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hapter 814 - #96. 진해솔 (118)
게오스 황제는 믿을 수 없는 소식을 듣고 재차 되물었다.
"뭐라고? 다, 다시 말해보라. 다시!!!"
"소, 송구하옵니다."
"다, 당장 가봐야겠다!"
"폐하!! 폐하아!!!"
쿵쿵쿵쿵!
의복이 흐트러진 채로 황제가 황궁을 달려갔다.
쾅!
문을 열어 젖힌 황제는 눈앞에 보이는 끔직한 광경에 현기증이 나 비틀거렸다.
"어디로...어디로 간 것이냐? 비앙카는...비앙카는!!!"
"주, 죽여주시옵소서!!!"
"그래!! 죽는 건 죽는 거고!!! 비앙카가 어디 갔냔 말이다!!"
"흑흑흑!"
궁인들이 눈물을 뚝뚝 흘렸다.
비앙카가 머무르고 있어야 할 방 안에는 핏자국이 가득했다.
누군가가 비앙카가 누워 있는 곳을 기습해서 끔찍한 짓을 저질렀다.
분명 귀족의 짓이 틀림없었다.
비앙카의 궁을 확실하게 지켰어야 했는데, 안일하게 행동한 탓이다.
황제는 넋을 놓은 듯 핏자국이 흥건하게 묻어 있는 이불 자락을 쓸었다.
"비, 비앙카...비앙카...어디 있느냐...어디로 간 것이야...!"
게오스 황제도 바보는 아닌지라 왜 이런 일이 벌어졌는지 금방 눈치 챘다.
이게 다 자신이 멍청해서 생긴 일이다.
"어떻게...어떻게 이런 참혹한 짓을...!"
섣불리 귀족들을 건드렸다.
배후를 대라며 서슴없이 고문을 가했고, 이게 꽤 효과적이어서 배후를 털어놓은 자도 있었다.
그리고 그렇게 성과가 난 것이 오히려 역효과를 만든 게 분명했다.
꼬리를 자르는 식으로 처리가 안 되니, 아예 원인을 제거해버린 것이다.
피해자가 사라졌는데 황제가 뭐 어쩌겠나 하는 생각이 들었을 것이다.
실제로 황제는 참을 수 없는 분노를 느끼면서도 무력감과 공포를 느끼고 있었다.
'지, 짐도 이렇게 될 수 있다는 경고일까?'
애초에 그녀는 귀족들의 추대로 황제의 자리에 오른 사람이다.
아무런 힘이 없는 지라 비앙카가 아니었다면 기를 펴지 못하고 그들이 하라는 대로 움직였을 꼭두각시 황제인 것이다.
그러다가 똑똑한 비앙카를 만났고, 뭔가 해낼 수 있다는 생각을 하게 됐다.
축제의 성공이 황제에겐 나도 할 수 있다는 자신감을 안겨준 것이다.
'네 주제에 뭘 한다고...'
게오스 황제는 털썩 바닥에 주저 앉았다.
주변에 있던 궁인들이 재빨리 엎드려 고개를 조아렸다.
수많은 사람들의 머리를 아래에 두고 살면 무엇하겠나?
정작 마음으로는 조금의 존중도 보여주지 않고 있는데 말이다.
"이게 다 무슨 소용이란 말인가..."
게오스 황제는 비앙카를 잃었다는 사실에 상상 이상의 큰 충격을 받았다.
그녀의 의식이 순식간에 꺼진다.
스르륵- 털썩!
"폐, 폐하아아!!!!!"
황제가 쓰러졌다.
♧ ♧ ♧
"도대체 누구입니까?"
"나는 아니오."
"나도 아니올시다!"
"다들 아니라고만 하시니 답답합니다. 잘못을 저질렀어도 시원하게 인정하고, 수습 할 생각을 하셔야지요!"
"우리라고 그걸 모릅니까? 왜 애꿎은 사람을 붙잡고 추궁을 하시는지 모르겠습니다."
"황제가 시름시름 앓고 있습니다! 수습은 해야지요. 그 여자 시체라도 내놓아야 자리 보전하지 않고 일어날 것이 아닙니까!"
게오스 제국의 황제가 쓰러졌다.
마음이 다친 것이 병으로 찾아 온 것이었다.
"아무도 하지 않았다고 하는데 더 이상 추궁해봐야 뭣하겠습니까? 차라리 뒷수습을 생각하는 게 맞을 겁니다."
"전 오히려 잘 됐다 싶습니다. 누가 한 건지는 몰라도 속은 시원합니다."
비앙카를 향한 귀족들의 적대감은 생각보다 더 컸다.
모두가 그녀가 죽은 게 확실하다 생각하면서도 안타까움을 표하는 이가 없었다.
"맞습니다. 진작 그 여자를 치웠어야 했습니다. 솔직히 폐하께서 쓰러졌다는 걸 듣고 어이가 없었습니다."
"허어...고작 평민 상인이 죽었다고 쓰러지는 황상이라니...혹여나 다른 곳에 알려질까 부끄럽습니다."
"맞아요. 맞아."
한 자리에 모인 귀족들 모두 고개를 끄덕이며 동조했다.
"누가 했는지 몰라도 대신 해줬으니 지금이라도 이렇게 된 걸 다행이라고 생각해야 합니다. 두고두고 후환이 될 여자였어요."
"이번에 폐하께서 우리들을 압박했던 일을 기억하시지요? 지금은 폐하께서 쓰러지신 탓에 중단이 된 상황이지만, 고문을 받은 이들의 입에서 우리 중 누군가의 이름이 나왔을지 알 수 없는 상황입니다."
"허참!"
지금 생각해도 어처구니가 없다며 혀를 쯧쯧 찬다.
"황상이 달라지셨습니다. 예전 같지가 않아요."
"자리가 사람을 바꾸는 것이지요. 대우를 받으니 그게 진짜 자기에게 걸맞은 대우라고 착각을 하는 겁니다."
귀족들이 하는 대화는 구역질이 날 정도로 더러웠다.
하지만 그들 사이에서 이 대화에 문제가 있다는 걸 지적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다시 바꿔야 할까요? 이대로 두면 시름시름 앓다가 꼴깍 넘어갈 것 같던데 말입니다."
"다른 황족들 중 쓸만한 자가 있습니까?"
"끄응, 아무리 그래도 황제가 너무 자주 바뀌는 건 좋지 않은데 말입니다."
쪼르륵-
호록-!
귀족들이 대화를 나누면서 태연하게 차를 마신다.
피투성이가 된 방에서 비앙카가 사라졌고, 황제가 쓰러졌지만 귀족들에겐 한가하게 차를 마시며 대화를 나눌 만한 일밖에 되지 않았다.
오히려 황제가 쓰러짐으로 귀족들에겐 한결 상황이 나아진 상태였다.
황제는 귀족들과 대거리를 할 힘과 의지를 잃은 상태였기 때문이다.
"지금 황족들은 쓸만한 자가 없습니다. 황제가 워낙 오냐오냐해준 탓에 황제보다 더 황제처럼 살고 있어요."
"그건 우리가 그렇게 만든 것도 있지 않습니까. 벌써 그렇게 물들 었습니까?"
"예, 백지라서 그런지 가르쳐주면 열을 알더군요. 그런 짓은 누구보다 빨리 배우더군요. 괜히 황실의 피를 이은 게 아닌 거죠."
"끄응...이리도 인재가 없으니 어찌하면 좋단 말인가..."
다음 대 황제를 자기들 멋대로 세우니 마니 하고 있는 귀족들.
사람이 달라진 것은 황제 뿐만이 아니라는 사실을 게오스 제국의 귀족들은 알지 못했다.
그들의 방만함이 나라를 좀먹고 있다는 사실도.
'그 여자를 시기 적절하게 처리를 한 것은 다행이다만, 도대체 누가 그런 짓을 한 걸까?'
황궁에서 그런 짓을 하고도 들키지 않고 도주할 수 있는 능력자가 누구인지 도무지 알 수 없다는 게 귀족들을 찜찜하게 만들었다.
하지만 그들이 찜찜해 할 필요는 없다.
이미 그 능력자는 게오스 제국을 떠난 상태이기 때문이다.
♧ ♧ ♧
"따라오는 사람은 없는 것 같습니다."
"의외네. 납치 당한 것처럼 꾸며 놨으니 이를 잡듯이 뒤집어 엎을 거라고 생각했는데. 내가 이 정도밖에 안 됐나? 괜히 서운해지려고 하네요."
비앙카는 입술을 삐죽 내밀었다.
자신이 생각한 것과 달리 시시할 정도로 무사히 게오스 제국을 빠져나가고 있었다.
"조용히 빠져나갈 수 있는 게 다행인 겁니다. 아쉬워하지 말아주시지요."
데인 남작은 굳이 어려운 상황이 나오길 바라는 비앙카의 이해할 수 없는 태도에 고개를 저었다.
"흐응~"
황궁에서는 황제가 쓰러졌다는 소식이 전부 퍼져나갔지만, 황궁 바깥은 귀족들이 철저하게 입 단속을 했기에 소식이 퍼지지 않은 상태였다.
만약 황제가 쓰러졌다는 소식이 다른 나라에까지 퍼지면, 축제로 회복했던 게오스 제국의 이미지가 다시 폭삭 내려 앉을 것이다.
"아무튼 쫓아오는 사람이 없으니 저것들은 버리지 않고 계속 가져가는 거죠?"
"...예. 그러겠습니다."
비앙카가 손가락으로 가리킨 것은 마차 안에 한 가득 쌓인 금은 보화들이었다.
비앙카는 마지막까지 재물을 챙기는 것을 멈추지 않았다.
당연하지만, 데인 남작은 이를 못 마땅하게 생각했다.
목숨이 위험한 상황에서 굳이 그런 세속적인 것을 챙기는 걸 좋게 볼 수 없었다.
"이게 다~ 주인님께 도움이 되는 일이에요. 게오스 제국을 무너트리는데 중요한 역할을 한다니까요? 좀 번거로워도 후회하지 않을 거에요."
아마 지금은 모르고 있겠지만, 황실에 남아 있는 것이 거의 없다는 걸 알게 되면 무언가 이상하다는 사실을 알게 될 것이다.
물론 비앙카를 무조건 신뢰하는 황제한테는 씨알도 먹히지 않을 얘기겠지만 말이다.
"돌아가면 바로 제가 제국에 망명했다는 소문을 낼 거에요."
황제가 비앙카를 의심하기 전에, 그녀를 혼란에 빠지게 할 것이다.
"게오스 황제가 다시 돌아오라고 하지 않겠습니까?"
"죽을 뻔 한 게 몇 번인데 어떻게 돌아가요? 내가 그렇게 호구는 아니거든요. 절대 못 돌아가죠. 목숨이 여러 개 인 것도 아닌데."
게오스 황제에게 아무런 충성심도 갖고 있지 않은 그녀이다.
그녀에 대한 애착은 시간이 지날수록 변화할 것이고, 그 감정은 결코 게오스 제국에 긍정적이지 않을 것이다.
"날 되찾으려면 그쪽에 두 눈 시퍼렇게 뜨고 있는 귀족들을 싹 다 처리하고 난 후에 찾아 달라고 할 거에요. 꽤 애절하게 적어 놓으면 게오스 황제 속이 뒤집어 지지 않을까요?"
발랄한 목소리로 사람 한 명을 농락하겠다는 말을 하는 비앙카를 데인 남작이 지그시 바라봤다.
"...게오스 제국에 내전이라도 일으키고 싶으신 겁니까? 황제와 귀족이 반목한다면 결과는 둘 중 하나의 파멸일 겁니다."
"저 때문에 내전이 일어난다면, 보람차긴 하겠네요. 그 혼란이 결국 주인님을 위한 일이 될 테니까요."
가뜩이나 귀족들에게 좋지 않은 감정이 많은데, 비앙카가 그 귀족들이 무서워 돌아갈 수 없다고 하니 환장하겠지.
데인 남작은 비앙카의 즐거워하는 웃음 소리를 들으며 한숨을 푹 쉬었다.
"폐하께도 그런 식으로 굽니까?"
데인 남작은 이런 위험한 여자를 폐하가 가까이 한다는 게 꺼림칙했다.
"주인님께요? 설마요~ 제가 그 정도로 사리분별 못하는 건 아니에요."
"지금 게오스 제국에 한 일을 보면 그대를 다시 제국으로 데려가는 게 맞는 일인지 모르겠습니다."
비앙카의 행동이 고지식한 남자의 경계심을 샀던 모양이다.
"지금 나 경계해요?"
"예."
"풋! 걱정하지 말아요. 내가 다시 주인님 곁으로 가도, 곧 다른 명령을 받고 떠나게 될 테니까."
"폐하의 곁에 계속 있는 게 아니라는 말입니까?"
"네. 내가 주인님 곁에 있다가 게오스 황제처럼 만들면 어떻게 할지 걱정 되는 거잖아요, 지금? 너무 믿음이 없다. 우리 주인님이 게오스 황제처럼 쉬워 보여요? 고작 나한테 휘둘리는 사람으로 보이냐고요."
"물론 폐하를 믿습니다."
"나도 그걸 알아요. 안 통하는 걸 아는데 내가 왜 그러겠어요. 애초에 나는 주인님한테 해를 끼칠 수도 없어요."
그녀의 말을 들었음에도 불구하고 데인 남작은 여전히 찜찜한 표정이었다.
하지만 비앙카는 그의 표정을 신경 쓰지 않고 오랜만의 자유를 만끽했다.
"아우우웅~~ 바다를 보지 못하는 건 아쉽지만, 해로로 가는 것보단 역시 육로가 낫네요. 배 멀미는 최악이라."
"......"
데인 남작은 비앙카가 대화를 나누기 좋은 상대가 아님을 자각하고 입을 꾹 다물어버렸다.
비앙카는 다시 한 번 입술을 삐죽였으나 데인 남작의 태도가 바뀌는 일은 없었다.
비앙카가 제국으로 돌아가는 여정은 생각한 것보다 훨씬 지루한 여정이 될 듯 싶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