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hapter 800 - #96. 진해솔 (104)
"...."
"...."
용기를 내서 문을 두드렸고, 1시간 같았던 10분이 지나갔다.
10분 후에는 그래도 무사히 방 안으로 들어갈 수 있었는데, 막상 들어오고 나니 어쩐지 두 사람 사이에서 어색한 침묵이 돌았다.
'어...할 말이 많았던 것 같은데...왜 아무 생각이 안 나지?'
뭔가 그런 거 있지 않은가?
대화 잘 나누다가 불쑥 정적이 흐르는 거.
무슨 말을 해야 할지.
갑자기 어색함이 확 와 닿아서 머릿속이 새하얗게 되어버리는 거다.
괜스레 멋쩍게 웃은 그녀가 구석에 자리를 잡고 앉았다.
원래 좀비를 잡고 나면 서로 적당히 거리를 두고 있을 필요가 있었다.
더군다나 신뢰가 없는 사이이기까지 하지 않은가?
부탁을 해서 개인 공간을 침범 했으니 이 정도 거리는 매너였다.
킁킁.
'근데 이게 무슨 냄새지?'
여러 해 멸망한 세상에서 살아가며 예민해지지 않고 둔해진 것이 있다면 바로 후각이다.
좀비들은 결국 '죽은 인간'이라는 의미였고, 시체가 내뿜는 지독한 악취는 코를 마비시켰던 것이다.
열악한 환경으로 몸을 씻지 못해 스스로의 냄새를 견디지 못한 경우도 있다.
해서 평소라면 이상한 냄새가 났어도 그러려니 하면서 대수롭지 않게 여겼을 것이다.
그러나.
'이거 그 냄새 같은데...혹시 이 사람도 그 상태인가?'
함께 죽음의 위기를 헤쳐 온 상대인 여자의 몸도 평소와 상황이 많이 달랐다.
오죽 했으면 휴식하고 있을 그를 직접 찾아왔겠는가?
그녀는 몸의 달뜬 흥분감을 가라앉혀줄 사람이 필요했고, 대화를 나누면서 그것을 해내려고 했다.
하지만 그녀도 미처 예상하지 못했던 게 있었으니.
'나만 흥분한 게 아니었구나!'
그도 자신처럼 흥분 상태라는 것이다.
남자가 성욕이 강한 것은 사실이나, 여자도 분명 성욕은 존재한다.
특히 사람이라고는 찾아 볼 수 없는 이런 곳에서 성욕을 해소하는 건 정말 어려운 일이었다.
"저기..."
"네."
다소 쌀쌀 맞은 태도와 경계심을 내보이고 있는 남자.
저 남자가 부디 자신과 같은 마음이기를 바라며 조심스럽게 정적을 깨고 말했다.
"다친 곳은 없으세요?"
"확인해보니 없었습니다."
"다행이에요. 저도 확인해봤는데 다친 곳 없었어요. 사실 오늘이야 말로 죽는 날이구나 싶었거든요. 좀비 웨이브에 지진이라니. 맙소사! 어제의 저한테 너 이런 일 있으니까 도망쳐! 라고 하면 말도 안 되는 소리 하지 말라고 했을 거에요. 아하하!"
다행인 것은 한 번 입이 터지니 이후로는 말을 하는 게 어렵지 않았다는 점이다.
"오늘 정말 무쌍을 찍으시더라고요. 무슨 영화 속 주인공 보는 줄 알았어요. 주인공은 원래 아무리 힘들어도 쓰러지지 않는 법이잖아요."
"네. 그쪽도 고생하셨습니다."
"어...그러고 보니 우리 통성명도 안 했네요? 저는 민진주에요."
"박경호입니다."
"경호...이름이 되게 잘 어울리시네요."
"진주씨도 잘 어울립니다."
"나이는 어떻게 되세요?"
"...요즘 세상에 나이가 뭐가 중요하겠습니까."
"하긴, 맞아요. 그날로부터 며칠이 흘렀는지도 모르는데 나이를 세어 봤자 뭐하겠어요. 새로운 달력은 영영 나오지 않을 텐데..."
갑자기 분위기가 우울해졌다.
그녀는 어깨를 으쓱이는 것으로 우울한 분위기를 털어버리고 다시 텐션을 올렸다.
"그냥 제가 오빠라고 부르고 싶으니까 그렇게 부를게요! 경호씨는 너무 팍팍하잖아요. 오빠는 원래 그렇게 힘이 강했어요? 좀비 때려 잡는데 막 전문성이 묻어 나오는 것 같더라고요. 혹시 무술 같은 거 배우셨나 싶은데 맞나요?"
"좀비 숫자가 너무 많다 보니 배운 게 있어도 생각이 안 나던 걸요. 그런 건 생각하지 않고 휘두른 겁니다."
"그래요? 되게 멋있어 보였는데...아! 그, 저, 저도 배워보고 싶고 막 그렇더라고요. 오빠한테 무술 배우면 좀비 녀석들, 좀 더 잘 때려잡을 수 있지 않을까 싶어서요. 그리고 제가 너무 늦게 말한 것 같은데 살려주셔서 감사해요. 덕분에 살았습니다!"
"함께 해쳐나간 겁니다. 누가 누구를 살렸다는 건 어폐가 있죠."
남자의 태도가 너무 딱딱하고 써늘하다.
친해지기 어려운 성격인가 보다.
세상이 이렇게 변해서 그런지 낯선 사람과 친해지는 게 엄청 어려워졌다.
하지만 그녀는 기분 나빠하지 않고 오히려 더 의욕을 불 태웠다.
"오늘 잠은 진짜 푹 잘 수 있을 것 같아요. 너무 열심히 좀비를 때려 잡아서. 근데 내일은 우리 어쩌죠? 지진이 끝났으니까 좀비들도 좀 흩어질까요? 내일도 저길 뚫으라고 하면 못 할 것 같은데..."
"해가 뜨면 천천히 흩어지지 않을까 싶습니다."
"좀비 웨이브는 몇 번 경험해보셨어요? 저는 이번이 두 번째에요. 사실 첫 번째 때는 지진이 안 나서 건물 안에서 벌벌 떨고 있었거든요. 근데 두 번째 때는 좀비 웨이브에 뛰어들었다가 살아서 나왔네요. 제가 발전하긴 발전했나 봐요. 으히히!"
"좋은 경험은 아니죠."
"하~ 근데 이게 은근 손맛이라는 게 있잖아요? 처음에 좀비 잡을 때는 끔찍하고 느껴지는 감각도 소름 돋고 그랬거든요? 근데 이제 익숙해지니까 은근히 짜릿하더란 말이죠. 정타로 들어가면 손맛이 있잖아요."
"그렇죠."
남자는 말수가 많은 사람이 아니었다.
때문에 대화하기 편한 상대는 아니었는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녀는 행복했다.
누군가로부터 자신의 말에 대한 답변 그러니까 맞장구를 듣는 게 정말 오랜만이었기 때문이다.
이 정도의 대답 만으로도 그녀는 울컥 눈물이 쏟아질 것 같았다.
그녀는 손등으로 눈물을 쓸어내고 좀 더 밝게 입을 열었다.
"그거 때문에 그런지 살아서 건물 안에 들어오니까, 온 몸에 소름이 쫘악 돋더란 말이죠."
"저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정말 위험한 순간이었으니까요."
"지진을 우리가 어떻게 상상하겠어요! 아하하. 어쨌든 오늘도 이렇게 살아남아서 정말 다행인 것 같아요. 너무 외롭고 힘들 때는 그냥 팍 죽어버릴까 생각이 드는데, 솔직히 너무 아깝잖아요. 죽으려면 이런 개 고생 하기 전에 죽었어야 덜 억울했을 거란 말이죠."
죽고 싶어도 그동안 개 고생한 게 너무 아까워서, 지금처럼 정말 어쩔 수 없어서 죽는 거 아니고서는 꾸역꾸역 살고 있는 중이었다.
"자살하기 딱 좋은 세상이지만, 그렇게 허무하게 끝내려고 지금까지 아등바등하며 살고 있는 건 아니죠."
"맞아요! 그래서 저는 내일도 열심히 살아보려고요. 그래서 그런데 좀비 웨이브가 언제쯤 사라질까요? 우리 그동안 여기서 꼼짝 없이 갇혀 지내야 할 것 같은데 엄청 지루할 것 같지 않아요?"
그녀는 슬금슬금 엉덩이를 끌어서 남자의 가까이로 다가갔다.
남자는 그녀가 다가오고 있는 걸 보고 있었으나 딱히 제제를 가하지 않았다.
'이 정도면 넘어 오겠는데?'
솔직히 어딘가에 갇혀서 무의미하게 시간을 보내는 건 너무 익숙하고 지긋지긋했다.
기왕이면 지루하지 않은 시간을 보내고 싶었다.
'짜릿하면 더 좋고.'
그녀가 무엇을 노리고 있는지 모르는 건지 남자가 순진하게 대답했다.
"내일은 바깥 상황을 확인하고 결정하는 게 맞을 것 같습니다."
"내일의 일은 내일에게 맡기자는 거군요. 근데 제가 좀비 웨이브를 한 번 경험해봤다고 했잖아요. 얘네들 어느 정도 흩어지려면 적어도 한 3일은 걸릴 거에요."
"3일 내내 이곳에서 기다리는 건 안 될 겁니다. 애초에 식량이랑 물이 없으니까요."
"아무튼 적어도 하루 정도는 계속 여기에 갇혀 지내야 한다는 건 바뀌지 않는 일이에요. 그러니까 우린 그 시간을 심심하지 않게 보낼 궁리를 해야 하는 거죠."
"그럼 건물 내부를 좀 더 둘러보죠. 초코바를 발견한 것처럼 뭔가 도움이 될 만한 걸 발견 할 수 있을 지도 모릅니다."
남자가 영 눈치가 없다.
이러면 어쩔 수 없이 겉치레는 버려두고 하고 싶은 말을 직설적으로 하는 수밖에 없었다.
'에잇, 모냥빠지게. 왕년에 잘 나가던 대학 캠퍼스 여신 민진주인데 말이지.'
그래도 어쩌겠나?
성욕 앞에서는 그저 한 마리의 짐승일 뿐.
오랜만에 만난 남자와 그렇고 그런 짓을 하고 싶어 애가 닳고 있는 건 그녀였다.
"건물 내부를 둘러보는 건 필요한 일이긴 한데, 그게 24시간 넘게 걸리는 일은 아니잖아요."
"그렇죠."
"그러니까, 제 말은...남녀가 한 공간에 갇혀서 시간을 보내야 하는데 심심하게 대화만 나눌 거냐는 거에요."
"...무슨?"
"솔직히 오빠 여기서 방금 자위했죠? 저 냄새 맡았거든요."
"어쩔 수 없는 생리현상이었습니다."
진주의 솔직한 지적에 남자의 표정이 굳어졌다.
그녀의 말에 기분이 상한 게 틀림없다.
"기분 나쁘게 할 생각은 없었어요. 나는 그냥...그 말을 하고 싶은 거에요. 오빠는 한 발 뺐는데, 나는 못 뺐다고요! 그러니까 오빠 것 좀 빌려주시면 안 될까요?"
"이걸...빌려달라고요? 그게 가능합니까?"
"헤헷, 그냥 말이 그렇다는 거죠. 섹스 한 판 하자는 거에요. 에잇, 세상도 망했는데 내 이미지 쯤이야. 다 같이 망해버려라~!"
이성에게 나 성욕 때문에 죽을 것 같으니까 섹스좀 하자고 말하는 게 어디 쉬운 일인가?
부끄러워서 얼굴이 다 빨개진다.
"오빠도 방금 좀비 잡은 일로 흥분했잖아요. 사실 저도 그렇거든요. 그래서 이 욕구를 해소 시키고 싶은데, 마침 오빠도 몸 상태가 비슷해보였거든요."
"자위 하실 줄 모릅니까?"
"자위랑 섹스하는 거랑 차원이 다르잖아요! 가볍게 생각해요. 한 번 잤다고 막 매달리고 질척이는 그런 진상 아니거든요. 그러니까 딱 한 판 하고 서로 떨어져서 꿀잠 잡시다. 어때요?"
성욕이 해소 되지 않으면 잠도 제대로 못 잘 것이다.
그와 한 판 시원하게 땡기고 쿨쿨 자는 거다.
"콘돔 없습니다."
"한 번으로 애 안 생겨요. 그리고 사실 저한테 콘돔 있어요."
"...그게 왜 있죠?"
"은근 쓸 곳 많아요. 본래 목적이 아니어도 말이죠. 쭉쭉 늘어나니까."
사실 본래의 목적과 엇비슷하게 사용하고 있다.
저 안에 손가락을 넣고 건강한 자위 생활을 보내곤 했으니까.
몇 달 전에 물건이 아직 남아 있는 편의점을 발견해서 싹 쓸어 담았는데, 그 과정에서 콘돔이 쓸려 들어왔었다.
"짠! 어때요? 한 판 하는 거."
"...이번이 처음이자 마지막일 겁니다. 아침에 일어나면 없던 일인 것처럼 행동할 거고요."
"오케이. 진짜진짜 깔끔하게 떨어져 준다니까요. 약속약속!"
"콘돔 주십시오."
남자가 그녀의 손에 있는 콘돔을 가져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