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24화 〉 2. 사냥꾼.(96)
* * *
2. 사냥꾼.(96)
넋이 빠진 이정은을 내버려둔 채 창으로 몸을 훌쩍 날린다.
내 몸이 4층 높이에서 떨어져도 멀쩡한지에 대한 것은 확신할 수 없기에 돌출부위를 적당히 잡으며 바닥에 착지했다.
이 정도 육체 능력이면 안전 불감증이 생길 법도 하지만.
내 생존본능은 몸을 사리도록 만든 것이다.
난 절대로 단명하고 싶은 마음이 없다.
수지와 상연누나, 그리고 이번 주말에 노리고 있는 나연누나까지.
세 여자와 오순도순 장수하는 꿈을 꿔 본다.
아니, 연지도 나한테 완전히 반한 것 같은데 연지까지 넣어 보자.
회귀 전에는 말도 안 되는 하렘물 소설 속 상상이었지만.
나는 그 웅대한 목표를 한껏 품어보련다.
“흐흐흐~ 좋구나~”
한 번씩 저런 쌍년들로 입가심도 좀 하고.
아무래도 이상한 것에 눈을 뜨기 시작한 것 같지만.
저런 년들에게 죄책감을 가질 필요는 없겠지.
그러고 보니 정은식의 딸년도 있었지?
그 년은 또 어떤 재미를 줄지 기대감에 심장이 두근거린다.
“룰룰루~”
발걸음도 가볍게 차를 세워 놓은 곳까지 금세 당도했다.
톡톡.
창문을 두드리자 졸기라도 했는지 화들짝 놀라며 마른세수를 하는 김명기가 보인다.
“대... 대푯님!”
“피곤했나 보네.”
“아... 아닙니닷!”
“그래? 그럼 바로 출발하자. 흐흐흥~”
“기분이 상당히 좋으신 모양입니다.”
“어? 그렇지~”
“일이 잘 풀렸나보네요.”
“응응~ 아주 잘~ 재미있게. 크크큭~”
***
사건의 여파는 엄청난 크기로 터져 버렸다.
무려 사이코패스 연쇄살인마에 대한 사건이다.
뿐만 아니라, 그 사건에는 정격유착까지 포함되었기에, 그 파장은 더욱 크게 번졌다.
경찰 간부는 물론이고 형사들.
국회의원에서 시.구청의 고위간부까지 사이코패스의 검은 돈을 받아 쳐 먹었다.
건축비리에 사건의 은폐까지.
대한민국에 대통령탄핵이라는 엄청난 사건도 등장하고는 했지만, 이보다 더 뜨겁게 달아오를 수는 없었다.
줄줄이 엮인 이들은 더욱 많아지겠지만, 이제 내 손을 떠난 사건이다.
아마도 당분간은 저 사건으로 상당히 시끄러울 듯하다.
나는 가뿐한 기분으로 함께 TV시청 중인 상연누나의 가슴을 조물 거린다.
짜악.
“아얏! 왜 때려?”
“자기 손버릇이 날이 갈수록 안 좋아지는 거 같아?”
“누나 가슴은 내꺼얏!”
“나가려고 옷 다 입었는데 그렇게 헤집어 놓으면 어떻게 해. 으이그!”
파고든 내 손을 빼내고 옷매무세를 고치며 눈총을 준다.
나는 트레이닝복 속으로 모습을 감춘 상연누나의 가슴을 보며 입맛을 다셨다.
이정은 따위의 창녀와는 비교도 안 되는 아름다운 가슴.
“그나저나 우리 자기 정말 장하네.”
내가 정은식의 일을 피 보지 않고 처리한 것에 대한 이야기인 것 같다.
“그렇지? 히히~ 그럼 상 줘~ 가슴~”
“자기야~ 나 나가야 해. 그만해. 오늘부터 훈련도 받기로 했잖아.”
나는 어쩔 수 없이 그녀를 놓아 줄 수밖에 없었다.
위험이 산재한 이 세상에서 자기 몸 하나는 지킬 힘이 필요하다.
그러고 보니 나도 할 일이 많구만.
나대명에게 금괴랑 다이아의 처분도 맡겨야 했고.
그리고 드디어!
오늘 마이 드림카가 집 앞으로 도착할 예정이다.
상연누나가 막 일어나 나가려는데 휴대폰의 진동이 울린다.
“오오~”
“왜?”
“명기 전화 옴. 밖에 도착했나 봐.”
“진짜? 드디어 우리 자기도 차가 생겼네? 빨리 내려가 보자~”
호들갑을 떨며 내 팔을 잡고 재촉하는 상연누나.
나는 씰룩이는 입매를 가까스로 부여잡고는 태연한 척 그녀의 손에 이끌려 주차장으로 내려왔다.
주차장에 도착하자 김명기가 운전석에서 내려 꾸벅 고개를 숙여 온다.
“좋은 아침입니다. 대표님.”
시각은 이미 아침을 지나 11시가 다 되어가지만 그런 것을 따질 정도로 고지식하지는 않다.
그저 눈앞에 영롱한 자태를 뽐내며 서 있는 벤틀리의 모습에 모든 감각을 빼앗겨 버린다.
에메랄드빛 차체가 보석처럼 빛나는 모습은 말 그대로 황홀할 정도다.
“그래. 너무 좋은 아침이야.”
나는 이제 벤틀리의 오너이며 현물도 남부럽지 않게 가진 부자다.
절로 얼굴이 씰룩인다.
그런 내 얼굴이 웃겼는지 옆에서 상연누나가 킥킥거린다.
“자기야~ 다이아몬드로 목걸이 해 준다는 거 잊지 말고?”
나는 누나의 말은 한 귀로 흘리며 그저 고개를 끄덕여주었다.
그러곤 운전석으로 다가가 조심스레 문을 열어본다.
부드럽게 문이 열리며 고급스러운 내부가 드러난다.
“흐응~ 내 차보다 훨씬 좋다아~”
당연한 말씀을.
“좋아~ 오늘 첫 시승을 경험할 영광을 주지.”
“어머~ 나 태워다 주려고?”
“당연하지.”
나는 김명기에게 상연누나의 차를 몰고 따라오라 이르고 벤틀리의 운전석에 앉았다.
시동을 켜자 부드럽고 웅장한 배기음이 귀를 울린다.
마치 뱃고동 소리를 연상시키듯 심장까지 울리는 묵직한 울림이다.
오피스텔의 지하 주차장을 빠져나가며 내 마음은 색다른 감회에 빠져든다.
남의 차나 한 번씩 빌려 타거나, 렌터카를 이용해 운전을 하던 과거의 모습이 겹쳐진다.
자차를 갖는 것은 꿈에서나 이룰 수 있는 목표였거늘.
그런 내가 이렇게 내 차를 소유하게 되었다.
그것도 한두 푼도 아닌.
무려 수억에 달하는 초호화 차량을 말이다.
“자기야 울어?”
훌쩍.
“아니.”
사실, 울음이 나올 뻔했다.
평생 벗어나지 못할 것 같던 원룸살이.
이제 차도 생겼고, 얼마 후면 집도 생긴다.
“히히~ 우리 자기 귀여워 죽겠어~”
상연누나가 내 볼을 잡아 이리저리 흔들어댔지만, 이 기분을 방해할 수는 없었다.
이렇게 벤틀리를 운전하는 지금.
정말로 내 신분이 바뀌었다는 것을 실감한다.
그 신분이 비록 깡패들의 우두머리라지만.
사는 세상자체가 달라졌다.
아니, 사는 세상은 이미 달라져 버렸지.
세상의 이면을 마주하게 되었으니 말이다.
이제 나는 더 이상 찌질했던 원룸살이 프리렌서가 아니다.
지금 가진 것만으로도 평생 호의호식 할 수 있지 않을까?
돈이 없을 때는 항상 돈이 많아졌을 때를 상상하며 하고 싶은 것들을 나열하곤 했다.
그런데 지금은 이렇게 운전만 하는 상황임에도 배가 부르다.
남부럽지 않게 전부 하고 싶었던 것과는 달리, 사고 싶다거나, 갖고 싶다거나, 하고 싶은 것이 별로 생각이 나지 않는다.
지금 나는 모든 것을 전부 갖게 된 것은 아닐까?
사랑하는 이가 옆에 있고, 돈도 풍족하며, 이런 고급 차를 타고 있다.
“하하하~ 좋네~ 오빠 운전 솜씨 죽이지~?”
“꺄악~ 오빠~! 달려~!”
“히히히~”
내 실없는 농담에 맞받아쳐 주는 사랑스러운 여인.
어째 나보다 그녀가 더 신난 것 같다.
달리라는 그녀의 말과는 달리, 나의 벤틀리는 70KM 이하를 준수하며 나아가는 중이다.
첫 시승에 과금을 부여받을 수는 없는 노릇.
그렇게 도착한 곳은 강일유통 지하에 있는 체육관.
원래는 체육관이 아니었으나, 나대명의 지시로 웬만한 시설 못지않게 변화되었다.
강북을 장악한 깡패조직인 강일파.
사실, 강일파는 알게 모르게 변화를 꽤하는 중이다.
반은 강제력이 적용되었던 주류유통을 소상공인 사장님들에게 자율적으로 바꿀 수 있는 선택권을 주었다.
가격도 합리적으로 유통해 주는 것으로 바뀌었다.
그렇게 자율권을 주었지만, 거래처를 바꾸는 사장님들은 거의 없다시피 했다.
오히려 손이 미치지 않던 곳까지 사업이 뻗어 나갔다.
타 업체에 비해 저렴하게 유통을 해 주면서도, 깡패들의 이권다툼에서 안전하다는 이유 때문이다.
이러니저러니 해도 강일파는 강북에서는 가장 강력한 조직인 것이다.
강일파의 세력권에서 감히 깽판을 칠 조직은 없었다.
멋들어진 벤틀리가 들어서자 연락을 받은 조직원이 후다닥 뛰어 나와 인사를 한다.
그러곤 떨리는 손으로 키를 받아 들고는 소중한 내 차를 조심스레 주차를 시도했다.
내 주차공간을 따로 마련해 놓은 것인지, 응달에 제법 넓은 자리를 비워 놓았다.
건물로 들어서 지하로 내려가자 지하특유의 꿉꿉한 냄새와 남정네들의 불쾌한 땀 냄새가 코를 찔러 온다.
마침 정욱아저씨에게 훈련받고 있던 나대명이 나를 발견하고는 재빨리 고개를 숙여 보인다.
그 틈을 파고들며 정욱 아저씨의 주먹이 나대명의 복부에 파고들었다.
퍼억.
“커어억! 고... 고문님...”
“나사장. 무슨 일이 있어도 한눈을 팔지 말라고 했잖소.”
“하... 하지만... 대표님이...”
“흥. 목숨이 오가는 상황에서도 대표님에게 인사하겠다는 거요?”
“큭... 죄송합니다.”
“일단, 인한이가 왔으니 잠시 쉬도록 합시다.”
“네... 감사합니다.”
그제야 나를 발견한 다른 이들도 고개를 숙이며 인사를 해 왔다.
그중에는 조응수도 있었는데 내 앞까지 다가와 공손하게 고개를 숙였다.
“대표님. 오랜만에 뵙습니다.”
“네. 조이사님. 그동안 수고가 많으시다고요?”
“저야... 뭐... 고생할 게 있겠습니까. 감히 우리 쪽을 넘보는 이들도 없는데 말입니다. 그저 이렇게 몸을 움직이는 게 전부입니다.”
조응수.
호감 : 75
신뢰 : 72
충성 : 65
그리 나쁘지 않은 수치.
하긴 조응수와 관계를 계선할 기회가 없다 보니 이 정도가 한계였겠지 싶다.
“곤란한 상황은 없으니 다행입니다. 훈련을 어떻습니까?”
“허... 허허허... 나이 먹고 따라가기도 벅찹니다. 군대도 이렇게 굴리지는 않을 겁니다. 그나저나 나사장은 어디서 좋은 거라도 먹었는지 완전히 괴물이 되었어요. 고문님은 말할 것도 없고요.”
조응수의 눈빛은 왠지 모를 씁쓸함이 배어있다.
나를 완벽하게 믿게 된다면 당신도 변할 수 있을 거야.
믿음이라는 것은 내가 강요할 수 있는 건 아니다.
그가 계속 내 옆에 남는다면 언젠간 유의미한 변화를 맞이하게 될 터.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