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hapter 840 - #97. 란나 (1)
그녀의 인생은 몇 가지 터닝 포인트를 통해 인생이 많이 바뀌어왔다.
평범한 아니, 또래에 비하면 그리 특출나지 않고 오히려 아르바이트를 하면서 살아갔던 그녀.
우연한 기회에 한 가게에 아르바이트를 하게 되면서 터닝 포인트를 맞이했다.
가게의 사장님은 동화 속에서 나오는 왕자님 같았다.
잘 생겼고, 돈이 많았으며, 그녀가 서투른 행동으로 잘못을 저질러도 화 한 번 내지 않고 오히려 열심히 하고 있다면서 위로를 해주는 다정한 사람이었다.
그런 사람이 자신처럼 평범한 여자에게 호감을 보인다는 게 쉽게 믿어지지 않았다.
세상에 잘난 여자가 어디 한 둘인가?
그는 평범한 자신보다는 더 아름답고, 부자이며, 성격도 모나지 않은 사람을 만날 수 있는 사람이었다.
"여보!"
하지만 이제는 더 이상 그 의문에 잠도 못 자면서 고민하지 않는다.
자신감을 갖게 된 건 꽤 되었다.
그녀는 더 이상 대학교를 다니며 아르바이트를 하는 학생이 아니다.
프렌차이즈 회사의 CEO였고, 한때는 이런 여자가 그를 만나야 한다고 생각했던 조건에 자신이 들어맞는 곳이 많아졌다.
자신에게 분에 넘치다고 생각했던 남자를, 스스로 발전하면서 그의 여자가 될 자격을 갖추게 된 것이다.
그 뿐인가?
"애들은요?"
"재우는데 성공했죠."
"잠투정 많은 애들인데 어쩜 그렇게 잘 재워요? 노하우 좀 알려 달라니까 절대 안 알려주고 말이야. 너무해."
이제 그녀는 자신에게 과분하다 생각했던 남자의 아이를 낳기까지 했다.
한 명도 아니고 무려 두 명이나!
그리고 결혼도 했다.
사랑하는 사람과 결혼 생활이라니!
자신이 소설 속 주인공이라도 된 것 같은 기분이었다.
아니, 드라마 주인공이라고 해도 좋을 것이다.
멋진 왕자님이 갑자기 자신의 인생에 끼어들어서 그녀를 동화책 속으로 초대해주었으니 말이다.
"얼굴 얼마 못 보는 못난 아빠니까, 이런 노하우라도 있어야 점수를 따죠."
그녀의 투정에 남편이 다가와서 허리를 다정하게 팔에 두른다.
"그런 거 없어도 애들은 오빠만 오면 좋아서 죽으려고 하는데요? 애들이 원래 그렇게 활짝 웃는 애들이 아니에요."
"당신이 그렇다고 하니까 그런가 보다 하고 있긴 한데, 아무리 생각해봐도 상상이 안 가요. 우리 애들이 그렇게 무뚝뚝해요?"
그가 이해할 수 없어 하는 것도 충분히 이해가 된다.
애들은 아빠가 오는 날만 되면 그동안 아껴두었던 텐션을 싹 다 끄집어 올려내니까.
고작 5살도 먹지 않은 애들이 하는 행동이라기엔 너무 영악해서 어처구니가 없었다.
'아빠, 매일 매일 봤으면 좋겠어!'
란나는 문득 스쳐 지나간 목소리에 질끈 입술을 깨물었다.
TV를 틀면 뉴스에서 매번 나오는 남성 부족 현상들.
아빠를 너무 좋아하는 아이들에게는 차마 현실을 알려줄 수가 없어서 말을 얼버무리기만 했었다.
그래도 요즘은 예전보다 훨씬 자주 얼굴을 보여줘서 다행이다.
이주일에 한 번 정도 올까 말까 하던 사람이, 어느 순간부터는 일이 좀 널널해졌다면서 일주일에 두 번 혹은 세 번 왔다가 간다거나 한 번 오면 며칠씩 있다 간다거나 하는 식으로 집에 머물렀던 것이다.
덕분에 애들의 아빠 사랑은 시간이 지날수록 더해져 가고 있는 중이었다.
'아빠랑 헤어져야 할 때면 울고 불고 해서 점점 더 힘들어지긴 하지만 말이야.'
허리에 둘러져 있는 남편의 팔을 풀고 몸을 돌려서 얼굴을 마주봤다.
"정말 내 애지만, 아빠 사랑이 과해도 너무 과해요."
"엄마가 아빠를 그만큼 사랑하니까 애들도 닮은 거 아닐까요?"
"...아니라고 할 수도 없고, 맞다고 하기엔 너무 낮간지러운데요?"
"뭐가 낯간지러워요. 나 안 사랑해요? 난 당신 사랑하는데."
"하여튼! 날이 갈수록 주책 맞아 진다니까."
남편의 가슴을 콩! 하고 주먹으로 한 대 아프지 않게 때리고 그의 입술에 키스를 해준 후 품에서 빠져나왔다.
"당분간 못 온다고 했죠? 다시 일이 바빠져서요."
"네. 대충 두 달 정도는 바쁠 것 같아요. 미안해요."
"그 정도야 뭐...저는 괜찮은데 애들이 걱정이죠. 항상 눈 뜨면 아빠만 찾으니까."
"그리 대단한 걸 해준 것도 없는데...너무 미안하네요."
그녀의 남편이 어떤 일을 하는지는 연애 시절에 언듯 들어봤었다.
무역일을 해서 여러 나라를 수시로 들락거려야 한다고 말이다.
너무 자주 출장을 가서 연애 시절에는 그의 얼굴을 보는 게 하늘의 별 따는 것보다 어려웠던 적도 있다.
그땐 회사를 키우겠다는 목표 때문에 그의 부재가 크게 상관이 없었지만, 회사가 안정 되고 체계가 잡히기 시작하면서 그의 빈자리를 보며 점점 외로움을 느끼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럴 때쯤, 뱃속에 첫 아이가 들어섰다.
마침 결혼 얘기도 나오고 있었던 지라 '이게 운명인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이 사람이랑 만난 이후로 내 인생이 빛나기 시작했어.'
결혼?
아무에게도 말하지 않았지만, 부정적이었다.
어차피 대부분의 사람들이 남자 부족으로 결혼하지 못하고 독신으로 살아가지 않는가?
그러니 자신 하나쯤이야 그렇게 되어도 문제 없을 거라 생각했다.
남자와 만나는 게 싫다는 건 아니다.
결혼은 다른 문제일 뿐.
아직 그녀에게 이른 일이라고 생각한 것이다.
그와 한참 연인 관계가 되어 사랑을 할 때도 결혼을 구체적으로 생각해본 적이 없었던 것 같다.
오히려 주변 사람들이 그녀를 더 닦달했었지.
'결혼하지 않으면 이 사람을 놓치게 될 거라고 말이야.'
친구들에게 그런 말을 들었을 때 그녀도 불안하긴 했었다.
그런 사람 아니라고 친구들에게 말했지만 말이다.
하지만 그런 불안감을 갖고 있음에도 결혼에 대한 생각은 여전히 부정적이었다.
'그땐 왜 그랬는지 몰라. 이렇게 행복한데.'
온전히 100% 행복할 수 있는 건 인간이 할 수 없는 일이다.
하지만 다른 사람과 비교해봤을 때, 자신이 비교적 행복한 사람의 축에 낀다는 것은 객관적으로 증명이 된 상태였다.
'사랑하는 남편, 사랑하는 아이들, 경제권으로 부족함이 없는 생활에 나 스스로의 능력으로 회사를 이끌어가고 있다는 만족감까지.'
주변 사람들의 부러워 하는 시선도 그녀의 부족했던 자존감을 채워주는 훌륭한 요소가 된다.
"본격적으로 바빠지기 전에 애들이랑 여행 가는 거 어때요?"
"여행요? 어..."
"일 바빠요?"
남편의 갑작스러운 여행 제안.
여행이라는 말에 당장 생각나는 건 애석하게도 회사였다.
주먹구구식이었던 회사가 체계적으로 돌아가기 시작하면서 그녀가 당장 해야 할 일은 많이 줄어들었다.
하지만 여전히 회사의 주요 일들을 직접 확인하고, 현장 일을 뛰는 것을 마다하지 않고 있었다.
혹자는 이 정도로 회사가 커졌는데 CEO가 왜 현장에서 일을 하냐고 손가락질을 하는 사람도 있다.
괜히 나댄다면서 말이다.
하지만 그녀의 성격이 직접 뛰는 걸 좋아하는 탓에 어쩔 수가 없었다.
"아니에요. 시간 내볼게요. 언제 가면 좋을까요? 스케줄 한 번 맞춰보죠. 근데 어딜 갈 생각이에요?"
안 된다고 생각하면 계속 안 되는 거고, 안 되는 일이지만 되게 만들어보려고 노력을 한다면 가능해질 수도 있는 거 아니겠나?
"가족들 의견 다 들어봐야 하지 않겠어요?"
"애들 의견까지요? 걔네들이 뭘 안다고요."
"그래도 바다를 가고 싶은지, 사막을 가고 싶은지, 휘양찬란한 도시를 가고 싶은지 뭘 좋아하고 뭘 싫어하는지 정도는 물어볼 수 있잖아요."
"그건 맞네요."
아직 어린 아이들이지만, 그럼에도 아이들의 의견을 물어보겠다고 말해주는 남편의 다정함이 좋았던 그녀가 다시 한 번 그의 입술에 키스를 했다.
쪽.
"뭐에요?"
뜬금없이 키스를 당한 남편이 묘한 표정으로 그녀를 바라본다.
"그냥요."
감정을 주체하지 못하고 키스를 한 거라고 말하기엔 너무 부끄러웠다.
다만 남편은 눈치가 빠른 편인지라 그녀가 뭘 숨기고 있는지를 금방 알아차리는 편이었다.
"내가 그렇게 예뻤어요?"
"...그런 거 아니에요."
장난기가 가득한 미소에도 여전히 예뻐 보인다는 것은 이미 답이 없는 상태라는 걸 의미한다.
"방금 내가 예뻐서 깨물어주고 싶다는 표정이었는데요?"
"본인의 입으로 예쁘다고 말하는 거 안 부끄러워요?"
"내 사람한테 예쁨 받는 건데 뭐 어때요."
남편의 애교에 홀딱 넘어간 그녀는 어쩔 수 없이 자신의 부끄러운 마음을 인정했다.
그가 귀엽고 예뻐서 꽉 깨물어버리고 싶으니...
콰득!
"엑!"
진짜 깨물어버리는 거다.
그의 목선에 그녀의 앙큼한 이빨 자국이 남는다.
쎄게 물지 않아서 금방 자국이 사라질 테지만, 자국이 남은 모습을 보고 있으니 소유욕이 충족 된다.
"깨문 거에요?"
"네. 아프면 핥아줄까요?"
혹시 많이 아팠던 걸까?
살살 깨물었던 것 같은데...
걱정해서 올려다 봤다가 그녀는 침을 꼴깍 삼켰다.
불쾌?
그의 표정을 보면 절대 아니라는 걸 알 수 있다.
그는 불쾌함이 아니라 제대로 자극을 받은 상태였다.
그가 그녀의 어깨에 손을 얹더니 아까 전, 허리를 껴안았을 때와 전혀 다른 느낌으로 터치하면서 말했다.
"방금 애들 재웠으니까 아마 꽤 오래 잘 겁니다."
"...그래서요?"
"개인적으로 저는 셋째를 낳는 것도 나쁘지 않다고 생각합니다."
"또 낳자고요?"
"슬슬 애들도 나이가 차서 동생을 원하지 않을까요?"
그건 당신 생각인 것 같은데...
아빠를 차지하기 위한 신경전이 첫째와 둘째 사이에서 꽤나 치열하다는 것을 란나는 잘 알고 있었다.
그런데 여기에 셋째까지 생긴다?
분명 싫어할 거다.
경쟁자가 한 명 더 늘어나는 거니까.
란나는 아닐 거라고 말해야 하나 고민하다가 '셋째를 만들기 위해 해야 하는 일'에 대한 갈증이 돌아서 입이 떼어지질 않았다.
"셋째는 뭐 혼자 만들어요? 당분간 바쁘다면서요."
"당분간 바쁘긴 해도 셋째 만들 시간은 있습니다. 특히 지금 당장요. 요즘은 집에 와서 하는 일이라곤 애들이랑 놀아주는 것밖에 없었잖아요. 우리 둘이서 보내는 시간이 너무 적어졌어요."
"애들이 아빠를 안 놔줘서 어쩔 수가 없잖아요."
"지금은 지쳐서 잠들었으니까, 아빠가 자유로워진 지금이야 말로 당신이랑 같이 시간을 보낼 수 있는 찬스가 아닐까요?"
애들이 아빠를 너무 사랑하다 보니, 자연스럽게 그녀는 뒷전으로 밀려날 수밖에 없었다.
애들이랑 아빠를 두고 싸우는 것도 뭐한 일이지 않은가?
그래서 애들한테 마냥 양보만 하다 보니 그게 습관처럼 굳어진 것 같았다.
'지금은 애들도 다 잠들었으니까, 이때 만큼은 내가 차지해도 되는 거잖아.'
그녀는 남편의 속닥거림에 홀딱 넘어가 버렸다.
애초에 거부하고 싶지 않은 유혹이기도 했다.
"그럼...우리 방으로 들어갈까요?"
진짜 셋째를 낳을 건 아니지만, 그 과정을 즐기는 것 정도는 부부 사이에 충분히 할 수 있는 일이 아니겠나?
란나는 남편과 함께 방으로 들어가 행복한 절정을 맞이했다.
남들에겐 부러움을, 본인 스스로에겐 만족감을 남기는 밤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