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hapter 842 - #97. 란나 (3)
가족과의 즐거운 여행.
애가 둘이라서 바깥으로 나오면 고생이긴 하지만 나온 보람이 있었다.
더욱이 그녀의 마음이 훈훈해졌던 일이 있었는데...
"내일부터는 그러지 말아요."
"네?"
"다른 사람들 신경 쓴다고 정작 당신은 제대로 놀지도 못했잖습니까?"
"아...!"
남편이 정말 모르는 건지 긴가민가 했는데, 역시 모르는 척이었던 것이다.
란나는 부끄러움에 얼굴이 화끈거렸다.
뒤늦게 자신이 너무 오버했다는 생각이 든 것이다.
"죄송해요. 신경 쓰이게 할 생각은 없었는데."
"당연히 신경 쓰이죠. 기껏 여행 온 건데, 제대로 즐기지 못하고 있었잖아요. 엄청 속상했어요."
"!!"
속상했다니!
무려 속상했다니!!!
란나는 남편의 말에 정신이 번쩍 들었다.
"앞으로는 절대 이런 일 없게 할게요."
그래, 다른 여자들을 견제한다고 모처럼 보내는 가족들과의 시간을 허투루 쓸 수는 없다.
그런데 그녀의 비장한 결심을 들은 남편의 표정이 오묘해진다.
"가끔 그런 생각을 해요. 란나씨가 은근히 말을 서운하게 한다고."
"네? 제가 서운하게 했어요?"
도대체 어디가???
이해할 수 없는 말이다.
그리고 살짝 억울하기도 했다.
가족들을 지키려고 한 거였는데 서운하다고 하니 말이다.
"일단 방금 전에 했던 말이요. 가족끼리 절대 이런 일 없게 할게요 라고 딱딱하게 말하는 게 어딨어요? 그리고 절대 말 편하게 안 하겠다고 해서 저도 다시 예의 지키고 있잖아요. 가끔 보면 란나씨가 제 아내인지 직장 동료인지 모르겠다니까요."
"아..."
그녀가 회사 CEO이긴 하지만, 회사의 모든 권리는 남편의 것이었으니 직장 동료가 아니라 상사라고 봐야 한다.
그래서 결혼을 했을 때도 말을 편하게 하라는 남편의 말에 고개를 저었더랬다.
그러자 덩달아 남편도 그녀처럼 예의를 지키겠다며 편하게 하던 말투를 싹 바꿔버렸다.
...역으로 당하니까 은근히 서운하긴 하더라.
하지만 공과 사를 구분하기 힘든 그녀는 남편에게 말을 편하게 하는 게 쉽지 않은 일이었다.
'절대 풀어지고 싶지 않아.'
자신은 대단한 사람이 아니다.
평소 생활이 공적인 일에도 묻어 나올 것이다.
그녀는 자신이 얼마나 나약한 존재인지 알았기에, 평소 생활에서 긴장을 놓치면 안 된다는 생각을 갖고 있었다.
긴장을 풀었을 때의 모습은 굳이 생각을 많이 할 필요가 없었다.
엄마를 떠올리면 되니까 말이다.
'엄마한테는 미안한 말이지만, 그런 모습이 되고 싶지 않으니까.'
불룩 튀어나온 아랫배, 두툼한 허벅지, 대충 동네 미용실에서 자른 머리는 남자에게 잘 보이겠다는 생각조차 없어 보인다.
입고 다니는 옷은 자기 취향을 괴상하게 섞어 둔 옷들이다.
좀 제대로 된 걸 입고 다니라고 해도, 이 나이 먹고 잘 보일 곳이 어디 있냐면서 이젠 나이 먹었으니 자기가 입고 싶은 걸 입고 다닐 거라고 우긴다.
그래서 어쩔 수 없이 엄마의 외형에 대한 것은 포기한 상황.
'저 말은 결국 좀 편하게 있으라는 거겠지?'
남편의 앞에서 긴장을 놓치지 않았던 그녀의 노력이 빛을 발한 거다.
그러니 그녀 입장에서는 고쳐야 할 게 아니라 계속 이런 행동을 고수해 나가야 했다.
"가족 간에도 지킬 예의가 필요하다고 생각하는 것 뿐이에요. 예의를 지키는 게 마음에 안 드세요?"
"제가 생각하는 거랑 의견이 좀 안 맞네요. 다른 곳에서는 몰라도 가족 앞에서는 긴장을 풀고 편하게 있는 게 가족이라고 생각하거든요. 가족이라는 게 그런 거잖아요. 같이 있으면 편한 거."
"......"
"근데 란나씨는 여전히 나랑 있을 때 긴장하는 것 같아요. 편하게 있는 것 같지도 않고."
"당신이랑 있을 땐 항상 편해요. 말을 편하게 하지 않았을 뿐이죠. 제가 능력이 부족해서 말까지 편해지면 공과 사를 구분하지 못할 것 같거든요."
남편에게 자신의 의견을 피력했으나 그는 마음에 들지 않는다는 표현을 멈추지 않았다.
"우리가 공으로 얼마나 크게 묶여 있다고 그걸 구분해요?"
"크죠! 그게 왜 안 커요? 어마어마한 돈을 투자했는데."
"그런 돈보다 당신이라는 사람이 저한텐 훨씬 가치가 큽니다. 이런 말 하면 싫어하겠지만, 란나씨가 회사를 망하게 만들어도 전 화나지 않을 거에요."
"!!"
알고는 있었다.
자신이 운영하고 있는 회사의 가치가 그에겐 그리 크지 않다는 걸.
그래도 이렇게까지 자존심을 무너트리는 말을 할 건 없지 않은가?
"...저도 알아요. 당신한테 회사가 그리 중요하지 않다는 걸. 그 많은 돈을 투자했어도, 회사가 아무리 커진다고 해도! 나 같은 사람이나 전전긍긍 할 돈이겠죠."
"아니, 그런 의미로 한 말이 아니잖아요. 나는 그냥..!"
"됐어요. 그만해요. 계속 하면 싸우게 될 것 같으니까."
사실 이 정도면 이미 싸우게 된 거나 다름없다.
아무것도 풀리지 않은 채 대화를 단절해버리는 건 좋지 못한 선택일인 것도 잘 알고 있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녀는 남편을 외면했다.
본의 아니게 그에게 증명 받게 된 차가운 진실에 마음이 너무 시렸으니까.
행복으로 가득 찼던 마음 속에 차가운 냉기가 파고 들기 시작한다.
♧ ♧ ♧
남편은 시간이 필요했던 자신을 다시 찾아와 정중하게 사과를 했다.
그런 식으로 회사를 낮잡아 본 게 아니었고, 그저 내겐 회사보다 당신이 더 중요한 사람이라는 걸 말하고 싶었을 뿐이라고 해명했다.
다른 평범한 여자들이라면 그 말에 기뻐했을 것이다.
그 많은 돈보다 자신이 더 중요하다는 말을 어떻게 싫어할 수 있겠는가?
그도 아마 그런 의미를 그녀에게 전달하고 싶었을 것이다.
하지만 애석하게도 그녀는 그 말을 듣고 좋기보다는 좌절감을 느꼈다.
'회사보다 내가 더 중요하다는 말에 순수하게 기뻐하지 못하는 건, 내가 회사를 생각보다 더 중요하게 생각하고 있다는 의미일 거야.'
그녀의 자존감, 우월해진 생활 전반의 모든 것들이 이 회사로부터 나온다.
그러니 회사가 그녀에게 어떤 의미가 되겠는가?
하지만 다시 생각해보면 남편의 잘못도 아니었다.
그는 회사를 낮잡아 본 게 아니라 그보다 자신이 더 소중했을 뿐인 거니까.
그저 그의 말을 꼬아서 들은 자신의 잘못일 뿐.
"그래서 결국 싸웠다고?"
"응."
친구에게도 이런 내밀한 얘기를 할 순 없었다.
그렇다면 도대체 누구에게 자신의 얘기를 털어놓을 수 있을까?
언제나 자신의 편이 되어 주는 사람.
'엄마'였다.
"으이구! 너는 참 성격 이상해. 내 딸이지만, 성격이 너무 까다롭고 더러워. 사위는 이런 너를 왜 데리고 사는지 모르겠다."
물론 엄마에게 하소연을 한다고 해서 속이 시원해지는 건 아니었다.
애초에 엄마가 그녀의 편을 들어주는 것도 아니었기 때문이다.
"엄마!! 엄마는 내 편 들어줘야지!"
"네 편을 왜 들어줘!! 네가 진상 짓을 한 건데!"
"하...엄마까지 이러면 난 누구한테 하소연을 하냐고."
"하소연 할 이유가 없는데 하는 게 문제인 것 같지 않니?"
엄마는 정곡도 굉장히 잘 찌르는 편이었다.
"엄마는 이상하지도 않아? 그 많은 돈을 쓰고 만든 회사가 나보다 중요하지 않대. 내가 말아 먹어도 상관이 없다는 건데, 이게 평범한 건 아니잖아."
그녀의 항의에도 친정 엄마는 영 공감을 해주지 않고 있었다.
"이년이 복에 겨워 가지고...! 어휴."
"아~ 진짜아~! 진짜 내가 이상한 거야?"
"네가 이상한 거야. 이것아! 그럼 너 반대로 생각해보자. 네 남편이 회사가 더 중요하니까, 회사 일에 네 건강 체력 다 갈아 넣어서 키우라고 말했어봐. 너 서운해 안 서운해?"
"...서운하지."
"거 봐!!"
퍽!
"악!"
엄마의 묵직한 스메싱이 등짝에 작렬한다.
"사위가 어느 장단에 맞춰줘야 네 기분이 안 상하는 건데? 이년아!!"
"아파아아아앗!!!!"
"너, 사위한테 쓸데없는 소리 하지 말어라. 무조건 네가 잘못한 거니까 빌어! 나는 내 사위가 너를 데리고 살아 주는 것 만으로도 하루에 한 번 기도를 하는 사람이야. 너 심보가 왜 이렇게 꼬였어? 뭐가 문제냐고."
"그냥...찜찜해서 그래. 뭔가 나한테 숨기는 게 있는 것 같으니까."
자신이 느끼는 오묘한 찜찜함을 말해봤자 공감해주지 못할 거라는 걸 안다.
남들이 봐도 아니, 핏줄인 엄마가 봐도 그녀의 이유 없는 찜찜함은 어처구니 없는 일일 테니 말이다.
그래서 대답을 듣기도 전에 한숨부터 쉬고 있는데, 엄마가 의외로 차분한 목소리를 한 채 말했다.
"판도라의 상자는 여는 거 아니야. 너한테 잘 해주면 됐지 뭘 더 바라니? 그 사람의 모든 걸 굳이 알 필요가 있을까? 괜히 알면 안 되는 걸 알았다가 네 가정이 파탄 날 수가 있어. 숨기는 일을 억지로 들췄다고 화가 나서 더 이상 너 안 찾아오면 어쩔 거냐고."
"!!!"
그건 생각해보지 못한 부분이었다.
그 사람이 날 더 이상 찾아오지 않는다고?
"사위가 뭐가 아쉬워서 숨기려던 걸 억지로 파헤친 너를 만나러 오겠니?"
"아니...그건..."
애들을 그렇게 좋아하는 사람인데?
그에게 있는 무언가 알 수 없는 의뭉스러움을 파헤치는 게 정말 그를 잃을 수 있는 일인 걸까?
란나는 엄마의 정곡을 찌르는 말에 할 말을 잃고 말았다.
"네가 아무리 대단한 회사를 운영하고 있는다고 해도, 그거 다~ 부질없다. 너도 사위 사랑하잖아. 나도 네가 결혼까지 할 줄은 몰랐어, 이년아."
"씨."
"결혼 절대 못 할 줄 알았던 년이 좋아하는 사람이 있다면서 사위 데려왔을 때, 내가 얼마나 기뻤는지 아니? 아~ 얘가 적어도 나이 먹고 나처럼 외롭게 살다 죽지는 않겠구나 하면서 안도했다고."
"엄마 외로워? 그럼 좀 꾸며! 꾸미고 남자 만나라고."
"됐어! 엄마는 혼자가 편해. 젊었을 때 네 아빠랑 하도 지지고 볶고 싸워대서 남자라면 내가 학을 떼는 사람이야. 쓸데없는 소리 하지 말고 본론을 들어, 본론을!"
엄마가 아빠와 지지고 볶고 싸웠던 이유.
그건 엄마 잘못이 크다.
요즘 세상에서 여자의 질투는 비웃음만 당할 뿐인데, 엄마는 질투심이 너무 컸다.
그게 아빠와의 사이를 틀어지게 만들었고 말이다.
"...그래서 뭐 어쩌겠다는 건데?"
"그냥 덮어 둬. 모르는 게 약이라는 말이 있어. 내가 몸소 경험해본 거잖니? 몰랐을 때가 낫더라."
아빠는 다른 여자와 가정을 차렸다는 것을 엄마에게 숨겼다.
질투심이 많으니까 숨길 수밖에 없었던 거다.
그런데 엄마는 아빠의 행동에서 수상함을 느꼈고, 결국 다른 여자와 가정을 차렸다는 걸 알게 됐다.
아빠는 난리를 치는 엄마를 보면서 진절머리가 난다며 떠나버렸다.
아빠를 지키기 위해 패악질을 부린 것인데, 그것이 오히려 아빠를 떠나 보내는 원인이 되어버린 것이다.
"아직도 아빠 기다려?"
"아니. 내가 왜? 잘난 딸 덕분에 잘 먹고 잘 살고 있는데."
엄마는 때때로 이런 말을 한다.
차라리 계속 모르는 척 할 걸.
그랬으면 비록 아빠를 다른 여자와 나눌 수 밖에 없었겠지만, 완전히 잃지는 않을 수 있었을 것이다.
'내가 괜한 말을 해서 엄마 상처를 끄집어낸 건가?'
엄마는 자신이 아빠를 잃어버렸던 것처럼 그녀도 남편을 잃어버릴까 두려워 하고 있었다.
"아무튼 그러니까 하지마. 그냥 묻어."
"...생각해보고."
"생각해보고는 무슨 생각해보고야! 하지 말라면 좀 하지 마. 너는 왜 이렇게 엄마 속을 썩히니?!"
"방금 전에는 잘난 딸 둬서 잘 먹고 잘 살고 있다면서. 말이 왜 1초만에 바뀌어?"
"뭐 잘 했다고 말대꾸야!"
폭력적인 엄마는 말문이 막히면 등짝을 때리곤 한다.
그녀는 한숨을 포옥 쉬면서 생각을 정리했다.
'정말 묻어두는 게 맞을까?'
엄마의 말을 들어야 한다는 건 알지만...
란나는 결혼 생활이 더할 나위 없이 행복했지만, 때때로 자신과 맞지 않는다는 느낌이 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