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hapter 835 - #96. 진해솔 (139)
역시 후회할 것 같다.
-아뇨, 선주씨와는 이런 일이 있을 거라고 생각 못해서 제대로 대처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그 사람이랑은 자주 팀을 짜서 바깥으로 나가는 편이라 단호하게 거절할 수가 없거든요.
“이런.”
자주 얼굴을 봐야 하는 사이라면 거절하는 게 힘들다는 것이 충분히 이해가 된다.
“그 정리, 제가 해도 되겠습니까?”
-바라신다면 충분히 가능하죠. 일을 잘 해주신 덕분에 이제부턴 편하게 원하는 일만 할 수 있을 것 같거든요.
온갖 진상을 부리던 의뢰인이 마지막이 되자 크게 선심을 쓰고 있었다.
이 사람이 이런 스타일은 아니었는데 싶긴 한데, 좋은 게좋은 거라고 기회를 주는 걸 마다 하고 싶지는 않았다.
“그럼 이후로는 연인 분과만 하시는 겁니까?”
-예, 그렇게 되겠죠. 혼자서 영상을 보면서 익힌 거라 부족하긴 할 겁니다. 다만 연인과 함께 추억을 쌓아가는 게 의미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렇지!
역시 아이템이 효과 하나는 기가 막히다.
이제 좀 정상적인 반응을 보이고 있었다.
“그렇죠. 원래 하다 보면 익숙해지기 마련이니까요. 너무 조급하게 생각하지 말고, 천천히 하나씩 해봐요. 제가 할 수 있었던 거면, 당신도 할 수 있습니다. 아시잖아요?”
내가 저 몸을 써봤기에 안다.
사람이라는 게 각자 잘하는 분야가 있기 마련이 아닌가?
그가 나를 따라오는 건 불가능하다.
하지만 기준을 조금만 낮춘다면 얼마든지 행복하게 연인과 잘 지낼 수 있을 것이라 생각한다.
'갑자기 실력이 줄어들면 이상하게 느껴지긴 하겠지. 근데 그것도 몇 번 하다 보면 다시 좋아질 거고.'
초반만 어떻게 잘 해결이 되면 연인끼리 온전히 그 시간을 즐길 수 있을 것이다.
-그동안 큰 문제 없이 의뢰를 수행해주시고 제 문제를 해결하는데 도움을 주셨죠. 제가 드린 값 이상을 해주셨습니다. 감사합니다.
나는 감사 인사를 기꺼이 받아들이고, 그의 호의도 냉큼 받아들였다.
마무리를 깔끔하게 끝 맺음 하는 게 후회하지 않을 선택일 것이다.
특히 다른 건 몰라도 마지막으로 이선주씨를 만나서 대화를 나눠보고 싶었다.
“사람들한테는 이제 그만하겠다고 말하셨습니까?”
-아직 안 했습니다. 이 통화가 끝나면 바로 해야죠.
“고생 많으셨고, 앞으로 쭉 잘 되시길 바라겠습니다.”
-감사합니다.
여전히 좀비들이 돌아다니고, 살아남은 생존자들은 몇 되지 않는 세상.
멸망한 인류 문명을 다시 재건하기 위해서 많은 시간이 필요할 것이다.
나도 세상을 구해야 한다는 다소 무거운 짐을 어깨에 짊어지고 있지만, 그 수단이 ‘섹스’인지라 다소 가벼운 수준이었다.
반면 그는 세계를 다시 재건하기 위해 많은 일들을 해야만 한다.
사라진 문명을 다시 되찾고, 90%가 죽어버린 세계에서 새로운 생명을 싹 틔워야 한다.
누가 봐도 그가 해야만 하는 일들이 훨씬 어렵고 힘든 일이었다.
진상을 부렸다고 해서 그의 앞날에 재를 뿌리라고 기도를 하고 싶지는 않았다.
‘오히려 좀 잘 됐으면 좋겠달까? 너무 살기 팍팍해 보이잖아.’
거기서 고생하는 사람들을 보면 안쓰럽다.
내가 사는 세상에서 그곳을 들락날락 거리다 보니 두 세계를 더 확실하게 비교할 수 있었고, 자연스럽게 그쪽 세계의 사람들을 동정하게 됐다.
의뢰인과 약속 된 시간이 오기를 기다리며 선주씨와 만나면 어떤 말을 할지 생각을 해봤다.
그녀가 상처 받지 않게 관계를 정리하고, 이해 시켜야 한다.
‘시간이 더 있을 줄 알았는데, 의뢰가 너무 빨리 끝나버렸어….’
누가 알았겠나?
의뢰인의 정자가 그토록 활발할 줄.
섹스에 눈을 뜬 그녀에게 ‘다음’의 경험을 꼭 만들어주고 싶었는데 그걸 아예 못하게 됐다.
어떻게든 잘 달래서 관계를 정리해야 했다.
의뢰인이 약속했던 날이 밝았다.
그동안 열심히 머리를 굴려서 그녀를 설득할 말들을 생각해 놓긴 했지만, 내가 준비한 말이 효과가 있을지는 잘 모르겠다.
‘잘 통하기만 한다면…납득하고 포기하겠지.’
내가 보기에 워낙 이성적인 사람인지라 계획했던 대로 말을 하기만 하면 그러겠다고 할 것이다.
‘싫다고 해도 어쩔 수 없는 상황이긴 해.’
의뢰인은 다른 여자에 관심이 없고, 이제 연인과의 더 나은 관계를 위해 나아가고 있다.
중요한 순간인데, 다른 여자가 끼어들어서 문제를 만든다?
그랬다간 세 사람 모두가 상처 받을 거다.
‘내가 시작했으니 해결도 내가 해야지.’
약속했던 시간이 되어서 마지막으로 빙의를 진행했다.
의뢰인의 몸에 빙의를 했다.
순식간에 의식이 변하면서 몸이 바뀐다.
눈을 뜨자마자 보이는 건 천장.
마지막이라고 생각을 하니, 방 안의 풍경이 새삼 색 다르게 다가온다.
‘그쪽 세계에서도 이런 느낌이려나?’
내가 오가는 세계는 총 3개.
그 중 하나는 오늘 정리하게 될 거고, 미션 때문에 오가고 있는 나머지 한 세계는 아직 시간이 좀 걸릴 것이다.
다만 언젠가는 그 세계도 이곳처럼 끝을 내야 하는 순간이 올 것이다.
‘적어도 지금보단 더 기분이 묘할 거야.’
내 아이가 자라서 황위를 이어받는 모습을 볼 때쯤이라면 나도 나이가 제법 들었을 것이다.
그때는 슬슬 연예인 일도 접고 사람들의 시선으로부터 벗어나 제 2의 인생을 준비하고 있을 것이다.
“음….”
짧게 목소리와 몸 상태를 확인하는 과정을 걸친다.
몸이 바뀌면서 느끼는 것도, 움직이는 속도도 모두 달라지기 때문에 이런 과정을 꼭 거쳐야 움직이는 게 편했다.
“이선주…이제야 처음 불러보네.”
몸 상태를 확인하고 난 이후에는, 다시 이곳에 온 이유인 그녀의 이름을 낮은 목소리로 불러봤다.
의뢰인에게 들어서 겨우 알게 된 이름이다.
선주씨에게 좋은 소리를 하려고 온 게 아니라는 점이 안타깝지만, 그래도 곧 얼굴을 본다는 점 하나는 마음에 들었다.
“혹시 선주씨가 어디 계신지 아십니까?”
밖으로 나와서 아무나 붙잡고 선주씨의 이름을 말하며 있는 곳을 물어보았다.
“선주 언니요? 글쎄요.”
“선주씨라면 아마 보수 공사 도와주고 있을 걸요? 힘 쓰는 곳이 필요하다고 했던 것 같아요.”
몇 차례의 사람을 거쳐 드디어 선주씨의 위치를 알게 됐다.
의뢰인의 배려 덕분에 아직 날이 다 저물기 전에 빙의를 한 상태였다.
처음으로 날이 밝은 상태에서 쉘터를 보게 됐는데, 생각보다 쉘터 내부가 활발하고 밝은 분위기를 내고 있었다.
“사람들도 은근히 많네.”
대부분 여성들로 구성 되어 있지만 야무지게 쉘터를 꾸려가는 모습은 든든하기 그지없다.
“여긴 어쩐 일이세요? 오늘 쉬신다고 하지 않았어요?”
“아.”
한참 건설이 진행 되고 있는 곳에 도착을 하자 사람들이 바로 아는 척을 해왔다.
“볼 일이 있어서 잠깐 들렸습니다.”
“무슨 일인데요?”
“잠깐 이선주씨를 빌려도 되겠습니까?”
“아휴, 당연히 되죠. 그만 하고 들어가라고 했는데 계속 버티고 있으니까 빨리 데려가요. 선주 언니 힘 엄청 많이 썼어요. 쉬어야 해.”
다행히 그녀를 데려가는 걸 다들 환영하고 있었다.
내 조언을 받긴 했지만 사람의 성격이 쉽게 고쳐지는 건 아니었다.
그녀는 여전히 쉘터를 위해 하루의 대부분을 사용하고 있는 걸로 보였다.
“어쩐 일이에요? 무슨 일이라도 있어요?”
내가 그녀를 부른다는 게 쉘터에 큰일이 생겼다는 걸로 들렸는지 굉장히 다급하게 달려와서 물었다.
“공적인 일로 부른 건 아닙니다. 개인적으로 대화를 좀 나누고 싶어서요.”
“개인적인 대화…? 그걸 나랑 하겠다고요? 지금?”
내 말이 뭘 의미하는 것인지 알기는 하는 걸까?
애석하게도 그녀는 긍정의 의미로 느껴진 모양인지 얼굴에 미소가 서렸다.
기대감이 잔뜩 서려 있는 얼굴인데, 제대로 호응을 못해준다는 게 안타까웠다.
“알았어요! 잠깐만 기다려요. 후딱 씻고 방으로 갈게요! 기다리고 있어요.”
"제 방에 말입니까?"
"거기 말고는 딱히 얘기 나눌 곳도 마땅치 않잖아요. 공사 하느라 다들 바쁜데."
"그건 그렇죠."
대화를 나누려면 사람들이 없는 곳이 필요하니, 의뢰인이 지내는 방이 딱 좋기는 하다.
다만, 굳이 내 방으로 가자고 하는 말은 어딘가 비밀스러운 일을 기대하는 것만 같았다.
이런 오해는 좋지 않았다.
난감해져서 장소를 바꾸는 게 좋을까 고민했다.
“뭐에요, 둘이? 어디 가는 거에요?”
그때, 우리 두 사람의 심상치 않은 분위기를 다른 사람이 읽은 것인지 새초롬한 눈빛으로 물어왔다.
주변을 살펴보니 우리를 은근하게 주시하고 있는 시선이 꽤 있었다.
거기다가 그 질문을 하고, 관심을 보인 여자의 얼굴이 낯이 익었다.
‘여기 있는 사람들, 몇 번 잤던 여자들이네.’
놀라운 건 이곳 현장에서 일하고 있는 여자들이 내게 낯이 익는다는 점이다.
'쉘터에 도움이 되는 일을 한 사람이 즉, 건설 쪽에 도움을 많이 준 사람이 된 건가?'
확실히 건물을 짓는다는 게 굉장히 고되고 힘든 일이기는 하다.
솔선수범 하겠다며 나서기엔 꺼려지는 일거리인 것이다.
그렇다 보니, 일의 대가를 의뢰인이 자신의 몸으로 해결을 했던 것 같다.
'근데 이젠 그런 것도 안 하기로 했을 텐데.'
그래서 그런지 다들 표정이 좋지 않았다.
여자들이 충분히 임신을 했으니 더 이상 섹스를 하지 않고, 연인에게 집중하고 싶다고 했을 텐데, 떡하니 다른 여자를 불러다가 방으로 가려고 하니 말이다.
“선주씨한테 할 말이 잠시 있어서 따로 잠깐 부른 겁니다."
"정말 할 말 있어서 부른 거 맞으시죠?"
"그게 아니면 제가 선주씨를 따로 부를 이유가 어디 있습니까?"
"하긴, 그건 그렇지."
"맞아, 거기다가 선주씨잖아. 선주씨는 그런 사람 아니고."
주변 여자들이 맞장구를 쳐주니, 그제야 의심의 시선을 보내던 걸 멈추고 샐쭉하던 표정을 푼다.
역시 여자를 더 이상 안지 않겠다고 한 게 쉘터에 부정적인 영향을 끼친 모양이었다.
남자가 아예 없는, 아니....
'두 명이긴 한데, 한 사람은 나이대가 너무 높잖아.'
그런 상황에서 유일하게 성욕을 풀어줄 수 있는 대상이 더 이상 그 일을 하지 않겠다고 하니 아쉬웠던 것이다.
"맞습니다. 그리고 더 이상 하지 않겠다고 한 말이, 제 행동을 제한 시킬 이유는 되지 못한다는 걸 아셔야 할 겁니다."
“…….”
"그, 그래요. 그건 맞지. 눈이 맞아서 연인이 되겠다는 걸 우리가 무슨 이유로 막아."
몇 명은 내 말에 호응을 해줬지만, 꽤 많은 여자들이 내 말에 할 말을 잃고 입술을 삐죽였다.
'여기가 특히 아는 얼굴이 많다 보니까 어쩔 수 없지.'
내 의뢰는 끝났지만, 의뢰인이 앞으로 가야 할 길은 여전히 한참이나 남아 있는 듯 했다.
“가시죠.”
"흠흠, 네."
어서 가자고 눈짓을 하며 말하자 냉큼 나와 함께 발을 맞춰 걷기 시작한다.
"제가 너무 티를 냈나 봐요. 미안해요. 이렇게 개인적으로 말을 걸어온 게 그날 이후로 처음이다 보니 나도 모르게 진심이 튀어 나와버렸어요. 잘 숨겼어야 했는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