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hapter 836 - #96. 진해솔 (140)
티를 많이 낼 수밖에 없을 만큼 내가 개인적으로 다가와 주기를 기다린 것이 아니겠는가?
이렇게 잔뜩 기대하고 있는 사람에게 좋지 못한 말을 해야 한다는 게 안타까운 이이었지만, 달리 다른 방법이 없었다.
"무슨 얘기 하려고 불렀어요? 아니, 그 전에 나도 할 말이 많거든요. 오늘 뭐 해야 할 일 있어요?"
"아뇨, 일정은 없습니다."
"그럼 나랑 얘기 좀 많이 나눠요."
그녀의 말에 순순히 고개를 끄덕였다.
이곳에서 따로 시간을 내서 정리해야 할 만큼 가치 있는 인연은 이선주, 그녀 딱 한 명이었기에 문제 되지 않을 일이었다.
"그동안 제가 너무 이상하게 굴었죠? 평소 답지도 않았고, 그렇다고 해서 살가운 것도 아니고. 많이 이상했을 거에요."
"그렇습니까?"
그런 일이 있었어?
꽤 살갑게 바뀌어서 난감했다는 의뢰인의 말만 들었지, 그녀가 얼마나 많은 방황을 했는지에 대해서는 들은 바가 없었다.
"그동안 생각을 정리하느라 시간이 좀 걸렸어요. 그리고 그 와중에 먼저 선수를 치셨더라고요. 그때 정신이 번쩍 들었죠. 아무리 변하려고 한다지만, 이건 나답지 않은 일이었어요."
의뢰인이 더 이상 여자를 안지 않겠다고 말한 것을 말하는 것 같았다.
"오늘 이렇게 신경 써준 것 만으로도 충분히 위로를 받았어요. 그러니까 그렇게 미안해 죽겠다는 표정 짓지 말라고요. 평소에는 돌멩이가 사람이 됐나 싶을 정도로 무감각하면서 이런 상황에서만 아닌 척 굴면 또 오해할 수밖에 없다고요."
내가 정리를 하러 이곳에 올 필요가 있었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
의뢰인의 선언을 들은 이후로, 그녀는 이미 혼자서 마음의 정리를 끝내 놓은 상황이었던 거다.
사실 상황을 놓고 생각해보면 당연한 말이긴 하다.
그날 밤은 분명 내게서 여지를 느꼈겠지만, 다음날 아침부터는 다시 태도가 딱딱해졌을 것이고 더 이상 다른 사람을 안지 않겠다는 선언까지 했다.
'감정이 막 피어 나고 있었을 텐데 그 순간에 벽을 만난 기분이었겠지.'
그것도 뚫릴 수 없는 벽 말이다.
정신이 번쩍 들었다는 말은 결코 비유가 아닐 것이다.
그녀가 혼자서 생각을 정리하는 내내 어떤 기분을 느꼈을지 조금도 짐작이 되지 않는다.
내가 상상하는 그 무엇보다도 훨씬 굴욕적이고 실망스러웠을 거다.
나를 제대로 말도 못 지키는 나쁜 놈으로 봐도 할 말이 없는 것이다.
"미안합니다. 상황이 갑작스럽게 바뀌었습니다. 저도 이렇게 빨리 이 일을 끝내게 될 줄은 몰랐습니다. 하지만 지금이 딱 알맞은 시기였습니다."
"이해해요. 아니, 이해해줄게요. 제가 이해를 안 한다고 해서 달라지는 건 없잖아요. 근데 내 상황이 좀 억울하다는 건 알아줬으면 좋겠어요. 몰랐으면 몰라도 분명 다음에 하면 더 좋을 거니까 기대하라고 하셨잖아요."
그녀와 섹스를 끝내고 여운을 느끼며 여러 가지 말들을 뱉어냈었다.
그 말이 정확히 뭐였는지 정확히 기억이 나진 않는다.
잠이 들락말락 해서 비몽사몽이었으니 말이다.
연기도 어색해질 수밖에 없어서 그때 무언가 말을 들었다면 꽤나 다정했을 것이다.
"근데 이제 다음은 없는 거잖아요."
"...아무래도 그렇죠."
"그러니까요. 아예 계속 모르고 있었으면 좋았을 텐데...괜히 그런 걸 알게 돼서 요즘 욕구불만이에요. 그걸 좀 달래보려고 거기 가서 힘 쓰고 있었던 거고요."
당당하게 욕구 불만이라는 것을 밝혀오는 그녀.
눈빛이 활활 불 타오르고 있었다.
"...설마 절 덮치시려는 겁니까?"
"그러고 싶으면 넘어가 주실래요? 딱 한 번 더 해주면 깔끔하게 떨어져 줄게요."
그녀가 똘망똘망한 눈동자로 나를 바라보며 말한다.
진짜 이걸 받아들여야 하나 고민하고 있는데, 그녀가 돌연 풋! 하고 웃더니 말했다.
"뭐에요, 그 표정은? 진짜 해주려고요? 그렇게 쉬운 남자였어요?"
"...거절할 생각이었습니다. 한 번이 두 번이 되면, 그 두 번이 세 번 될 수도 있는 거잖습니까."
"한 번 더 잤다가 내가 달라붙을 까봐 걱정 돼서 안 되겠다는 거에요? 우와, 자존심 상해. 저 그렇게 구질구질한 여자 아니거든요?"
"미안합니다. 그런 의미로 한 말은 아니었습니다."
"아무리 당신이라도 그렇게 행동하면 화낼 거에요."
쉘터를 위해 의뢰인은 없으면 안 되는 필수적인 존재.
그는 잃어버린 문명을 유일하게 복구해줄 수 있는 특별한 사람이다.
쉘터의 안전을 누구보다 걱정하고 고민하는 그녀에게 의뢰인은 기본적으로 특별할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그러다가 내가 그녀와 밤을 보내면서 그 특별함이 다른 감정으로 변하게 됐을 것이고 말이다.
"사과를 해야 할 것 같았습니다. 만약 제게 연인이 없었다면, 당신과 좋은 관계를 가져볼 수도 있었겠죠."
"자존심 생각해서 물어보지 않으면 후회할 것 같거든요. 그래서 하는 말인데 연인과 헤어지거나, 몰래 같이 만난다거나 할 생각은 없는 건가요?"
일부일처제가 기본적인 세상.
멸망했기에 법이라는 게 무색해진 곳이긴 해도 사람들의 머릿속에 박힌 상식이 쉽게 바뀌지는 않을 것이다.
그런 상황에서 그녀가 자존심을 다 버리고 제안한 거다.
내가 바라기만 한다면 기꺼이 내연녀가 되어 줄 수 있다고 말이다.
나는 질끈 눈을 감고 대답했다.
"그럴 수는 없을 것 같습니다."
어째 그녀가 먼저 선수를 쳐서 내가 하려던 말을 하나도 하질 못했다.
그녀가 먼저 마음의 정리를 하고 왔고, 마지막 미련 한 자락을 보여주면서 나를 붙잡은 것이다.
이런 상황에서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거절밖에 없다.
"사실 오늘 사과를 하고, 관계를 적당히 정리하려고 했습니다. 말했다시피 이번 일은 워낙 갑작스레 진행 됐고, 결심도 단 번에 해버린 거였습니다. 그렇게 앞으로 나가는 사이에 당신에 대한 배려가 부족했다는 걸 깨달았습니다."
"처음에는 좀 설렜는데 표정을 보니까 절로 차분해지더라고요. 절대 좋은 얘기를 하려는 사람으로 안 보였어요. 그래도 날 걱정해줬다는 거니까. 그걸로 만족할게요."
그녀는 덤덤하게 내 말을 받아들였다.
그 모습이 어쩐지 멋있어 보여서 드러내지 않으려고 했던 내 마음을 털어놓을 수밖에 없었다.
"사실 어떻게 말을 해야 할지 고민 많이 했습니다. 정작 당신이 먼저 다 얘기하고 물어봐서 고민했던 게 전부 무색해졌습니다. 당신이 나보다 조금 더 용기 있는 사람이라는 의미겠죠."
"내가 우리 쉘터에서 제일 용기 있는 사람이죠. 그건 아무도 반박 못 할 거에요. 좋게 봐줘서 고마워요. 오늘 일 때문에 앞으로 우리 관계에 영향이 오는 건 아니겠죠?"
"좋은 마음을 받아줄 수 없다는 것 때문에 조금 불편한 거지, 당신이 싫어진 게 아닙니다. 거기다가 누가 봐도 당신이 더 아까운 사람이잖아요."
"알긴 하네요?"
세계의 상황을 고려하지 않고 의뢰인과 그녀를 비교해봤을 때, 나는 단연코 그녀가 아깝다고 말할 것이다.
그가 나와 비슷한 힘을 갖고 있다고 해서 저울의 무게는 달라지지 않을 것이다.
'솔직히 멋있는 여자잖아.'
외모로도 부족하지 않고, 성격도 남자보다 훨씬 용기 있는 모습으로 자신의 마음을 시원하게 고백할 줄 아는 여자였다.
거기다가 거절을 당하니 꿍해 하지 않고 털털하게 털어낼 줄도 알았다.
'이런 여자는 동성한테도 인기가 있지.'
어느 하나 매력적이지 않은 곳이 없는 선주씨에 비해 의뢰인을 봐라.
'이 새낀 그나마 상점에서 성벽을 바꿔서 사람 노릇 하고 있는 거잖아.'
솔직히 그것도 조금 불안불안하다.
정신을 건드리는 일은 진한 후유증을 남기는 법이고, 아직까진 멀쩡해도 나중에 어떤 부작용에 시달릴지 알 수 없는 일이니 말이다.
'그런 위험한 남자를 좋아하는 것보단 멀쩡하고 평범한 남자를 만나는 게 맞지.'
쉘터에는 계속해서 생존자들이 들어오고 있었다.
인류의 마지막 희망이다 보니 소문을 알음알음 듣고 사람들이 찾아오기 시작한 것이다.
물론 쉘터 주민들 쪽에서 적극적으로 생존자들을 구출하고 있다 보니 더 그렇기도 하다.
'시간이 지나면 또 다른 남자가 들어오겠지.'
적어도 그놈이 의뢰인보다 나은 놈이기를 바란다.
그래서 이어지지 못한 짝사랑으로 아파하지 않았으면 좋겠다.
'이 정도 꼬장은 부려도 되는 거잖아?'
호의를 보여서 내게 하루의 시간을 더 주긴 했다만, 그걸로는 내게 부렸던 진상의 전부를 보답했다 할 수 없었다.
다시 올 차가 리무진이 아닌 평범한 승용차라고 해도 똥차를 피한다는 게 중요한 법 아니겠는가?
"당연히 알고 있죠. 당신이 훨씬, 비교도 안 될 정도로 아깝습니다. 저 같은 사람 좋아하지 마십시오."
"좋아할 기회도 안 줘 놓고 그렇게 훈훈하게 말하지 말아요. 다른 사람들이 있는 곳에선 또 철벽 칠 거면서."
의뢰인과 내가 변하면서 생긴 괴리감이 본인에게 철벽을 친 거라 생각한 모양.
"또 그렇게 될 겁니다. 아니, 앞으로는 쭉 그런 태도를 보일 겁니다. 너무 서운해 하지 마십시오."
"나도 다시 예전처럼 굴 거에요. 당신이나 서운해 하지 말아요. 두 번은 기회 안 줄 거니까. 이번이 끝인 거에요."
"알겠습니다."
그게 내가 바라는 일이다.
"근데...이거 좀 진상이라는 건 아는데, 약속은 지켜주면 안 돼요? 어차피 이런 식으로 간질거리는 대화는 지금이 마지막인 거잖아요. 내가 너무 억울해서 그래요. 솔직히 그날 밤에 다음은 더 좋을 거라고 얘기 하지만 않았어도 이렇게까지 기대는 안 했을 거란 말이에요."
약속?
잠들기 전에 했던 말을 말하는 건가?
"아까 거절했습니다만."
"계속 생각을 해봤는데, 딱 마지막으로 한 번만 더 안 하면 밤에 잠을 못 잘 것 같아서 그래요. 당신이 좋은 게 아니니까 아슬아슬하게 세이브 되는 거 아닐까요?"
"오로지 섹스를 더 하고 싶다는 겁니까?"
"네!!"
신체가 워낙 건강하다 보니 그런 쪽으로도 왕성해졌나 보다.
"혼자서 해결한다는 방법은요...?"
"잠을 저 혼자서 자는 게 아니잖아요. 사람들이랑 같이 자는데 도대체 어디서 성욕을 해소해요? 거기다가 전 그런 걸 해본 적도 없단 말이에요! 섹스할 때랑은 조금도 비슷하지 않았다구요!"
그런 거 안 한다면서, 자위를 시도해보긴 했었나 보다.
조금도 비슷하지 않다는 걸 그녀가 어떻게 알았겠는가?
다 해봤으니까 아는 거겠지.
'그럼...자위하는 방법을 알려줘야 하나?'
아무래도 자위 기구도 하나 선물해줘야 하는 거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든다.
자위에 빠져들다 보면 자연스럽게 도구에 눈을 뜨기 마련이니까.
'나중에 의뢰인 편으로 선물을 보내는 정도는 괜찮겠지.'
지금 당장도 기구를 건네줄 수 있긴 하지만, 이걸 어디서 가져왔다고 말을 해야 할지 몰랐기에 시일을 두고 선물해줄 필요가 있어 보인다.
"그럼 이렇게 하시죠. 섹스는 안 할 겁니다. 대신..."
"대신?"
"자위하는 법을 알려드리겠습니다."
내 말에 선주씨가 경악을 금치 못한다.
"변태 같아!!!"
"......"
참 신랄한 평가였다.
뭐 어떤가?
내 이미지 망치는 게 아니니 무책임하게 나가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