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hapter 817 - #96. 진해솔 (121)
엉망진창으로 당했다.
고작 닭한테!!
"꼴 사나워, 짜증나. 배고파!!"
사실 그 녀석은 고작 닭이라고 말하기엔 일반 닭과는 굉장히 달랐다.
고작 닭한테 패배해서 변명하는 게 아니다.
일단 덩치가 엄청나게 커서 그녀의 허리에 닿을 정도였다.
깃털은 어찌나 윤기가 좔좔 흐르는지….
츄릅-!
꼬르륵~!
“하아….”
닭은 죽어서 고기가 된 것만 먹어봤기에, 살아 있을 땐 얼마나 강한 녀석인지 몰랐다.
야생 닭은 너무 사납고, 컸으며, 눈초리는 매섭고, 부리는 매우 아팠다!
"아야야...어쩐지 아프더라. 피 나잖아..."
힘이 장난이 아니었다.
몸통박치기에 당해서 그녀가 바닥을 뒹굴뒹굴 굴렀고, 그로 인해 이곳저곳에 생체기를 입었다.
머리는 산발이었고, 옷도 이곳저곳에 구멍이 났다.
"히잉..."
한 마디로 지금의 몰골을 표현하면 ‘거지꼴’ 하나로 설명이 다 될 것이다.
“잡을 수 있었으면 좋았을 텐데….”
이렇게 형편없이 당했음에도 불구하고, 비앙카는 닭을 잡지 못했다는 것에 아쉬웠다.
덩치가 컸던 만큼 먹을 살도 많았을 것이 아닌가?
살결이 매우 야들야들하니 쫀득하게 맛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그림의 떡이다.
맛있으면 뭐하겠냐고, 이길 수가 없는데!
"배고파. 배고프다구우..."
숲 속이니 과일이라도 발견할 줄 알았다.
그런데 눈을 아무리 바쁘게 굴려봐도 주변에 있는 것은 초록빛의 풀밖에 없더라.
그나마 먹을 만한 걸 발견한 건 버섯인데, 이걸 먹었다간 꼴깍 넘어갈 게 분명했기에 그림의 떡으로만 삼았다.
꼬르르륵- 꼬르륵ㅡ!
'그냥 먹고 디지는 것도 나쁘지 않을지도.'
물론 그 배고픔이 한계선을 넘어가자 나무도 씹어 먹을 수 있을 것 같았다.
무작정 뾰족한 돌을 들어서 바닥을 이곳저곳 파봤다.
"칡 뿌리 막 그런 거 캐던데..."
흙이 잘 파지지도 않았을 뿐더러, 뜬금없이 바닥에서 칡이 나올 리도 없었다.
비앙카는 괜히 힘을 쓴 것에 허탈해져서 바닥에 축 늘어졌다.
'그냥 가만히 있자. 가만히 있어서 에너지를 최대한 보존하는 거야.'
돌아가면 달달한 과일 생크림 케이크를 먹을 거다.
살면서 자신이 이렇게 식탐이 많은 사람이라고 생각해본 적 없는데, 요즘에는 먹고 싶은 음식이 왜 이렇게 많은 것인지 새삼 음식의 소중함을 깨달아가고 있었다.
'따듯한 침대...침대도 그리워.'
바닥은 너무 차고 뼈를 시리게 만든다.
삭신이 쑤신다는 걸 느낀 비앙카는 유일하게 담요만이 의지할 수 있는 대상이라는 듯 꼬옥 움켜쥐었다.
온통 차갑기만 한 숲 속에서 유일하게 그녀에게 온기를 주는 건 담요밖에 없었다.
조난 당하고 2일.
여전히 그녀를 구하러 오는 이의 기척은 없었다.
3일 째 아침.
꼬꼬꼭! 꼬꼬꼬꼭!
야생 닭이 친구들을 데려왔다.
'비열한 자식!'
병아리만큼 작지는 않지만, 아직 온전한 닭이 되기 전인 어린 개체를 데리고 온 것으로 보아 그녀를 만만하게 본 게 틀림 없었다.
그들은 그녀를 낯선 침입자로 생각하는지 또랑또랑한 눈동자로 그녀를 노려보고 있었다.
오늘이야 말로 그녀를 이곳에서 쫓아내겠다는 결의가 보였다.
더불어 어린 개체에게 싸움 경험도 시켜줄 겸해서 말이다.
야생 닭의 노골적인 무시에 비앙카가 주먹을 움켜쥐고 부들부들 떨었다.
"개 아니, 이 닭자식이…!! 내가 인간인데, 인간인 나를 무시해?”
꼬꼭! 꼬꼬꼭!!
“어, 어쩌라구. 나도 여기 있고 싶어서 있는 거 아니거든?"
꼬꼬꼭! 꼬꼬꼭!!
“더, 덤벼봐?! 덤벼!! 누가 무서워 할 줄 알아?!”
어린 개체의 닭들이 호승심을 드러내며 비앙카를 압박 해온다.
그녀도 암팡지게 두 손에 주먹을 쥐었다.
다 큰 닭한테는 덩치로도 밀리니 질 수밖에 없었지만, 그녀의 무릎 밖에 되지 않은 덩치인 어린 닭 정도는 이길 수 있을 것 같았다.
“이겨서 닭털 싹 다 뽑아가지고 불에 구워 먹을 테다!”
꼬르륵-!
배고프면 눈이 뒤집히는 법이고, 비앙카는 현재 제대로 눈이 뒤집혀 있었다.
하지만.
“왜 이렇게 빠른 거야아!! 내 머리 위에서 내려와악!!!”
어린 닭은 너무 빨랐다.
큰 닭의 핏줄을 이어받은 어린 닭은 아직 경험이 부족하지만, 신체적으로는 그리 뒤떨어지지 않은 모양이었다.
비앙카의 머리 꼭대기에 올라가서 용맹하게 꼬끼오! 하고 울부 짓은 어린 닭이 그녀를 비웃듯 날개를 펄럭였다.
“닭 주제에 나는 게 어딨어!! 너희 새 아니라고!!”
날개가 있지만, 날지 못하는 게 바로 닭이 아닌가?
그런데 얘네들은 날았다.
새처럼 하늘을 날 정도로 높이 나는 건 아니어도 나무 높이 정도는 쉽게 날아다녔다.
당연하지만 비앙카는 먹지 못해 힘이 없었고, 체력도 다 떨어진 상태였다.
멀쩡한 체력을 갖고 있어도 이길 수 있을지 알 수 없는 상황에서 거의 날다시피 하는 닭을 이기는 건 불가능했다.
어린 개체가 승리하고 기세등등하게 무리로 돌아간다.
그러자 야생 닭들이 어린 개체를 뿌듯하게 바라보며 반겨준 후, 비앙카를 향해 패배 했으니 이제 꺼지라는 듯 경계심을 내보였다.
어린 닭에게도 져버린 비앙카에게 남은 선택지는 하나밖에 없었다.
"며, 며칠 만 여기서 지낼게! 여기가 그나마 덜 더럽고 따듯하단 말이야."
그들에게 이곳에 있게 해달라고 부탁하는 것 말이다.
이곳은 야생 닭의 영역이다.
다른 곳으로 갔다가 어떤 동물의 영역에 들어갈지 모르는 상황에서 그나마 자신의 목숨을 위협하지 않는 야생 닭의 영역은 최선의 선택이 될 수밖에 없었다.
'주인님이 오면 저것들 싹 다 잡아서 목 쳐달라고 할 거야!'
비앙카는 속으로 복수를 다짐하면서 겉으로는 야생 닭의 비위를 맞추기로 했다.
처음에 ‘그걸’ 봤을 땐 기겁했지만, 지금은 아주 유용하게 쓰일 비장의 무기가 될 것이다.
"너희들 애벌레 좋아하지? 내가 저쪽에 애벌레 엄청 많이 봤는데 어디서 봤는지 알려줄게. 며칠 만 여기서 지내게 해줘."
꼬꼭?
꼬꼬꼬꼭!!
야생 닭이 그녀의 말을 알아 듣는 듯 예리하게 눈을 반짝였다.
애벌레는 썩은 나무를 뒤적이다가 추워서 불이라도 피워보겠다고 발버둥치다가 우연히 발견한 것이었다.
언젠가 다큐에서 현지 사람들이 야무지게 섭취하던 것을 본 적이 있었는데, 그때 섭취하던 식용 애벌레와 똑닮아 있던 흰색 애벌레였다.
‘웨엑-!’
그걸 발견했을 땐, 끔찍해서 온 몸에 소름이 쫙 돋았다.
그런데 지금은 그 애벌레들이 위기를 극복시켜 줄 훌륭한 뇌물이 될 것이 분명해보였다.
지렁이도 먹는 야생 닭이니, 그 애벌레도 굉장히 좋아할 거다.
그리고 놀랍게도.
'이게 통했어?'
통했다.
애벌레가 있는 곳까지 직접 안내를 해주고 흰색 애벌레를 확인 시켜주자 야생 닭들이 그녀를 보는 눈빛이 놀라울 정도로 너그러워졌다.
"참나, 이게 통한다는 게 왜 이렇게 굴욕적이지? 이젠 야생 닭 비위까지 맞춰주고 살아야 하는 거야?"
비앙카는 어쩌다가 자기 신세가 이렇게 꼬였나 싶어 깊은 한숨을 쉬었다.
이젠 이 푸릇푸릇한 초록잎들이 지겨웠다.
그래도 다행인 것은 야생 닭의 비위를 맞춰준 보람이 있었다는 거다.
기운이 없긴 했어도 하루 종일 가만히 있는 것도 힘들었기에 야생 닭들을 따라다니다가 마실 수 있는 물을 발견하게 된 것이다.
"강이다!"
꿀꺽꿀꺽-!
물 안에 뭐가 있는지 전부 보일 정도로 투명하고 맑은 물이었다.
닭들도 아무 문제 없이 마셨기에 그녀도 믿고 손에다가 물을 받아서 마셨다.
"살 것 같아. 하아~"
사람이 3일 동안 물을 마시지 않으면 죽는다 더니!
진짜 딱 죽기 직전에 생명수를 마시는 것이었다.
'물이 이렇게 달았나?'
물로 배를 채우기라도 하겠다는 듯 계속해서 허겁지겁 물을 마셨다.
당연하지만 그런 걸로는 포만감을 느낄 수 없는 지라 배에서는 다시 한 번 꼬르륵 소리를 요란하게 냈다.
고작 이 정도로는 만족할 수 없다는 듯이 말이다.
"하으..."
물이 들어가니 더 배고팠다.
상황이 이렇게 되니 울컥 화가 치밀어 올랐다.
'왜 자꾸 애벌레가 생각나는 거야!!'
다큐에서 그 애벌레를 먹고 온갖 인상을 찌푸리면서도 의외로 맛이 좋다며 놀라는 연예인의 얼굴이 떠오른다.
머지 않아 그것이 자신의 모습이 될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나 비앙카야...비앙카!! 고작...고작 며칠 굶은다고 꼴사납게 애벌레 따위....먹을 수는...없..."
꼬르륵- 꼬르륵!
흰색 애벌레...오동통한 살이 많은 애벌레....
닭들이 참 맛있게 먹었지.
‘먹을 순 없는데…나 비앙카, 프라이드 있는 여자인데….’
그녀의 입에서 침이 추릅 흘러나왔다.
'딱 한 번만 먹어볼까? 이대로는 굶어 죽을 거야. 그냥 뭐라도 먹고 살아남는 게 중요하잖아.'
사람은 아무것도 먹지 않는다 해도 일주일은 살 수 있다고 한다.
하지만 그게 말이니까 가능한 거지, 3일 동안 굶주렸던 그녀의 머릿속엔 이성이 남아 있지 않았다.
이젠 애벌레도 맛있게 먹을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래도 난 사람이니까…불에 구워먹자.’
마시멜로 먹는 기분이 들지도 모른다.
아마도.
“이거 왜 이렇게 안 돼에!!!”
다행히 마른 장작은 쉽게 찾을 수 있었다.
비가 오지 않았으니까.
문제는 마른 장작을 가져다 대고 나뭇가지로 열심히 비벼봐도 영 불길이 솟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그냥 생으로 먹을까?”
강가의 위치를 발견해뒀기에 깨끗하게 씻어 먹으면 될 것 같았다.
배고파서 눈이 돌아버린 비앙카는 더 이상 참을 수 없는 지경에 다달았다.
만지는 것만으로도 오랫동안 고민하게 만들었던 애벌레를 질끈 두 눈 감고, 마침내 입 쪽으로 가져 가려던 순간.
부스럭 ㅡ! 부스럭 ㅡ!
비앙카! 비앙카!!
꿈 속에서나 들을 수 있었던 주인님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애벌레가 툭! 하고 그녀의 손 아래로 떨어진다.
비앙카는 자신이 환청을 들었나 싶어 귀를 황급히 손가락으로 후벼 팠다.
그런데 다시 한 번 더 자신의 이름이 낯익은 목소리로부터 들려왔다.
비앙카!! 어딨어? 비앙카!!
“…주인님이야. 이거 주인님 목소리 맞잖아.”
비앙카는 풀썩 자리에 주저 앉았다.
그리고 야생 닭들한테 당했을 때도 펑펑 울지 않았던 눈물샘이 쾅 하고 터졌다.
“흐아아아앙!!! 주이니이이이임…흐어어어!!!”
“비앙카!!!!”
울음소리를 들었는지 수풀 사이를 해치고 인기척이 점점 가까워졌다.
그리고 마침내.
그토록 보고 싶었던 주인님이 그녀의 눈 앞에 나타났다.
비앙카는 눈물 콧물이 범벅이 된 채로 주인님을 향해 두 손을 뻗었다.
“흐어어어어!!!”
“세상에…맙소사.”
주인님은 그녀를 안는 것을 망설이지 않았다.
바닥을 뒹굴어 더러워진 그녀를 소중하게 품에 안아 올렸다.
비앙카는 마침내 자신을 안전하게 보호해줄 대상을 만나자 긴장이 완전히 풀려버렸다.
그녀가 주인님의 옷깃을 애처롭게 잡아채고 힘겹게 말했다.
“주인니임…”
“그래그래. 혼자서 고생 많이 했구나. 다친 곳은?”
“흐윽…흑…주인니임…저…저어…!”
“그래, 어서 돌아가자.”
비앙카는 주인님에게 꼭 하고 싶었던 말이 있었다.
미치도록 보고 싶었다.
정확히는.
“너무 배고파여…흐흑…! 밥 좀 주세요오…!”
주인님이 나타나면 먹을 수 있을 밥이 필요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