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57화 〉 2. 사냥꾼.(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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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사냥꾼.(28)
나연누나와 데이트는 하지 못했지만, 다음 주를 기대하며 발걸음도 가볍게 집으로 향했다.
그런 기분을 잡치는 것은 한순간이었다.
띠리리리링.
스마트폰이 울리며 발신인을 확인한 순간 좋았던 기분을 잡쳐 버린 것이다.
김동운.
‘이 새끼가 왜?’
하긴, 대놓고 절교를 한 것도 아니고, 언젠가는 올 연락이었다.
받을까 말까 하다가 계속 연락 오는 것도 짜증 날 것 같아서 단호하게 절교를 선언할 작정이었다.
“여보세요.”
야~ 요즘 뭐 하는데 연락이 없어.
“그냥, 쓸데없는 것 같아서.”
엥? 뭔데 그렇게 까칠해?
“용건이 뭐야.”
새끼~ 오랜만에 함 보자. 그런데 너 아직 상연이 누나 보냐?
뜬금없이 묻는 말에 의도가 궁금해진다.
구상두가 죽고 내가 강일파를 먹은 지금 거리낄 것은 없지만, 이놈의 의도가 불순하다는 것쯤은 짐작하고도 남는다.
“네가 그건 왜 궁금해 하는데?”
헐~ 친구끼리 물어볼 수도 있지. 좀 전에 상연누나 백화점에서 봤거든~ 그래서 물어보는 거지~ 영훈이랑 있는데 나와라. 기왕이면 상연누나도 불러~ 오랜만에 진하게 함 놀자.
“상연이를 부르라고?”
상연누나와 수지는 오늘 쇼핑하러 간다고 했는데, 아무래도 백화점에 갔다가 마주친 모양이다.
날이 갈수록 미모가 빛을 발하는 상연누나나, 인간 같지 않은 미모의 소유자 수지를 봤으니 눈이 돌아갈 만도 하지.
아차, 수지는 아직 완전한 인간이라고 하기는 그런가?
아무튼, 둘 다 내 여자였고 놈은 헛물을 잔뜩 켜고 있었다.
김동운의 의도는 금세 파악이 되었고, 상연누나와 수지의 문제가 아니고서라도 이놈과는 앞으로 연락을 끊을 작정이기에 단호하게 말했다.
“됐다. 너희끼리 놀아라. 그리고 앞으로 연락하지 마.”
그 말에 당황한 음성이 수화기 너머로 들려왔다.
뭐... 뭐? 갑자기 뭔 개소리야?
“그 개소리는 네가 잘 알겠지. 이만 끊는다.”
야! 씨발. 친구끼리 이러기야? 어?
그냥 전화를 끊어 버리려던 나는 한 마디 더 던져 주고 미련 없이 끊어 버렸다.
“그리고 둘 다 내 여자니까 침 흘리지 말고. 더러운 새끼야.”
전화를 끊고 나니 그렇게 속이 시원할 수가 없다.
한때는 친구들이 다 떨어져 나가면 혼자가 될 거라는 외로움에 겁먹어 움츠러든 적도 있었지만, 한 번 죽었다 살아나고 나서는 별 의미를 두지 못하겠다.
더군다나 친구를 그렇게 쉽게 팔아먹는 놈에 대해서야...
생각해 보면 내 주변에 괜찮은 사람은 꽤 있었다.
그저 내가 불알친구라는 것에 사로잡혀 주변을 둘러보지 못했을 뿐.
성기형도 항상 든든하게 옆에 있어 주었고, 같이 일하다 연락이 뜸해진 준이형도 있다.
나연누나와도 괜찮은 관계고, 가장 든든한 상연누나와 수지가 있다.
같은 목적을 가진 정욱아저씨도 있고...
그런데... 준이형은 진짜 어떻게 된 거지?
한 번 성기형한테 제대로 물어보기는 해야겠다.
성기형은 준이형한테 조금 실망한 것 같지만, 그 사람의 성격상 한 번에 뒤돌아 설 사람은 아니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
빠드득.
“이런 개새끼가?”
분노하는 김동운을 보며 이영훈이 슬쩍 묻는다.
“왜?”
“씨발놈이 연락하지 말하는데? 좆나 어이없네.”
이영훈이 머저리는 아니기에 강인한이 왜 그랬는지 눈치를 챘다.
백화점에서 봤던 이상연과 김동운의 대화, 그리고 강인한의 반응.
분명 김동운이 또 트롤짓을 했겠구나 싶었다.
그렇다고 이를 애써 입에 담지는 않았다.
“쩝... 내가 연락해 볼까?”
이영훈의 말에 김동운이 버럭 했다.
“야! 씨발. 이 새끼랑 연락하지 마. 친구라는 새끼가 조또 이해심도 없어.”
이영훈은 김동운의 행동에 슬슬 짜증이 났지만, 그저 침묵으로 답했다.
이 이기적인 놈은 언제나 지 멋대로 안 되면 참지 못하는 놈이었으니 말이다.
행여 편이라도 든다 치면 개지랄이 나는 놈이다.
“아오... 진짜 짜증나네? 뭐라는 줄 알아?”
“뭐라는데?”
“둘 다 지 여자란다. 좆나 어이가 없어서. 하하하.”
이영훈은 그저 따라 웃으며 속으로 되뇌었다.
‘네가 더 어이가 없다. 아 씨발. 이 새끼 이러는 거 언제까지 봐야 하는 거야?’
그러거나 말거나 김동운은 계속해서 강인한을 욕하고 있었다.
“두고 봐라. 씨발. 내가 그 년들 다 따먹고 만다.”
김동운의 번들거리는 눈빛을 보며 이영훈의 얼굴이 찌푸려졌다.
‘하... 이 새끼... 도 넘네.’
이영훈 입장에서는 김동운이나 강인한이나 똑같은 불알친구였다.
물론, 자기중심적인 김동운의 비위를 조금 더 맞춰주기는 했지만, 이런 식이라면 더 이상은 안 되겠다 싶었다.
‘이 새끼는... 친구를 뭐라고 생각하는 거야? 진짜 사고치는 거 아냐?’
이영훈은 강인한보다 김동운의 어두운 부분을 더 많이 알고 있었다.
깨끗한 척 깔끔한 척하지만 알게 모르게 불법을 넘나드는 모습을 몇 번이나 봤다.
한때는 그 스릴에 어울리기도 했는데, 점점 잘못되고 있다는 것을 깨닫고는 한 발 두 발 빼는 중이었다.
그래도 가슴 한 편에는 친구인데... 설마... 라는 마음이 남아 있는 것을 보면, 김동운에 대한 미련이 아직은 남아 있는 모양이다.
***
깡패는 깡패일 뿐.
의리, 로망이라는 단어는 예전에도 그랬고, 21세기인 지금에도 마찬가지다.
그저 드라마나 영화에서 극적인 장면을 위해 연출했을 뿐이다.
배신과 배신이 난무하고, 약해 보이면 뒤통수치는 건 일도 아니다.
보스가 힘을 잃으면 으레 그렇듯 오른팔이나 왼팔이 거하게 통수를 쳐 주니 마음 편할 날이 없다.
그나마 압도적인 힘을 손에 쥐고 있다면 유지되는 시간은 늘어날 거다.
대한민국의 정상에 위치한 조직들이 그러했고, 그 조직들 중에는 구상두파도 한 다리 걸치고 있었다.
이미 인간이 아닌 요괴였던 구상두의 무력은 압도적이다 못해 파괴적이었다.
그런 구상두를 처치한 강인한.
나대명은 강인한이 전설이라 불리는 이들과 어깨를 나란히 할 수 있다고 생각했다.
상명파를 복속 시키던 그 모습은 전율마저 일었다.
어쩌면 구상두마저 꺼리던 강북 이외의 지역을 통일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문제는 강인한이 조직의 일에 별로 관심이 없다는 것.
이런 상황이라면 보통은 보스를 재껴버리고 올라가는 것이 순리이지만, 나대명은 추호도 그런 생각이 없었다.
의도한 것은 아니겠지만, 강인한은 생명의 은인과 마찬가지라고 생각했다.
그 자리에서 살아남은 두 부하도 나대명과 같은 생각이었다.
그나마 위안이라면 강북의 중심인 스카이클럽 일대는 확실히 사수할 수 있다는 것이다.
강북에서 가장 돈이 되는 지역이었고, 일대에서 벌어들이는 돈 뿐만 아니라 스카이클럽에서 나오는 매출의 일부분도 조직을 운영하는데 내어 주었다.
그런 강인한의 뒤통수를 칠 생각은 절대로 없다.
강인한이 클럽을 지키는 것에는 한 손 거들겠지만, 그 이외의 것에는 신경 쓰지 않을 거라는 것은 확실했다.
“쩝... 형님이 제대로 나서면 좋을 텐데...”
링 바닥에 앉아 중얼거리던 나대명의 귓가로 부하의 음성이 들려온다.
“형님. 더 하실 겁니까?”
고개를 돌리자 슬슬 정리하는 부하들의 모습이 보인다.
스카이클럽의 그 사건 이후로 하루도 거르지 않고 단련을 하는 강일파였다.
“나사장 쉬어가면서 해.”
어느새 옷을 갈아입고 나온 조응수.
나대명보다 다섯 살이나 많은 그는 40줄에 접어들었지만, 몸은 서른이라 해도 믿을 수 있을 만큼 탄탄하다.
“조이사님, 먼저 가쇼. 나는 한 타임 더 뛰고 갈랍니다.”
강인한의 무력을 겪고 난 후 조직의 분위기가 바뀌었다.
나대명도 격투기 선수로 활동했을 만큼 제법 실력이 좋았지만, 깡패라는 직업이 은근히 나태하게 만드는 직업이다.
어느 순간부터는 몸 쓰는 것보다 사람 부리는데 더 재미를 붙이게 되기 때문이다.
“쯧. 적당히 하라고. 먼저 간다.”
조응수가 손을 흔들며 나가고, 부하들이 90도로 꾸벅 인사를 하며 나간다.
모두 돌아갔기에 스파링을 뛸 사람은 없었지만, 혼자 쉐도우 복싱을 시작했다.
그의 반들반들한 머리에 맺힌 땀방울이 흘러내리며 링 바닥을 적신다.
한참을 무아지경에 빠져 주먹을 휘두르고 있는데 스마트폰이 요란하게 울렸다.
띠리리링. 띠리리링.
그제야 크게 숨을 내뱉으며 동작을 멈춘 나대명.
“후우... 후우... 오늘은 그만하자.”
그렇게 웅얼거린 나대명이 링 밖으로 빠져나와 스마트폰을 확인했다.
“칠성아들?”
바로 기억이 나지 않아 고개를 갸웃거리던 그.
“아... 형님 꼰지른 놈이잖아?”
기억의 틈바구니에서 끄집어낸 칠성건물주 아들네미의 얼굴을 떠올렸다.
구상두의 명령으로 잡아왔더니, 건드리기도 전에 주절주절 강인한에 대해 나불거리던 놈.
그때야 수고스럽지 않게 술술 내뱉어 주니 좋았다만, 지금은 형님을 배신한 빌어먹을 놈일 뿐이다.
스카이 클럽의 vip이기도 했던 놈이긴 한데 갑자기 왜 전화를 한 걸까
의문도 잠시.
전화를 받자마자 호들갑스러운 음성이 귀에 때려 박힌다.
안녕하십니까. 형님! 저 칠성빌딩 김동운입니다.
말하지 않아도 당연히 누군지는 알고 있었다.
김동운이 클럽 vip인 것을 제외하더라도 김동운의 아버지와도 안면이 있었다.
조직차원에서 몇 번 일을 해주며 괜찮은 관계를 유지했던 것.
“그래.”
김동운의 아버지는 조직의 고객님이었고, 김동운은 클럽의 vip였다.
그랬기에 제법 호의적으로 대했는데, 지금 나대명의 목소리는 무뚝뚝하기 그지없다.
흐흐흐, 강일파로 바뀌고 형님이 조직의 보스가 되셨다면서요? 정말 축하드립니다. 축하도 드릴 겸, 거하게 대접해 드리고 싶은데, 시간 한 번 내주세요.
비밀도 아니었기에 김동운이 알고 있다는 것이 이상한 것은 아니지만, 이제 자신은 겨우 건물주 아들놈을 만날 위치는 아니다.
버럭 하고 전화를 끊을까 하다 그 의도가 궁금해졌다.
“네가 그럴 이유가 없을 텐데?”
형님~ 우리 사이에~ 너무 빡빡하십니다. 대접도 해드릴 겸, 의뢰하고 싶은 것도 있고 해서 전화 드렸습니다.
그리고 이어지는 말에 물기 어린 나대명의 반짝이는 머리에 잔뜩 주름이 지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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