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44화 〉 2. 사냥꾼.(15)
* * *
2. 사냥꾼.(15)
강인한이 훈련에 매진하는 그 시각.
정수지는 마마가 있는 강원도의 삼척에 있었다.
사람들의 왕래가 거의 없는 오지의 산자락에 위치한 곳.
행여 사람들이 들어선다 해도 그 안에 이 정도의 마을이 자리 잡고 있으리라는 것은 누구도 알지 못할 것이다.
넓은 부지에 듬성듬성 지어진 고급스러운 한옥들.
그리고 한옥주택들의 중앙에는 성이라 불려도 무방할 대 저택이 들어서 있었다.
이곳은 오로지 마마가 구축한 경계이면의 세상이었으니.
그녀의 허락이 없는 자는 발을 디딜 수조차 없었다.
구미호에서 인간이 된 존재.
그녀만큼 오래 산 구미호가 인간이 되려는 경우는 없었다.
천 년이 넘는 세월을 살며 쌓은 요기는 이미 요괴의 허물을 벗어난 새로운 존재가 되어 있었다.
그런데도 인간이 되기를 택했던 마마.
그녀는 알고 싶었다.
포식자들의 서열상 거의 밑바닥에 위치한 인간이 어떻게 세상의 지배자가 될 수 있었는지.
그 궁금증을 해소하기 위해 인간이 되었지만, 그녀의 오랜 수행은 평범한 인간과는 다른 존재가 되어 버렸다.
덕분에 평범한 인간의 삶은 요원하게 되어버렸다.
구미호에게는 성욕이 없다.
그저 인간 남성의 양기를 매개로 요기를 얻을 뿐.
그 과정에서 남성은 모든 양기를 빼앗겨 목숨을 잃기도 한다.
마마는 그저 요기를 충당하는데 필요한 사내와의 성행위가 어째서 인간의 3대 욕구 중 하나가 된 것인지 실로 궁금했다.
인간이되 인간이 아닌 존재가 된 마마는 제일 처음으로 한 것이 인간과의 교접이다.
인간 세상에 나가 남성을 유혹하는 것은 아름다운 그녀에겐 너무나도 쉬운 일이었다.
그렇게 왕이라는 남성을 유혹해 그의 씨를 받았다.
그 당시 나라가 어수선하기는 하였지만, 기왕이면 인간 중 높은 직책에 있는 자의 씨를 받고 싶었던 탓이다.
하지만 불행하게도 이미 나이가 제법 있던 고종은 밤일이 형편없었고, 인간과의 첫 섹스는 매우 실망스러운 것이었다.
그 후 섹스에 대한 환상은 날아가 버렸고 그 때 잉태한 딸을 낳았다.
당연히 섹스에 실망한 그녀는 아버지의 성 대신 자신이 인간이 되면서 붙인 성으로 이름을 지었고, 이곳에 자리를 잡았다.
그리고 그녀의 소문을 들어 인간이 되고 싶은 구미호들이 몰려들었고 지금의 마을을 형성하게 된 것이다.
인간이 되려는 구미호는 남성의 양기를 받아는 들이되 성행위를 하여서는 안 된다.
급격하게 들어온 양기는 요기의 폭주를 일으켜 이성을 잃게 만들었다.
그 것이 구미호의 본성이기는 하지만, 인간이 되려면 그 본성을 없애야만 했다.
그리고 대부분의 요기를 봉해야 하는 만큼 원래 힘의 반밖에 사용할 수 없었다.
그러다 보니 자연스럽게 강한 존재인 마마에게 의지하려 몰려든 것이다.
“마마! 한 달 가까이 지켜보았지 않습니까! 이제 그만 현세로 보내주세요오!”
마마에게 정염귀에 대해 알아보러 왔다가 발이 묶여 버린 정수지는 답답해 미칠 지경이었다.
드디어 강인한과 깊은 관계를 확고히 할 수 있게 되었는데, 마마에게 그 사실을 들켜 버린 것이다.
마마가 그녀 안의 변화를 모를 턱이 없다는 것을 생각했어야 했다.
“아가야. 어미가 그렇게나 주의하라고 당부하지 않았니? 남성과 관계하게 되면 요기가 폭주한다고.”
마마는 인간이 되고픈 구미호들을 적극적으로 지원했다.
딸인 정수지 역시 당연하다.
그렇게 기대했던 섹스는 비록 실망스러웠지만, 그 수행으로 얻는 것은 실로 이롭기 그지없었다.
요사한 요기가 정순해지는 것은 물론이요, 수행의 결과로 더욱 강한 힘을 손에 넣을 수 있었다.
부수적으로 늙지 않는 젊음까지 얻을 수 있으니, 딸이 수행을 하는 것을 당연히 지지할 수밖에.
구미호라도 영원히 젊음을 유지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니 말이다.
그런데 어느 빌어먹을 사내놈이 정수지를 꼬드겨 성관계를 맺어 버린 것이다.
지금은 사내가 지니고 있다는 뇌기로 인해 좋아진 결과를 보이고 있지만, 이 후 무슨 일이 생길지도 모르는 일이다.
마마는 진정으로 아무런 변수 없이 딸의 수행이 끝나기를 바랐다.
“마마도 확인했지 않사옵니까아! 오히려 더욱 좋아졌습니다!”
이곳에서 충분한 수련을 한 후에는 필연적으로 인간 세상에 부대끼며 양기를 모아야 한다.
그렇기에 모든 구미호들은 이성의 유혹에 넘어가지 않도록 철저하게 교육시켰다.
그러했는데... 결국 이런 사고가 터져 버렸다.
이는 곧, 모든 수행을 되돌려야 할 수도 있다는 말이다.
정수지의 경우 특수한 상황이기에 보통 구미호들보다 수행기간이 현저히 짧기는 하지만 122년을 무로 돌릴 뻔했다.
“네 말대로 지금은 이상이 없으나, 더욱 지켜봐야 하지 않겠니.”
한 달 가까이 지켜봤지만, 확실히 딸의 정기는 훨씬 늘어 있었다.
그렇다고 무조건 안심할 수는 없는 상황.
“마마! 미워요!”
도대체 어느 빌어먹을 놈이 딸의 마음을 저만큼이나 훔쳐갔을까 싶었다.
마마는 딸의 원망에도 마음을 다스리며 눈을 감아버렸다.
그녀의 눈이 파르르 떨리며 기다란 속눈썹 또한 심정을 대변하듯 함께 파르르 떨린다.
*
몸을 홱 하니 돌려 저택을 나온 정수지는 씩씩거리며 경계주변을 어슬렁거렸다.
아무리 살펴보아도 빠져나갈 구멍 따위는 보이지 않는다.
그만큼 마마의 능력은 정수지가 엄두도 낼 수 없을 만큼 높은 경지였다.
“휴우... 서방님... 이를 어찌합니까. 흑... ”
그녀의 마음은 너무나 불안해 그 마음을 다잡을 길이 없었다.
세상에서 제일 잘생긴 얼굴.
완벽한 그의 육체.
너무도 당당한 그의... 서... 성...
화아악.
그녀의 상상이 꼬리에 꼬리를 물며 얼굴이 붉게 달아올랐다.
“하아... 불안하옵니다. 서방님이 혹여 다른 생각할까 말입니다. 서방님은 너무나 잘 생기셨습니다. 흑흑...”
강인한의 옆에 이상연이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녀보다 먼저 만났던 여인이기에 어떻게든 감수하려고 했다.
그런데도 여인이기에 질투라는 감정이 샘솟는다.
자신이 없는 그 시간 동안 이상연이 독차지한다는 생각에 머릿속이 복잡하다.
그뿐 만일까?
그렇게 잘생기고 완벽한 서방님을 다른 여자들이 그냥 두지 않을 거다.
“아... 안 됩니다! 정말 마마가 밉습니다!”
단단히 화가 나, 나가 버린 딸을 조용히 뒤따라 살피던 마마는 하늘이 꺼져라 한숨을 쉬었다.
얼마나 잘난 사내이기에 저렇게나 어여쁜 딸이 애가 달았는가 싶었다.
구미호들이라고 아름다운 것을 싫어하겠는가?
성욕이 없을 뿐이지, 인간이 되고픈 구미호들은 잘생긴 남성들에 대한 로망이 있었다.
이제는 인간에 더 가까운 마마도 마찬가지다.
잘생긴 남성에게 호감이 가는 것.
하지만 딱 거기까지다.
섹스라는 것이 얼마나 찝찝하고 별로인 것인지 알기 때문이다.
그리고 보통 인간들의 수명은 너무나도 짧기에...
아름다운 것은 아름다운 것으로 끝내야 한다.
경계에서 어슬렁거리던 딸이 기운 빠진 모습으로 터덜터덜 발걸음을 옮기자, 이를 보는 마마의 마음은 더욱 복잡해졌다.
그리고 딸의 마음을 저렇게나 헤집어놓은 사내에 대한 분노가 피어오른다.
“내 이놈을 당장...”
사실, 한 달 가까이 살펴본 결과 딸에게는 별다른 이상을 밝혀낼 수 없었다.
그렇다고 그냥 내 보내기에는 불안한 마음이 들었다.
그 사내와의 관계에서는 확실히 큰 이득이 있었다.
어쩌면 딸이 생활하는데 정말 이로운 이일지도 모르겠다.
문제는 세상이라는 것이 마음대로만 흘러가지 않는다는 것.
사내라는 족속들은 그 더러운 몽둥이를 휘두르지 못해 안달이 난 것들이라 무슨 변수가 발생할지 몰랐다.
딸이 저 정도로 빠졌다면 필시 엄청나게 잘 난 사내이리라.
그녀의 눈에 딸은 너무나도 완벽하지만, 그렇다고 그런 놈이 딸만 바라보고 산다는 보장이 없다.
그놈이 이리저리 더러운 물건을 휘두르다 딸이 알게 되면 홧김에 그녀도 일을 칠 수가 있는 것이다.
정말로 돌이킬 수 없는 일이 발생 할 수도 있었다.
그렇다고 언제까지 이곳에 묶어둘 수도 없는 노릇이고.
결국, 인간이 되기 위해서는 현세로 나가야만 한다.
마마의 고심이 깊어졌다.
그 시각.
정수지의 눈에만 세상에서 제일 잘생긴, 평범한 얼굴 강인한은 뼈가 빠지게 훈련에 매진하고 있었다.
***
후비적.
‘갑자기 귀가 왜 이렇게 가려워?’
나는 오늘도 어김없이 빡빡한 훈련을 소화해내었다.
벌써 한 달이라는 시간이 지났다.
그러면서 복수에 들끓던 마음도 많이 차분해지고 있다.
복수도 능력이 되어야 할 수 있는 것.
그리고 언젠가는 분명히 이루리라 생각되었다.
한 달이 지나며 지금은 자율훈련을 하고 있었다.
내가 훈련에 대해 체계를 잡아가자 정욱아저씨는 돌아다니는 시간이 많아졌다.
나도 함께하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았지만, 그는 내가 더욱 준비가 되기를 바랐다.
훈련을 마치고 돌아온 지금, 오늘도 어김없이 급 우울해지고 있다.
마마를 만난다고 갔던 정수지는 완전한 연락두절 상태이다.
이렇게까지 된 것을 보니 어쩌면 그냥 까인 거라는 생각이 든다.
“하아... 젠장.”
정수지와의 짧은 기억이 이렇게나 괴로울 줄은 몰랐다.
솜털처럼 부드러운 그녀의 새하얀 살결과, 나를 향해 보내던 그 아름다운 눈동자가 생각난다.
차라리 그만 보자고 말이라도 건넸으면 이 정도는 아니었을 텐데...
그녀에 대한 갈증은 날이 갈수록 심해지는 것 같다.
이상연이 마음의 한쪽을 채워주고 있지만, 다른 한쪽은 공허하기 그지없다.
그러다 보니 정수지에 대한 원망과 함께 분노마저 드는 것 같다.
“에이! 씨발! 바람이나 쐬자.”
참고로 나는 욕을 거의 하지 않는 스타일이다.
하지만 지금은 마음이 정말 좆같다.
밖으로 나와 근처에 있는 마들렌으로 향했다.
정욱아저씨를 만났을 때 처음으로 들렸던 곳.
핸드드립 커피를 처음 맛보고 완전히 반해 버렸다.
물론, 여사장 또한 강아지처럼 귀엽고 상당한 매력의 소유자다.
그런 여사장이 주인이라면 남자들이 몰리기 마련인데, 손님은 쉽사리 늘지 않고 있었다.
나처럼 커피 맛을 본 사람들이야 그 맛을 잊지 못하고 찾고 있었지만.
그 이유를 파악해보자면, 그녀는 자신을 꾸밀 줄 몰랐다.
첫날은 안경도 쓰지 않고 머리를 질끈 묶었던 반면, 그 후로는 이상하게 생긴 안경을 쓰고 머리카락으로 얼굴마저 반은 가리고 있었다.
궁금해서 슬쩍 물었더니, 렌즈를 처음으로 껴 봤다고 했다.
그리고 너무 불편해서 그 날 이후로는 사용하지 않는다고...
그녀에게 미안하기는 하지만, 손님이 없어 상당히 친해질 수 있었다.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