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hapter 827 - #96. 진해솔 (131)
못 보낸다는 친구를 어처구니 없어 하는 여자는 완전히 나를 포기했는지 도끼눈을 뜬 채로 친구를 잡아 먹을 듯이 노려봤다.
그 살벌한 눈초리에 절로 오금이 저린다.
'좀비보다 더 무서운데?'
여자들의 싸움.
남자가 끼어들기엔 무리가 많다.
애초에 끼어든다고 해도 좋은 결과를 만들어낼 확률도 적다.
“좋은 돈 셔틀이긴 했지. 세상이 멸망하고 제일 좋은 게 뭔지 알아? 너도 별 거 없어져서 마음껏 하고 싶은 말 다 할 수 있다는 거야.”
“야!!!”
“내가 그동안 어릴 적 버릇을 못 버려서 그냥 당해주고 있었는데, 이제부턴 안 그럴 거야. 이번 기회에 뼈 저리게 느꼈어. 너는 도와준다고 해서 고마워 할 애가 아니잖아?”
"내가 뭘 그렇게 잘못했다고 이래!!"
"설명을 해줘도 못 알아 듣는 게 문제라는 건 생각 안 해봤니?"
두 사람 문제에 내가 끼어드는 것도 참 우스운 일이다.
'저러다가 설마 주먹다짐까지 가진 않겠지? 그래도 사이가 오래 되어 보이는데, 극단적으로 절교까지야 하겠어?'
저러다가 말 거다.
...부디 그랬으면 좋겠다.
원래 싸움 구경이나 불 구경이 재밌는 법이라는데, 나는 그 싸움의 원인이 된 상황인지라 계속 지켜보고 있을 수가 없었다.
더군다나 지금은 두 사람을 위해서라도 자리를 피해줄 필요가 있어 보였다.
내가 안 보이면 좀 낫지 않겠는가?
싸우는 두 사람을 뒤로하고, 다른 곳으로 이동했다.
잠깐의 소란이었지만, 귀가 얼얼하다.
‘여자들 싸움은 진짜….’
머리가 지끈거리고 아파온다.
후유증이 심각할 듯 싶었다.
‘그나저나 또 누구한테 말을 걸어야 하나.'
예상하지 못한 일로 시간을 많이 썼기에 서둘러 잠자리를 할 여자를 구해야 한다.
다만 밤이라서 그런지 돌아 다니는 사람이 거의 없어서 여자를 찾기가 힘들었다.
그렇다고 사람들이 많은 천막 쪽으로 가기도 뭐하다.
‘누가 봐도 섹스 할 상대 구하러 온 느낌을 풍길 텐데...’
동물원의 원숭이도 아니고.
그런 시선을 받고 싶지는 않았다.
결국 사람을 찾기 위해 눈을 감고 귀에 신경을 집중시켰다.
이렇게 하면 신체 능력이 뛰어난 이 몸은 먼 곳의 소리를 들을 수가 있다.
부스럭- 부스럭-
자박, 자박, 자박...
풀잎 스치는 소리.
흙 밟는 소리.
‘저쪽이다.’
소리가 나는 쪽으로 움직이니 역시나 여자를 한 명 만났다.
“어?”
반대편으로 오던 여자도 나를 발견하고 깜짝 놀란 표정을 짓는다.
“여긴 어쩐 일이에요, 이 시간에.”
복불복이었는데, 하필 의뢰인과 잘 아는 여자인 모양이다.
아는 척 하는 얼굴에 반가움이 서려 있었다.
한 번 잠을 잔 적 있는 여자인가 싶어서 유심히 살펴봤는데 다행히 내가 잊어버린 건 아닌지 처음 보는 얼굴이 맞았다.
다만 놀랐던 것은.
'좀 닮았는데?'
주아 누나와 얼굴이 비슷한 면이 놀라울 정도로 많았다.
게다가 쉘터 주민들 중에서 이런 미인이 있었을 줄도 몰랐고 마링다.
놀람을 감추고, 태연한 척 질문에 대답했다.
“그냥 돌아다니고 있었습니다.”
“이 늦은 밤에요? 오늘 그날이지 않아요?”
이 여성도 내가 오늘 뭘 하는 날인지 알고 있었다.
“...좀 난감한 일이 있었습니다.”
나는 여자에게 방금 있었던 일을 설명했다.
그러자 얘기를 다 들은 여자가 꺄르르 웃음을 터트렸다.
“진짜 그런 일이 있었다고요? 완전 웃긴다. 아하핫! 엄청 당황 했겠네요.”
“네, 그리고 보다시피 지금 도망치는 중인 겁니다. 네가 잘 되는 꼴은 도저히 못 보겠으니까 엿 되어 봐라! 뭐 이런 느낌이었습니다.”
“와~ 지금 가면 구경할 수 있을까요? 원래 구경은 싸움 구경이 제일인데.”
“아마 지금은 끝나지 않았을까요? 워낙 시끄럽게 싸워서 주변 사람들이 말렸을 겁니다.”
“아이, 아쉬워라. 좋은 구경 놓쳤네. 그 사람들, 누군지 몰라도 아마 징계 받을 거에요. 그러니까 마음에 담아두지 말아요."
"...징계를요? 그런 걸 바라진 않았는데요."
뜬금없이 징계를? 이란 생각이 들어 되물었는데, 여자가 어깨를 으쓱이며 시치미를 뗐다.
"쉘터에서 생기는 감정 싸움은 가장 조심해야 하는 일이잖아요. 분란을 일으켰는데 아무런 제지가 없으면 안 되죠. 쉘터에 해가 되는 일을 한 사람은 용서 못해요."
주아 누나를 닮은 그 여자가 정색을 하면서 굉장히 단호하게 말한다.
싸움이 났다고 얘기를 할 때까지만 해도 까르르 웃으면서 또래 여성과 다를 바 없는 반응을 보이던 사람이었는데 말이다.
"이렇게 할 일 없이 돌아다니는 걸 보면 밤을 함께 보낼 사람이 필요한 거죠? 될 수 있으면 참견을 안 하려고 할 텐데, 곤란해보이니까 도와드릴까요?"
"어떻게 도와주시려고요."
본인이 그 여자가 되겠다고 말하는 건 아닌 것 같았다.
"방에 가 계시면 제가 괜찮은 분한테 몰래 가보라고 전해드릴게요. 스스로 구하고 싶으시면 어쩔 수 없고요."
"좋은 분에 혹시 제가 아는 사람이 있습니까?"
"음...정현씨? 아니면 하윤씨? 다인씨? 채원씨도 있네요."
그녀의 입에서 여러 여자들의 이름이 나온다.
이름을 말해봤자 얼굴을 아는 사람은 한 명도 없었다.
"그 중에 본인은 없네요."
눈치 껏 이름 속에 본인을 집어 넣지 않았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해서 말하니 그녀가 눈을 동그랗게 뜬다.
“저를요?”
"생각해보신 적 없으십니까?"
"음...임신은 좀 곤란해요. 아무래도 몸이 무거워지면 쉘터를 보호하는데 문제가 생기잖아요. 아직 쉘터는 제가 자리를 비워도 아무 문제 없이 버틸 수 없을 거에요."
"오로지 쉘터 때문에 거절하시는 걸로 보이는군요. 임신에 대해서는 긍정적으로 생각하고 계신 건가요?"
"오늘따라 짓궂으시네요. 쉘터가 정말 제가 필요 없어질 만큼 안전해진다면 뭐..."
말을 끝 맺지 않았지만, 그때라면 임신을 생각해볼 수도 있다는 뉘앙스였다.
나는 이 여자가 마음에 들었다.
주아 누나를 닮은 얼굴도 그렇고, 책임감 있는 모습들이 적어도 오늘 고른 여자들과 비교가 안 되는 차이를 보였다.
"섹스의 본래 목적은 임신이 맞지만, 놀이처럼 가볍게 하루를 즐기는 경우도 심심치 않게 있습니다."
"!!"
"사실 방금 전까지만 해도 오늘은 날이 아닌 것 같아 아예 하지 않을 생각을 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제 마음을 돌린 분이, 다른 사람을 보내겠다고 해서 조금 난감한 상태고요."
즉, 임신이 부담 된다면 그런 건 생각하지 않고 오늘 밤 같이 보내는 건 어떻겠냐는 의미였다.
현대 사회에서 섹스가 임신을 위한 수단이기만 했던 건 아니지 않은가?
단숨에 내 말의 의미를 눈치 챈 그녀가 어색한 미소를 지었다.
"...저랑 섹스하자는 거에요?"
"네."
"놀이 같은 느낌으로? 클럽에서 원나잇 하듯이?"
"맞습니다."
"갑자기 나를 왜요?"
"적어도 오늘 제가 고른 여자 중에 최고의 선택일 것 같아서 말입니다."
여자가 난감했는지 마른 입술을 혀로 핥았다.
"되게 뜬금없는 일이긴 한데, 기분이 썩 나쁘지는 않네요. 그냥 내가 끌렸다는 거잖아요. 의무적으로 하는 그런 게 아니라."
"정확히 보셨습니다."
"당신...은근히 바람기가 있네요. 이런 사람인 줄 몰랐는데."
내가 의뢰인이었다면 당연히 이런 일이 생기지 않았을 거다.
다른 사람이니까 가능한 일이었다.
"사귀자고 질척거리는 거 아니죠? 대놓고 양다리 걸치는 건 싫어요."
"그 정도로 저를 깊게 생각하십니까?"
"...내가 그 정도는 아니라는 거죠? 알았어요. 김칫국 적당히 마실게요. 옛날이었으면 이런 식으로는 한 명도 안 넘어갔을 거에요."
얼굴이 사기라서 괜찮습니다.
잘만 넘어오던 걸요.
속으로 그렇게 생각하며 주아 누나의 닮은 얼굴을 유심히 살폈다.
보면 볼수록 닮았다.
'신기하네. 그래도 우리 주아 누나가 훨씬 예쁘긴 하다.'
주아 누나는 여배우다 보니 열심히 외모를 가꾸고 또 내가 준 아이템들로 타고난 외모의 한계를 뚫었다.
하지만 그녀는 여배우도 아니고, 아포칼립스에서 외모를 챙겨가며 살 수도 없는 지라 관리 되지 못한 순수함이 얼굴에 남아 있었다.
"하룻밤 즐기는 걸 저랑 하고 싶은 거에요?"
그녀는 선뜻 결정을 내리기 힘들었는지 대답 대신 다른 질문을 해왔다.
"네, 그리고 쉘터가 안전해지면 하겠다는 그런 말. 앞으로 하지 마십시오."
"왜요??"
"그런 식으로 기준을 잡아가며 노력해봤자 한계만 빨리 올 겁니다. 쉘터가 안전해지는 기준을 잡아 두긴 했습니까? 그냥 무작정 언젠가 그렇게 되겠지 라는 생각만 했죠?"
"...정곡을 찌르시네요."
"그런 식으로 굴면 몇 년이 지나도 마음에 안 찰 겁니다."
지금은 A라는 게 마음에 안 들었다면, 시간이 지났을 때 A가 해결 되어도 또 다른 문제 B가 튀어나와서 골치 아프게 만들 거다.
그러니 하고 싶은 게 있으면 뒤로 미루기보단 기회가 왔을 때 저질러 버리는 게 맞다.
그런 식으로 인생 살아봤자 결국 나중에 생각해보면 후회만 될 게 뻔하지 않은가?
'그때 해볼 걸...이라는 생각만 들겠지.'
아포칼립스 세상에서 너무 먼 미래를 기대하고 있으면 본인만 힘들어지지 않겠는가?
내 말에 생각이 깊어졌는지 그녀가 선뜻 입술을 떼지 않는다.
다행인 것은 내 말을 듣고 진지하게 고민을 시작했다는 점이다.
'자기 의견이랑 틀리다고 생각하면 아예 귀를 막아서 안 들으려고 하는 사람도 있는데, 저 정도면 똑똑한 거지.'
한참 고민하던 그녀가 어렵게 입을 뗐다.
“어…음...좀 당황스럽네요. 조언은 감사해요. 앞으로 더 깊게 생각해볼게요. 그리고 오늘은...오늘은...."
쉽사리 대답을 하지 못하는 그녀.
나는 부담 갖지 말라는 의미로 말했다.
"거절해도 괜찮습니다. 애초에 전 오늘 하지 않으려고 했으니까요."
한 번 안 한다고 미션이 실패한다 거나 배상을 해야 한다 거나 하는 일은 없다.
그런 쪽으로는 의뢰인이 매우 프리하다.
"한 번도 생각 해본 적 없는 일이어서 결정을 내리는 게 쉽지가 않네요. 저는 그냥 쉘터를 더 안전하게 만들기 위해서 그럴 필요가 있다고 생각했던 거거든요. 막 거창하게 대의를 생각하고 있었던 건 아니었어요. 근데 말씀대로 곰곰이 생각을 해보니까 만족할 만큼 쉘터가 안전해진다는 기준이 얼마나 되는지 구체적으로 생각을 해본 적은 없었더라고요.”
"아직 늦지 않았습니다."
생각을 바꾸기에 충분한 시간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