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hapter 820 - #96. 진해솔 (124)
문제는 게오스 황제에게 변고가 생긴 게 사실이라면, 그 휘하에 있는 귀족들이 마음껏 날뛰고 있을 거라는 사실이었다.
‘귀족들이 날뛰면 나라는 더 빨리 무너진다. 개판 오 분 전이 될 테니까.’
황제의 권력을 빼앗기 위해 귀족들 사이에서 어떤 아귀 다툼이 벌어지고 있을지 뻔하다.
조금씩조금씩 곪아가다가 어느새 그 곪은 환부가 전체로 퍼져나가면 그제야 귀족들은 깨닫게 되는 거다.
자신들의 권력다툼이 어떤 개판을 초례한 것인지.
‘지금 당장 무너지는 건 곤란해. 아직 우리 제국은 게오스 제국을 뜯어 먹을 준비가 되어 있지 않아.'
뱃구레가 작은데, 너무 과하게 먹으면 탈이 나고 배만 아픈 법이었다.
'다른 나라들 움직임도 슬슬 확인해둬야겠네.'
게오스 제국의 풍요로운 땅은 언제나 다른 나라들의 탐욕을 부추기곤 했다.
그런 와중에 약해진 게오스 제국의 상황을 알게 된다면?
당연히 욕심이 날 거다.
그럼 게오스 제국과 전쟁을 치르는 게 아니라 게오스 제국을 둘러싼 여러 나라의 전쟁이 시작 될 수 있었다.
‘게오스 제국은 무너지기 일보 직전인, 힘이 다 빠진 나라라서 상관없지만 다른 나라는 그게 아니잖아. 그럼 승리한다고 해도 피해가 커질 거야.’
그건 내가 이곳에 온 목적에도 부합하지 않고, 바라지도 않는 일이었다.
‘역으로 게오스 제국 황제를 도와야 하는 일이 생길지도 모르겠는 걸.’
마지막을 향해 달려가고 있는 게오스 제국에 숨결 한 자락을 불어 넣어주는 것.
그것이 필요해질 수도 있을 것 같았다.
“그나저나.”
“넹?”
한동안 생각에 잠겨 있던 나는 비앙카를 향해 고개를 돌렸다.
비앙카는 무언가 자신에게 좋지 않은 이야기가 나올 것이라 직감 했는지 슬며시 내 시선을 외면했다.
물론 그런다고 내가 하고자 하는 말이 바뀌는 건 아니었다.
“슬슬 돌아가야지?”
“지금 황궁으로 돌아가고 있는데요?”
“내가 돌아가야 한다는 곳이 황궁이 아니라는 거 알잖아.”
비앙카는 돌아갈 곳이 있다.
게오스 제국의 황궁이나 우리 제국의 황궁 모두 그녀가 돌아가야 할 최종 목적지는 아니었다.
“충분히 잘 놀았던 거 아니었어? 야생 닭이랑 1:1로 싸워보기도 했잖아.”
“걔한테는 처참하게 졌어요! 하나도 좋은 경험이 아니었다고요!”
“그래도 마지막에는 웃으면서 헤어졌잖아.”
비앙카는 야생 닭에게 내가 자기 보호자라면서 한껏 거들먹거리고 자랑을 하더니 아직 노란물이 다 안 빠진 병아리들을 한껏 귀여워 해주고 왔다.
물론 그걸 할 수 있었던 건 내가 따로 먹이를 챙겨간 덕분이긴 하지만 말이다.
“훈훈하게 잘 마무리 됐으니까 이제 그만 놀고 돌아가야지.”
“아직 훈훈하게 마무리 안 됐어요. 게오스 황제 일이 남았잖아요.”
“집으로 돌아가도 편지는 쓸 수 있잖아.”
비앙카가 열심히 이곳에 남을 핑계를 떠올려봤지만, 수월하게 막아낼 수 있었다.
그녀가 더 이상 이곳에 있을 명문이 없었다.
“서운하겠지만 이제 그만 돌아가자. 고생은 충분히 했어.”
놀이터에서 나와 집으로 돌아가고 싶지 않아하는 어린애를 달래는 투로 비앙카를 위로했다.
그녀는 내 설득에 한숨을 포옥 쉬더니 마침내 알겠다며 고개를 끄덕였다.
“지금까지 충분히 잘 놀긴 했으니까요. 이제 현실로 돌아가긴 해야죠. 마무리가 좀 찝찝하긴 한데 그건 주인님께서 잘 해결해주실 거라고 믿을게요. 적어도 저한테 자객을 보낸 놈들은 싹 목 쳐주셔야해요.”
”…그, 그래.”
나는 비앙카의 당황스러운 말에 일단 그러겠다고 대답을 했다.
어차피 게오스 제국이 망하면 그쪽 출신 귀족들이 모두 죽긴 할 거다.
시간이 얼마나 걸릴지는 몰라도, 그들의 끝은 결코 편하진 않을 것은 확실했다.
나는 살벌한 화제를 바꾸기 위해 다른 얘기를 꺼냈다.
“아마 돌아가면 멜리사한테 잔소리 좀 들을 거야. 걔가 너한테 이를 갈고 있거든.”
몇 달만 부탁한다고 했으면서 거의 1년 째 회사를 맡겨 놓은 상황이지 않은가?
화가 안 나는 게 이상한 거였다.
실제로 멜리사는 비앙카가 연락이 안 된다며 화가 잔뜩 나 있었다.
1년이 되도록 연락 한 자락도 안 되는데 걱정 한 톨도 하지 않는 걸 보면 비앙카가 어디로 잠적했어도 자기 몸 보존은 착실하게 할 거라 믿고 있는 듯 했다.
그나마 내가 일 시킨 게 길어져서 그렇다고 변명을 해줘서 참고 있는 거였다.
그런데 비앙카는 멜리사가 화낼 거라는 얘기가 나오자 눈을 반짝였다.
“후후, 그러네요. 동생이 절 엄청 보고 싶어 하고 있겠어요.”
다정한 의미로 보고 싶은 게 아니지만, 비앙카는 그것 만으로도 충분한 모양이었다.
게오스 황제가 아무리 재밌는 사람이어도 비앙카에게 동생 만큼 큰 흥미를 주는 존재는 아닐 것이다.
비앙카가 가장 사랑하는 존재인 만큼, 많은 괴롭힘도 당했던 멜리사.
비앙카에겐 게오스 황제보다 더 애정하고 흥미로워 하는 존재가 멜리사일 것이다.
한동안 잊고 있었던 동생에 대한 애정이 물씬 피어 오르는 듯 그녀의 뺨이 붉어졌다.
”갑자기 걔가 보고 싶어졌어요. 우리 동생이 언니를 얼마나 그리워했을지 직접 만나서 듣고 싶네요.”
비앙카의 얼굴에 다시금 미소가 피어났다.
좋은 소리 못 들을 게 분명할 텐데도 말이다.
그 배짱이 웃기기도 하고, 비앙카 답다는 생각이 들었다.
♧ ♧ ♧
비앙카가 돌아가야 한다는 것에 동의를 했다고 해도 곧바로 그녀를 돌려보낼 수는 없었다.
황궁에 도착하자마자 게오스 제국 황성 상황을 알아보기 위해 사람을 파견한 한편, 비앙카를 죽이려 들었던 데인 남작의 처벌 문제를 매듭지어야 했다.
비앙카는 데인 남작한테 화풀이를 다 하기 전까지는 절대 돌아 갈 수 없다고 못을 박은 상태였다.
"주인님이 약속하셨잖아요! 저 사람 처분은 제게 맡긴다고요."
"당연히 그렇게 할 거야. 네가 바라는 대로 될 거라고. 근데 그 말이 처벌 받는 걸 너한테 보여준다는 의미는 아니었어. 아파서 고통스러워 하고 피 튀기는 징그러운 걸 꼭 봐야겠니? 고생 하고 왔으니까 그런 건 보지 말고 좋은 것만 봤으면 좋겠는데."
비앙카가 내 말을 듣고 잠시 말을 잇지 못했다.
"...주인님이 너무 다정하게 대해주시니까 적응이 안 돼요. 지금 더 보내려고 일부러 더 그러시는 거죠?"
"미안하니까 이러는 거잖아. 그리고 고작 이 정도로 흔들리면 어쩌자는 거야? 내가 특별히 다정하게 한 것도 없는데."
"시치미 떼셔도 절대 안 넘어 갈 거에요."
"너야 말로 얘기 다른 쪽으로 돌리지 마. 징그러운 거 보기 싫지 않아? 냄새도 엄청 심하게 난다고. 애벌레 봤다면서."
"!!"
"또 그런 거 보고 싶은 거 아니잖아."
사람을 불에 지지고, 때리고 그러는데 좋은 냄새가 날 리 없다.
비앙카가 혹시나 그렇게까지 취향이 심각하게 변했을까 걱정을 담아 바라봤다.
일부러 징그러운 걸 떠올리라는 의미로 애벌레를 언급했는데, 다행히 보람이 있을 것 같았다.
"그...소름끼치는 녀석 언급 좀 안 해주시면 안 될까요?"
비앙카의 안색이 창백하다.
애벌레 얘기를 해서 비위가 제대로 상한 모양이었다.
"알았어. 네가 질색하는 걔보다 더 징그러울 거라고. 좋은 것만 보자. 응?"
"...알았어요. 주인님 뜻에 따를게요. 대신 그 인간, 꼭 제가 바라는 대로 해주셔야 해요."
"당연하지. 그래서 뭐 어떻게 해줄까?"
"저는...일단 그 새끼 면상을 봐야겠어요."
"그래."
"예쁘게 꾸밀 거에요. 화장도 하고, 머리도 세팅하고."
"옷도 최고로 맞춰주고 보석도 잔뜩 주마."
비앙카가 바라는 것은 자신이 예쁘게 꾸며서 놈의 앞에 나타나는 것이었다.
그녀가 왜 데인 남작을 보고 싶어 하는지는 충분히 납득이 됐다.
'네가 목숨을 걸고 그런 짓을 했어도 자긴 멀쩡하게 잘 살고 있다.' 라는 것을 알려주고 싶은 것일 거다.
기껏 목숨 걸고 일을 저질렀는데 욕을 듣고 감옥에 갇혀 버렸고, 죽이려고 했던 대상은 멀쩡하게 잘 살고 있는 것 아닌가?
분명 비앙카의 생존 소식이 데인 남작을 좌절하게 만들 것이다.
"그리고 그놈한테 제가 느꼈을 고통을 고스란히 안겨줘야 해요. 여기서 중요한 부분은 춥고 배고픈 것을 느끼게 해야 한다는 점이죠. 불빛 하나 들어오지 않는 공간에서 벌레들이 사방에 돌아다니고, 바닥은 추워서 담요 하나로 겨우 버티면서 바들바들 떨며 밤을 보내는 거에요. 아마 깊게 잠들지 못할 걸요?"
"그거 상상만 해도 끔찍하네."
"제가 그랬어요!"
이건 차마 못 막을 것 같다.
"그래도 여긴 숲 속보다 훨씬 사정이 나으니까 잠을 잘 수도 있겠죠. 그런 꼴은 못 봐요. 잠을 못 자게 괴롭혀야 해요. 벌레를 일정 시간마다 풀어주세요."
어우, 그건 좀.
"...기사니까 아마 그 벌레를 싹 다 잡아버리지 않을까?"
"벌레가 몸을 타고 오르는 그 끔찍한 기분을 느껴야 해요! 벌레가 부족하면 더 많은 벌레를 가져다가 풀어버리면 돼요."
안 해준다고 하면 안 될 것 같아서 순순히 그녀의 요구를 받아줬다.
"그래, 알았다. 그렇게 해주마."
"당연히 그러셔야죠. 그리고..."
"또 있어?"
"네! 고작 이 정도로 어떻게 만족을 해요? 당연히 더 있지."
비앙카는 조금의 양보도 없다는 듯 단호하게 말했다.
언제나 기준이 팍팍할 정도로 높은 비앙카에게 최대한 가능한 수준으로 열심히 설득을 해서 합의를 봐야 할 것 같았다.
"밥은 애벌레로 주세요."
"야."
"저는!! 3일을 굶고!!! 배고파서 애벌레를 먹을까 말까!! 진지하게 고민 했었다고요!!"
"진짜 먹지는 않았지?"
"당연하죠!"
목소리에 원한이 너무 깊어 보여서 얘가 진짜 먹었나 싶었는데, 그건 아닌 모양이다.
그런데 비앙카는 뭔가 숨기는 게 있는 듯 꼴깍 침을 삼켰다.
'진짜 먹은 건 아니겠지?'
어쩐지 애벌레에 대한 원한이 깊어 보이더니...
정말 해 달라는 대로 해줘야 할까?
내 걱정을 읽었는지, 비앙카가 분노하듯 외쳤다.
"저는 살면서 흰색 애벌레가 통통해서 맛있을지도 모른다고 자기 합리화를 하게 될 날이 있을 줄 몰랐어요!!"
"알았어, 알았어. 꼭 흰 애벌레로 밥 줄게. 다만 먹는 것까지는 내가 강요 못해."
강제로 입 벌려서 먹으라고 강요할 수 없다는 뜻이었다.
"좋아요. 저는 배고파서 그 애벌레를 먹을까말까 고민하는 것까지를 바라는 거니까요."
비앙카는 그 정도에 만족한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이제 다 끝난 거지?"
"아뇨? 아직 한참 남았는데요?"
"....."
비앙카는 인성질로 그런 짓을 당해 놓고 크게 교훈을 느낀 게 없는 모양이다.
아니면 이건 상황이 다르다고 생각한 걸까?
어쨌든 호언장담을 했으니 달래기 위해서라도 한 풀이를 좀 더 들어줘야 할 것 같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