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hapter 821 - #96. 진해솔 (125)
데인 남작은 좋지 못한 상대를 적으로 만들었다.
과연 비앙카답다 싶은 고문들이 데인 남작을 괴롭히기 시작했다.
내가 반드시 누군가와 척을 져야만 하는 상황이라면, 적어도 나는 비앙카를 척지는 사람으로 선택하지 않을 것이다.
그녀는 악의에 민감하고, 사람을 처절하게 만드는 것에 재미를 느끼는 괴상한 취향을 가진 사람이었다.
'그러고 보니 비앙카가 좋아하는 사람을 괴롭히는 건 본 적 있어도 적대적인 사람을 괴롭히는 건 본 적이 없었네.'
적어도 애정하는 사람을 괴롭힐 때보다 더 참혹하지 않을까 짐작을 하고 있긴 했다.
그리고.
나는 이번 기회에 그녀가 적대적인 사람에게 어떻게 응징을 가하는지 확실하게 볼 수 있었다.
비앙카는 대범하게 괴롭힐 줄 알았는데, 의외로 적대적인 사람을 괴롭힐 때는 굉장히 치졸하고 쪼잔하게 괴롭혔다.
으아아아악!!!! 그만해!! 차라리 죽여!!!
아침은 미친 듯이 뜨거워서 땀이 줄줄 흐르고, 밤에는 추워서 온 몸을 덜덜 떨게 만든다는 극과 극 체험의 고문이 매일매일 이어진다.
아침에 딱 한 번 넓은 그릇에 살아 있는 흰색 애벌레가 잔뜩 담겨 온다.
당연하지만 데인 남작은 발작하듯이 그릇을 뒤집어 엎었고, 애벌레를 신발로 짓밟아버렸다.
그리고 다음날, 똑같은 그릇에 처음 애벌레를 줬던 양의 딱 반만큼 애벌레가 담겨져 나왔다.
데인 남작은 똑같이 그릇을 엎었다.
그리고 다음날 굶주리며 포기한 채 누워 있으니 전 날의 반 정도 되는 애벌레가 담겨져 있었다.
'못된 장난질이지. 사람을 열 받게 하기 딱 좋고. 특히 데인 남작 같은 사람이 이런 거에 당하면 더 열 받아 하기 마련이거든.'
먹지 않을 때마다 양을 반으로 뚝 잘라버리는 거다.
어차피 안 먹을 애벌레지만, 점점 줄어가는 양을 보면 괜히 짜증이 팍팍 치솟을 것이다.
'나 였으면 고작 저렇게 소리 지르는 걸로 안 끝나지.'
이 모든 것은 당연하지만 비앙카가 손수 주문한 것이었다.
그녀가 황궁에 돌아온 며칠 만에 일어난 변화였다.
비앙카는 하겠다고 말했던 것을 그대로 실천했다.
공작 새처럼 한껏 자신을 꾸미고 감옥에 가서 데인 남작을 면회하고 돌아온 것이다.
그리고 그때부터 지금 데인 남작이 겪고 있는 추잡한 괴롭힘이 시작 됐다.
이건 비앙카가 그렇게 해 달라고 한 거였다.
그래야 자기가 한 거라는 걸 알 거라고 말이다.
"데인 남작 살이 쫙쫙 빠지고 있어요. 오늘 가서 보니까 얼굴이 거의 반쪽이 됐더라고요. 후후후!"
"..."
피 보는 고문을 하는 것보다 더 악질적인 것 같긴 한데, 그래도 보는 게 역한 고문을 당하는 건 아니다 보니 비앙카에게 데인 남작을 면회하는 것을 허락해줬다.
그러자 그녀는 수시로 괴로워 하는 데인 남작을 보러 가며 사람 속을 뒤집어 놓고 오곤 했다.
'진짜 불쌍하다.'
나는 이제 데인 남작이 트롤짓을 한 걸 겸허하게 용서하기로 했다.
지금도 시달리고 있지만, 앞으로 시달릴 것들을 떠올려보면 그 사람을 도저히 더 미워할 수가 없더라.
요즘에는 그냥 명복을 빌어주고 있었다.
"이제 속이 좀 시원해? 적어도 네가 고생한 거의 몇 배 이상은 고생하고 있잖아."
"저렇게 감옥에 갇혀서 고생하는 꼴을 보니까 속은 시원하죠. 근데 분이 풀리지는 않네요. 제가 떨어져서 죽을 뻔한 건 못 풀었잖아요."
낭떠러지에 떨어졌던 기억에 대한 분노.
그것이 아직 비앙카의 마음 속에 남아 있던 모양이다.
"데인 남작이 큰 죄를 짓긴 했지만, 나름 귀족이야. 오래 가둬봤자 좋을 거 없거든. 그쪽 가문에서 어떻게든 데인 남작을 살려보겠다고 난리 치고 있으니까."
물론 가문 쪽의 압박을 막아주는 건 내가 해야 하는 일이었기에 막아주고 있는 중이기는 하다.
데인 남작이 저지른 죄는 명령 불복종과 살인 미수였는데, 여기서 아이러니하게도 평민인 비앙카를 죽이려 했던 살인 미수보다는 명령 불복종이 더 무거운 죄였다.
특히 데인 남작이 어긴 명령 불복종은 황제의 밀명이기까지 하지 않았는가?
데인 남작의 가문에서도 살인 미수보다 명령 불복종을 들었을 때 기겁을 하더라.
'어처구니가 없다니까. 그래도 가문 사람이니까 살리려고 노력은 하는 것처럼 보이는데...'
데인 남작이 가문의 방계 쪽이라서 그런지 직계 가족들은 열심히 구명을 하려고 했지만, 그 외의 이들이 보여주는 태도는 썩 적극적이지 못하다.
황제의 명령을 불이행했다는 점에서 괜히 구명 요청을 했다가 내게 밉보일까 걱정이 되는 모양이었다.
개인적인 소감으로는 데인 남작처럼 우직한 기사가 비앙카의 인성질을 못 버티고 트롤 짓하게 된 것은 정말 안타까운 일이라고 생각한다.
그 행동만 하지 않았다면 내 신뢰를 사서 금방금방 승진해 알차게 써먹었을 인재였다.
'그만큼 믿고 있었던 놈인데, 그 믿음을 홀랑 배신해서 더 열이 받은 거였고.'
애초에 비앙카의 일은 극비사항.
데인 남자에게 그 사실을 공유했다는 게 그를 믿고 있다는 증거였었다.
하지만 원래 믿었던 놈이 배신을 하면 더 화가 많이 나는 법 아니겠나?
그래서 데인 남작이 비앙카에게 당하는 걸 가만히 보고 있는 것이었다.
애벌레를 밥으로 주는 것은 인권을 무시하는 행동이나 다름없었다.
법은 아무리 범죄자라고 해도 인권은 챙겨줘야 한다고 말하지 않는가?
'피해자 입장에선 개소리지.'
범죄자 인권 생각해준다고 제대로 된 처벌을 안 받고 희희낙락하는 꼴을 피해자가 어떻게 봐야 하나?
내가 저 새끼를 용서하지 않았는데, 누가 감히 대신 용서를 해주느냔 말이다.
내가 데인 남작의 상황이 딱하다고 생각하는 것 이외로, 비앙카가 만족할 때까지 괴롭히는 것을 막지 않는 이유였다.
'다만 데인 남작을 괴롭히는 걸 핑계로 돌아가지 않는 건 곤란해.'
치졸하게 괴롭힐 거라고 생각을 못했다.
마차에서 하던 말처럼, 끔찍한 고문을 가해서 죽여버릴 거라고 생각했으니 말이다.
그런데 지금의 비앙카를 보면 데인 남작을 죽일 생각이 전혀 없는 것 같았다.
'생각해보면 비앙카 스타일이 원래 두고두고 옆에서 괴롭히는 게 맞기는 해.'
데인 남작이 저지른 죄가 있으니 그걸 갚을 때까지는 이 사람을 괴롭혀도 된다는 허락이 떨어진 거다.
가뜩이나 재밌게 놀던 게오스 황제와 떨어져서 아쉬웠을 텐데, 그 아쉬움을 데인 남작에게 풀고 있는 것으로 보였다.
"아무리 그래도 슬슬 그만해야지. 이러다가 2년 채우겠어."
"아직 부족한데요?!"
"고작 일주일 밖에 안 됐는데 사람 꼴이 너무 불쌍하더라. 널 밀어서 낭떠러지로 떨어트린 건 못 갚았으면 딱 삼일 더 줄 테니까, 그 안에 해 놔. 삼일이 내가 줄 수 있는 최대야."
이 정도 괴롭혔으면 슬슬 마음의 응어리가 다 풀려야 한다.
'그냥 내버려두면 한도 끝도 없이 괴롭히려고 할 테니까.'
시일을 정해두면 그때까지는 확실하게 분이 풀리게 만들어 놓을 것이다.
내가 아는 비앙카라면 그럴 여자였으니까.
그리고 약속했던 삼일의 시간이 흘렀다.
"끝난 거야?"
"네. 풀어주세요."
"정말 그걸로 되겠어? 널 죽이려고 했던 사람을 살려둬도?"
"어차피 작위는 빼앗아주신다고 하셨잖아요. 저는 그걸로 만족해요."
지난 삼일간 그녀가 무슨 짓을 할지 관심을 기울이지 않았다.
괜히 봤다가 그건 좀 심한 거 아니냐며 하지 말라고 만류를 하게 될 것 같았기 때문이다.
'죽을 뻔한 건데 심한 게 어딨어? 심한 짓을 한 건 데인 남작이 먼저가 맞아.'
그리고 비앙카는 삼일 후 깔끔하게 데인 남작을 놓아주었다.
그에게 무슨 짓을 했는지는 잘 모르겠다.
하지만 비앙카를 다시 본래의 세계로 돌려보내고 데인 남작을 풀어주기 위해 감옥에 갔을 때, 그의 표정에는 생기가 조금도 남아 있지 않았다.
"고생했다."
데인 남작에게 딱 한 마디, 위로를 해줬는데 그게 바로 고생했다는 말이었다.
그는 놀랍게도 내 말을 듣자마자 눈물을 뚝 하고 흘렸다.
비앙카에게 시달렸던 삼일이 고되긴 했던 모양이다.
초췌해진 그를 가족들이 바깥에서 초조하게 기다리고 있었다.
가족들은 살이 많이 빠지긴 했어도 잘린 곳 없이 성하게 가족의 품으로 돌아온 것에 감사할 줄 알았다.
'그냥 손가락이 잘리는 게 더 나았을 테지만.'
물론 검을 잡는 기사에게 손가락이 어떤 의미인지 잘 안다.
기사 작위를 빼앗기게 되긴 했어도 검술 실력이 사라지지 않는 이상 먹고 사는데 지장은 없을 것이다.
'평생 명예는 얻지 못하겠지만 말이야.'
지금은 혼이 빠진 것처럼 초췌하고 힘들어 보이지만, 저렇게 소중하게 생각해주는 가족들이 있다면 시간이 걸릴 뿐 회복할 수 있을 것이다.
비앙카가 돌아가고 난 이후.
게오스 제국 황실에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 것인지 알아보기 위해 보내두었던 이가 돌아왔다.
생각보다 오래 걸려서 왜 그런가 했더니, 귀족들이 철저하게 막고 있어서 첩자와 접근하기가 쉽지 않았다고 했다.
"게오스 황제가 쓰러진 게 맞았구나."
"예, 폐하. 시름시름 앓고 있다고 하옵니다."
"비앙카가 죽었다고 생각했나 보구나. 짐이 전하라고 했던 것은 전했는가?"
"황제에게 은밀히 서신을 전달했습니다."
"그래, 앞으로 어떻게 될지 지켜봐야겠군."
비앙카가 직접 작성한 서신을 첨부해서 내 서신을 게오스 황제에게 보냈다.
믿을지는 모르겠으나 우연히 괴한으로부터 도망치던 비앙카가 우리 제국의 황족과 연이 닿았고, 그녀가 우리 제국으로 들어와 보호 받고 있다고 말이다.
비앙카가 게오스 황제에게 꼭 연락을 해야 한다고 간곡하게 부탁을 해서 어쩔 수 없이 서신을 함께 동봉한다는 거짓말을 잔뜩 적어두었으니...
'아픈 와중이라면 무조건 믿을 거야.'
더군다나 게오스 황제에게 나에 대한 이미지가 썩 나쁘지 않은 것으로 안다.
이번 일은 의심해보면 참 의심할 구석이 많지만, 게오스 황제라면 의심보다는 믿고 싶어 할 것이기에 걱정하지 않기로 했다.
'죽은 줄 알았던 소중한 사람이 살아 있다는데, 죽었다고 생각하는 것보단 훨씬 믿고 싶겠지.'
게오스 황제가 과연 비앙카의 필체까지 알아볼지는 잘 모르겠다.
'비앙카를 다시 보고 싶으면 귀족들이랑 치고 박고 싸우라고.'
비앙카가 작성한 편지에는 그곳이 너무 무서워서 갈 수 없다고 적었다.
거기다가 이번 납치 사건과 독살 사건으로 몸이 많이 안 좋아져서 오랜 여행이 불가능한 상태라고 적어두었고 말이다.
그 정도면 게오스 황제도 비앙카를 게오스 제국으로 데려 오는 게 불가능하다는 것을 납득할 것이다.
'그래도 계속 질척 대겠지.'
정말 무사한지 두 눈으로 보고 싶을 거다.
그럴수록 게오스 황제는 힘을 내서 귀족들에게 증오심을 보일 거다.
그녀가 자기 곁으로 돌아오지 못하는 이유가 바로 귀족들 때문이니까.
게오스 제국은 점점 수령에 빠질 것이다.
황제와 귀족의 다툼에 고통 받는 것은 백성들이 될 것이 분명했다.
게오스 제국민들에겐 안타까운 일이었으나, 게오스 제국을 노리고 있는 우리 제국에겐 더할 나위 없이 만족스러운 상황이기도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