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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녀역전 세계의 아이돌-797화 (779/849)

Chapter 797 - #96. 진해솔 (101)

좀비 웨이브가 왔고, 영토를 지키기 위해 좀비들을 유인하는 작전이 있었다.

그리고 그 과정을 해낼 수 있는 사람은 의뢰인밖에 없더라.

좀비의 약점은 속도가 느리다는 것.

그 좀비들을 유인해서 웨이브를 비켜 나가게 하는 것이 의뢰인이 해야만 하는 일이었다.

'시발, 그런 일을 하는 거였으면 빙의를 못하게 해야 하는 거 아니냐고.'

문제는 이 인간이 급하게 나온다고 핸드폰을 안 챙기면서 생겼다고 한다.

밤을 세워가며 좀비들을 유인하다가 뒤늦게 깜빡했던 내 존재를 깨달았고, 황급히 안전 할 수 있는 공간으로 이동해서 몸을 숨겼단다.

종이가 왜 이렇게 다급하고 꾸깃꾸깃해져 있었는지 의문이었는데, 이걸 시간 내에 준비하기까지 꽤 상황이 급박했던 모양이었다.

'빙의 시간은 계약으로 묶여 있어서 함부로 중간에 그만두지 못하는데.'

[오늘은 이곳에서 편하진 않겠지만, 혼자 밤을 보내주셨으면 합니다. 그리고 제가 따로 연락을 드릴 때까지 빙의는 하지 말아주십시오.]

오늘 하루는 어쩔 수 없으니 참으라는 거다.

의뢰인 입장에서도 내가 여기서 자기 몸을 막 사용하는 게 달갑지는 않았을 것이다.

그러다가 잘못해서 좀비에게 당하기라도 하면?

나는 빙의가 풀린 채 내 몸으로 돌아가면 되지만, 의뢰인은 좀비에 당한 몸을 고스란히 감당해내야 한다.

그 부분은 의뢰를 수락하기 전에 분명하게 의견을 나눈 적 있었다.

['갑'은 '을'이 빙의해 있는 시간에 대해 안전 할 수 있도록 최선을 다 해 협조한다.]

['을'은 '갑'의 몸에 문제가 생기지 않도록 최선을 다 해 협조한다.]

물론 현재 '갑'에 해당하는 의뢰인 쪽에서 내가 안전할 수 있도록 최선을 다 한다는 부분을 먼저 어겼으니 어쩔 수 없는 상황이기는 하다.

하지만 나는 이 의뢰를 무사히 끝내서 80만 코인을 얻어야 할 필요가 있었다.

의뢰 실패 사유가 의뢰인 쪽에 있으니 내가 배상을 해야 하는 일은 없겠지만, 의뢰금을 전부 받을 수 없다는 점에서 일이 복잡해질 수 있었다.

'그나저나 여기서 하룻밤을 보내라는 건데...'

과연 저 많은 좀비들 사이에서 태연하게 잠을 잘 수 있을까?

'절대 못하지.'

아마 잠들지 못하고 뜬 눈으로 밤을 보내게 될 것이다.

'좀비 구경이나 실컷 할까.'

첫 번째 미션으로 사극을 연기 했으니 두 번째 미션의 경험을 살려 다음 작품은 좀비물 주인공으로 캐스팅 되는 것도 재밌을 것 같았다.

'이런 거 보면 연기가 확실히 가성비가 좋아.'

연기만 하면 별의 별 직업을 다 경험해볼 수 있지 않은가?

물론 얼마나 깊게 연기에 빠져 들었느냐에 따라 체험의 경험이 다르겠지만...연기라는 직업은 나와 굉장히 잘 맞는 편인 건 확실하다.

멤버들 사이에서 여한 없이 개인 활동을 했으니 슬슬 한 번 뭉치자는 얘기가 나온 상태였기에 당장 아포칼립스 장르의 연기를 하는 건 불가능하겠지만, 선택지로 남겨두고 나중에 써먹어보자 싶었다.

그렇게 마음을 바꾸고 나니, 홀로 고립 되어 있는 현재의 상황이 마냥 나쁘게만 생각 되지는 않았다.

'이것도 저 좀비 떼랑 마주하지 않고 있는 지금이니까 가능한 생각이지.'

실제로 저 좀비를 상대해야 한다고 생각하면 아찔하다.

이런 고어 쪽 장르는 개인적으로 매우 불호한다.

영화로 보는 것은 좋을지 몰라도 직접 경험하는 것은 얘기가 달라도 한참 다르지 않은가?

절대 얽히고 싶지 않은 세계관이었다.

"쿨럭쿨럭. 어우, 먼지."

창 밖에 좀비 떼가 돌아다니는 걸 구경하다가 그것도 식상해졌을 무렵.

한 번 잠을 자보려고 노력이라도 해볼까 싶어서 주변을 둘러봤다.

어딘가 누워서 잠을 잘 수 있는 곳이 있지 않을까 싶었던 것이다.

그런데 먼지가 너무 많아서 누울 곳이 없었다.

'이 먼지를 그냥 무시하고 누워야 하나?'

의뢰인이었다면 먼지 따위 상관하지 않고 잠을 잤을 것 같기는 하다.

깔끔을 떨겠다고 의뢰인이 만들어 둔 안전한 공간에서 벗어나고 싶은 생각도 없었고.

'그냥 달이나 구경하자.'

쪼그려 앉아서 벽에 등을 기대고, 하늘을 올려다 봤다.

아래로는 바이러스에 걸려 좀비가 되어 죽은 시체가 걸어 다니는 끔찍한 광경이 펼쳐져 있지만, 하늘은 의외로 꽤 볼만 했다.

'불빛이 없어서 그런지 별이 보이는 것 같기도 하고...'

쿵!

"!!"

아씨, 깜짝이야.

공포 영화를 못 보는 건 아니지만, 직접 경험하는 공포는 개인적으로 매우 불호한다.

'아래층인가?'

괜히 인기척을 내면 안 될 것 같아서 숨을 죽이고 귀를 쫑긋 세운 채 긴장했다.

의뢰인이 쓰던 것으로 보이는 길쭉한 쇠 봉도 손에 쥐었다.

드라마를 하면서 배운 무술이 과연 실전에서 통할진 모르겠다.

하지만 의뢰인의 신체가 좀비를 상대하는데 충분한 능력을 갖고 있으므로 괜찮을 거라 자의 한다.

쨍그랑!

'시발, 진짜 뭔가 있네.'

한 번 쿵! 하는 소리가 났을 때는 잘못 들었나? 하고 넘길 수 있었지만, 두 번째 유리가 깨지는 소리와 무언가를 밟는 소리까지 나니 더 이상 아니라고 부정하기가 힘들어 보였다.

좀비들이 간간히 내뱉는 소리 때문에 구분하는 게 쉽지 않긴 했지만, 열심히 현실 사플(소리를 들으며 하는 플레이)을 해보니 소리가 난 곳이 내 아래 쪽이라는 걸 알 수 있었다.

'아래에 좀비가 들어 온 건가?'

하긴, 길가에 좀비가 저렇게 많은데, 한 눈 안 파는 놈이 없을 리가 없다.

문제는 저 좀비가 어디까지 들어오느냐는 거다.

'내가 있는 곳까지 올까? 알아서 멀리 가줬으면 좋겠는데.'

좀비에 대한 두려움과 동시에 무책임한 의뢰인에 대한 분노도 함께 올라온다.

'좀비가 밑에서 저렇게 드나들고 있는데, 태연하게 잠을 잘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나?'

처음에는 사방이 막혀 있고, 문이 가구들로 막혀 있어서 몸을 피하기 좋은 곳으로 보였는데 지금은 언제 좀비가 튀어나올지 알 수가 없어서 불안해졌다.

여기가 정말 안전한 곳인지 확신이 들지 않는 것이다.

숨을 죽인 채 가만히 있으니, 아래에서 들려오는 기척이 위로 올라 올 낌새가 보이지 않았다.

하지만 밑에서는 꾸준히 부스럭 거리는 소리가 들려와 내 신경을 계속 거슬리게 만들었다.

'여기 사람들은 정신이 쇠심줄인가?'

어떻게 이런 걸 다 참아내고 살아 남았는지...

'대단한 사람들이었네.'

아포칼립스.

직접 당해보니 단 하룻밤이었을 뿐인데도 신경줄을 순식간에 긁어먹는다.

'차라리 속 시원하게 아래로 내려가서 소리를 내는 좀비를 처리해버리고 싶은데...'

좀비가 얼마나 강한지에 대한 정보가 하나도 없는 지라 섣불리 결정을 내릴 수 없었다.

내가 좀비를 상대하려고 이곳에 온 건 아니지 않은가?

'괜한 모험은 하지 말자.'

호기심과 불편함을 억누르고, 여전히 한 손에는 쇠 봉을 들고 있는 채로 다시 바닥에 앉았다.

좀비가 내 앞에 나타난다 해도 저 많은 가구들을 뚫고 가까이 오는 것은 쉽지 않은 일일 것이다.

'내가 할 일은 빙의가 끝날 때까지 버티는 거야.'

그렇게 다시 한 번 내 할 일에 대해 되새기고 있는데.

슥, 스윽, 슥!

아래에서 들려오던 인기척이 점점 가까워지고 있었다.

'진짜 좀비야?'

나는 작게 한숨을 쉬고 숨을 곳을 확인해봤다.

'영화 속 좀비랑 얼마나 닮았는지, 차이는 뭐가 있는지 미리 알아뒀어야 했는데...'

그랬으면 좀비를 상대하는 지금 상당한 도움이 되었을 것이다.

좀비에 대한 아무런 지식도 없는 상황에서 유일하게 믿을 수 있는 건 신체 능력과 꼼꼼하게 문 단속을 해둔 공간 뿐.

덜컹- 덜컹- 덜컹-

아랫층에서 올라 온 인기척이 마침내 내가 있는 방의 문을 열기 위해 문고리를 당겼다.

하지만 안에서 무언가로 막혀서 들어오지 못한다는 걸 깨달았는지 금세 문을 여는 걸 포기한다.

'좀비가 지능이 있는 건가? 바깥에 있는 애들을 보면 지능은 전혀 없어 보이는데.'

좀비에 대해 아는 바가 없다 보니 답답했다.

쟤가 문 앞에서 계속 버틴다면, 시간이 지나 몸 주인이 돌아왔을 때 깜짝 놀랄 테니 이 사실을 미리 종이에 적어두기로 했다.

'손에 쥐고 있어야겠다.'

몸 주인이 나처럼 바로 종이를 발견 할 수 있을지 알 수 없었기에 최대한 발견하기 쉽도록 손 안에 종이를 쥐었다.

바스락-

그런데 그게 실수였을까?

종이가 구겨지는 소리가 바깥까지 들렸는지 다시 문고리가 돌아가며 덜컹 소리를 냈다.

'하씨, 여기 좀비는 진짜 똑똑한가?'

이 정도면 확실히 지능이 있는 수준인 것 같은데.

"거기...누구 있어요?"

좀비에 대한 새로운 정보를 습득하고 있을 무렵.

나는 좀비가 말도 할 수 있다는 황당한 현실에 맞닥뜨려야 했다.

'아니, 애초에 좀비가 맞긴 한 거야?'

여태까지 기척이 있으면 당연히 좀비일 거라고 생각했다.

끝이 없는 것 같은 좀비 웨이브 사이로 사람과 조우하게 되는 경우의 수가 몇이나 되겠는가?

그런데 그런 말도 안 되는 일이 현실이 됐다.

"...사람입니까?"

"우와! 네! 네! 저 사람이에요! 사람!"

문 밖에 좀비로 의심 하던 인기척은 사람을 만났다는 기쁨에 가득 차 있었다.

"정말 죽었다 싶었는데, 이렇게 사람을 만나게 될 줄이야! 혹시 소문의 쉘터 주민 맞으신가요?"

쉘터 주민?

"제가 소문을 들었거든요. 전단지도 봤어요. 여기 근처에 생존자들이 모여서 안전지대를 만들었다고요. 처음에는 말도 안 되는 소문이라고 생각했는데, 어차피 갈 곳도 없어서 에라 모르겠다 하고 무작정 온 거거든요."

갑작스레 만난 생존자는 하고 싶은 말이 매우 많았는지 수다를 쏟아냈다.

"기쁜 건 알겠지만, 좀 목소리를 줄여주실 수 있겠습니까? 아시다시피 좀비 웨이브 때문에 주의해야 하는 상황이지 않습니까?"

"네네네, 목소리 줄일게요. 제가 지금 거의 몇 개월 만에 사람을 만나는 거라서요. 너무 흥분했나 봐요."

여자는 조심하겠다며 목소리를 확 줄였다.

문제는 지금부터였다.

'쉘터...가 아무래도 의뢰인이 지내고 있는 곳 맞겠지?'

정황상 맞는 것 같긴 한데, 알다시피 나는 이 몸의 주인이 아니지 않은가?

새로운 사람을 만났다고 해서 내가 아무 생각 없이 그녀를 안으로 들여보낼 수는 없었다.

아포칼립스 세계에서 낯선 사람을 믿는 것만큼 어리석은 일이 없지 않은가?

'저 사람을 받아들이는 건 의뢰인이 선택 할 일이잖아.'

몇 달 만에 사람을 만나서 기분 좋은 것은 이해하지만, 안으로 들여 보내주는 것은 좀 다른 얘기였다.

"죄송하지만, 좀비 웨이브 때문에 함부로 움직이진 못할 것 같습니다."

"아아..! 네네네. 전 괜찮아요. 어차피 좀 쉬려고 온 거거든요. 여기서도 얼마든지 쉴 수 있어요. 이것보다 더 열악한 곳에서도 잘 버텼는 걸요. 저는 신경 쓰지 마세요."

여자는 내 목소리에서 껄끄러움을 느꼈는지 무단으로 안에 들어올 생각이 없었다며 경계심을 최대한 자극하지 않으려 했다.

오랜만에 만난 사람과 척을 지고 싶지 않은 듯 했다.

"근데...쉘터 주민...은 맞으신 거죠? 거기에는 사람이 얼마나 모여 있나요?"

안으로 들어 올 생각은 없어도 내게 질문을 하고 싶은 건 많았는지 여자가 조심스럽게 질문을 해왔다.

물론 내 입장에서는 대답해줄 수 없는 질문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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