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04화 〉 2. 사냥꾼.(7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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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사냥꾼.(76)
계약서를 직접 작성해 본 적은 없기에 생각나는 대로 적었다.
법적인 효력이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아예 없지는 않을 거라는 생각이다.
나는 간단하게 적은 두 장의 계약서에 사인을 하고 두 장을 겹쳐 가운데에 엇갈리게 사인한 번 더 했다.
이것은 조금 전 부동산 계약서를 작성하며 보고 배운 것이다.
“읽어보고 사인해. 물론, 1년 뒤에 원한다면 이대로 갱신해도 돼. 그것도 적어 줄게.”
“이... 이건 오빠한테 너무 불리한 것 같은데...”
“불리할 게 뭐 있어. 진짜 장사 안 되면 내 개인 바리스타로 쓰지 뭐. 앞으로 위에 살 건데 나갈 때마다 전속 바리스타가 내려주는 커피를 마실 수도 있고. 나한테는 손해가 아니야.”
그 말에 연지의 목부터 얼굴까지 화끈하게 달아오른다.
전속이라는 말에 달아오른 것인지, 위에 산다는 것에 달아오른 것인지는 모르겠다.
무슨 상상을 했든 그린 라이트는 확실하다.
어제 그렇게 욕구를 분출했음에도 고개를 치켜드는 음심에 몸이 뜨거워진다.
날이 갈수록 증상이 심해지는 것이 문제라도 생기는 것은 아닌지 모르겠다.
오빠...? 눈이 느끼해.
아무래도 귀신이라 민감한 것인지 윤지는 내 변화를 느낀 모양이다.
“후우...”
천천히 숨을 내뱉으며 열기를 달래고는 연지의 손에 집중했다.
스스슥. 슥.
연지는 내가 했던 것처럼 사인을 하고는 중간에 겹쳐서 사인을 마무리했다.
이것으로 이제 그녀의 마음이 어떻든 간에 정은식은 모든 권리를 잃었다.
어차피 돈을 값아 주면 끝날 일이었기는 하지만 중요한 것은 연지의 결심이었으니 말이다.
“좋아. 이제 한 장씩 나누어 갖자. 커플 계약서인가?”
연지의 얼굴이 또다시 붉게 물들었다.
말하는 족족 반응하는 것이 정말 순박한 성격이다.
지금 내 몸을 달아오르게 만든 열기처럼 연지의 얼굴에서도 열감이 느껴질 정도다.
“커... 커플...”
“푸하하... 뭘 그렇게 심각해. 아무튼 공사는 바로 시작할 거야. 당분간은 가게 닫고 쉬어도 될 것 같은데?”
“아? 네... 오빠. 정말 감사합니다.”
“나야말로 잘 부탁해. 전속 바리스타.”
“네? 네...”
“흐음... 그리고 스타일도 많이 바꿔야 할 거야.”
“오... 오빠가 말씀하신 데로 바꿨는데...”
아니다.
연지는 전문가의 도움이 절실히 필요하다.
정말 저 흙들을 다 털어내 주고 싶다.
말 그대로 지지리도 자신을 못 꾸민다.
“스타일을 바꿔 줄 사람 소개해 줄게.”
나는 상연누나를 떠올렸다.
수지야 워낙에 운동복스타일이다보니...
“네...”
“그리고 삼촌에게 연락은 최대한 빨리해.”
“네? 그... 그럼, 지금 할 게요.”
“오오~ 그래. 이제야 빠릿빠릿하게 움직이네. 있는 그대로 말해. 건물주가 바뀌었고, 내가 조건을 내밀어 보증금은 필요 없게 되었다고. 그 돈은 건물주가 내어 줄 거라고.”
“네... 그럼... 잠시.”
연지는 내 앞에서 전화를 걸기가 조금 머쓱했는지 카운터로 가 조심스럽게 휴대폰을 꺼내 들었다.
그 새끼가 순순히 놓아 줄까요?
“글쎄다. 그런데 그놈은 왜 여직 연지를 안 건드린 거지?”
네? 그러게요?
놀란 듯 되묻는 윤지의 모습에 나는 미간을 좁혔다.
“그놈이 여기에 한 번도 안 왔을 리는 없잖아?”
그... 그렇죠?
“야. 넌 아는 게 뭐야? ‘그렇죠?’ 라고 말하면 나는 뭐라고 하냐?”
아니~ 오빠 만나기 전에는 제 존재가 너무 희미했다고요. 그냥 꿈속에서 노니는 느낌? 이렇게 선명하지가 않았다고요!
“흐음... 이상하단 말이야.”
그러면서 심각한 표정으로 안절부절못하며 통화 중인 연지를 바라본다.
어린애들을 선호하기는 하지만 여자라면 가리지 않는 정은식.
그런 놈이 연지를 지금까지 그저 두고만 보고 있었다고?
말도 안 되는 소리다.
“연지가 놈에게 당하지 않았다는 건 진짜야?”
네? 선명하지는 않아도 언니의 위기 정도는 알아챌 수 있어요. 절대 당하지 않았다는 것에 왼팔을 걸겠어요!
나는 헛소리를 지껄이는 윤지를 보며 혀를 쯧쯧 찼다.
저런 말은 어디서 배웠는지.
TV가 애들을 베려놓는다는 옛말이 틀릴 것 하나 없다.
아니, 인터넷인가?
“그런데 왜 하필 왼 팔이야?”
전 오른손잡이거든요.
“쯧. 그만하자. 농담이라면 정말 기분 조졌다.”
죄송.
아무튼!
세상의 이면을 알기 전에는 그저 사이코패스 살인마라거나, 연쇄 강간범 등 그런 것들을 가져다 붙였겠지만, 어째 하는 짓이 내가 아는 무언가랑 닮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여성의 음기를 탐하는 더러운 존재.
정염귀.
내 눈으로 확인해 보면 알겠지만, 의심이 그쪽으로 흐르는 것은 막을 수 없었다.
나는 윤지에게 시선을 돌려본다.
내가 빤히 바라보자 귀신 주제에 몸을 이리저리 비틀며 얼굴을 붉힌다.
오빠... 왜 그렇게 뜨겁게 저를~
이윤지.
호감 : 55〉90
신뢰 : 75〉75
애정 : 15〉40
윤지가 나에게 품은 정보를 볼 수 있었다.
더군다나 호감은 90에 다다를 정도로 크다.
얘 나한테 관심 있어?
숫자가 상당히 올라간 것을 볼 수 있었다.
내 얼굴이 별로라면서 은근히 마음에 있었던 것 아냐?
초딩인가? 좋아하는 사람한테 괜히 투덜대고 괴롭히는 그런 거.
그러고 보니 윤지를 빼고는 아직 다른 귀신을 본 적이 없었다.
귀신이 별로 없는 걸까? 아니면 내 눈이 알아채지 못한 것일까?
“너 말고 다른 귀신 본 적 있어?”
저 말고...? 아니요?
“그래? 귀신이라는 것이 별로 없는 건가?”
간혹 느껴질 때는 있어요.
“간혹?”
네.
그러면 귀신이라는 것이 많이 발생하는 것은 아닌가 보다.
그래서 아직 보지 못한 것일 수도 있겠다.
그게 아니라면 산 사람보다 귀신이 내 시야에 가득했겠지.
연지의 통화는 상당히 길어지는지 심각한 얼굴로 굽실거리고 있었다.
그러곤 드디어 통화가 끝났는지 다소 풀이 죽은 표정으로 다가왔다.
“통화는 잘했어?”
“네...”
“왜? 무슨 문제라도 있는 거?”
“그게... 다... 다른 곳에 차려 준다고...”
“엥? 그게 왜 그런 식으로 튀냐. 그럼, 여기에 들인 시설비랑은 어쩌라고. 어차피 퉁 쳐 줄 것도 아니잖아?”
“네? 삼촌이 그냥 해 주겠다고...”
“참나... 이해할 수가 없네.”
“저도... 삼촌이 이렇게 화내는 것은 처음이라서.”
“그래서 뭐라고 했는데?”
“그냥... 여기서 점장으로 일 하겠다고 했어요.”
“오오~ 연지가 드디어 강단이 생겼구나?”
연지의 얼굴이 발그레하게 물들었다.
“지... 진심으로 저를 필요로 하는 사람은 오빠가 처음이라서...”
“하하하~ 그랬어?”
“그런데 문제가 좀...”
“???”
“삼촌이 오빠를 직접 만나시겠다고... 휴... 왜 그러시는지...”
“직접? 알겠다고 해.”
“네?”
“알겠다고 하라고. 언제든 상관없으니 보자고 해.”
“네... 감사합니다. 오빠. 아니, 사장님...”
“사장님은 무슨. 그냥 오빠라고 해. 사장님은 너무 거리감 생겨 보이잖아?”
“아...”
연지의 얼굴에 화색이 돌았다.
진심으로 기뻐하며 짓는 미소는 어디 가서도 꿀리지 않을 정도로 귀여웠다.
급을 따지자면 텐프로 삼인방 이상이라고 장담한다.
다듬어지지 않았을 뿐.
진정한 보석이 될 원석이다.
“휴대폰 줘 봐.”
“휴... 휴대폰...”
떨리는 손으로 내민 휴대폰.
나는 그것을 받아들고는 내 번호를 입력하고 통화버튼을 눌렀다.
그 모습에 감격이라도 한 듯 떨리는 눈망울.
‘훗... 미남이란...’
우리 언니도 취향이 좀 구려졌네.
괜히 볼을 부풀리고 눈을 흘기는 윤지를 보며 나 또한 슬쩍 눈을 흘겨 준다.
얘만 없었어도 연지는 벌써 닦아 먹었을 거다.
“시간 정해지면 그 번호로 연락해. 오빠 번호니까 알아서 저장하고.”
“네! 오빠!”
“그렇게 좋아?”
“아!... 헤헤... 네...”
그런 연지의 머리를 쓰다듬어 준다.
이번에는 자연스럽게 손길을 받아들이는 모습에 나름 뿌듯해졌다.
참으로 부드러운 머리카락이다.
이연지.
호감 : 70 〉80
신뢰 : 55 〉70
애정 : 15 〉45
윤지보다는 조금 떨어지지만 상당히 오른 수치.
윤지야 귀신을 알아 본 나에 대한 호기심이 크기 때문일 수도.
“그럼, 오늘은 이만 가 볼게.”
“네... 그런데 가게는 언제부터 닫아요?”
“아까 본 사람 있지? 그 사람한테 연락 주라고 할게. 1층 인테리어는 네가 원하는 데로 해 봐.”
“정말이요? 감사합니다. 오빠!”
“그래그래.”
나는 환하게 웃는 연지의 배웅을 받으며 카페 마들렌을 빠져나왔다.
내 뒤를 졸졸 따라 밖에까지 나온 윤지.
오빠, 우리 언니한테 관심 있어요?
“응?”
왜 그렇잖아요. 안지도 얼마 안 됐는데 이렇게 나서주고.
“있다면?”
뭐... 뭐라고요!? 흥!
“흥? 너 나한테 관심 있냐? 귀신이?”
뭐... 뭐라는 거야! 못생긴 주제에! 우리 언니 울리면 진짜 혼내 줄 거에욧! 바람피워도 알아서 하세요!
“무슨 진도가 벌써 거기까지 나갔어? 그리고 전에 말 했지? 나 좋다는 여자 많다고.”
허얼~ 설마~
“그렇게 믿던가.”
오... 오빠도 그 여자들 좋아하는 거예요?
“당연한 거 아니야? 내 전부인 여자들인데.”
전부인 여자들? 이... 이런 바람둥이! 안 돼! 우리 언니는!
“아... 그래? 네가 그렇게까지 극구 반대라면 나도 어쩔 수 없지. 사무적으로 거리를 벌려보도록 할게.”
어...? 그렇게 쉽게...? 으... 으...
막상 내가 포기한다는 식으로 말하자 불안한 모습으로 손톱을 물어뜯는다.
으으... 안 되는데... 언니가 정말 좋아하는 것 같은데... 으...
“그럼, 난 간다~ 바이바이~”
그런 윤지를 두고 손을 흔들며 몸을 돌렸다.
그때까지도 윤지는 뜯을 수도 없는 손톱을 물어뜯으며 혼자만의 고민에 휩싸여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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