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hapter 805 - #96. 진해솔 (109)
"오늘도요? 다른 여자들은 신경 안 쓰십니까?"
-어차피 아이를 임신할 때까지 계속 해야 하는 일 아닙니까. 정해진 순서는 없고, 저는 누구를 먼저 임신 시킬지 결정 할 수 있는 자격이 있습니다. 혹시 싫으신가요?
"아뇨. 싫은 건 아닙니다. 너무 한 사람과 하다 보면 문제가 생길 것 같았을 뿐이죠. 본인이 상관없다고 하는데 제가 뭐라고 더 하겠습니까."
좀비 웨이브를 경험했던 날로부터 며칠이 지났다.
그날의 경험이 굉장히 특이했던 거라는 듯 이후로 의뢰를 수행하는데 돌발 상황이 생긴 적은 없었다.
다만 의뢰인이 너무 자주 민진주씨와 밤을 보내는 걸 요청하는 게 유일한 문제였다.
누가 봐도 쉘터의 여자들과 문제가 생길 상황이었는데, 그걸 알면서도 그냥 밀고 가려는 모양이었다.
'근데 이놈은 왜 자꾸 자기 여자랑 나를 붙여 놓는 거야? 찜찜 하지도 않나?'
슬슬 의뢰인의 취향에 의심이 생기기 시작했다.
껄끄러워 해야 하는 상황에 오히려 더 부추기고 있는 것부터가 이상하지 않은가?
평밤한 취향을 갖고 있다면 어떻게든 잠자리 횟수를 줄이려고 하는 게 정상이었다.
똑똑똑-
"폐하."
"들어오게."
통화를 막 끊었을 무렵.
기다리고 있던 소식이 도착했다.
"게오스 제국이 소란스럽던데, 그렇게 상황이 심각한가?"
"예, 폐하. 아직 확실하게 터지지는 않았지만, 낌세가 심상치 않습니다. 이곳저곳에서 문제가 터지고 있습니다!"
"계획대로 일이 진행 되진 않을 거라 생각했다만, 생각보다 빨리 망했구나. 도대체 어쩌다가 그렇게 된 건가? 대규모 국책 사업을 시작할 때만 해도 우리 제국이 게오스 제국을 부러워 하고 있었는데 말이야."
우리 제국 귀족들 중 몇몇이 게오스 제국의 국책 사업을 꽤 유심히 살펴보고 있다고 들었다.
게오스 제국이 성공을 하면 따라해서 이익을 가져가려고 말이다.
'지금 상황을 보고 아 뜨거라 하는 놈들이 꽤 있을 거야.'
비앙카가 계획한 일 답게, 그녀가 만들어낸 일은 게오스 제국을 점점 병들게 하고 있었다.
아니, 내가 생각한 것보다 훨씬 빠르게 게오스 제국이 무너져 내리고 있었다.
이미 비앙카에게 진행 사항을 모두 들었지만, 사람들 앞에서는 철저하게 모르는 척을 해야만 했기에 소식을 가져 온 신하의 말을 경청했다.
"그러니까..."
귀족 중에서 비앙카를 내가 파견한 첩자라는 걸 아는 사람은 극소수였다.
황궁은 언제 어디서든 말이 세어나갈 수 있다는 생각을 가진 채 살아야만 했다.
그러니 소식을 가져 온 신하와 독대를 하고 있는 순간에도 확실하게 연기를 하는 것이다.
"확실히 일을 한 번에 너무 많이 벌려 놓기는 했지. 하지만 완공이 하나 같이 몇 년이 넘어가는 공사이니 그럴 수밖에 없었을 거야. 돈이 안 모인 것도 아니었으니까."
신하가 가져 온 게오스 제국의 소식.
투자금이 이례적으로 빠르게 모이면서 거대 국책 사업이 시작 되었다.
하지만 예상과 달리 공사의 진척도가 50%도 넘지 않은 상황에서 여러 문제가 튀어 나오고 있었다.
"저희 입장에서 봤을 때 왜 저러는 건지 이해가 안 되더군요. 투자금을 냈으면 공사가 문제 없이 잘 되어야 할 텐데, 왜 괜히 나서서 일을 만드는 건지..."
"제 버릇 남 못 주는 거지. 더군다나 자기 돈이 들어간 사업이 아니냐. 뭐 눈에는 뭐만 보인다고 내 돈 빼돌려서 자기 주머니 채우는 놈은 없는지 감시하고 싶었을 거다."
하나하나씩 공사를 시작하기엔 워낙 많은 인력과 시간이 드는 사업들이었다.
황제 혼자서 감당하기에는 금액적으로 말이 되질 않았고 말이다.
그래서 귀족들에게 투자 기회를 주었고, 그게 예상한 것보다 훨씬 대박이 났다.
예정 되었던 투자 금액의 몇 배가 더 벌렸으니 말이다.
부유함이 넘쳐 흐르는 게오스 제국의 귀족들이다.
집안에 꿍쳐둔 황금들이 얼마나 많았겠는가?
그 황금들이 이번 국책 사업에 투자 되었다.
"폐하의 말씀이 옳사옵니다. 게오스 황제는 투자금이 모였으니 성공한 거나 다름없다며 공사 진행을 관료들에게 맡겨버렸습니다. 요즘은 어떻게 진행 되고 있는지 묻지도 않는다고 하옵니다."
그리고 그 관료들에게 가장 최우선으로 입김이 닿는 존재가 있었으니, 바로 비앙카다.
"그 여인이 공사를 할 때 인부들을 모두 평민으로 고용하라고 했다고 하옵니다. 이는 황제의 권위를 세우는데 도움이 될 것이라면서요."
"황제의 돈이 평민들에게 흘러가게 되는 것이니, 백성들 입장에서야 당연히 황제를 칭송 할 수밖에."
"문제는 그 돈 중에는 귀족들의 주머니에서 나온 황금이 있다는 점이었습니다. 뒤늦게 평민들에게 투자금이 흘러 들어가고 있다는 걸 알게 된 귀족들 사이에서 난리가 났습니다."
"평민들을 데려다가 쓰면 안 된다는 법이라도 있나?"
"그럴 리가요. 다만 노예들을 이용하지 않고 평민을 고용함으로써 들어가게 된 비용이 못 마땅하다는 것이었습니다."
노예들은 돈이 들지 않는다.
평민들을 사용하면 고용비가 들고, 그 고용비는 당연히 귀족들의 투자금이 나가는 거였다.
당연히 귀족들 입장에선 노예를 두고 왜 평민을 고용해서 굳이 돈을 쓰냐고 항의를 할 수밖에 없어진다.
거기다가 그들의 돈으로 황제가 평민들의 환심까지 사고 있는 상황이 아닌가?
"근데 그 큰 공사를 노예들로만 지을 수가 있는가? 게오스 제국에 그렇게 노예가 많아?"
"그렇지는 않습니다. 거기다가 노예의 대부분은 귀족들이 소유하고 있는 재산인 경우가 많습니다."
"귀족들이 본인 재산인 노예를 공짜로 대여해서 공사에 참여하게 하진 않을 것 같은데."
"그렇사옵니다. 가문에 소속 되어 있는 노예를 돈 받고 대여해주겠다는 귀족들이 있습니다."
허 참내!
평민을 돈 주고 쓰는 거나, 노예를 귀족에게 돈 주고 대여 받는 거나.
투자금을 쓰는 것은 똑같은 일이었다.
"결국 자기 돈이 평민들한테 나가는 게 아니 꼽고, 그 돈이 자기 주머니로 들어오는 건 좋다는 거군."
"투자금을 댔으니 그 정도 참견은 당연히 해도 되는 거 아니겠냐는 식입니다."
자기 돈이 혹여나 이상한 놈 주머니에 들어가는지 수시로 확인하겠다면서 꼬투리를 잡아 대니 공사가 정상적으로 진행이 될 리가 없었다.
"잠깐 설명을 들어도 게오스 제국이 어떤 상황인지 짐작이 가는구나. 이젠 황제가 나선다고 해도 수습 할 수 있는 수준이 아닌 것 같다."
"예, 폐하. 더군다나 평민을 고용해 놓고 뒤로 돈을 빼돌리다가 덜미가 잡힌 관료까지 있는 터라..."
시나리오 좋던 영화가 망하는 이유 중에 하나가 바로 투자자들의 참견으로 물가로 가야 할 배가 산을 오르기 때문이다.
투자한 회사에서 연기자를 낙하산으로 꽂고, 시나리오를 마음에 안 든다며 이리저리 참견하는 거다.
말을 안 들으면 투자금을 빼겠다고 강짜를 놓는다.
그리고 게오스 귀족들도 어김없이 그 짓을 하고 있는 거다.
이러니 국책 사업이라 해도 멀쩡하게 돌아 갈 리가 없었다.
"명분이 만들어졌으니 더 날뛰었겠군."
"귀족들에게 대규모 투자금을 받아 공사를 시작한 건 좋았지만...이젠 비리가 가득한 사업이 되고 있습니다. 투자금을 못 뜯어 먹으면 무능한 관료라고 손가락질을 받는다고 합니다."
"하하! 기가 막힐 일이구나."
투자금을 모을 때까지만 해도 모두가 꿈에 차 있었을 것이다.
"본인들의 손으로 나라의 미래를 팔아 먹고 있다는 자각도 없을 거야."
투자금을 횡령하는 관료, 공사가 진행 되는 동안 어떻게든 참견해서 사업적 이익을 보려 하는 귀족 등등.
갑자기 쏟아진 황금을 자격 없는 자의 손에 맡겼으니 파탄이 나는 건 당연한 일이었다.
그렇게 사업에 온갖 흙탕물을 끼얹다가, 국책 사업이 실패라도 된다면, 이놈들은 잽싸게 발을 빼고 자신 깨끗한 척 하며 남탓을 할 것이다.
이게 우리 제국에서 벌어지고 있는 일이 아니라 적국인 게오스 제국에서 일어나는 일이라는 점이 얼마나 다행인지 모른다.
'남일이라고 웃을 수 있는 게 아니라는 점이 씁쓸하긴 하다만...'
먼저 나섰다가 매를 아주 호되게 맞고 있는 게오스 제국이었다.
우리는 한 발 늦게 움직인다 해도 손해를 보진 않을 것 같았다.
"그렇게 이곳저곳에서 살점을 뜯어 먹히고 있는데, 건물이 다 지어질 수 있을지 모르겠군. 지금은 투자금이 마르지 않은 샘 같아 보여도 계속 이리저리 빼먹다 보면 결국 바닥을 보일 텐데 말이야."
"그때가 바로 게오스 제국에 피 바람이 부는 날이 되지 않을까 싶습니다."
나라를 무너트릴 수 있다고 자신하면서 게오스 제국으로 떠났던 비앙카.
그녀가 고작 1년이 채 지나지 않은 시간에 정말 게오스 제국을 시름시름 앓게 하고 있었다.
"귀족들을 불러야겠다. 게오스 제국이 무너지면 그 여파가 우리 제국에도 미칠 터. 미리 대비해서 그 여파를 최대한 줄여봐야겠다."
"게오스 제국의 이번 일이 우리 제국에도 영향이 미칠 거라는 말씀이십니까?"
"게오스 제국은 최대 곡물 생산지다. 그런 곳 나라 경제가 무너지는 일이 생기는 거야. 우리 제국은 곡물 수입 의존도가 높은 나라다. 영향이 오지 않는다는 건 말도 안 되는 소리지."
원래 미국이 기침을 하면 한국은 독감에 걸린다고 하지 않는가?
이번 일로 게오스 제국은 기침이 아니라 피를 토하게 될 것이 분명하다.
그렇다면 우리 제국은 어떻게 되겠는가?
"우리 제국은 피해를 입을 수밖에 없다. 짐과 귀족들이 해야 할 일은 게오스 제국 때문에 백성들이 고통 받지 않도록 미리 준비를 해둬야 하는 거고."
우리는 이미 게오스 제국의 미래를 파악하고 있었다.
그러니 미리 준비한다면 게오스 제국에서 생기는 일의 여파를 최소화 할 수도 있을 것이다.
귀족들을 불러서 앞으로 게오스 제국의 경제가 파탄이 났을 때 벌어질 수 있는 일을 상의해 봐야 했다.
소식을 전하러 온 관료가 돌아가고.
혼자 남게 된 나는 시간을 확인했다.
'10시가 되기 전에 잠을 자야 하니까...오늘은 좀 일찍 가볼까.'
2개의 의뢰를 동시에 하는 것이 고되다는 생각이 들 정도로 어려운 것은 아니었다.
하지만 두 의뢰 모두 하루 이틀로 끝나는 게 아닌 장기 의뢰다 보니 정신적으로 피로한 것은 사실이었다.
'그냥 섹스만 하고 끝나는 거면 몰라도...'
2개의 의뢰 모두 내가 해야 할 일 이외의 일들까지 신경을 써야 하는 것들이었다.
이곳에서는 황제인지라 나라를 다스려야 했고, 그곳에서는 유이랗게 살아 남아 인류의 마지막 희망이 되어 쉘터를 운영해야 하는 입장이었다.
그나마 두 번째는 의뢰인이 주체적으로 행동하고 있어서 밤만 책임져주면 됐는데...
'그놈이 하는 행동 보니까 슬슬 똥이 아래로 내려올 것 같단 말이지.'
부디 내가 더 신경 써야 할 일이 없기를 바란다.
하지만 의뢰인은 오늘도 자기 여자를 안아 달라며 요구를 해오고 있었다.
그리고 예로부터 굴러 들어 온 돌이 박힌 돌을 뽑아버리는 걸 달가워 할 사람은 없는 법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