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1화 〉 1. 내 눈에만 보여.(21)
* * *
1. 내 눈에만 보여.(21)
서방님이 보통 사람과는 틀리다는 것을 알았다.
하지만 결계에 대해서는 모르는 것 같았다.
뇌기를 사용하면 결계를 손쉽게 파괴할 수 있거늘.
그리고 서방님이 챙기는 한 여성이 눈에 들어온다.
꽤 아름다운 여성이다.
“아름답군요... 그러나 저도 꿀리지는 않는답니다.”
강인한을 바라보는 여성의 눈빛은 서방을 보는 아낙네의 눈빛이었다.
그도 여성을 아끼기에 저렇게 몸을 불사르는 것이겠지.
조금은 섭섭한 마음이 드는 것은 어쩔 수 없나보다.
***
밖으로 나갈 수 없는 ‘이상 현상’에 대해 깊게 고민할 시간은 없다.
그런 것을 고민할 시간에 조금이라도 기회를 살리는 게 이득이다.
전기가 통한다는 것을 안 이상, 이제는 도박이라도 걸어봐야 한다.
과도를 주머니에 쑤셔 넣고 육각빠루를 힘껏 말아 쥐었다.
‘쇠로 되어 있어서 전기가 잘 통하겠지?’
파짓. 파트틋.
육각빠루에 전기를 흘려보내자 정전기처럼 파다닥 튀는 소리가 난다.
눈을 감싸 쥐고 고통을 호소하던 구상두가 인기척에 고개를 돌렸다.
“네 이놈!”
눈 주변이 검게 그을려 보기 흉하게 일그러진 눈가.
제대로 눈을 뜨지 못하는 것으로 보아 부상이 작지는 않다는 판단이다.
부웅.
정확하게 보고 휘두르는 것은 아닌지, 구상두의 손톱이 허공을 가른다.
처음보다 확연하게 느려진 공격에 양발을 바닥에 맞대며 몸을 뒤로 숙였다.
치이이이익.
달리던 관성의 법칙에 따라 몸이 주욱하고 미끄러지며 신발이 지면을 쓸었다.
숙인자세 그대로 양손으로 육각빠루를 쥐고는 허리를 비틀었다.
미끄러지는 왼발을 살짝 들었다가 강하게 지면을 찍어 내리며 빠루를 힘껏 휘두른다.
뻐억.
전기를 머금은 육각빠루가 구상두의 옆구리를 강타했다.
육각빠루에 적중단한 옆구리가 빠루 모양대로 움푹 들어갔다.
“크아악!”
구상두가 비명을 지르며 양팔을 마구잡이로 휘둘렀다.
나는 재빠르게 육각빠루를 회수하고는 놈의 뒤편으로 몸을 이동시켰다.
무릎의 통증이 심상치 않았지만, 목숨을 위협하는 이 순간에 초인적인 인내심으로 견뎌 낸다.
뒤쪽으로 돌아들자 구상두의 오금이 훤히 드러났다.
오금을 향해 다시 한 번 육각빠루를 강하게 휘둘렀다.
뻐걱.
쿵.
놈의 한쪽 무릎이 굽혀지고, 반대쪽의 오금도 똑같이 가격한다.
빠루에 적중당한 부위는 금세 검게 물들었다.
확실히 전기를 실은 공격이 통하고 있었다.
무릎이 꿇린 상태에서도 몸을 비틀어 팔을 휘둘러 온다.
스거걱.
완벽하게 피하지 못한 탓에 옷 앞섬이 손톱에 걸려 찢겨져 나갔다.
황급히 피하느라 비틀거리는 몸의 중심을 잡고 땅을 힘껏 박찬다.
마구잡이로 팔을 휘두르는 통에 다가갈 엄두가 나지 않은 것이다.
단숨에 2m를 뛰어올라 놈의 두상을 향해 육각빠루를 내리친다.
터업.
마구잡이로 휘두르던 구상두의 팔이 노리기라도 한 듯, 방향을 틀며 떨어져 내리는 빠루를 낚아챘다.
‘젠장’
비릿하게 웃는 구상두의 얼굴이 눈에 들어온다.
확실하게 노리고 있었음을 알 수 있었다.
“크크큭. 잡았다.”
어느 정도 눈이 회복된 듯, 놈의 눈동자는 정확하게 나를 향해 있다.
징그럽게 일그러진 눈가와 핏발이 잔뜩 선 눈동자.
줄줄이 흘러나오는 살기.
손이 전기에 의해 시커멓게 물들고 있음에도 절대 놓을 생각이 없어 보인다.
나는 미련 없이 빠루에서 손을 놓아버렸다.
몸을 돌린 구상두의 나머지 손이 나를 향해 뻗어왔던 탓이다.
쿠당탕.
볼 품 없이 땅에 떨어진 몸을 일으켰다.
구상두도 몸을 일으키고는 흉흉한 기세로 나를 향해 달려든다.
정말이지 엄청나게 튼튼한 몸이다.
반면에 나는 한 대라도 제대로 맞으면 그대로 비명횡사할 거다.
부우웅.
놈의 기다란 손톱이 근처를 지날 때마다 머리가 쭈뼛쭈뼛 선다.
감히 맞받아 칠 생각은 하지 못하고 필사적으로 피하는데 집중했다.
‘씨발!’
도저히 놈을 공략할 방법이 생각나지 않았다.
나는 주머니의 과도를 빼 들고 전기를 흘려보낸다.
나머지 주먹에도 전기를 흘려보냈다.
분명히 처음보다 느려진 공격이지만, 그만큼 내 몸도 정상은 아니다.
구상두의 손톱공격을 피하는 도중, 돌연 발길질이 날아왔다.
지금까지 발을 쓰지 않았기에 전혀 예상하지 못했던 공격이다.
퍼억.
놈의 발이 복부를 강타했다.
말이 복부 강타지 400사이즈는 될 정도의 큰 발은 몸통 전체에 충격을 준다.
“커어억!”
잔뜩 굽어진 몸.
그리고 벌어진 입에서 울컥하고 핏 덩어리가 튀어나온다.
속에 있는 내장이 전부 터져 죽어버리는 건 아닌가 싶을 정도의 충격이다.
동시에 몸은 수 미터를 날아가 창고의 박스더미에 박혀 들었다.
쿠웅.
와르르르르.
와장창.
박스더미들이 무너져 내리고 지독한 알콜향이 코 속을 파고든다.
아무래도 이곳은 술을 보관하는 창고였던 모양이다.
“쿨럭. 컥.... 컥... 컥...”
숨조차 쉬기 힘들 정도의 충격이다.
이제는 정말 마지막 인가하는 생각이 든다.
전부 회복된 것은 아니었는지 구상두가 비틀거리며 붉게 번들거리는 몸을 움직였다.
저벅. 저벅. 저벅.
놈의 발걸음 소리가 유난히 크게 들렸다.
이제는 마무리를 하러 오는 모양.
이미 한 번 죽어 봤지만, 또다시 죽음이 다가오자 몸은 사시나무 떨리듯 덜덜 떨려온다.
죽음이라는 것은 경험한다고 해서 익숙해지는 것이 아닌가 보다.
“멈춰!!!!!!”
귓가에 울리는 이상연의 절규.
그녀가 어울리지도 않는 쇠 파이프를 들고 구상두를 향해 달려들었다.
짧지만 굵은 관계를 보냈던 탓일까?
벌벌 떨며 오줌을 지려도 모자랄 판에 저런 행동을 보일 수 있다니.
보통 사람이라면 목숨을 구걸하는데 급급하지 않았을까?
두려움을 이겨 내고 구상두를 향해 달려드는 이상연의 눈빛은 죽음을 각오하고 있었다.
도대체... 왜?
그녀와 보냈던 그 짧은 시간이, 그녀에겐 그렇게나 의미가 있는 시간이었나?
하긴, 이곳까지 찾아온 나도 정상은 아니지.
구상두가 설마 저런 괴물일 거라곤 생각하지 못했지만, 놈들이 나를 죽이려 할 것이라는 건 알고 있었으니까.
“커억... 도... 도마...”
도망가라고 외치려던 나는 이내 굳게 입을 다물었다.
이상연을 둘러싼 색은, 그 어느 때보다 핑크핑크했다.
지금까지 보았던 것 중, 가장 진한 선분홍색.
저 정도 진한 분홍색이면 나를 위해 목숨까지 던질 수 있다는 말이군.
적어도 외롭지는 않겠다.
저승길, 나를 위해 그 한 몸 기꺼이 내던지는 그녀와 함께라면.
이 안에서 도망을 갈 곳은 없다.
나는 그녀의 숭고한 마음을 기꺼이 받아들이기로 했다.
“크크큭... 단단히 미쳤군...”
짜증스럽게 말을 내뱉은 구상두가 쇠 파이프를 간단하게 잡아챘다.
“놔! 죽어버려!”
“네년은 죽을 때까지 갇혀서 음기를 헌납해야 할 거다.”
가장 듣고 싶지 않은 말이 들려왔다.
구상두는 이상연을 죽이지 않을 작정이다.
내가 죽은 후에도 그녀는 놈에게 죽을 때까지 고통을 받게 될 터다.
구상두가 쇠 파이프와 함께 귀찮다는 듯이 이상연을 휙 하고 던져 버렸다.
‘음기?’
“꺄아악!”
너무도 가볍게 날아가 바닥을 구르는 이상연.
땅바닥을 구른 그녀의 몸이 힘겹게 꿈틀거렸다.
음기를 갈취하는 괴물.
그런 것에 대해 얼핏 들어 본 기억이 있다.
민화나 전설 속에 등장하는 마귀나 요괴 또는 귀신 같은...
구상두의 말은 심장이 철렁하게 내려앉게 만들었다.
이상연과 결혼한 이유가 음기를 갈취하기 위해서였던가?
그렇다면 그녀는 다른 여자들보다 음기가 강하거나 특이한 체질일 거다.
어쩌면 이상연은 죽음보다 더 한 고통 속에서 살게 될지도 모른다.
아무것도 할 수 없는 내 자신이 너무 원통하고 한스럽다.
“이렇게 애를 먹게 만들다니. 네놈을 어떻게 해야 더 고통스럽게 만들 수 있을까?”
구상두가 진짜 고민이 된다는 듯 나를 지그시 내려다본다.
내가 할 수 있는 것이라고는 추잡하게 꿈틀거리며 놈을 노려보는 것이 전부다.
역시나 세상은 좆같다.
이따위 힘을 쥐여 주고 저런 괴물을 내 앞으로 보내다니.
신이라는 존재가 있다면 나는 완벽하게 기만당했다.
정말이지 개 같은 세상.
내 모든 것을 앗아간 것도 모자라 마지막까지 나를 농락하고 있다.
기만당해 벌레처럼 꿈틀거리는 내 모습이 재미난 유흥거리라도 되는 것일까?
“하... 하하하하하... 하하하...”
비틀린 입가를 비집고 허무한 웃음소리가 새어 나온다.
“벌써 미쳐 버린 건가?”
이죽거리는 구상두의 말에 화조차 나지 않는다.
모든 것을 포기한 채 공허한 시선으로 조용히 천장을 바라본다.
그다지 감수성이 뛰어나지 않음에도 문득 하늘이 보고 싶어졌던 것이다.
꽉 막힌 창고의 천장은 그 정도의 사치조차 허용하지 않겠다는 듯, 단단히 막혀 있다.
그때, 두꺼운 천장을 두부처럼 뚫고 무언가가 쑤욱 하고 삐져나왔다.
‘저건 뭐지...?
칼? 날붙이일까? 아무튼 상당히 날카로운 무언가라는 것은 알겠다.
그리고 그날붙이로 짐작되는 것은 콘크리트를 도려내듯 원을 그렸다.
‘죽을 때가 되니 헛것이 다 보이는군.’
쿠웅.
종이처럼 동그랗게 오려진 원형의 콘크리트 덩어리가 떨어져 내렸다.
그 소리에 구상두가 놀란 듯 몇 발자국 물러난다.
갑작스러운 상황에 놈도 놀란 듯하다.
천장에는 사람이 한 명 빠져나올 정도의 구멍이 생겨났다.
구멍을 통해 마지막 하늘을 볼 수 있겠구나 하는 생각이 드는 와중, 불쑥 하고 얼굴이 튀어나온다.
유난히 밝은 달빛이 들어차는 가운데 은빛을 머금은 새하얀 백발이 신비롭게 늘어진다.
바닥에서 천장까지의 높이는 대략 5미터.
여성으로 짐작되는 이가 왜 창고의 지붕에 올라갔을까?
그런 의문을 품는 것도 잠시, 흩날리는 머리칼 사이로 얼핏 보이는 얼굴은 너무나 아름답다.
백옥 같은 피부와 붉은 눈동자, 그 눈동자만큼이나 붉은 입술 사이로 송곳니가 날카롭게 번뜩인다.
‘귀...신?’
죽음을 맞이하게 된 지금, 이제는 신기하지도 않다.
짧은 시간, 회귀하면서 너무 많은 일들을 겪었다.
다만, 판타지에서나 등장할 저 외모가 너무 아름답다고 느낄 뿐이다.
귀신의 시선이 나를 향해 미소를 보내고 있다는 것은 그저 착각이겠지?
구상두는 음기를 먹고, 저 귀신은 양기를 먹나?
내밀었던 얼굴이 사라졌다.
대신에 두 다리가 구멍으로 불쑥 나타난다.
무슨 이유인지 모르겠지만, 저 귀신은 창고 안으로 들어오려는 모양이다.
“무... 무슨 일로 오시었소...?”
잘게 떨리는 구상두의 음성이 들려왔다.
놈의 목소리에서 알 수 있었다.
창고로 들어오려는 저 귀신은 초대받지 않은 손님이라는 것을.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