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hapter 819 - #96. 진해솔 (123)
“아아~ 이렇게 많이 다친 건 거의 떨어질 때 난 상처에요. 주인님께서 주신 아이템에 흡수 할 수 있는 데미지 총량이라는 게 있는데, 즉사 이상의 데미지를 이미 흡수해놔서 자잘한 생채기들은 흡수를 못한 거죠. 여기 무릎 멍든 건 제가 말했던 걔 때문이 맞고요!”
비앙카의 말에 그녀가 낭떠러지에서 떨어졌을 때, 얼마나 큰 위험이었는지 알 수 있었다.
데인 남작, 그 트롤러 새끼는 진심으로 비앙카를 죽일 생각이었던 게 틀림없다.
‘돌아가면 가만히 안 둔다.’
다시 한 번 그놈에 대한 분노를 불 태운 나는 비앙카의 머리를 쓰다듬어주며 침대에 눕혔다.
효과 좋은 연고는 치덕치덕 발려진 몸에 빠르게 흡수 되고 있었다.
시트에 아예 안 묻히는 건 불가능했지만, 아파 죽겠는데 시트 걱정을 할 이유는 없었다.
“내일 아침이 되면 결정해야 하는데, 네가 말한 닭을 잡으러 갈까? 아니면 황궁으로 갈까?”
“바로 황궁으로 가보셔야 하는 거 아니에요?”
게오스 황제의 곁에서 지내면서 황궁 법도에 대해 배운 바가 있었고, 황제가 황궁 바깥으로 나가는 건 매우 드문 일임을 알고 있었다.
비앙카가 상회 일을 보기 위해 황궁 바깥을 나갈 때마다 게오스 황제는 따라가고 싶어 하는 눈빛을 한 채로 잘 다녀오라고 말했던 적이 여러 번이었다.
그런데 또 다른 황제인 주인님은 자신을 구하겠다며 이 자리에 있었다.
그도 위험을 무릅쓰고 이곳에 있는 것이다.
“상관없어. 이 정도도 마음껏 못하는 게 무슨 황제라고. 닭을 만나러 가고 싶은 거지?”
“네. 제가 그놈들한테 무시 당한 거 전부 갚아줄 거에요. 방금 전까지는 세상이 하나하나 다 밝고 소중해보여서 닭 녀석들에게 뇌물을 바쳐 살아남았던 원한도 금방 잊혀질 것 같았는데, 지금 다시 만나서 본때를 보여주지 않고 돌아가면 닭고기를 먹을 때마다 그 녀석에 대한 원한이 떠오를 것 같아요. 나도 주인님 있다 이거야!!”
어린 개체가 자신을 이기고 포효하듯 꼬기오-!!! 라고 외쳤던 그날의 굴욕!
그리고 승리한 어린 개체를 바라보며 흐뭇하게 웃으며 만족하던 야생 닭!!
그 녀석에게 주인님을 보여주면 화들짝 놀라고 쫄아서 벌벌 떨 거다! 라며 비앙카가 신나서 떠든다.
“주인님이 꼭 이겨주셔야 해요. 제가 굴욕 당했던 걸 복수해주셔야 한다고요.”
“그래그래, 알았어. 꼭 이길게. 근데 닭이 허리춤까지 왔다고?”
근데 허리춤까지 오는 닭을 내가 무슨 수로 이기지?
‘좀비 잡던 솜씨 좀 부려봐야 하나?’
그때 몸을 놀린 노하우를 다시 한 번 꺼내 써야 할 모양이다.
물론 비앙카를 크게 다치게 하진 않았으니 적당히 손을 봐줄 생각이었다.
“오늘은 푹 자자.”
“네에…눈 감으면 바로 잘 수 있을 것 같아요.”
“그래, 졸린 거 억지로 참지 말고 눈 감아.”
“계속 곁에 있어주실 거죠?”
“물론이지.”
비앙카가 눈을 감는 걸 보고 나도 그 옆에 누웠다.
이렇게 해줘야 그녀가 안심할 거란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아니나 다를까, 눕자마자 비앙카가 내 품 안으로 다가와 폭 안겼다.
새액- 새액- 새액-!
비앙카는 예상대로 눈을 감자 마자 곧 고된 숨소리와 함께 잠에 빠져 들었다.
다행히 잠을 자는 동안 꿈도 꾸지 않고 곤하게 잠을 잤다.
♧ ♧ ♧
비앙카가 바란 대로 야생 닭을 만나서 호되게 야단을 쳐주고 싶었지만...
생각보다 덩치가 너무 크더라고.
날쎄기는 또 얼마나 날쎄던지.
꼬끼오오오오옥ㅡ!!!!!!!!!
"어우."
아직도 그놈이 포효하던 찢어지는 목소리가 환청으로 들린다.
그래도 패배하지 않고 무승부 결과를 만들어내서 체면은 지킬 수 있었다.
녀석이 잡히지 않은 것처럼 나도 녀석한테 안 당했거든.
'역시 내 몸이 사기긴 하다니까.'
과연 무승부를 비앙카가 만족할까 걱정이 컸는데, 이 정도 결과에도 매우 흡족해 하며 야생 닭에게 한껏 거들먹거리고는 만족한 듯 돌아가자고 말했다.
야생 닭이 콧김을 내뿜으며 맹렬하게 나에 대한 복수심을 느끼는 걸 비앙카는 아주 좋아하더라고.
야생 닭과의 헤프닝은 그렇게 날이 새기 전에 끝이났고, 다음 날 마차를 타고 황궁으로 향하는 길을 떠났다.
다그닥- 다그닥- 다그닥-
비앙카는 마차를 타는 것을 무서워 하지도 않았고, 황궁으로 돌아 가는 내내 밝은 모습을 유지했다.
다만….
'무섭다.'
무서운 말을 자주 하긴 했다.
원한이 뼈에 사무쳤는지, 영화에서 봤을 게 분명한 잔인한 고문 기술들을 내뱉기 시작한 것이다.
“돌아가면 데인 남작이 최대한 멀쩡했으면 좋겠어요. 그래야 제가 할 수 있는 게 많을 거잖아요."
"..."
"어떻게 고문을 해볼까 상상하는 것 만으로도 돌아가는 길이 심심하지 않네요. 후후후!”
"..."
“그거 아세요? 사람 피부를 벗기는 고문 기술이 존재한다는 거?”
"..."
“사지를 찢어 죽이는 게 나을까요, 끓는 물에 삶아 죽이는 게 나을까요?”
"..."
그나마 필터링을 좀 거쳐서 나온 형벌들이 이 정도다.
비앙카가 알고 있는 각종 고문 기술들에 절로 혀를 내둘렀다.
'일부러 내 반응을 보려고 잔인한 얘기를 하는 건가 싶기도 하고.'
사람이 이래도 되나 싶을 정도의 고문을 데인 남작에게 하겠다고 단단히 결심을 한 것 같은데...
'저런 거 하면 폭군이라고 역사에 100% 남는다.'
애초에 저런 그런 끔찍한 짓을 실제로 하도록 내버려 둘 생각이 없었다.
가뜩이나 인성 삐뚤어져 있는 비앙카인데, 그런 쪽으로 선을 넘어버리면 안 될 것 같았다.
그래도 지금은 잔뜩 분노에 가득 차 있었기에 오냐오냐 그래그래 하는 식으로 받아줬다.
그렇게 한참이나 데인 남작에 대한 분노를 풀다가, 비앙카가 문득 생각났다는 것처럼 물었다.
“게오스 제국은 어때요?"
"아, 게오스 제국?"
"제가 나름 열심히 깽판치고 왔는데 효과가 있는지 궁금해서요.”
“네가 죽었다는 얘기를 듣고 바로 나온 거라서 아직 제대로 된 소식을 못 들었어. 황궁으로 돌아가면 알아봐야지.”
나도 게오스 제국이 어떻게 됐는지 궁금한 상태이긴 하다.
“게오스 황제는 제가 납치 당했다는데 왜 아무것도 안 했을까요? 말로는 영혼의 파트너니 뭐니 했으면서. 제가 아는 게오스 황제라면 분명 병사들을 풀어서 제 시체라도 찾겠다고 나왔어야 정상이거든요?”
“납치? 그건 또 무슨 소리야. 쫓아오는 병사들이 없으면 다행인 거 아니야?"
나는 게오스 황제가 아무런 조치도 취하지 않았다는 그 소식조차도 제대로 들은 바가 없었다.
비앙카를 무사히 데려올 줄 알았던 남작이 와서는 대뜸 비앙카가 죽었다는 말을 했는데 그런 걸 신경 쓸 겨를이 있을 리가 없지 않은가?
내가 당황하면서 묻자 비앙카도 아차 했는지 눈알을 굴린다.
뭔가 내가 모르는 수작질을 마지막에 하고 나온 모양이었다.
"너 솔직하게 싹 다 말해. 명령이야."
웬만하면 명령까지는 언급하고 싶지 않았지만, 눈알을 굴리는 걸 보면 이렇게라도 해서 들어야 할 것 같았다.
그리고 잠시 후.
상황 설명을 들은 나는 한숨을 푹 쉬었다.
'그 새끼가 왜 트롤짓을 했나 싶었는데....'
비앙카 쪽에서 보여주는 훌륭한 인성질에 데인 남작이 너무 많이 놀랐던 모양이다.
"게오스 황제는 제가 없어도 그다지 아쉽지 않았나 봐요. 제가 사람을 잘못 본 거죠. 이런 실수를 할 줄이야."
"글쎄, 네가 사람을 잘못 봤을 리는 없을 것 같은데."
"그럼 왜 저를 안 쫓아온 건데요? 제가 누워 있던 곳에 피칠갑을 해놓고 왔단 말이에요? 제가 소중했으면 시체라도 찾겠다고 병사를 풀었어야 하는 게 정상이라구요."
왜 그런 걸 재밌어 하는 건지 조금도 이해가 안 된다.
조용히 나왔어도 게오스 황제의 충격이 이만저만이 아니었을 텐데, 피칠갑에 납치 당한 것처럼 꾸며 놓고 왔다면....
"정상일 때의 행동이라면 지금은 정상이 아니니까 그렇게 못한 거 아니겠어?”
게오스 황제가 얼마나 유약한 성격을 지니고 있는지 알고 있는 지라 절로 황제의 상황이 그려진다.
'얘는 상상도 못할 일이겠지.'
내 추측을 들은 비앙카의 얼굴이 묘해졌다.
“정상적이지 못한 상황이요?"
"가령 네가 납치 당했다는 사실을 듣고 쓰러진다거나 그런 거?"
"...쓰...러져요? 고작 그걸로?"
"네가 많이 소중했다면 충분히 그럴 수 있을 것 같은데. 게오스 황제 성격이 꽤 유약하잖아."
얼마든지 충격을 받고 쓰러질 수 있었다.
비앙카가 소중한 만큼 받은 충격은 더 컸을 테니 말이다.
내 말을 듣고 곰곰이 생각에 잠긴 비앙카는 잠시 후 말했다.
"그런 거면 뭐...납득이 되긴 하네요. 왜 저를 찾지 않았는지 충분히 알겠어요."
게오스 황제와 꽤 오랜 시간 가까이 지내면서 알게 모르게 정이 쌓였을 텐데, 비앙카는 자신의 예측과 맞지 않은 상황이 벌어진 이유를 납득한 것으로 만족한 눈치였다.
“고작 그걸로 되겠어? 게오스 황제가 쓰러졌을 지도 모른다는데?”
걱정 안 되냐는 의미였다.
비앙카는 내 물음이 어처구니 없었는지 피식 웃음을 보였다.
“저 비앙카에요.”
"......."
놀랍게도 그 말 한 마디로 충분히 답이 되긴 했다.
“그래도 계속 같이 지내면서 정이 쌓였지 않아? 병사들 안 보냈다고 엄청 섭섭해 했으면서.”
사실 지금의 황제가 무너지는 건 나도 바라지 않는 일이었다.
나라의 힘이 줄어들길 바라고 그녀를 게오스 제국으로 보낸 것이지, 황제에게 유감이 있는 건 아니었다.
오히려 지금의 황제는 전쟁을 바라지 않는 나와 뜻이 같아서 편했다.
'다른 황족이 괜히 황제가 됐다가 쓸데없이 전쟁전쟁 이러면 곤란해지는 건 나야.'
바라지 않는 전쟁으로 골치 아파지고 싶지 않았다.
그러니 다른 황족이 황제가 되는 것은 피해야 할 일이었다.
“제가 사사로운 정에 흔들리고 그런 사람으로 보이세요?”
비앙카가 내 말에 정색을 하며 물었다.
하긴, 아무리 애정하는 사람이라도 단번에 냉정해야 할 때는 딱 끊어버리는 것이 내가 아는 비앙카의 모습이긴 하다.
그래도 아예 걱정이 안 될 리는 없을 것이다.
“사실 네가 걱정해도 상관없어. 게오스 황제를 죽이고 싶어서 널 거기로 보낸 게 아니니까. 오히려 그 사람이 아니라 다른 황족이 게오스 황제가 되면 나도 골치 아파진다. 그냥 게오스 제국의 미래에 똥을 뿌리고 싶었을 뿐이야.”
우리 제국보다 훨씬 좋은 땅 때문에 같은 선에서 달리면 자연스럽게 게오스 제국이 더 앞서 나갈 수밖에 없는 상황이다.
나는 그 밸런스를 맞추길 바란 것이었다.
'밸런스 뿐만 아니라 시간이 지날수록 게오스 제국이 바닥으로 쳐박혀야지. 우리 제국은 게오스 제국 살점을 먹으면서 성장하고.'
내 다음 대 황제가 즉위하면 게오스 제국의 마지막 골수를 쪽 뽑아 먹는 거다.
그게 현재 내가 계획하고 있는 시나리오였다.
'그렇게 되려면 지금 황제가 무사히 자리를 보존하고 있어야 할 필요가 있어. 괜히 다른 놈이 앉으면 피곤해지기만 하지.'
혹여나 그놈이 제법 똘똘한 녀석이기라도 하면 곤란해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