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hapter 818 - #96. 진해솔 (122)
최대한 빨리 구출해보겠다고 서둘렀지만, 며칠을 혼자 숲 속에서 조난을 당했기에 고생이 이만저만이 아니었던 모양이다.
나는 비앙카가 이렇게까지 엉망진창인 모습을 처음봤다.
식겁해서 애를 데려와 일단 밥부터 먹였다.
“크게 다친 곳 없어서 다행이야.”
비앙카는 입에 음식을 잔뜩 구겨 넣고 우물거리면서 고개를 끄덕였다.
뱃속에 음식을 넣지 않으면 안 되는 사람처럼 필사적이다.
“그렇게 많이 배고팠어?”
끄덕끄덕.
괜한 고생을 한 비앙카가 안쓰러웠던 나는 먹고 싶은 게 있으면 다 말하라고 했다.
이 차원에 없는 음식이어도 상점에서 구매해서 사다줄 생각으로 말이다.
“배불러서 더 이상 못 먹겠어요.”
물론 비앙카는 과식하는 스타일이 아니었기에 열심히 먹어도 한계가 있었다.
“그동안 어떻게 지냈어?”
“아! 맞다. 주인님께 꼭 부탁드릴 거 있었는데.”
비앙카가 내 질문에 깜빡 했다는 듯 눈을 동그랗게 떴다.
아직 씻지도 못하고 음식부터 먹인 상황인지라 그 모습이 제법 웃겼다.
비앙카를 찾지 못했을 땐, 안쓰럽고 애처로웠지만 건강하다는 걸 알게 된 현재는 좀 웃음이 나왔다.
“부탁할 거? 그게 뭔데? 지금이라도 해.”
“아니에요. 됐어요. 뭐…굳이 그렇게까지 복수할 필요는 없는 것 같아서요.”
“데인 남작을 말하는 거야?”
비앙카에게 복수라는 단어를 듣자마자 생각난 게 데인 남작이었다.
그런데 의외로 비앙카가 고개를 저었다.
“그 사람 말고요.”
“그럼 누구 말하는 건데?”
“숲 속에서 조난 당했을 때, 생긴 원한이에요.”
비앙카는 놀랍게도 꽤 재밌었던 추억을 말하는 표정으로 이야기를 시작했다.
“야생 닭이 그렇게 크다고?”
“여기 세계가 특이해서 그런 줄 알았는데, 아니에요?”
“전혀 아닌데. 아무래도 걔가 좀 특이했던 걸 거야.”
아니면 야생 닭이 아니라 몬스터였을 수도 있다.
비앙카가 정말 위험할 뻔했구나 하는 생각이 들자 데인 남작에 대한 분노가 치밀어올랐다.
“아무튼 그 녀석, 진짜 보통이 아니었어요. 조류 주제에 똑똑해서 제 말을 알아 듣더라니까요?”
비앙카가 해준 모험 이야기는 무척 재밌었다.
그 녀석 때문에 바닥을 뒹굴었고, 이곳저곳 생채기가 났다는 것을 들었을 땐 눈살을 찌푸렸고 결국 어린 개체한테 패배해서 내쫓길 뻔했다가 애벌레를 뇌물로 받쳐서 그곳에서 지낼 수 있었다는 말을 들었을 땐 웃음을 터트렸다.
“정말 고생 많이했네.”
그 짧은 사이에 비앙카는 엄청난 모험을 하고 온 모양이었다.
“그래서 주인님을 만나면 꼭 복수를 해달라고 하려고 했어요.”
그렇게 신나서 말한 비앙카는 많이 지쳤는지 목소리에 힘이 없었다.
“많이 피곤 할 것 같은데, 씻고 잠부터 자고 일어나는 게 어때? 복수는 네가 깨어나면 해줄게.”
본의 아니게 비앙카를 위해 야생 닭과 1:1로 싸워야 할 것 같지만, 무사히 돌아와준 비앙카를 위해서라면 얼마든지 그렇게 해줄 의향이 있었다.
“네! 빨리 씻을래요. 당장요. 강가를 발견해서 대충 씻긴 했는데, 솔직히 찝찝해요. 머리도 다시감고 싶고.”
배가 부르자 이제 다른 것이 필요해진 비앙카가 목욕을 할 수 있다고 하니 눈을 반짝였다.
그녀를 위해 밥을 시키기 전부터 여관 직원에게 부탁해 바로 씻을 수 있게 부탁을 해놓은 참이었다.
“씻겨줄까?”
“…아뇨. 괜찮아요.”
평소라면 이런 기회를 절대 놓칠 사람이 아닌데, 비앙카는 고개를 저었다.
“무서우면 바로 부르고. 밖에서 지키고 있을 거야.”
“헤헷, 주인님께서 다정하게 대해주시니까 적응 안 되는데요?”
“죽을 뻔한 사람을 겨우 찾았는데 매정하게 대할 만큼 냉정한 사람 아니야. 그동안 냉정하게 대한 것도 네가 너무 심하게 할까 걱정 돼서 말리려고 그런 거였고.”
“알아요. 저도. 아무튼…구해줘서 감사해요. 찐하게 키스 해드리고 싶은데, 그건 씻고 나온 후에 해드릴게요.”
“지금 해도 괜찮은데?”
“제가 싫어요. 아무튼 주인님은 앞에서 딱 기다리고 계셔야 해요. 알았죠?”
씻겨주는 것은 사양하나 멀리 가는 것은 안 된다는 말이었다.
나는 알겠다는 의미로 고개를 끄덕여주었다.
그녀가 씻으러 들어가고, 난 주변에서 호위를 서고 있는 기사들에게 말했다.
“하룻밤 자고 움직일 거다.”
“예, 주인님.”
바깥에서 함부로 나를 ‘황제’라 부르지 못한 기사들이 ‘주인님’으로 바꿔서 부르는 중이었다.
그들은 데인 남작이 트롤짓을 해서 큰 실망을 샀던 것을 만회라도 하고 싶었던지 맡은 임무에 최선을 다 하고 있었다.
‘데인 남작이 기사라고 해서 전부 다 똑같은 놈 취급 할 생각은 없는데….’
바짝 긴장해서 일에 집중하는 모습이 좋아 보였기에 별 다른 말을 하지는 않았다.
개인적으로 이번 일이 다른 기사들에게 좋은 본보기가 되기를 바라는 중이기도 하다.
자기 멋대로 비앙카를 재단하고 처리한 데인 남작의 일은 최악의 트롤링이었다.
기사들에게 일정을 말해주고 난 후.
비앙카가 씻고 있는 방으로 다시 들어갔다.
솨아아아아ㅡ
물소리가 한참동안 이어지다가 1시간에 가까워져서야 겨우 멈췄다.
비앙카가 밖으로 나오자 고생해서 엉망진창이던 얼굴이 뽀얗고 순해져 있었다.
비앙카와 순하다는 말이 어울리는 순간이 있을 수 있다니!
놀라운 일이었다.
“이리 누워.”
나는 따듯하게 데워 둔 이불 자락을 들어올려 침대를 팡팡 쳤다.
비앙카는 초롱초롱한 눈동자로 잽싸게 달려와 침대에 누웠다.
“하…이거에요. 이거. 너무 그리웠어요. 푹신한 침대…따듯한 온기….”
내가 알고 있는 비앙카였다면, 여관의 침대가 싸구려라며 흉을 봤을 거다.
하지만 며칠간 차가운 흙바닥에서 잠을 자본 그녀는 싸구려 침대에 감사 할 줄 아는 사람이 되어 있었다.
“갑자기 의젓하게 행동하니까 적응이 안 되네.”
“이게 의젓한 거에요?”
“그럼 아니야?”
“제가 평소엔 뭐 어땠는데요?”
“이런 침대에 누워서 자면 악몽을 꿀 거라던가, 냄새가 난다던가 뭐 그런 투정 부리는 게 보통이었잖아.”
“…….”
비앙카도 마냥 아니라고 할 순 없었는지 말 없이 잠잠하다.
고생하고 온 애를 다그칠 생각이 없었기에 나는 비앙카의 손을 잡아서 다정하게 말했다.
“고생 많이했어. 이제 편하게 쉬어.”
“조난 당했던 며칠은 제 평생 가장 최악의 시간들이었어요.”
“먹지도 못하고, 제대로 잠도 못하고, 무섭고 외로웠겠지.”
“맞아요. 저 고소공포증도 생겼을 지도 몰라요.”
“충분히 그럴 수 있어. 돌아가면 의사 선생님한테 상담 받자.”
“주인님이 비용 다 대주셔야 해요.”
우리 두 사람 모두 돈에 있어서는 부족함이 없는 사람들이었다.
그럼에도 비앙카가 이런 말을 하는 것은 서투른 투정이었다.
힘드니까 누군가에게라도 투정을 부려서 위로를 받고 싶은 거다.
그 마음을 알고 있기에 순순히 고개를 끄덕였다.
“당연하지. 내가 비용도 다 대주고, 직접 병원에 데려다 줄게.”
“저랑 약속하신 거에요?”
“응.”
비앙카가 내 대답이 만족스러웠는지 배시시 미소를 지었다.
“뽀뽀해줄까?”
씻고 나오면 키스하겠다고 했었던 비앙카였기에 그것도 잊지 않았다는 의미로 먼저 물어봤다.
평소보다 많이 시무룩해져 있긴 해도 비앙카는 비앙카였는지 그녀가 냉큼 고개를 끄덕였다.
“네, 주인님이 해주세요.”
아무렴, 누구 부탁인데.
미안해서라도 당분간 그녀가 부리는 투정은 다 들어줄 생각이었다.
비앙카가 무사했다고 해서 받은 상처가 아예 없다고는 못한다.
정신적인 상처도 엄연히 큰 상처 중 하나다.
신체적인 상처만 위험한 게 아닌 것이다.
비앙카가 바라는 것은 거친 키스겠지만, 나는 오늘 그녀의 몸을 거칠게 다룰 생각이 없었다.
최대한 부드럽게 키스를 했고 그녀도 순순히 그것을 받아들였다.
쪽, 쪼옥, 쪽!
“주이니임…우웅….”
“그래그래. 쪽! 고생했어. 잘 버텼어.”
머리과 등을 쓰다듬어주면서, 위로의 의미를 담아 달래주니 효과가 있었는지 그녀의 몸이 노곤노곤하게 녹아내렸다.
이대로 섹스를 하고 싶었는지 그녀가 옷을 벗으려고 들었다.
나는 그녀의 행동을 막진 않았다.
하지만 지쳐 있는 비앙카를 무리하게 만들 생각은 처음부터 없었다.
“그게 뭐에요?”
“연고. 상처난데 바르는 거야. 흉 안 지려면 꾸준히 발라야해.”
“아~!”
비앙카는 뒤늦게 자신의 몸이 섹스하기에 적합한 상태가 아님을 깨달았다.
“그럼 안 하실 거에요?”
“아픈 사람 데리고 하긴 뭘 해.”
옷을 다 벗기고나니 그녀가 얼마나 고생했는지 몸이 고스란히 보여주고 있었다.
이곳저곳 생채기가 난 곳이 굉장히 많았다.
“많이 다치긴 했죠?”
비앙카가 자신의 몸을 보며 배시시 웃었다.
“속상하게 왜 그렇게 웃어.”
“주인님 속상하지 말라고 웃은 건데요?”
“아픈 곳 하나도 빠짐없이 전부 다 말해.”
“네엥~”
비앙카가 말해준 곳부터 시작해서 꼼꼼하게 연고를 발랐다.
“이거 되게 효과 좋네요. 코인으로 구매하신 거죠?”
“응. 흉터 없이 나을 거야.”
가장 심하게 상처가 난 곳은 팔뚝 부분이었다.
무언가에 심하게 쓸린 듯 여러 줄이 그어져 있었고, 피부가 벗겨진 상태였다.
안 쓰러움에 절로 인상이 써졌다.
다친 곳에 연고를 바르자 붉어진 피부가 빠르게 진정 되고, 통증이 사라지는지 비앙카의 안색이 점점 펴졌다.
이 몸뚱이로 나랑 섹스할 생각을 한 그녀가 어이가 없었다.
“멍든 것도 이걸 바르면 빨리 나을 거야.”
“주인님 밖에 없어요. 감사해요.”
밖에 나가봤자 고생 밖에 더하나.
역시 주인님 품이 최고였다면서 비앙카가 너스레를 떨었다.
이렇게 말하는 걸 보고 있으면 이번 사건으로 기가 완전히 죽은 건 아닌 걸로 보였다.
비앙카의 멘탈이야 기본적으로 튼튼하니 걱정한 만큼 충격을 받은 건 아닌 듯 했다.
‘그래도 당분간은 간호하는 것처럼 보살펴야지. 아까 우스갯소리로 했던 고소공포증 생길 것 같다는 말이 마냥 장난은 아니었을 거야.’
그녀가 해낸 일을 생각하면 금희환양 한 사람 대우를 해줘도 부족할 판이지 않은가?
공식적으로 대접을 해주진 못해도 섭섭하지 않게는 해줘야 한다고 생각했다.
“다 됐어.”
“우와…몸에 칠갑을 했네요.”
다친 곳만 발랐을 뿐이다.
즉, 비앙카의 몸에 상처가 나지 않은 곳이 없다는 의미였다.
“왜 이렇게 많이 다친 거야? 아이템이 효과가 안 났던 거야? 아니면 아까 말했던 닭 때문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