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hapter 810 - #96. 진해솔 (114)
결국 담합을 한 귀족들에게 일방적인 벌금형을 내리고 노예 대여를 강제로 중단시켰다.
그리고 다시 평민들을 고용했으며, 그 과정에서 평민들에게 제대로 지급 되지 않았던 인력비를 모두 결제하도록 만들었다.
보통 생각이 좀 있는 사람이었다면, 비리를 발견했을 때 전수 조사를 하겠지만 비앙카의 만류도 있었고 그 정도로 복잡한 일에 신경을 쓰고 싶지 않았던 황제는 책임 관료를 다른 관료로 바꿔버리는 것으로 신경을 껐다.
새롭게 황제의 관심을 사고 있는 것은 비앙카가 하길 원하던 축제에 관련 된 일이었다.
"한 달 간 계속 되는 축제 말씀이시옵니까?"
"준비 기간이 너무 촉박하옵니다."
"폐하, 국책 사업으로 많은 관료들이 과중한 업무에 시달리고 있습니다. 헌데 거기에 축제까지 더하다니요."
관료들이 축제라는 말에 펄쩍 뛰었다.
축제를 진행하기 위해 갈려가야 하는 당사자들이다 보니 질색을 하는 것이다.
도대체 무엇을 기념할 것이며, 무슨 이익이 있다고 축제를 하냔 말이다.
"거기다가 한 달이라니요. 그 기간 동안 나가는 돈이 어마어마할 겁니다!"
"게오스 제국은 그동안 전쟁으로 고통 받는 날들이 많았다. 국책 사업의 준비가 끝난다 해도 아무런 홍보 없이 관광객들이 제국을 방문 할 리가 없지 않은가? 미리미리 축제를 계획해서 관광객들이 게오스 제국을 찾아올 수 있도록 만들어야 한다."
황제는 비앙카에게 조언을 받은 대로 신하들에게 말했다.
반대를 하던 관료들도 확실한 명분을 쥐고 있는 황제의 말에 더 이상 격한 반대의 의사를 표할 수 없었다.
'이번에도 비앙카, 그 여자의 수작질인가?'
'폐하를 데리고 주마다 남창들을 불러서 방탕하게 논다고 들었는데...축제도 그 일환인가?'
'쯧쯧쯧, 기어코 비앙카 그 년이 폐하를 타락시키는구나.'
'비앙카...반드시 제거해야 할 여자야.'
'이번에 폐하께서 갑자기 담합을 얘기한 것도 그 년이 수작을 부린 거겠지. 이런 식으로 나온다면 절대 가만히 내버려둘 수 없지.'
비앙카가 예측했던 대로 그녀가 귀족을 향해 칼을 겨누자 귀족들도 가만히 당하고 있지 않았다.
"폐하! 공사 중이던 건물에서 인부가 추락해 사망했다고 하옵니다!"
"그게 뭐 어쨌다는 것이냐?"
평민 한 명이 죽은 일이 황제 앞에서 말할 정도로 큰일이냐는 질문에 관료가 대답했다.
"떨어진 인부는 현장 감독을 하던 관료이며, 그 관료가 떨어진 이유는 평민이 밀어서라고 하옵니다!"
"뭐, 뭐라?!"
죽은 인부가 귀족이라는 점도 경악스러운데, 귀족을 밀어버린 게 평민이라고 한다.
이는 신분 사회였던 게오스 제국의 근간을 뒤흔드는 끔찍한 일이었다.
"감히 평민이 그런 짓을 한다고?! 어떻게 된 일인지 낱낱이 밝혀내야 할 것이다."
"예, 폐하!"
"그리고 평민의 가족들을 모두 잡아 들여라. 도주하려고 들 수도 있으니."
"예!"
황제의 은혜로 고용이 된 평민이 현장 감독을 죽였다는 일은 단순히 사건 하나로 끝날 일이 아니었다.
귀족들은 이번 일을 핑계로 황제에게 진즉 노예를 고용하면 됐지 않았느냐고 할 것이다.
황제는 벌써부터 귀족들의 잔소리가 떠올라 머리가 지끈거렸다.
"비앙카...비앙카에게 가야겠다!"
"예? 지금 당장 말씀이시옵니까?"
아직 일이 다 끝나지 않은 상황이었다.
그런데도 황제는 막무가내로 비앙카를 보러 가겠다고 했고, 기어코 자리에서 일어나버렸다.
그날 황제는 비앙카에게 달려가 하루가 다 지나도록 술잔을 기울였다.
황제가 나온 것은 새벽 무렵.
고주망태가 되어 궁인의 등에 업힌 채였다.
♧ ♧ ♧
평민이 관료를 밀어버린 이유.
그 평민은 일한 대가를 제대로 받지 못했던 평민들 중 하나였다.
그러다가 이번에 황제 폐하가 비리를 발견해 평민들에게 제대로 급여를 지급하라는 명령이 내려왔다.
그런데 이 미친 관료 놈이 그 명령을 받고서도 정신을 못 차리고 평민에게 지급해야 하는 밀린 급여 3분의 1을 떼어먹은 채 쥐어준 것이다.
처음에는 이거라도 돌려 받은 게 다행이라 생각했으나 뒤늦게 다른 평민들의 얘기를 듣고 자신이 관료에게 사기를 당한 것을 알게 되었다.
곧장 그를 찾아가 받지 못한 것을 돌려 달라 했으나 관료는 이미 지급 받았다는 인증 서류에 싸인을 하지 않았느냐며 시치미를 뗐다.
"이건 관료가 잘못한 일이긴 하군. 하지만 그렇다고 해도 살인이라니!!"
관료의 잘못이 맞기는 하지만, 평민의 손속이 너무 과했다.
그것이 황제가 내린 결론이었다.
"그렇사옵니다. 이래서 평민들에게 분에 넘치는 과한 재물은 필요하지 않다고 한 것입니다. 지금 이 사건도 평민이 분에 넘치는 재물을 얻어 욕심이 생긴 탓에 만들어진 사건이지 않사옵니까."
"..."
귀족이 황제의 말에 냉큼 추임새를 넣으며 은근하게 그녀를 깠다.
실제로 노예를 고용해서 일을 시켰다면, 급여를 받지 못해 원한이 생길 일이 없었을 것이다.
그들이 노동해서 번 돈은 모두 귀족의 호주머니로 들어갈 것이고, 그런 돈을 관료가 착복 할 수 있을 리가 없었다.
"그 평민의 가족들은 붙잡아 왔느냐?"
황제는 불편한 화제를 돌리기 위해 다른 말을 꺼냈다.
"송구하옵니다. 잡으러 갔을 땐 이미 평민 가족들은 국경을 넘어 혁명국으로 도망쳤습니다."
현재 게오스 제국은 혁명단이 만든 나라와 귀족이 내전을 일으켜 독립한 국가로 갈려져 있었다.
진작 군대를 보내 그곳을 다시 되찾아야 했지만, 황제는 전쟁을 일으켜 피를 보는 일을 하고 싶어 하지 않았다.
그 땅을 잃는다 해도 게오스 제국은 여전히 풍요로운 땅들이 많았다.
해서 황제는 군대를 파견하는 일을 차일피일 미루고 있는 중이었다.
"도망을 쳤다? 결국 못 잡았다 이 말이냐!! 뭐 하나 제대로 하는 일이 없구나! 답답하다 답답해!"
평민에게 귀족이 죽지를 않나, 그 평민 가족을 놓치기까지 하지 않나.
정치는 알면 알수록 짜증만 나고 머리만 아팠다.
게오스 황제는 또 다시 지끈거리는 두통에 한숨을 쉬었다.
"그놈들을 데려 올 방법은?"
"애초에 평민들만 들어갈 수 있는 곳이지 않사옵니까? 이참에 군대를 보내 응징을 하심이 어떠하십니까?"
"방법이 피를 보는 것 뿐인 것이냐? 다른 방법이 없어?"
"송구하옵니다, 폐하."
쉬운 방법을 두고 왜 다른 방법을 생각해야 하냐는 식이다.
"자네들은 전쟁이 그리도 좋은가? 꼭 그렇게 사람이 죽어 나가야 만족하느냔 말이네!"
"폐하, 전쟁은 반드시 필요하옵니다. 내전국을 언제까지 봐주고 있을 수는 없지 않사옵니까?"
"자네들은 몰라도 너무 모르는군. 우리 게오스 제국은 전쟁을 치를 돈이 없다!"
"예?"
황제의 말에 귀족들이 어처구니 없어했다.
게오스 제국 황실에 돈이 없다?
그런 건 농담으로도 그러냐며 속아 줄 수 있는 일이 아니었다.
"다들 왜 그렇게 못 믿겠다는 눈치인가? 잘 생각해보게. 과연 황실에 남아 있는 돈이 있겠는가?"
"어...어?"
"하지만...하지만 아무리 그래도...우리 게오스 제국인데..."
말도 안 되는 농담이라며 웃어 넘기려던 귀족들의 표정이 구겨진다.
아마 구겨진 표정의 귀족들 사이에선 그동안 있어왔던 일들을 새삼 떠올리고 있을 것이다.
폭군 황제를 끌어내리고, 새 황제를 세우기 전에 빼 먹었던 황실 재산과 국책 사업에 들어간 재산, 그리고 황제가 매 주마다 벌리는 연회와 사치에 들어가는 재산까지.
마르지 않은 강의 수위가 조금씩 조금씩 낮아지면서 어느새 바닥이 드러나기 직전의 상황이 된 것이다.
"그, 그걸 왜 지금에서야 말씀하시는 겁니까!"
"돈이야 어차피 세금을 걷으면 다시 들어오는 거 아닌가? 당장 황실이 돈이 없어 무너진다는 게 아니라 벌려 놓은 일이 많아서 전쟁이 불가능하다는 말을 하고 있는 거네."
"지금 그게 문제가 아니지 않습니까!!"
귀족들이 걱정하고 있는 건 다름 아닌 국책 사업이었다.
그들이 투자한 국책 사업.
야금야금 옆에서 뜯어먹으며 한 몫 챙기고 있긴 하지만, 엄연히 따지면 투자금으로 넣은 돈이 더 많았다.
건축에 들어가야 할 돈을 빼 먹었다가 큰일이 나면 어떡하나 싶긴 했으나 국책 사업이다 보니 수습은 황실에서 할 것이라 낙관했었다.
그런데 정작 수습을 해줘야 할 황실에 돈이 없다고 한다.
'그럼 내 투자금은?'
서늘한 한기가 뒷덜미를 훑고 지나간다.
뭔가 일이 잘못 되고 있었다.
황제는 매해 들어오는 세금으로 배짱을 부리고 있는데, 그건 절대 해선 안 되는 일이었다.
세금이라는 게 무엇인가?
결국 나라를 유지하기 위해 다시 쓰여야 할 돈들이다.
나라에 유보금이라는 게 왜 존재하겠는가!
'이런 멍청한 년이!!!!!!'
귀족은 순간 내뱉을 뻔했던 말을 속으로 꾹꾹 눌러 담았다.
아직 상황 파악을 못한 귀족들이 있는 게 얼마나 다행인지 모른다.
'투자금을 뺀다. 배에 구멍이 뚫렸는데 계속 배에 타고 있으면 다 함께 물에 빠져 죽는 것밖에 되지 않아!'
귀족들 모두 눈이 돌아서 가문에 있는 돈을 모조리 긁어모아 국책 사업에 뛰어든 상태였다.
누구도 국책 사업이 망할 것이라 예측하지 못하고 돈잔치를 하고 있었다.
돈이라는 게 결국 한계가 있기 마련이고, 펑펑 쓰다 보면 바닥이 나올 텐데 말이다.
'도망쳐야 한다!'
아직 늦지 않았다는 것이 이 귀족에게는 천운이었다.
만약 조금만 더 늦었다면 평민 가족들이 살림을 모두 버려두고 몸만 챙긴 채 도망친 것처럼 그도 그렇게 될 수 있었다.
아직 귀족들 사이에서는 국책 사업에 투자의 기회를 얻지 못해 손가락만 빨고 있는 이들이 있었다.
그들에게 이 폭탄을 떠넘기는 거다.
귀족의 눈알이 은밀하고 치밀하게 굴러갔다.
황제가 말했던 엄청난 폭발의 징조를 못 알아 먹은 귀족들이 여전히 전쟁을 부르짖고 있었다.
"돈이 없다면 더더욱 전쟁을 해야 합니다. 내전국이 독립을 하면서 빈 세금의 양이 꽤 된다고 알고 있습니다. 그들을 패배시키고, 다시 땅을 되찾는다면 황실의 빈 내탕고도 다시 꽉 채울 수 있습니다."
"폐하, 이번에 문제가 된 평민의 일이 두 번 벌어지지 말라는 법이 없사옵니다. 평민들을 고용하시는 것을 다시 재고해주심이 어떠하십니까?"
그의 눈에는 이미 이곳저곳 뜯어 먹혀서 뼈가 보이고 있었는데, 까마귀와 하이에나 눈에는 여전히 남아 있는 살점만 보이는지 호시탐탐 기회를 노리고 있었다.
그 한심한 자태에 혀를 찬 그는 누구에게 이 폭탄을 넘길 것인지 고심했다.
적어도 아직까지는 폭탄인 줄 모르는 이들이 더 많을 테니, 넘기는 일이 어렵지는 않을 것이다.
'돈이 없는 게오스 제국이라니...어쩌다가 이 지경이 된 것인가.'
천 년의 제국이라며 무너지지 않을 강대국이란 소리를 들어왔던 게오스 제국.
하지만 그렇게 불린다는 것이지 진짜 천 년의 세월을 보낸 것은 아니지 않은가?
천 년은 커녕, 게오스 제국의 끝이 멀지 않았다는 직감이 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