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hapter 834 - #96. 진해솔 (138)
의뢰인에게 임신에 대한 조언을 쏟아내고, 상점에서 구매하면 좋은 것들도 잔뜩 추천을 해줬다.
이렇게 늘어놓으니까 생각한 것보다 훨씬 챙겨야 할 게 많다는 걸 느꼈다.
당연하지만 의뢰인은 나보다 더 기겁을 하고 있었다.
그는 아이를 낳는 거에 이토록 많은 신경을 써야 한다는 걸 몰랐던 것 같다.
-휴...정신이 하나도 없네요. 기억을 다 할 수 있을지 모르겠습니다.
"저도 말을 쭉 하다 보니 끝도 없이 나오네요. 하하."
말하는 나도 정신이 어질거렸으니 말이다.
그래도 어디 하나 빠질 곳이 없는 필수 용품들이었다.
-아이 낳는 거 하나에 이렇게까지 신경을 써야 할 줄은 몰랐습니다. 이것들이 꼭 필수적으로 있어야 한다는 말씀이시죠?
"하나도 포기 못하죠. 아니, 직접 경험해보면 아십니다. 이게 꼭 필요한 것들이구나 하는 걸요."
-갑자기 막막해지는군요.
“애 낳는 게 전부가 아니죠. 그때부터 시작인 거에요.”
진정한 육아 지옥.
뱃속에 아이가 자라고 있을 때는 어서 나왔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 것이고, 밖으로 나오면 그런 생각도 못할 정도로 아찔해질 것이다.
-저희 쪽은 그런 세심한 것까지 모두 신경 쓰면서 챙길 겨를이 없습니다. 아시다시피 환경이 열악하니까요.
"그럼 적어도 임산부들은 꼭 챙겨주십시오. 아이를 낳으면 여자들은 몸이 많이 상합니다."
-말씀하신 것만큼 세심하게 모두를 다 챙길 수는 없습니다. 써야 할 곳들이 많습니다. 적어도 아이들이 무사히 자랄 수 있도록 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의뢰인의 말은 아이를 낳을 임산부의 건강보다는 아이들을 키우는데 온 힘을 다 쓰고 싶다는 의미일 것이다.
"엄마가 건강해야 아기도 건강합니다. 그걸 생각해주셨으면 좋겠네요."
-...알겠습니다. 진지하게 고민해보겠습니다.
아빠가 된다는 건 정말 쉽지 않은 일이다.
지금도 가끔 내가 괜찮은 아빠가 맞는지 걱정이 들곤 한다.
의뢰인도 부디 아빠가 될 준비를 잘 하기를 바란다.
“사랑하지 않은 사람의 아이라고 해서 그 아이가 내 피를 이은 아이는 아니지 않습니까. 핏줄이라는 게 괜히 당기는 게 아닙니다. 낳았으면 책임을 져야 하는 겁니다. 그리고 우리는 그럴 능력이 있죠.”
상황이 특이하다 보니, 이 남자가 혹여나 태어난 아이들에 대한 책임감이 적지는 않을까 걱정도 됐다.
-그럴 능력이 있기야 하죠. 다만 상점을 이용하는데는 한계가 있습니다. 사람들에게 아이템의 존재를 들켜선 안 된다는 제한이 있지 않습니까?
아아.
나는 가족 한정해서 제한이 풀려 있는데, 이 남자는 그 제한을 풀지 못했던 모양이다.
이걸 조언을 해줘야 하나 고민했는데 아무래도 환경이 다르다 보니 그는 내 경우처럼 한정적으로 제한을 풀어주는 일은 없을 것 같았다.
'그쪽 세계에서 상점 물건들을 적극적으로 쓰기 시작하면 밸런스가 붕괴 될 거야.'
어쩌면 살아있는 신으로 추앙을 받게 될 지도 모르는 위험한 일이었다.
그들도 이런 부작용을 모르지 않을 텐지, 아마도 나처럼 풀어주는 건 불가능하지 않을까?
'나 같은 경우에는 상점 아이템을 써봤자 섹스나 미용에 관련 된 것들이 대부분이었으니까 풀어준 거지.'
어떤 조언을 해줘야 할까 고민하다가 그나마 현실적으로 도움이 될 만한 작은 조언을 건넸다.
“지금은 현대 문명이 많이 사라졌지만, 거기도 병원은 남아 있지 않습니까? 당신이라면 좀 무리를 해서라도 병원에 있는 시설을 가져올 수 있다고 생각하는데요. 정확히는 사람들에게 납득을 시킬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사람들이 납득할 수 있는 퍼포먼스를 보여주고, 상점에서 물건을 구매해서 쉘터에 두는 거다.
그 정도 잔머리 굴릴 융통성은 있을 거라 생각했는데, 의뢰인은 내 말에 기발한 생각이라며 깜짝 놀라했다.
-아! 그런 식으로 해도 괜찮겠군요. 기계를 다룰 전문 지식이 필요하긴 하겠지만 그건 이리저리 만져보다 보면 답이 나오겠죠.
“맞아요. 저도 의사 선생님께서 해주시는 것들을 자세히 알지는 못하지만, 상점에는 전문적인 지식이 없어도 충분히 그만한 효과를 낼 수 있는 물건들이 많지 않습니까?”
물론 몸에 좋은 것의 경우에는 꼬치꼬치 캐묻는 경향이 있는데, 우리 멤버들처럼 매너 좋게 적당히 모르는 척 굴어주는 경우가 아니라면 조심해서 쓸 필요가 있기는 했다.
'너무 밸런스를 망가트리는 물건을 쓰는 걸 자제하면 돼. 특히 전문적인 지식이 필요한 경우라면 사람들이 큰 관심을 안 보일 거야.'
그렇기에 오히려 전문적인 지식을 가진 사람이 없다는 게 이득일 수 있다.
상식을 벗어난 기계가 있어도 그게 정상이 아니라는 걸 모를 테니 말이다.
“그리고 아직 다 끝난 게 아닙니다. 한참 더 남았어요. 얘기를 하다 보니까 잊어버렸던 것들이 불쑥불쑥 생각나네요.”
-...여기서 더 말입니까?
“장비빨! 육아는 장비빨이 90%입니다. 장비가 좋으면 아이도 편하고 부모인 저도 편한 거거든요.”
육아는 장비빨!
이건 직접 경험해보지 않는 이상 공감하지 못한다.
-아마 육아는 쉘터 주민 전체가 공동으로 맡을 겁니다. 누구의 아이든 모두 미래를 위한 소중한 존재가 될 테니까요.
“좀 궁금한 게 있는데, 아이들이 크면 결혼은 어떻게 한답니까?”
-그 부분은 아직 해결하지 못했습니다. 다만 쉘터에 꾸준히 생존자들이 들어오고 있는 상황이라서 마냥 해결 방법이 없는 건 아닙니다.
나이 차이가 꽤 많이 날 테지만, 적어도 핏줄이 이어지지않은 사람과 이어질 수 있다는 의미이다.
그리고 공동육아는, 현재 그들의 세계를 고려 했을 때 나쁘지 않은 선택이었다.
“육아는 전문가한테 맡기는 게 맞죠. 잘 생각하셨네요.”
-아직 아이가 나오려면 많이 남아있지만, 상황상 지금부터 준비하려고 합니다. 항상 도움을 주셔서 감사합니다. 그리고 이제 의뢰는 마무리 하는 게 맞는 것 같습니다.
의뢰를 마무리 한다고?
“마무리요? 벌써 말입니까?”
-이번에 총 11명이 임신을 했다는 게 밝혀졌습니다. 아직 밝혀지지 않은 사람도 있을 수 있으니 더 나올 수도 있고요.
11명?
이야….
내가 그렇게 많이 안았다고?
시간이 얼마 된 것 같지도 않은데 11명이 임신을 했다면, 그보다 몇 배 더 되는 여자들을 안았다는 의미가 된다.
거기다가 임신이라는 게 해야지! 하면 되는 게 아니지 않은가?
그런 점에서 11명이나 임신을 했다는 말은 나를 깜짝 놀라게 만들었다.
정자가 얼마나 활발하게 활동을 하기에 몇 번이나 했다고 11명이나 임신을 한단 말인가?
많으면 3~4명 정도 임신을 하지 않았을까 생각했는데 10명 이상은 예상 밖의 숫자였다.
“굉장히…힘이 좋으시네요.”
이건 내 능력이라기보단 의뢰인의 신체 능력이 임신 쪽으로 탁월했기 때문일 것이다.
-…아무래도 신체 능력이 일반적이지 않으니까요.
“그럼 11명으로 만족 하시는 겁니까?”
-우리가 약속 되어 있는 숫자는 5명~10명 사이였죠. 기대를 넘어서서 더 많이 해주신 겁니다. 의뢰는 완벽하게 성공해내셨습니다.
의뢰가 끝났다는 말에 어쩐지 묘한 감정이 들었다.
시원해야 하는데, 좀 저급하게 표현하자면 똥 싸고 뒤 안 닦고 나온 기분이라고나 할까?
“그럼 당장 이번 주부터는 빙의하지 않아도 된다는 말이시군요.”
-혹시 이곳에서 정리해야 할 일이 있으십니까?
내 목소리에 망설임을 느꼈는지 그가 눈치 좋게 물어온다.
"애석하게도 없지는 않은 것 같습니다."
-저라고 왜 모르겠습니까? 깨어나면 그날 밤 일을 얘기하며 밝게 웃는 여자들의 표정을 다 봐왔는데 말이죠.
의뢰인은 그동안 한 번도 티내지 않았던 얘기를 마지막이란 생각이 들었는지 속에 있던 생각을 털어놓았다.
“곤란하셨을 것 같네요. 사실 저도 모르는 얘기를 하면 대처하기가 어려웠거든요.”
-저는 안 그러던 사람이 갑자기 너무 선 없이 다가와서 당황할 때가 많았습니다. 특히 선주씨 일은 특히 그랬습니다.
“선주씨요?”
선주라는 이름에 어쩐지 서늘한 직감이 찌릿하게 뒤통수를 꿰뚫고 지나갔다.
-예, 평소에 잘 알고 지내던 사람이었는데, 선주씨랑 밤을 보내셨더군요. 다음 날에 갑자기 팔짱을 껴와서 놀랐습니다. 거기다가 명백히 제게 호감이 있어 보였습니다.다른 여성분들도 그러긴 했지만…선주씨까지 그런 모습을 보여줄 줄은 몰랐거든요. 워낙 그런 쪽으로는 철저하게 철벽을 치시던 분이었으니까요.
“…혹시 연예인 지망생이었고, 예쁜 편이신 여자 분을 말씀하시는 거 맞습니까?”
-그 외모를 예쁜 편이라고 표현하는 건 아니지 않을까요?
역시!
내 직감이 경고했던 게 맞았던 것 같다.
“그 사람 이름이 선주였군요.”
-이름을 모르셨습니까?
“네. 그렇다고 아는 사이인 게 뻔한데 이름이 뭐냐고 물어볼 수는 없지 않습니까?”
-이선주입니다. 이름요. 다른 여성분 중에 이름이 궁금한 분은 더 없었습니까?
“어차피 더 이상 보지 못할 사람인데 이름을 알아 봤자 뭐하겠습니까?”
없다는 의미를 살짝 돌려서 말하니 그가 웃음소리를 냈다.
-하하. 마음이 약하신 줄 알았는데 맺고 끊는 게 의외로 철저하시네요.
“사는 곳이 다르지 않습니까? 시작이 불가능한 관계를 두고 괜히 미련 가질 생각 없습니다.”
사실 미련이 없는 건 아니다.
그녀와 내가 사는 세계가 같았다면, 분명 그녀를 내 가족으로 만들었을 것이다.
그만큼 느낌이 좋았다.
단순히 주아 누나와 얼굴이 닮았고, 민영 누나와 분위기가 비슷해서 그런 게 아니다.
그건 호감을 얻는데 기본 조건이 된 것일 뿐, 만약 그녀의 성격이 내 마음에 차지 않았다면 얻었던 호감도 허무하게 사라졌을 거다.
-그럼 굳이 정리할 시간을 드릴 필요는 없는 겁니까?
“…선주씨는 어떻게 됐습니까? 잘 거절하셨나요?”
선뜻 필요 없다는 말이 나오지 않는 이유는 뭘까?
역시 미련이 남았던 걸까?
머릿속을 깨끗하게 비워두고 다시 한 번 생각을 해봤다.
이대로 영영 그 여자를 만나지 못한다고 했을 때, 나는 훌훌 털어버릴 수 있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