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9화 〉 1. 내 눈에만 보여.(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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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내 눈에만 보여.(29)
오늘따라 정수지의 반응이 유독 이상하다.
얼굴을 제대로 마주치지 못하고 이리저리 시선을 피한다.
얼굴도 이따금 벌겋게 물들이는데, 무슨 홍역이라도 앓는가 싶을 정도다.
‘왜 저러는 거야?’
나랑 그렇게 빨리하고 싶어서 그런가?
그렇게 기분 좋은 상상해 본다.
경험이 없다시피 한 정수지에게 모든 것을 맡길 수는 없으니 완전히 회복될 때까지 피를 머금는 심정으로 참고 있는 중이다.
그녀의 말대로라면 내가 지니고 있는 뇌전의 기운은 보약이나 마찬가지 일 테니, 거부할 이유는 없겠지?
이상연은 정수지를 소개받으면서 뜻밖에도 담담했는데, 일단은 그녀로 인해 목숨을 구했기도 했고, 그녀가 뒤처리까지 해 주면서 도움을 준 컷이 큰 이유였던 것 같다.
나는 정수지가 우리를 구하게 된 정황을 설명했고, 그녀가 나를 서방님이라 부르는 이유에 대해서도 설명했다.
이상연은 정수지가 너무 예쁘고 귀엽다며 살갑게 대했다.
구미호에 대한 거부감은 없는 듯했다.
오히려 여자의 처음을 가져갔으니 확실하게 책임지라며 엄장을 놓기도 했다.
“수지 왔구나? 오늘은 조금 늦었네?”
하루도 빠짐없이 찾아왔기에 이제는 익숙해진 모습.
그녀가 늦게 왔기 때문에 망정이지 원래 오던 시간에 왔다면 못 볼꼴을 보여 줄 뻔했다.
오랜만의 섹스로 인해 서로가 시간 가는 줄도 모르고 즐겼던 탓이다.
“네... 오늘은 개인 PT가 있었습니다...”
왠지 기운이 없어 보이는 것도 같고.
나는 혹시나 병실에 냄새라도 나지 않을까 싶어 코를 벌름거려 확인을 했다.
“밥은 챙겨 먹었어? 기운이 없어 보이네?”
“아... 아닙니다! 저는 많이 먹지 않아도 됩니다!”
“어머~ 얘는 인한이 앞이라고 내숭 떠는 것 봐? 수지가 아무리 많이 먹어도 우리자기는 싫다고 안 할걸? 이렇게 예쁜데 어느 남자가 싫다고 하겠어?”
“아? 정말인가요? 서방님은 제가 싫은 것이 아니겠지요?”
그녀의 반응에 이상연이 머리를 쓰다듬어 준다.
참고로 정수지의 나이는 스물 둘이라고만 알고 있다.
“그럼~ 여자인 내가 봐도 반할 것 같은데? 안 그래? 서방님아?”
“그... 그렇지...”
어째서 내가 싫어한다고 생각했던 걸까?
요괴구미호라는 것이 마음에 걸리는 것일지도 모르겠다.
“다행입니다! 저는 서방님이 저에게 관심이 없는 줄 알았습니다.”
“푸훗. 별걱정을 다한다. 자기야~ 나는 일하러 다녀올게. 우리 수지랑 좋은 시간 보내고 있어~”
구상두가 운영하던 사업은 자연스럽게 이상연의 차지가 되었다.
구상두의 명의로 되어 있던 것은 그녀 명의로 이전을 했고, 구상두파가 관리하던 업장은 그의 부하들에게 넘겼다.
그녀가 조직의 보스는 아니니 깡패들을 관리할 수는 없는 노릇이다.
그렇게 그녀에게 남은 것은 5층짜리 상가빌딩 하나와 스카이클럽 건물 등이 남았다.
살고 있던 집은 부동산에 매물로 내어 놓았다.
나라도 그곳에서 살기는 싫었을 테니 말이다.
그리고 그날, 나와 이상연 말고도 살아남은 이들이 있었는데.
옥토퍼스와 졸개 둘이었다.
나를 쫓던 기억이 남아있기에 행동대장 정도로 알고 있었는데, 구상두파의 부두목이란다.
그럼, 이제는 옥토퍼스파인가?
놈들의 입단속은 정수지가 잘해 놨다고 하니 믿을 수밖에.
그런 이야기를 어디 가서 한다고 쉽게 믿을 이도 없고 말이다.
더군다나 정염귀가 된 구상두를 쉽게 처치해 버린 정수지가 무서워서라도 입에 담지 못할 거다.
***
일주일이 더 지났다.
병원에서 퇴원한 후, 오랜만에 원룸으로 돌아왔다.
입원해 있는 동안, 김나연도 한 번 더 다녀갔는데, 그날 이후로 내가 보내는 메시지에 한 번 씩 답장을 해준다.
이상연과의 묘한 분위기를 느끼고 임자 있는 놈이라는 생각해 부담감이 희석된 것일지도.
괜히 입맛이 쓰다.
“와~ 여기가 서방님이 사는 곳이군요!”
내가 퇴원하는 날에 맞춰 일을 그만둔 정수지.
그만둔 이유를 물었더니, 앞으로 조강지처로서 몸가짐을 실천해야 한다나 뭐라나.
생활비는 넉넉한가?
100년을 넘게 살았으니 재산을 꽤 모았을 수도 있겠다 싶었다.
이렇게까지 하는데, 집까지 따라오고... 혹시, 같이 살자고 하면 어떻게 하지?
정수지와 한 집에 살며 달달한 신혼생활이라...
생각만 해도 설레는 일임에는 분명하다.
그녀를 못 보는 잠든 시간이 아깝지나 않을까 몰라.
문제는, 내가 양다리 상태라는 거다.
이상연이 정수지의 존재를 인정한다고 해도 같이 사는 것을 달가워할 리는 없다.
“와~ 이런 운동기구로 잘도 그렇게 대... 대단한 몸을 만드셨습니다. 역시 우리 서방님입니다.”
항상 역시 우리서방님을 외쳐주니 절로 어깨가 으쓱해진다.
소라색 원피스를 입은 정수지가 핑그르르 돌며 원룸을 기웃거렸다.
그때마다 원피스 밑단이 원을 그리는데, 그 모습이 영화 속 주인공 같아 보였다.
잘록한 허리를 바짝 잡아주어 그녀의 가슴과 골반이 더욱 도드라져 보였다.
원피스가 이렇게 섹시하게 보이기는 쉽지 않을 거다.
하긴, 무엇을 입은들 어울리지 않았을까?
“집이 조금 어지럽지?”
한동안 사람이 없었다고 집에 내려앉은 뽀얀 먼지들이 눈에 들어왔다.
다행이라면 평소 청소는 꾸준히 했다는 것.
“이 정도면 무난합니다. 서방님이 집에 계시지 않아 먼지가 많이 쌓였습니다. 같이 청소하는 것은 어떤가요? 아! 아니지? 서방님은 마실 것을 준비해 주세요. 청소는 제가!”
그녀는 뭐가 그리 신났는지 혼자 떠들어 대며 들쑤시기 시작했다.
혹시 그녀가 보지 말아야 할 것이 있는지에 대해 곰곰이 생각해 보았다.
‘PC만 건드리지 않는다면 괜찮겠네.’
나는 슬그머니 데스크탑의 코드를 뽑아버리고는, 그녀가 청소하는 것을 함께 도왔다.
장장 5시간에 걸쳐 먼지 한 톨 남기지 않은 방을 보고 있자니 감회가 새롭다.
안 보이는 부분에 그렇게 많은 먼지가 있을 줄이야.
남녀차별주의자는 아니지만, 이 부분에서는 차별을 둘 수밖에 없다.
청소는 남자보다 여자가 잘한다.
그저 시키는 대로 따라다니면서 잡일을 맡으면 될 일이다.
그렇게 침대 구석에 박혀 있는 팬티나, 말라비틀어져 오해성이 짙은 휴지를 정수지 안 보이게 처분했다.
휴지는... 내가 비염이 있어서 코를 푼 것이 말랐던 것뿐이다.
“이렇게 서방님을 위해 청소를 하다니 꿈만 같습니다.”
소녀처럼 얼굴을 붉히며 몽롱하게 변하는 눈빛.
청소하며 달구어진 은은한 열기에 힘입어 묘한 분위기가 연출된다.
드디어 때가 온 것인가?
이 초라한 원룸이 꽃밭으로 변하려 하고 있었다.
두근 두근.
꿀꺽.
“수... 수지야?”
나도 모르게 잘게 떨리는 음성.
“네. 서방님?”
이름을 부르자 큰 눈을 껌벅이며 지그시 시선을 마주쳐 온다.
서방님이라니 정말 신혼부부 같잖아!
그녀의 고양이 같던 눈매가 강아지처럼 늘어지며 촉촉하게 변해간다.
♩♪♩♪♩♪~
한창 분위기가 최고조로 오를 시점.
이를 방해하려는 듯 지랄 맞게도 스마트폰이 울려 버렸다.
나는 일그러지는 얼굴을 애써 다림질하며, 이 신성한 시간을 방해한 주인공을 확인했다.
김... 나... 연... ?
욕이라도 한 바가지 해 주고 싶었던 심정이 ‘나연누나’ 라는 발신인을 확인하고는 슬그머니 가라앉는다.
그녀가 먼저 전화를 한 적이 없었기 때문에 조금은 당혹스럽기도 하다.
오늘 퇴원한다고 메시지를 보내서 전화를 한 걸까?
“잠깐만, 전화 좀 받을게.”
묘하게 눈을 뜨는 정수지의 시선을 외면하며, 최대한 담담한 표정으로 전화를 받았다.
“여보세요?”
여보세요. 퇴원했다며?
“응. 그것 때문에 전화까지 한 거야? 오올~”
목소리 들어 보니 다 낳은 것 같네? 다행이야. 일은 언제부터 시작하려고?
“나야 워낙에 건강하잖아~ 남즈아~~~ 몰라? 히히~ 성기형한테 다음 촬영은 연락 달라고 했어.”
그래?
“응.”
.......
막상 일상적인 대화를 나누려니 어색하기 그지없다.
간단하게 일정을 맞추기 위한 것 이외에는 이런 통화가 처음이다.
“하... 하하하. 요즘 일은 좀 했어?”
어색함을 날려 버리기 위해 최대한 주제를 짜내 본다.
뭐... 별로... 내 실력은 네가 잘 알잖아.
“아...”
그녀의 하찮은 실력을 파고든 것 같아 괜히 찔린다.
푸후훗. 뭐야? 그 반응은. 나도 알아. 내 실력 형편없는 거. 너 아니면 일거리도 거의 없는걸.
참고로 그녀를 고용하는 이들은 남자들이 주를 이루고, 그녀의 미모에 혹해서 사심이 들어간 놈들뿐이다.
“윽! 괜히 미안하네...”
왜 쭈구리질이야. 나도 취미로 하는 일이니까 크게 신경 안 써. 인한이 네가 일 시작하면 내 전속 모델이 돌아오니까 바빠지지 않겠어?
“큭큭큭~ 내가 전속이 된 거야?”
김나연이 이렇게나 말을 많이 하다니 조금 신기하다.
이런 사사로운 이야기는 꺼리고는 했는데 말이야.
관계가 갑자기 급진전된 느낌이다.
내 인생 중, 올해에 여운이 몰빵 이라도 된 건가 싶다.
그럼 아니었니?
“맞아. 누나 전속.”
고맙네~ 어쨌든 회복 잘해서 다행이야. 푹 쉬고 촬영 때 보자.
“알겠어. 누나도~”
기분 좋게 전화를 끊고 있자니, 옆에서 음산한 목소리가 들려온다.
“서방님... 어느 여자분 이기에 그렇게 기분이 좋으신 걸까요?”
갑자기 느껴지는 한기에 몸을 흠칫 떨었다.
얼굴을 슬쩍 더듬어 보자 반달 진 눈매와 잔뜩 올라간 입가가 매만져진다.
누가 봐도 좋아죽겠다는 표정.
분위기가 달아오를 무렵, 외간 여자와 통화를 하며 입이 찢어져라 즐거워한다면... ?
정수지의 얼굴을 슬쩍 바라봤다.
강아지 같던 눈매는 도도하게 치켜 올라가 고양이처럼 변했다.
‘오오~ 예뻐.’
이런 정신 차려!
무엇을 하든 ‘서방님~ 서방님~’ 하는 애가 저런 표정이라면 아주 심각한 거다.
“하하하, 이 누나가 어쩐 일로 전화를 다 했지? 같이 일하는 사이다 보니까, 퇴원했다고 해서 전화 했나 봐.”
정수지가 눈을 예쁘게 흘기며 팔짱을 낀다.
그녀의 팔위로 묵직한 가슴이 처억 올려 진 모습은 참으로 보기 좋다.
“서방님은... 역시나 인기가 많군요. 휴우...”
그러곤 올렸던 팔을 추욱 하고 늘어트렸다.
그대로가 보기 좋았는데...
“하긴... 이렇게나 잘 생기셨는데 어쩔 수 없는 일이겠죠.”
그녀의 눈이 아련해진다.
그런데... 내가 그렇게 잘생긴 얼굴이었나?
생각해 보면 이상연도 나한테 잘생겼다는 말은 안 한 것 같은데...
“내가... 그렇게 잘... 생겼어...?”
“네? 서방님은 거울도 안 보고 사시나요? 앞으로가 걱정입니다.”
거울은 항상 본다만?
나름 매력 있다고는 생각해도 잘 생겼다는 생각은 못해 봐서...
제 눈에 안경이라는 말이 이럴 때 쓰는 건가?
“그저 서방님이 저를 버리지 않기만을 바랍니다...”
허억...
정수지의 애절한 표정에 심장이 아프다.
아무리 처음을 내가 가져갔다고 해도, 저렇게 나만바라기가 될 수 있는 건가?
내 눈에 흙이 들어가도, 아니 평생을 빌어먹어도 정수지를 놓아줄 일은 없을 것 같다.
“흠흠... 청소했더니 좀 덥네... 먼지도 많이 묻었고... 저녁 먹기 전에 난 좀 씻어야 할 것 같아.”
아무래도 오늘! 확실하게 믿음을 줘야겠다는 다짐이 생긴다.
줘도 못 먹으면 병신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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