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hapter 802 - #96. 진해솔 (106)
아침이 되었다.
내 몸으로 돌아왔다는 것을 확인한 나는 하품을 하면서 창 밖을 확인했다.
"크~ 이거지."
특별할 것 없이 평소와 똑같은 건물들이 눈에 들어왔지만, 그것을 바라보는 내 감상은 예전과 달랐다.
살벌하고 소름 끼치게 고요하던 아포칼립스 세상에서 벗어나 멸망하지 않은 세상을 바라보고 있으니 내가 그동안 세계의 '멸망'에 대해 너무 대수롭지 않게 생각하고 있는 건 아닐까 하는 반성이 들었다.
앞으로도 의뢰를 완료하기 위해 아포칼립스 세계를 자주 들락거려야 하겠지만, 그 세계에 정이 들 일은 없을 것 같았다.
'내가 사는 곳이 제일 좋아.'
황제로 군림하는 것보다 그냥 이곳에서 아이돌로 사람들의 관심과 사랑을 받으며 사는 게 좋았다.
나는 침대에서 벌떡 일어나서 내 가족들이 자고 있는 방으로 움직였다.
누구의 방으로 갈까 고민하다가 우리 주아 누나가 보고 싶어져서 그녀의 방을 기척 없이 들어갔다.
그녀는 새근새근 숨소리를 내면서 잠에 빠져 있었다.
'잘 자네. 누구 마누라인데 이렇게 이쁘지? 하하.'
아무런 소음 공해 없이, 누군가가 나를 위협하지 않는 평화를 누리면서 잠을 자는 것에 감사하게 될 날이 올 줄은 몰랐다.
잠들어 있는 그녀의 옆자리에 누워, 가슴을 만졌다.
속옷을 입고 있지 않았기에 주아 누나의 보드라운 가슴 감촉이 손바닥에 고스란히 느껴졌다.
"으응..."
내가 부스럭거리며 인기척을 내서 그런지 푹 잠들어 있던 주아 누나가 잠 투정을 했다.
가슴을 주물거리던 손이 그녀의 도톰한 젖꼭지를 자극하기 시작하자 신음을 뱉어내며 결국 눈이 떠졌다.
"안녕."
"으움...머야...?"
잠을 자다가 막 일어난 탓에 갈라진 목소리가 지금의 나한테는 섹시하고 음란하게 느껴진다.
불과 몇 시간 전만 해도 다른 여자의 속살을 파헤치던 나였다.
문제는 그것이 현재는 정신적인 충족만 남은 채, 몸은 여전히 욕구 불만으로 가득 차 있다는 것이다.
애초에 남의 몸으로 한 일이지 않은가?
"누나, 나 섹스하고 싶어."
"...어제 안 하고 잤어?"
빙의해야 해서 섹스를 건너 뛴 것은 사실이다.
하지만 사실 평화로운 세계의 안온함을 확실하게 느끼고 싶어서 그런 게 더 크다.
"해도 돼?"
"하우...잠깐마안...나 잠 좀 깨구우..."
"그냥 누나는 눈 감고 편하게 있어. 나머지는 내가 알아서 할게."
최대한 부드럽게 해야지.
잠에서 깨지 못해 눈을 감은 채로 노곤하게 누워 있는 누나에게 갑자기 자극적인 감각을 줘서 억지로 정신을 깨우고 싶지 않았다.
나는 한층 더 손을 부드럽고 조심스럽게 움직이며 누나의 몸을 탐하기 시작했다.
그녀의 살결에 입술을 대고 빨면서, 바지와 팬티를 벗기고 그 안으로 들어간다.
이불 안에서 따끈따끈하게 데워져 있는 몸이 사랑스러웠다.
♧ ♧ ♧
주아 누나와 부드러운 섹스를 하고, 그 안에 진한 정액을 사정해준 후.
평소와 다를 거 없이 생활을 했다.
솔직히 한 며칠 간은 아포칼립스 세상에서 있었던 일의 후유증을 앓았다.
낯선 사람이 불쑥 다가오면 저도 모르게 경계하게 되는 그런 거 말이다.
'교통 사고 후유증이랑 비슷하네.'
후유증 때문에 고생을 하게 되면 자연스럽게 생각은 그곳으로 향했다.
과연 지금쯤 의뢰인과 그 여자는 무얼 하고 있을까?
궁금하지 않다면 거짓말일 것이다.
도저히 벗어날 출구가 있어 보이지 않는 공간이었지 않은가?
좀비 웨이브는 끔찍한 자연 재해나 다름 없었다.
'이후로도 그 광경보다 끔찍한 걸 보는 날이 올까?'
아마 어렵지 않을까 싶다.
그만큼 엄청나게 충격적인 광경이었다.
전쟁이라 해도 그보다는 덜 충격적일 거다.
시체가 걸어 다닌다는 게 단순히 영화로 보는 것보다 훨씬 충격이더라.
뿐만 아니라 내 호기심을 자극하는 부분이 더 있었다.
'여자가 엄청 들러붙을 것 같은데...'
민진주.
그 여자가 과연 섹스 한 번을 원나잇으로 생각하고 깔끔하게 떨어져 줬을지 의문이 들었다.
심심하니까 섹스 한 판 하자는 여자이지 않았는가?
아마 거절하느라 꽤나 고생을 하고 있을 게 분명하다.
'그래도 철벽 치는 거는 나보다 더 잘 하지 않겠어?'
수 많은 여자들로부터 철벽을 쳐온 경험이 많으니, 의뢰인이 알아서 잘 해결해주리라 생각한다.
항의 전화라도 오면 상황이 어떻게 진행 되고 있는지 알 수 있을 텐데, 알다시피 핸드폰을 챙겨오지 못해 내게 빙의하지 말라고 전달도 못했던 의뢰인이었다.
그런 상황에서 항의하겠다고 나한테 전화를 할 수 있을 리 없다.
의뢰인이 다시 연락을 취한 것은 그날로부터 이주일이 흐른 이후였다.
"여보세요."
-접니다.
"살아 계셨네요! 좀비 웨이브는 풀렸나요?"
생각보다 시간이 되게 오래 걸렸다.
적어도 일주일이면 연락이 오겠거니 했는데 말이다.
-예, 좀비들이 모두 흩어졌고 저는 무사히 쉘터로 돌아왔습니다.
"깜짝 놀랐습니다. 좀비를 그렇게 가까이에서 보게 될 줄 몰랐거든요."
네가 좀비들이 우글거리는 한복판에 대책 없이 떨궈둔 거 기억하니?
-연락을 못 드렸던 점 사과드립니다. 갑작스러운 좀비 웨이브였고, 핸드폰을 챙길 겨를이 없었습니다.
"충분히 이해합니다. 제가 상황 설명을 적어 둔 종이를 손에 쥐고 있었는데 보셨습니까?"
-예, 봤습니다. 좀비 웨이브가 지진 때문이라는 것을 알게 됐을 때, 많이 놀랐습니다.
"자연 재해가 일어나기 전에 동물들이 도망치는 것처럼 좀비들도 지진을 미리 예견했나 봅니다. 신기하더군요."
좀비의 베이스는 인간이다.
하지만 인간은 동물들처럼 감각이 예민하지 않아서 자연 재해를 미리 예측할 수가 없다.
그런데 좀비가 된 그들은 이성을 잃은 대신 자연 재해를 예측할 수 있는 감각을 갖게 된 모양이었다.
참 아이러니한 상황이다.
-지진 때문이라는 걸 알았으니 앞으로 좀비들 움직임을 예의주시 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집은 괜찮던가요?"
-지진의 여파에서 아예 벗어날 순 없었습니다. 지금 보수 공사를 한참 하고 있는 중입니다. 건물이 아예 무너져버려서 고생을 좀 해야 할 듯 합니다.
아이고.
결국 그쪽 건물도 무너져버렸구나.
"의뢰는 좀 더 뒤로 미루실 건가요?"
건물이 무너져서 수습 중이라는데 의뢰를 수행 할 수 있을까?
임시거처를 마련해서 지내고 있을 테니, 어렵지 않을까 싶었다.
-...그 일로 드릴 말씀이 있습니다.
"예, 말씀하세요."
민진주씨 얘기를 하려나?
-기억 하실 지 모르겠지만, 민진주씨는 무사히 쉘터로 합류했습니다.
"당연히 기억하죠. 다행이네요. 그때 민진주씨 아니었으면 되게 곤란할 뻔했거든요. 그 사람 덕분에 무사히 좀비 웨이브 피하고 다른 건물로 대피 할 수 있었죠. 소프트웨어랑 하드웨어가 잘 맞아야 컴퓨터를 잘 쓸 수 있는 거 아니겠어요?"
하드웨어가 좋아도 소프트웨어가 따라주지 못하면 하드웨어를 제대로 활용하지 못하는 법인 거다.
"그래도 상처는 없을 겁니다. 제가 좀비 감염에 대해 아는 게 없어서 최대한 조심해서 싸웠거든요."
-고생하셨습니다. 저는 바이러스에 감염이 되어도 좀비가 되는 일이 없는 슈퍼 면역을 갖고 있어서 걱정하실 필요는 없었습니다.
슈퍼면역! 오호라.
"그것도 역시 상점에서 구매하신 거겠죠?"
-코인만 있다면 구매하지 못할 게 없는 공간이니까요.
맞다는 의미의 대답이었다.
"그래서 민진주씨에 대한 건 뭔가요?"
-진주씨가 그...걸 하고 싶어 합니다.
"아아, 결국 또 그렇게 됐어요?"
역시 그 여자가 한 번으로 깔끔하게 떨어져 나가지 않은 모양이었다.
"거절하기 힘드신가요?"
워낙 마이페이스가 강한 사람이다 보니 아무리 거절에 능통한 의뢰인이라 해도 어려운 건가 싶었다.
그런데 의뢰인이 굉장히 의외의 말을 해왔다.
-제가...민진주씨랑 사귀게 됐습니다.
"네? 누구랑 뭘 한다고요?"
그 여자랑 사귄다고????
그럼 쉘터에 남아 있는 수많은 여자들은 어쩌고?
미래를 위해 다른 여자를 안아야 하는 의뢰인이다.
그런데 의뢰를 하는 도중에 여자와 사귀어버리면 어쩌자는 건가?
이건 내가 의뢰를 수행하는데 큰 어려움을 만드는 일이었다.
-민진주씨와 좋은 관계가 됐습니다.
"아니, 어쩌다가요?"
어쩌다가 그 수다쟁이랑?
내가 황당해 하니까 오히려 의뢰인이 어처구니 없다는 듯 말해온다.
-...당신이 그렇게 만들지 않았습니까?
"제가요?"
-마음에 들어서 그런...걸 한 거 아니었습니까?
"제가 마음에 든 거랑 당신이 마음에 든 거는 상관이 없죠. 설마 제가 마음에 들어 한다고 생각해서 억지로 사귀겠다고 하신 건 아니겠죠?"
-그런...줄 알았습니다. 물론 사귀겠다고 한 건 당신 때문은 아닙니다. 다만 마음에 들어서 그런...걸 하신 줄 알고...관계를 정리 할 필요가 있다는 생각이 들어서...
우울하기 그지없는 목소리로 주절주절 하는 말을 들어 보니 상황을 오해 하기 충분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민진주씨랑 좀비 웨이브를 해결하기 위해 붙어 다니다 보니 마음이 갔던 모양이다.
문제는 내가 민진주씨와 섹스를 했다는 점이다.
마음이 있으니까 의뢰 내용이 아닌 여자와 섹스를 한 것이 아니겠나 하는 생각이 든 거다.
"쓸데없는 걱정을 하셨네요. 저는 민진주씨에 대해 아무런 관심도 없습니다. 그때도 그냥 원나잇처럼 관계를 한 겁니다. 그러니까 진심으로 그분이랑 이어지고 싶은 거라면 저는 신경 쓸 필요 없습니다. 근데 민진주씨랑 사귀면서 의뢰는 계속 해도 되는 겁니까?"
제일 걱정 되는 건 의뢰다.
내가 거기에 있는 여자를 마음에 들어해서 뭐 어쩌겠는가?
애초에 나는 내 몸으로 이곳에 존재하는 게 아닌데 말이다.
-의뢰는...계속 할 수 있습니다. 그 부분에 있어서는 양해를 구했습니다. 오히려 자신도 꼭...그걸 해달라고 하더군요.
"아아...확실히 섹스에 굉장히 적극적이었죠. 어...근데 그것까지 제가 해야 합니까? 민진주씨는 본인이 직접 하시는 게 맞지 않나요?"
그 여자랑 사귄다며.
설마 민진주씨랑 섹스하는 것까지 나한테 미룰 건 아니겠지 싶어 물어봤다.
그러자 의뢰인이 한동안 침묵을 하더니 조심스럽게 말했다.
-안 될까요...?
되겠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