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hapter 845 - #97. 란나 (6)
"다들 잘 지냈어요?"
이젠 큰 회사 대표가 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직원들과 얼굴이 익숙할 정도로 일에 적극적으로 관여하는 사람이 바로 란나, 그녀였다.
"어서오세요, 대표님!"
"이건 커피랑 간식."
"앗,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 대표님!"
"오늘은 내가 산 게 아니라 내 남편이 샀어요."
"우와~!"
"감사해요!"
"감사합니다!!"
"다들 알고 있죠? 이 회사 실질적인 대표가 바로 이 사람이에요. 나는 바쁜 이 사람 대신 회사를 맡고 있는 거고."
"이 사람 겸손 떠는 거니까 한 귀로 듣고 한 귀로 흘리세요. 저는 돈만 대줬지, 회사 키우는데 조금도 관여 안 했습니다. 이 사람이 쭉 회사를 대표로 일 할 겁니다."
와아아!!
짝짝짝!
직원들은 대표님 남편의 시원시원한 발언에 환호했다.
직원들에 대한 대표의 인망이 보이는 순간이었다.
회사의 대표라는 게 얼마나 중요한 자리인가?
아무리 돈을 많이 대준 대표의 남편이라 해도 직원들의 머릿속에 가장 잘 어울리는 대표는 한 사람 뿐이었다.
"봐요. 직원들은 당신이 최고라고 말하고 있잖아요."
"아휴, 내가 부끄러워서 참..."
"좋으면서 아닌 척 하기는. 이 사람 앞으로도 잘 부탁드립니다. 여러분들이 회사를 위해 애 써주신 만큼 넉넉한 인센티브를 보장해드릴 겁니다."
와아아아!!!
인센티브 만큼 회사 직원들을 설레게 하는 말이 없는 법.
회사에 투자를 많이 했음에도 불구하고 투자 회수보다는 재 투자를 통해 회사를 더 키우는데 적극적인 두 사람 덕분에 직원들은 함박웃음을 지을 수 있었다.
"다들 바쁘게 일하시는데 방해하지 말고 이만 가요."
"아! 저흰 괜찮은데..."
"아직 돌아 볼 곳이 많아서 가봐야 해요. 그나저나 우리 남편 잘 생겼죠?"
"네! 알음알음 들어서 굉장한 미남이시라는 건 알고 있었는데, 연예인을 하셔도 성공하셨을 것 같아요."
"사실 오늘 남편 자랑 하려고 데려 온 거에요. 회사 소개는 핑계고."
"자랑 하실 만 하세요!"
"맞아요! 너무 부러워요!"
"두 분 잘 어울리세요."
직원들의 웃음 소리와 진심이 담긴 칭찬에 대표님과 남편의 얼굴에 미소가 떠오른다.
"고마워요. 인사는 여기까지 할게요. 다들 힘내요."
"네!"
대표가 남편과 함께 다른 부서로 이동한다.
뒤늦게 정신을 차린 직원들은 서로 시선을 마주치며 오오오...! 하는 감탄사를 내뱉고는 놀람을 공유했다.
"진짜 저런 미남이 튀어나올 줄은 상상도 못했어요."
"계속 사람들이 그냥 미남이라고만 했는지 알 것 같아요. 그거 외에 다른 수식어는 생각이 안 나요."
"와~ 오늘 일 열심히 해야겠네요. 뭔가 눈이 밝아진 기분이에요."
"저런 남자랑 사는 건 어떤 기분일까요?"
직원들은 놀람이 쉽게 가라앉지 않았다.
일을 해야 하는데 대표님 남편의 얼굴이 자꾸 떠올라서 넋을 놓게 되는 것이다.
그만큼 대표님 남편이 주는 외모의 여파가 컸다.
"사실 이건 비밀인데, 제가 소싯적에 연예인들 많이 따라다녔거든요."
"네."
"근데 제가 여태까지 실물로 본 연예인 중에서 오늘 뵌 대표님 남편 분이 제일 잘 생기셨어요."
"역시 그렇죠? 저는 사람 뒤에서 후광이 나오는 건 처음 봤어요. 통도 엄청 크신 것 같지 않아요? 이번에 인센티브는 얼마나 주시려나."
"일단 계속 회사에 재 투자 해주시는 것 만으로도 대단한 거죠. 재력이 얼마나 대단하면 저럴 수 있는 걸까요? 원래 투자자라는 게 엄청 쪼잔하고 하나라도 꼬투리 잡으려고 난리도 아니거든요."
직원들은 오늘 본 대표님의 남편이 쉽게 잊혀지지 않을 것 같았다.
그리고 이런 현상은 한 부서에서만 일어나는 일이 아니었다.
대표가 남편을 데리고 간 부서의 직원들 모두에게 공통으로 일어나고 있는 일이었다.
♧ ♧ ♧
"오늘 어땠어요?"
남편에게 회사를 보여주고, 직원들에게 소개 시키는 일을 그녀라고 긴장하지 않았을 리가 없다.
다행히 직원들은 남편을 매우 긍정적으로 본 듯 싶었는데, 정작 남편이 직원들을 어떻게 봤는지는 알 수가 없었다.
"좋았어요. 특히 직원 분들이 기억에 남더라고요."
"정말요? 직원이 제일 기억에 남았어요?"
회사 시설이나 규모 같은 걸 말할 줄 알았는데, 그녀가 제일 궁금해 하던 부분을 남편이 먼저 꼬집어주었다.
"네. 다들 표정이 굉장히 밝더라고요. 저도 회사 다니는 입장이다 보니까 직원들 표정을 딱 보면 알거든요. 이 회사가 좋은 회사인지, 별로 안 좋은 회사인지를요."
"아!"
확실히 그도 회사 다니는 사람이니 직장인에 대해서는 나름 아는 바가 있긴 할 것 같았다.
거기다가 처음으로 그의 직장 생활에 대한 얘기가 나와서 더 관심이 갔다.
"직원들 보면 다 표정이 좋아요. 물론 일 때문에 좀 피곤해 보이기는 하더라고요."
"직원을 더 뽑아야 하는데, 아무나 뽑을 수는 없어서요. 고르고 고르다 보니 아무래도 사람이 부족하긴 해요."
"피곤하긴 해도 자기가 하는 일에 열정을 갖고 있는 것 같았습니다. 돈을 벌기 위해서 마지못해 일하는 사람은 눈빛만 봐도 티가 나거든요."
일명 월급 루팡.
회사에 와서 시간만 때우고 가는 직원이 안 보였다는 의미다.
그리고 그건 회사를 키우는데 힘쓰고, 깐깐하게 직원들을 골라왔던 그녀에게 최고의 칭찬 아니, 찬사가 되어주었다.
"하...그렇게 말해주니까 기분 정말 좋네요. 다른 건 또 없어요?"
"회사가 꾸준히 성장하고 있다는 점도 좋아 보였어요. 그리고 회사가 커지면서 다소 놓칠 수 있는 부분을 오히려 더 신경 써서 준비하는 모습도 보기 좋았고요. 원래 모든 일에는 기초가 튼튼해야 하는 법이거든요."
"놓칠 수 있는 부분이라는 게 뭐에요?"
"프렌차이즈 회사에서 일어날 수 있는 아주 흔한 일을 말하는 거에요. 가맹점 관리."
가맹점을 내고 싶다고 상담 신청을 해오는 사람들에게 최선을 다 해 정보를 제공해주는 것.
가게를 냈다고 끝이 아니라 꾸준히 직접 직원을 파견해 방문하면서 관리를 해주고, 혹시 있을 수 있는 불만들을 수시로 점검하는 것.
위생 관리는 어떻게 되고 있는지 확인하고, 메뉴들을 자체적으로 변형 시켜서 맛의 질을 떨어트리지는 않는지 등등.
생각해보면 별 거 아닌 것처럼 보여도 직원이 하나하나 수시로 체크를 하려면 발품이 많이 드는 일이었다.
가맹점이 서울에만 있는 게 아니지 않은가?
그런 책임감 있는 모습이 남편은 보기가 좋았다며 칭찬을 아끼지 않았다.
"아..."
그녀는 감동이 밀려와 손바닥으로 자신의 얼굴을 가렸다.
"얼굴 빨개졌네요."
"지금 기분 엄청 좋으니까 방해하지 말아주세요."
"회사 칭찬한 게 그렇게 좋아요?"
"...네, 엄청 뿌듯하단 말이에요."
"이거 안 되겠네. 앞으로 더 자주 해줄게요. 칭찬."
"진심이 안 들어가 있는 칭찬은 의미 없어요."
"진심 잔뜩 들어가 있는 칭찬을 하라는 의미죠? 알겠습니다. 하하."
"아휴...정신 사나워요. 저기 앉아 있어요."
"넵."
남편을 소파에 앉혀 놓고 그녀는 일에 집중했다.
직원들 소개 시켜주고 일을 보러 가라고 했는데, 남편은 오늘 다른 일이 없다며 그녀의 곁에 있어주겠다고 말해왔다.
이제부터 하는 일이라곤 책상에 앉아서 일하는 것밖에 없다 보니 재미가 없을 텐데도 가지 않겠다고 우기니 할 수 없이 소파에 앉혀두는 것밖에는 도리가 없다.
다만...
'힘들 때 고개를 들면 저 사람이 있으니까 기분 좋기는 하네.'
이게 고가의 미술품을 걸어두는 사람들의 심리인 걸까?
저 얼굴을 미술품이라고 보지 않는 게 더 이상하지 않은가?
그리고 남편이 곁에 있어줘서 그런지 일이 생각보다 훨씬 잘 돼서 퇴근 시간이 되지 않았는데도 빠르게 일이 끝내졌다.
가끔 그의 얼굴에 넋을 놓을 때가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말이다.
"당신이 있으니까 일이 더 잘 되는 것 같아요."
"정말요? 그럼 더 자주 와야겠다. 우리 자기, 일 빨리 끝내고 일찍 퇴근하라고요."
"그런 말 하지 말아요. 이벤트도 오늘이 마지막이에요. 이게 무슨 비효율적인 행동이에요? 당신도 엄청 바쁘면서. 내일 또 따라오겠다고 하면 화낼 거니까 그렇게 알아둬요. 그리고 시간이 남는다고 퇴근할 건 아니에요. 오히려 지금부터 시작인 거죠."
"지금부터 시작이요?"
"당신이 처음으로 회사에 왔는데 그냥 소개만 시켜주고 보낼 수는 없잖아요. 앞으로 우리 회사가 어떻게 미래를 준비하고 있는지 말해줄게요."
보통의 회사였다면 당연히 투자자들에게 했어야 할 정기적인 보고다.
우리 회사가 얼마의 이익을 냈는지, 앞으로 또 어떤 프로젝트를 만들어서 회사의 발전에 힘쓸 것인지 등이 담긴 PPT였다.
"이런 걸 바라진 않았는데요..."
남편이 어느새 그녀의 집무실 한 켠에 있는 작은 방에 끌려오자 아연한 표정으로 말했다.
"여긴 간이 회의실이에요. 보통 대표실에는 이런 게 없는데 나는 현장 일을 할 거라서 꼭 필요하다고 만들어 달라고 했죠. 제법 요긴하게 쓰고 있는 중이에요."
PPT를 띄울 새하얀 스크린이 내려오고, 기계가 켜지며 불이 나온다.
달칵-!
PPT 세팅을 모두 끝내놓은 란나가 자리에서 일어나 불을 끄기 위해 버튼에 손을 올렸다.
하지만 그녀가 불을 달칵! 하고 끈 순간, 자신의 등 뒤 가까이에 남편이 다가와 있었다.
"여기 방음도 잘 됩니까?"
"...방음이야 당연히 되긴 한데. 설마 아니죠?"
회사에서 무슨 말도 안 되는 짓을 하려고!
그녀가 황급히 품에서 빠져나가려고 했지만.
"끄응...안 돼요. 진짜진짜 안 돼요."
"PPT는 제가 꼭 나중에 확인 할게요. 약속해요. 근데 우리가 지금 아니면 언제 이런 컨셉의 섹스를 해보겠어요."
"이, 이럴 필요까진 없잖아요!! 여긴 진짜 직장이라고요!"
"그러니까 더 짜릿한 겁니다."
그는 이미 그녀의 말이 귀에 들리지 않는 상태로 보였다.
그녀의 와이셔츠 단추가 똑똑 풀려가고, 그녀의 치마 옆구리 쪽에 있던 지퍼가 지지직-! 하고 내려갔다.
순식간에 단정했던 그녀의 오피스룩이 엉망진창이 된다.
"티 날 거에요. 문 앞에 비서도 있는데...!"
"방음 된다면서요. 그리고 소리만 좀 줄이면 되잖아요. 딱 한 번만 할게요. 음, 그럼 컨셉은 어떻게 잡을까요?"
"아잇, 컨셉은 무슨...!"
"란나씨는 그럼 그대로 있어요. 회사 대표, 좋네. 그럼 나는 당신 아래에서 비서인데 신입인 걸로. 조금 더 MSG를 치자면 그 비서가 발칙한 야심이 있는 겁니다. 대표님을 꼬셔서 애인이 될 생각을 갖고 있는 거죠. 일명 미인계."
"미쳤어."
남편의 야릇한 상황극 제안에....
애석하게도 그녀는 꼴려버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