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hapter 815 - #96. 진해솔 (119)
"그래, 알았다."
데인 남작은 부하가 전달해준 게오스 제국의 상황을 듣고 고개를 주억였다.
'게오스 황제에게 변고가 생긴 건가?'
황궁에서 병사들이 나온 적이 없으며, 귀족들끼리도 무언가를 입단속하며 조심하고 있다고 말이다.
좀 더 자세한 상황을 알아내려면 시간이 걸릴 듯 싶었다.
황궁 내부에 잡입해 있는 첩자도 현재는 몸을 사리고 있는 모양이었다.
황제에게 어떤 식이로든 변고가 생겼다면...
'저 여자의 인성은 놀랍도록 추악하지만, 능력으로는 뭐라 하지 못하는 수준이긴 하구나.'
황제 폐하의 밀명을 받고 한 일이라지만, 수행을 너무 잘해도 악랄하게 잘 해버렸다.
그래서 역효과로 경계심을 샀다.
게오스 황제에게 했던 것처럼 자신의 주군에도 그런 짓을 할까 싶어서 말이다.
말로는 주군께 해를 끼칠 수 없다고 말했지만, 그는 사람 마음이 얼마나 쉽게 변하는지 잘 알고 있었다.
'욕심도 많고, 머리까지 똑똑하다. 사람 머리 꼭대기에 올라가서 농락하는 걸 좋아하는 여자.'
폐하께서 어쩌다가 저런 여자와 연이 닿았고, 주군이 될 수 있었는지 의아하고, 인연의 시작이 궁금했다.
저런 여자에게 진심으로 충성을 받는 것이라면 주군의 능력이 생각보다 더 대단하다는 의미가 된다.
'게오스 황제를 보면 주군께서 호락호락한 분이 아니라는 건 알 수 있다. 비슷한 환경에서 자라셨지만 황제가 되신 이후로 보여주는 것들이 전부 다르니까.'
게오스 황제는 나라를 좀먹어가기 시작했고, 우리 주군께서는 왕국에서 제국으로 한 걸음 더 나아가게 하셨으며 백성들에게 풍요로운 게오스 제국의 땅 한 자락을 선물해주셨다.
그곳에서 생산 되는 식량이 싼값에 백성들에게 유통 되어 고통을 덜어주고 있음을 모르지 않는 데인 남작이었다.
'저 여자가 주군의 총기를 흐트릴 가능성이 있는가?'
조금이라도 그럴 위험이 있다면, 지금 이 자리에서 은밀하게 처리하는 게 나을 수도 있었다.
성능이 아무리 좋다고 해도 제 주인을 잡아 먹는 자를 곁에 두는 것을 두고 봐야 하는가?
데인 남작은 무엇이 옳은 일인지 고민하고 또 고민했다.
비앙카는 데인 남작의 고뇌를 아는지 모르는지 꽤 의미심장한 눈빛으로 그에게 물었다.
"뭐하세요?"
"...생각을 하고 있습니다."
"흐응~ 무슨 생각을 하시는진 몰라도 꽤 중요한 걸 고민하고 계시는 모양이네요."
"그럴 거라고 생각합니다."
"데인 남작님은 혹시 주변에서 꼰대라는 말 들어 본 적 있으신가요?"
"......"
대꾸하기도 싫은 말장난이다.
"꼰대라는 말이 왜 욕이 된 줄 아세요? 그 사람들은 자기 생각에 갇혀서 자기가 생각한 것들이 무조건 옳다고 우기거든요. 그래서 그런 사람을 보고 꼰대라고 말하는 거에요."
"그래서 제가 꼰대라고 말하고 싶으신 겁니까?"
"찔리는 게 있는 사람한테 그렇게 느껴지는 거 아닐까요?"
비앙카는 대놓고 그를 도발하지 않았다.
하지만 그가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는 짐작을 한다는 듯 의미심장한 말을 한다.
'내 생각을 의심하게 만드는 건가.'
데인 남작은 사람을 흔드는 것에 그녀만큼 탁월한 능력자가 없다고 느꼈다.
실제로 그녀의 말을 듣자마자 생각하지 않을 수가 없었으니까.
'확실히 내가 생각하고 있는 게 옳지 않을지도 모른다.'
아니, 애초에 명령을 받아 이행하는 기사인 그가 무언가를 고민하고 결정 내리는 건 옳지 않은 일이 맞을 것이다.
하지만 사람을 농락하는 여인을 가까이 둔다는 게 마음에 들지 않았다.
'고작 몇 마디로 사람을 농락하는 여자구나.'
어쩌면 기사이기에 더더욱 비앙카라는 여자에게 거부감을 느끼는 것인 지도 모른다.
데인 남작이 더 이상 대화를 나누지 않겠다는 듯 마차 밖으로 나가버렸다.
비앙카는 그가 나가는 것을 확인하고 작게 한숨을 쉬었다.
'영 반응이 없네. 이런 부분에서 게오스 황제가 반응 만큼은 찰졌는데. 벌써 심심하잖아.'
심심하고 따분하니 어서 주인님께 돌아가고 싶어졌다.
고지식한 남자, 데인 남작이 자신과 하는 대화를 거북해 하자 그의 수하들도 덩달아 그녀를 피하고 있었다.
마치 건드리면 안 되는 역병 걸린 사람이라도 되는 줄 알겠다.
좋지 못한 대우에 화가 나서 골려주고 싶었다.
그래서 자신을 경계하는 그에게 더 골치 아프게 경계심을 심어주었다.
'그래봤자 지가 어쩌겠어.'
주인님의 수하인 그가 자신을 해칠 수 있을 리가 없다.
그런 짓을 하면 주인님께서 본인을 가만히 내버려둘 리 없지 않은가?
생각이 있는 사람이라면 그런 짓을 할 리가 없었다.
♧ ♧ ♧
"이게 뭐하는 짓이야!!"
"오랫동안 고민하고 생각했습니다. 주제 넘는 짓이라고 생각했고요."
"야!! 너 이러고도 무사할 줄 알아?! 주인님이 가만히 두지 않을 거라고!! 그리고 혼자 충성심이 대단하다고 생각하는 것 같은데, 오버 하지 마!!"
"맞다. 나는 폐하의 충성심 때문에 이런 짓을 하는 게 아니다."
"꺄아악!! 놓지 마! 놓지 말라고!!"
후두둑-
일이 벌어진 건 순식간이었다.
갑자기 마차가 흔들리기 시작하더니 전복이 됐고, 마차가 전복이 됐을 때 지나가고 있던 곳이 하필이면 격한 곡선을 그리고 있는 흙 길이었다.
그녀는 마차가 잘못 됐을 때, 진심으로 위기감을 느꼈다.
자객의 방문을 받았을 때도 느끼지 못했던 위기감이다.
마차가 뒤집어졌을 때 완전히 낭떠러지에 떨어지지 않은 것은 큰 행운이었다.
하지만 이후로는 그녀에게 행운이 찾아 와주지 않았다.
그그극- 그그그그극-
"아흑!"
하필 허공에 걸쳐 있는 부분에 그녀가 챙겨 온 금은보화들이 있었기 때문이다.
아등바등 챙겨왔던 것들이 오히려 비앙카의 목숨을 위협하고 있었다.
"사, 살려줘! 살려주세요!"
마차는 점차 낭떠러지 쪽으로 기울어져 가고 있었고, 그녀는 마차가 전복 되면서 받은 충격을 견뎌내며 마차에서 빠져나가기 위해 노력했다.
쿵!
"하악! 하악!"
겨우겨우 문을 열어서 바깥을 확인한 순간이었다.
그녀는 마차가 전복 된 것이 우연이 아니라는 것을 깨달았다.
기사들이 바깥에서 태연하게 낭떠러지에 매달려 있는 마차를 지켜보고 있었던 것이다.
"폐하는 제국의 희망이고 생명이다. 함부로 망쳐선 안 되는 존재라는 의미지."
데인 남작은 거기에 한 술 더 떠서 마차의 끝을 손으로 잡아 챘다.
그리고 바깥 쪽으로 더 기울어지도록 힘을 줘서 밀어냈다.
"꺄아아악! 뭐하는 짓이야!!!"
그녀를 안전하게 보호해야 할 의무가 있는 기사가 할 짓은 절대 아니었다.
"무능력한 게오스 황제와 주군을 비교해선 안 된다는 것은 알고 있습니다."
데인 남작이 비명을 내지르는 비앙카를 바라보며 말했다.
"하지만 아무리 생각해봐도 당신은 너무 위험합니다. 게오스 제국에서 이미 당신이 위험하다는 증거를 보여주지 않았습니까?"
"미친 새끼야! 그건 네 착각일 뿐이야!"
"애초에 분란의 씨앗이 없는 게 제국을 위해 나은 일이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분란의 씨앗이 싹을 틔우기 전에 제거하겠다는 거다.
그로 인해 자신의 목숨이 위험해진다 해도 상관없었다.
이것이 진정한 우국충정이라 생각했다.
"미친놈아!! 나는 애초에 그럴 수가 없어!!"
"당신 또한 나라를 위해, 주군을 위해 충성하고 있음을 의심치 않습니다. 허나 내 어리석은...그래, 꼰대 같은 생각으로는 그대가 폐하의 곁에 있는 것이 꺼려집니다. 지금이 당신을 깔끔하게 처리 할 수 있는 유일한 기회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더군요."
"미친 새끼야!! 네 마음대로 생각하고 결론 내리지 말라고!! 꺄아아악!!!"
마침내 마차가 절반 이상으로 기울어졌다.
이젠 데인 남작이 잡고 있는 손을 떼면 오히려 바로 떨어지게 될 거였다.
떨어지는 것을 피할 수 없다는 걸 직감하고 다급하게 아래를 내려다 봤다.
전복 되면서 한 쪽 문 짝이 떨어져 나가 아래를 확인할 수 있었는데, 차라리 안 보는 게 나았을 지도 모르는 광경이 펼쳐졌다.
"잘 가십시오. 당신의 희생은 절대 잊지 않겠습니다."
"꺄아아악!!!!!!!!!!!!!"
마침내 데인 남작의 손이 떼어지고.
마차와 함께 비앙카의 몸이 낭떠러지로 떨어졌다.
비앙카의 비명 소리를 들은 기사들이 질끈 눈을 감았다.
"......"
"......"
일을 저질러버리긴 했지만, 뒷일이 걱정이 되는 건 사실이었던 지라 기사들 모두 표정이 좋지 못했다.
"이곳에서 저지른 죗값은 겸허하게 받아들여야 한다. 모두 알고 있겠지?"
"예."
"각오하고 있습니다."
"가장 큰 벌을 받는 건 내가 될 거다."
"저희도 같이 받겠습니다!"
"맞습니다. 피하지 않겠습니다!"
기사들 모두 결연한 표정으로 외쳤다.
모두가 한 마음으로, 비앙카의 죽음이 제국을 위해 최선의 선택이었다고 생각했다.
그것이 정말 불필요한 충정이었다는 진실을 알지도 못한 채 말이다.
♧ ♧ ♧
멀쩡하게 돌아올 거라고 생각했던 비앙카가 죽었다는 말도 안 되는 소식을 들었다.
기사들은 내 앞에 무릎을 꿇고 고개를 숙인 채 자신의 죄를 청하고 있었다.
"......"
순간 화가 울컥 치솟았지만, 어쩌다가 그랬는지 정확하게 상황을 들어야 할 필요가 있었다.
저들이 진짜 자신의 할 일을 제대로 하지 않았다면 합당한 죗값을 받을 것이고, 어쩔 수 없이 벌어진 일이라면 참작을 받을 것이다.
그런데.
"마차가 전복 되었습니다. 그리고 절벽에서 떨어졌습니다. 이게 그대들이 할 수 있는 말의 전부인가?"
"송구하옵니다, 폐하!"
"죽여주십시오, 폐하!"
"그대들은 본인의 설명이 매우 빈약해 보인다고 생각하지 않는가?"
"폐하의 믿음을 저버렸으니 무슨 변명이 필요하겠습니까. 그저 겸허하게 처벌을 기다리겠나이다."
특히 데인 남작은 이미 죽을 각오를 한 것인지 말도 많이 하지 않았다.
나는 그 태도에서 무언가 이상함을 느끼고 말했다.
"짐이 보기에 그대들의 태도가 석연치 않구나. 도대체 무슨 짓을 저지른 거냐? 혹시 그대들이 지켜야 할 대상을 해코지 한 건 아닌가?"
직감적으로 저들이 비앙카에게 무슨 짓을 한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도대체 왜??? 무슨 이유로? 게오스 제국의 첩자라도 되는 것이냐? 그렇지 않고서야 그대들이 비앙카에게 무슨 원한이 있어서 그런 짓을 해!!"
믿었던 사람이 시원하게 뒤통수를 친 것이다 보니 머리가 다 띵했다.
데인 남작은 게오스 제국의 첩자냐는 내 말에 발끈한 표정으로 무거운 입을 다시 열었다.
"그 여자는 너무 위험합니다."
"비앙카가 위험하다?"
"게오스 황제를 홀린 여자입니다. 제가 만난 그 여자는 게오스 황제에 대한 조금의 동정심도 없었습니다."
"......"
"너무 위험한 여자입니다. 그런 무기는 다루는 주인도 다치게 만들 수 있습니다. 폐하, 게오스 제국의 일을 반면교사 삼아야 합니다!"
비앙카...아무래도 그녀가 데인 남작한테도 인성질을 했던 모양이다.
그리고 빠꾸 없는 상남자 데인 남작이 비앙카의 심상치 않은 인성질에 그녀를 처리해야겠다는 결심을 해버린 것이고 말이다.
"시발, 진짜 황당해서 할 말이 없네."
황제 짓을 하고 있던 것도 그만 둘 정도로 황당해서 말이 안 나왔다.
이게 무슨 트롤짓이란 말인가?
그나마 다행인 것은 낭떠러지에서 떨어졌다는 비앙카가 진짜 죽진 않았을 거란 믿음이 있다는 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