지 않습니까? 감정이 섞이면 분명 본인의 능력에 맞지 않은 것을 바라는 사람이 생길 겁니다. 저도 팔은 안으로 굽기 마련일 테고요."
이곳도 결국 사람이 사는 곳이다.
의뢰인은 이곳에서 절대 없어선 안 되는 존재.
그런 존재에게 권력이 집중 되는 건 당연한 일이었다.
그리고 그와 친분이 쌓인 사람은 자연스럽게 인맥 만으로 힘을 휘두를 수 있게 될 테고 말이다.
"네가 그런 생각을 갖고 있는 줄은 몰랐어. 근데 그건 구더기 무서워서 장 못 담그는 거나 다름없잖아. 그런 것 때문에 선을 긋는 거면...!"
"저는 지금 태도를 바꿀 생각이 없습니다. 애초에 이게 저한테는 더 편하고요."
"바꿀 생각이 전혀 없다고?"
"바꿀 이유가 없습니다. 앞으로 임신을 하게 되면 이런 일은 더 심각해질 겁니다. 그러니 모두에게 평등하게 선을 긋는 게 맞다고 생각하는 겁니다."
"너 그러다가 마음에 드는 사람이 생기면 어떻게 하려고?"
의뢰인은 모두를 사랑하겠다는 내 선택과 달리 모두를 사랑해주지 않겠다는 선택을 한 사람이었다.
사랑 받고 싶어 하는 여자들에겐 애석한 일이었다.
"그건...아직까진 잘 모르겠습니다. 그럴 일이 있을까요?"
"확신은 못 하잖아! 모두한테 다 선을 긋다가 나중에 네 선으로 들어가는 사람이 있으면 오히려 더 역효과가 날 거야! 그냥 전부 다 사랑해주면 안 되는 거니?"
"불가능합니다. 제가 할 수 있는 일이 아니에요."
이건 의뢰인의 잘못이라고 몰고 갈 수 없는 일이다.
사람마다 성향이 다른 건 당연한 일이 아닌가?
나 같은 사람이 있으면 의뢰인 같은 사람도 있는 거다.
"결국 우리들로는 네 마음에 들어가기 부족하다는 거구나."
"떠날 생각은 없습니다. 그러니...읏!"
그리고.
미처 신경 쓰지 못했던 부분에서 갑자기 확 압박감이 왔다.
좀 어처구니 없는 상황이기는 한데, 우리는 여전히 서로 결합 된 채 이어져 있었다.
한참 동안 대화를 나누느라 솔직히 성감이 확 죽은 상태긴 했다.
그런데 안에 넣은 채로 내게 서운함을 느낀 그녀가 눈물을 뚝뚝 흘렸고, 그로 인해 내벽이 내 성기를 확 압박했다.
"나쁜 놈."
"왜 이러십니까?"
"마음은 절대 못 주겠다며? 그럼 이거라도 잔뜩 먹여줘야지. 적어도 두 번은 안에다가 싸줘야 돼."
마음이 안 되면 몸이라도 가져가겠다는 의미였다.
하지만 그녀의 바램과 달리 팽팽하게 커져 있던 성기는 조금씩 줄어들고 있었다.
"뭐, 뭐야? 얘 왜 이래? 설마 내가 싫어져서 이러는 거야?"
"아뇨, 그게 아니라."
내 얼굴에 당황이 스쳤다.
상황을 직접 설명하려니 창피했던 것이다.
하지만 또 울 것 같이 울먹이는 그녀를 보니 상황을 설명해주지 않을 수가 없었다.
"...갑자기 안을 조였잖아요."
"응?"
"이미 쌌어요. 방금 힘 줬을 때."
"싸, 쌌다고? 벌써? 나 때문에 화나서 죽은 게 아니라?"
벌써라는 말이 내 자존심을 얼마나 무너트리는지 이 여자는 알 필요가 있다.
"...네. 한참 전부터 참고 있었던 건데 갑자기 확 조이셔서 싸버렸어요."
정작 그녀는 내 말에 크게 안도하는 눈치였다.
의뢰인한테 밉보이는 게 무서웠으면 처음부터 잘 했으면 되는 거 아닌가 싶다.
"두 번째 섹스를 허무하게 끝낼 생각이 없었는데...다시 세우는 건 못 하겠지?"
"이 상황에서 한 번 더 하자고요?"
"아직 말 못한 거 많아."
그녀는 조금 더 내 속내를 알고 싶어 하는 눈치였다.
하지만, 내 몸도 아닌데 너무 깊은 대화를 나누는 건 피해야 할 일이었다.
"저는 할 말 없습니다."
나는 냉정하게 그녀의 요청을 거부했다.
대신 그녀가 바라는 대로 다시 한 번 세워볼 수 있을지 확인해보기로 했다.
오늘 사정은 총 두 번.
신체는 이미 만족한 지 오래 였지만, 내 정신적인 만족도는 부족해도 한참 부족했다.
제대로 섹스를 해보려고 해도 자꾸 다른 곳에서 불쑥불쑥 방해가 들어오니 말이다.
"내가 할 말이 많다는 건 입으로 하는 게 아니라 몸으로 하는 거야."
"...몸으로 하는 대화 말이군요."
그런 거라면...
이대로 물러나는 것도 오히려 욕구 불만을 일으키는 지라 순순히 축 늘어진 성기를 그녀 앞에 내어놓았다.
"한 번 더 세울 수 있을진 모르겠는데, 한 번 해보시겠습니까?"
"기회를 준다면 얼마든지."
체력과 정력은 관계가 있는 듯 하면서도 마냥 똑같은 것은 아닌 지라 세울 수 있을지 없을지 확신이 안 든다.
하지만 그녀는 몸뚱이라도 갖겠다는 의지가 가득했는지 성기를 입에 넣는 것에 거침이 없었다.
"쯉! 하움...!"
불알과 기둥 그리고 귀두까지 열심히 펠라를 시작한 그녀의 뒷머리에 손을 얹으며 깊게 한숨을 쉬었다.
성기를 다시 세울 수 있을 것 같다는 확신이 들었다.
♧ ♧ ♧
두 번째 여자를 안았고, 그날 있었던 대화 내용을 최대한 자세하게 기억해내서 종이에 적어 놨다.
의뢰인은 그날 일에 대해서 항의를 해오지 않았다.
내가 생각해도 그 일로 항의를 해오는 건 진상이나 할 짓이었다.
아마 그날 이후로 여자들이 의뢰인을 괴롭히는 게 좀 줄어들었을 것이다.
'굳이 할 필요 없는 일을 해준 거긴 한데...'
앞으로 근무 환경(?)이 쾌적해졌을 테니, 좋은 게 좋은 거다 라고 생각하기로 했다.
"씨발."
그렇게 생각하고 넘어가줬는데...
"이건 또 뭐냐?"
일주일에 세 번이 현재 내가 의뢰인과 계약한 시간이었고, 특별한 사정이 생겨 두 번을 일찍 당겨서 연속으로 사용했기에 며칠 간 빙의를 하지 않았었다.
의뢰인 쪽에서 특별히 연락을 해온 적이 없었기에 말을 맞춰두었던 시간에 빙의를 했고, 나는 저번처럼 똑같은 방의 풍경이 나를 반겨줄 거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좀비잖아.'
창문 밖에서 어슬렁거리며 걸어 다니고 있는 존재.
좀비가 아니, 엄청난 숫자의 좀비 군대가 아주 가까이에서 움직이고 있었다.
다행인지 불행인지 모르겠지만, 내가 있는 곳은 익숙한 공간이 아닌 처음 보는 건물 안이었다.
'이거 아무래도 뭔가 일이 잘못 된 것 같은데...의뢰인 이 열 여덟 같은 놈아, 약속했던 건 어디로 팔아 먹고 이딴 곳에다가 몸뚱이를 둔 거야?'
열이 머리 끝까지 치솟았지만, 상황 판단부터가 더 중요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좀비를 보자마자 온 몸에 소름이 쫙 돋아났다.
여태까지 아포칼립스라는 세계관을 너무 쉽게 생각했다는 생각도 들었다.
내가 왜 벽 안이 아니라 벽 바깥에, 그것도 혼자 덩그러니 숨어 있는 것인지...
그 이유를 꼭 알아내야만 했다.
'종이?'
상황 파악을 위해 주변을 탐색하다 보니 주머니에 부스럭거리는 무언가가 느껴졌다.
그걸 바깥으로 빼내니 꼬깃꼬깃하게 무언가를 적어둔 종이가 있었다.
[미안합니다. 상황이 여의치 않았습니다.]
그 종이의 첫 단락에는 나를 향한 사과가 담겨 있었다.
"이럴 거면 연락을 해서 빙의하지 말라고 하면 됐잖아. 사람이 왜 이렇게 융통성이 없지?"
이젠 먼 과거가 되어버린 회사 생활.
신입이 들어와서 낫 놓고 기억자도 모르는 듯 굴었을 때의 울분이 치솟는다.
[예상치 못한 좀비 웨이브가 있었습니다. 우리는 좀비 웨이브로부터 영토를 지켜야 했습니다.]
상황이 급박했던 것은 확실히 알겠다.
좀비 웨이브.
지금도 엄청난 숫자의 좀비들이 바깥을 어슬렁거리며 어디론가 이동하고 있었다.
그 광경은 끔찍함 그 자체였고, 이 세상을 살아간다는 게 얼마나 용기 있는 일인지 뼈 저리게 느낄 수 있었다.
처음으로 목격하게 된 좀비의 끔찍함은, 영화 속에서 보던 것과는 차원이 달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