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hapter 816 - #96. 진해솔 (120)
"폐, 폐하?"
아무리 화가 났다 해도 욕을 박을 줄은 몰랐던 모양인지 데인 남작이 당황한다.
"네가 무슨 자격으로 내 사람을 함부로 평가하고 처리를 하는 건데?!"
참을 수 없는 분노에 데인 남작의 멱살을 잡아 챘다.
갑옷을 입고 있는 탓에 묵직한 무게가 느껴졌지만, 이 정도는 아무렇지 않게 들어 올릴 수 있는 힘을 갖고 있었다.
"어, 어찌 그런...!"
내가 화를 이 정도로 심하게 낼 줄 몰랐던 걸까?
황제의 품위를 냅다 던져버리고 분노하자 데인 남작이 한껏 당황한다.
내 입장에서는 저런 태도조차도 화가 나고 열 받는 일이었다.
그런 일을 저질러 놓고 고작 이 정도에 당황이라는 걸 한다는 게 어처구니 없었기 때문이다.
"뭔 어찌 그런이야, 어찌 그런은. 네가 한 짓이 얼마나 의미 없고 멍청하고 고리타분한 머저리 짓인지 하나하나 설명이라도 해줘야 할까?!"
"!!!"
"병신 같은 놈. 하라는 일이나 잘 할 것이지."
데인 남작의 얼굴이 형편 없이 일그러진다.
자신의 충정이 정면에서 부정 당하고 짓밟혔으니, 명예에 살고 명예에 죽는 귀족에겐 최악의 죗값이 될 것이다.
물론 이 정도로 내 마음에 차는 건 아니었다.
"폐하! 저는 제국을 위해서 희생하려는 마음으로...!"
"희생이라는 단어를 잘못 알고 있네. 넌 그냥 마음에 안 든다는 이유로 사람을 죽인 살인마일 뿐이야. 제국을 위해서는 뭔 위해서야. 씨발!"
지금 중요한 건 저 자식이 해를 끼친 사람이 내 사람이라는 거다.
나라를 위해서 비앙카를 죽였다고?
내게 나라보다 더 중요한 게 비앙카였다.
'이 까짓 나라 망하든 뭘하든 무슨 상관이야.'
하지만 비앙카는 다르다.
이곳 출신의 사람도 아니고, 그녀의 인성질에 혀를 내두르면서도 함께 해왔던 세월이 존재한다.
거기다가 그녀를 보호해 달라고 보낸 사람이 오히려 그녀를 헤쳤으니, 나중에 비앙카에게 무슨 말을 해야 할지 감도 안 잡혔다.
"내가 직접 찾으러 가야 겠어."
"!!!!!"
다른 사람에게 맡겼다가 똑같은 일이 벌어질지 어떻게 알겠나?
지금부터는 내가 직접 움직일 셈이었다.
깜짝 놀란 이들이 나를 만류하기 전에 먼저 선수를 쳤다.
"이것들 싹 다 잡아 가둬라."
"예, 예!!"
"폐, 폐하. 서, 설마 정말 직접 움직이실 생각이시옵니까? 황궁을 버려두고 말도 안 되는 소리옵니다!"
"다른 놈들을 어떻게 믿겠나! 믿고 보낸 놈이 오히려 비앙카를 죽이려고 들었는데!"
다른 사람에게 맡겨봤자 그녀는 믿지 않을 것이다.
그녀가 믿을 수 있는 사람은 나밖에 없다.
이런 위험한 곳에 그녀를 데려와 놀라고 했던 것 부터가 잘못 된 일이었다.
황제인 내가 직접 움직이겠다고 하니 신하들이 안 된다며 난리를 쳤다.
하지만 이 장난 같은 황제 노릇, 언제든 다 버리고 떠날 수 있는 게 나였다.
삼천 명의 후궁을 만드는 것?
이곳에서 태어날 내 핏줄의 아이를 포기하고 미친 듯이 여자들을 안으면 단숨에 끝낼 수 있었다.
넉넉하게 시간을 두고 미션을 완료하려고 했던 것은 이 세계에서 지내며 생긴 애정과 사람으로서의 도리를 지키기 위함이었을 뿐이다.
그런데 이런 식으로 '내 사람'에게 해를 끼치는, 직설적으로 말해서 정 떨어지는 모습을 보여주면 상황이 달라진다.
"폐하!! 저희를 믿어주십시오."
"반드시 비앙카님을 찾아서 폐하의 앞에 무사히 데려오겠습니다!"
궁인들이 필사적으로 내가 황궁 밖으로 나가는 걸 막으려 든다.
하지만 그들의 말을 귀담아 들을 생각이 없었다.
"필요 없어! 걔가 바보도 아니고 한 번 배신을 당했는데 너희들을 믿을 것 같아? 내가 직접 갈 거다. 그래야 안전하다고 생각할 거야."
"다른 대신들이 의문을 가질 것이옵니다!"
"폐하의 부재를 어찌 설명을 해야 한단 말입니까?!"
"대충 피서 갔다고 해라. 몸이 안 좋아서."
"폐, 폐하아~!! 폐하아!!! 아니 되옵니다! 이렇게 가시면 아니 되옵니다아!!!"
궁인들이 발을 동동 구르며 내 뒤를 쫓아왔으니 내 앞길까지는 막지 못했다.
내 뒤로 우르르 기사들이 따라오는 것이 못 마땅해서 버리고 갈까 하다가 그렇게 되면 일이 너무 커질 것 같아 어쩔 수 없이 뒤에 대롱 달고 움직이기로 했다.
비앙카를 만난 후 안전하게 황궁으로 데려오기 위해서라도 그들의 힘이 필요할 것이다.
♧ ♧ ♧
"하아."
비앙카는 잠시 반성의 시간을 갖기로 했다.
인성질을 자제해주는 사람이 없다 보니 선을 넘어버렸다.
솔직히 선을 긋고, 이 이상은 절대 안 돼! 라고 계속 억압을 받다가 갑자기 줄을 풀어버렸으니 신나서 날뛸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그녀는 게오스 제국에서 나오면서 다시 선을 지킬 필요가 있다는 걸 자각하지 못했다.
'멍청했잖아. 너.'
그녀가 속으로 흉을 보고 있는 상대.
다름 아닌 본인니다.
멍청해도 너무 멍청했다.
생각한 것보다 그 기사가 남다른 충성심을 갖고 있었다는 점도 이런 일을 초례한 원인이 될 테지만, 한계선을 읽지 못하고 도발한 것은 엄연히 자신의 잘못이 맞았다.
지금 이 꼴을 당하는 걸 남탓해서 뭐하겠는가?
그런다고 상황이 나아지는 건 아니지 않은가?
'아프다.'
온 몸이 욱신거린다.
가장 큰 충격은 주인님이 주신 '아이템'이 흡수한 것 같은데, 자잘한 충격들은 흡수해주지 못했는지 온 몸에서 근육통이 온 것이다.
몸살 감기라도 걸린 것 마냥 몸이 삐걱거리고 욱신거렸다.
그래도 그 높은 곳에서 떨어진 것 치고는 상태가 좋았다.
'즉사하지 않은 게 기적인 수준이니까.'
알다시피 비앙카는 매우 곱게 컸다.
이런 험한 꼴을 당해 본 경험이 한 번도 없었다.
재벌 딸의 험한 경험?
아무리 생각해봐도 딱히 떠오르는 게 없다.
그나마 몸을 과하게 사용했던 경험이 있다면 다이어트를 위한 운동 정도랄까?
고작해봐야 미용을 위한 운동밖에 해본 경험이 없는 그녀에게 산속에서 당하는 조난은 너무 큰 시련이었다.
'춥고, 배고프고, 아파. 힘들어 죽을 것 같아!!'
마차에 있던 금은보화들은 지금 그녀에게 간절한 것들 중 무엇도 대신해줄 수 없었다.
이것들은 그냥 예쁜 쓰레기일 뿐이었으니까.
아픔을 꾹 참고 걸어가도 숲의 끝이 나오지 않았다.
사실 아까부터 이쪽 방향으로 가는 게 맞는 건지 확신이 들지 않는 상태였다.
"하아~ 그냥 쉬고 있는 게 나았으려나."
어차피 가만히 기다리고 있으면 주인님께서 구하러 오실 거다.
그때까지 그녀가 할 일은 최대한 다치지 않고 버티는 거였다.
그녀는 주인님이 자신을 구하러 올 것을 의심하지 않았다.
문제는 언제 자신을 구출하러 올지 알 수 없다는 거였다.
"여기까지 오려면 며칠은 걸릴 텐데..."
기사들이 다시 제국으로 가서 주인님을 뵙고 자신의 죽음을 알릴 때까지의 시간과 주인님이 자신을 구하러 오기 위해 움직이는 시간까지 고려해야 한다.
딱 봐도 그게 하루 이틀로 끝날 일은 아니지 않은가?
그동안 살아 있기 위해서라면 떨어졌던 그 자리에서 가만히 기다리고 있을 수만은 없었다.
그래서 움직였던 건데...
"아우, 내 다리..."
다리가 퉁퉁 부었고, 발에 물집이 잡혀서 걷는 게 힘들어졌다.
그녀는 바위에 걸터 앉아서 슬슬 날이 저물고 있는 것을 확인하고 밤을 보낼 준비를 시작했다.
'몬스터가 나오진 않겠지?'
이 세계에는 몬스터가 존재한다고 들었기에 조심할 필요가 있었다.
물론 주인님께서 혹시나 싶어 여러 가지 방어 수단을 마련해주긴 했지만, 그것만 믿고 방만하게 행동할 수는 없었다.
이미 그렇게 했다가 호되게 당하지 않았는가?
"거기서 더 도발을 했으면 안 됐는데."
꼰대라고 한 번 도발을 하고 멈췄어야 했다.
자신을 상대조차 해주지 않는 걸 보며 언제까지 그러나 싶어서 일부러 더 자극적인 말을 툭툭 던졌다.
주인님께 되돌아가는 길이 지루하기도 했기에 장난 삼아서 말이다.
"그랬다가 이 꼴이 됐고 말이지."
자조적으로 어깨를 으쓱인 그녀는 주변을 쭉 살폈다.
밤이 되면 지금보다 훨씬 추워질 거다.
마차 안에서 떨어진 물건들 중에 생존에 도움이 될 만한 물건들을 최대한 주워둬서 다행이었다.
밤에 추위를 막아 줄 담요는 그녀의 짐에 들어가 있었다.
꼬르륵ㅡ!
'그럼 뭐하냐고. 배가 고파 죽겠는데. 아~ 스테이크...먹고 싶다. 와인 한 잔만 하면 푹 잘 수 있을 것 같은데.'
한 번도 음식이 이렇게까지 간절했던 적이 없었던 것 같다
야들야들한 살코기를 입에 넣으면 사르르 혓바닥을 간질거리며 녹아 내리는 그 감각을 다시 한 번 느껴보고 싶었다.
이런 고생을 하는 게 스스로 만들어낸 일이라서 원망할 수 있는 대상도 없었다.
"그 새끼가 나 돌아가기 전에 죽지 않아야 하는데..."
돌아가서 고생한 만큼 되돌려줄 것이다.
비앙카는 이를 바드득 갈면서 몸에 담요를 두르고 웅크렸다.
바위 아래에 작은 공간이 있어서 그 아래에 몸을 웅크리고 누우면 하룻밤 정도는 충분히 잘 수 있을 것이다.
'잠은 이렇게 대충 구겨져서 잔다고 쳐도, 물이랑 음식은 확보해야 돼.'
그래야 며칠 동안을 무사히 버틸 수 있었다.
비앙카의 머리가 비상사태로 부지런하게 돌아가고 있었다.
과거에 다큐 같은 것을 보면서 얻어왔던 다소 부족하지만 지금 상황에서는 없는 것보단 나을 지식을 떠올리기 시작한 것이다.
'고작 이런 식으로 허무하게 죽을 수는 없지. 꼭 살아서 복수해주고 말 거야.'
비앙카는 인성질로 험한 꼴을 당하고서도 제 버릇 남 주지 못하고 이를 갈고 있었다.
지금 이 상황이 본인 스스로 자초한 일이라는 걸 인정했으면서도 복수하는 것 자체는 다른 일이라고 여긴 것이다.
"으으으..."
까아악! 까아아악!!!
푸드드득 푸드드드득!
나 홀로 숲 속 차가운 바닥에 누워 밤을 보내니, 흔하디 흔한 새소리조차도 공포로 다가오고 있었다.
그렇게 공포와 추위 그리고 배고픔에 휩싸여 고통을 받을 때면 '너무 나대지 말 걸.' 하고 후회를 하다가 돌연 '나쁜 새끼. 아무리 그래도 사람을 낭떠러지로 밀어?!'라며 이를 바드득바드득 가는 것이다.
홀로 어둠을 외롭게 이겨나가기 위한 비앙카의 처절한 노력이었다.
조난 1일 차가 간신히 지나가고.
비앙카는 조난 2일 차 아침을 꽤 스릴 있게 맞이했다.
'동물...이긴 한데.'
그녀에게 동물은 동물원에서나 볼 수 있는 온순하고 귀여운 존재들이었다.
하지만 동물이라는 단어에 '야생'이 붙으면 상황이 180도 바뀌게 된다.
그동안 보아오던 귀여운 동물들과는 전혀 다른 존재가 되어버리는 것이다.
그리고 애석하게도 그걸 직접 경험을 통해 알게 되었다.
"꺄아악! 저리 꺼져!"
고작 해봤자 닭이다.
그런데 야생이 붙으니 왜 이렇게 사납고 성질이 더럽단 말인가!!
"가만히 있는 사람을 왜 자꾸 공격하는 건데!!! 내가 너한테 뭘 잘 못했냐고!! 아악!"
꼬고고곡!!! 꼬꼬꼬꼬고곡!!!
비앙카는 야생닭의 공격에 당해 흙 바닥을 형편 없이 뒹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