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 사냥꾼.(139)
2. 사냥꾼.(139)
절벽높이 20여 미터.
지금의 육체 능력으로 어떻게든 올라갈 수 있을 것도 같기는 하다만...
그 건 저렇게 물기가 없을 때의 이야기다.
미끄러운 벽을 탈 재주는 없으니 말이다.
20미터.
과연 10미터 이상에서 떨어진다면 멀쩡할 수는 있을까?
아무리 육체 능력이 보통을 상회한다 하더라도 저 높이에서 뛰어내려 시험을 해 보는 미친놈은 없을 것이다.
당연히 나도 미친놈은 아닌지라 10미터 높이에서도 뛰어내려 본 적이 없다.
나는 손에 들린 단검을 보며 고민에 휩싸였다.
그러곤 힐끔 이은지에게로 시선을 던졌다.
이은지의 손에도 단검이 하나 들려 있다.
보통의 단검과는 달리 매우 매우 튼튼한 단검이라는 것에 이견은 없지만.
단단한 돌을 계속해서 찍어대다간 부러져 버릴 공산도 있다.
“흐음...”
게슴츠레한 눈으로 바라보자.
흠칫하고 몸을 떠는 이은지.
아마도 내가 저를 먼저 올려 보내려 한다 생각한 듯하다.
수치가 저렇게 올라갔음에도 나를 못 믿을 놈 취급하는 것이 기분이 언짢았지만 너그럽게 이해하기로 했다.
“야.”
“네...?”
“너 저 높이에서 떨어져 본 적 있냐?”
도리도리.
나에 대한 복종심이 상당히 높음에도 이은지는 두려운 눈으로 고개를 열렬하게 흔들었다.
아직까지는 복종보다 목숨이 더 소중한 모양이다.
나대명이었다면 이런 것 쯤 내가 시키지 않아도 먼저 나설 것 같은데. 쯥...
“그럼... 어느 정도 높이에서 떨어져 봤는데?”
“그건... 8... 9... 미터 정도에서는 떨어져 본 기억이 있는 것 같아요...”
자신 없는 말투의 이은지가 어깨를 잔뜩 움츠린다.
“그래? 떨어져서 부상은 입었어?”
“그게... 많이 욱신거렸던 것 같은데...”
“그 말은 어디 부러지거나 한 건 아니라는 거잖아?”
“네? 네...”
“저기서 떨어지면 어떨 것 같아?”
절벽을 가리키며 묻자 이은지의 목소리가 더욱 기어들어간다.
“아무래도... 무사할 것 같지는 않은데...”
지금, 이은지의 상태는 퓨리다크니스를 주입했을 때 이상의 몸 상태이다.
제 입으로 그렇게 말했으니 그것은 틀림이 없다는 생각이다.
그리고 나는 이은지의 육체 능력을 훨씬 웃돌고 있다.
‘죽지는 않겠군.’
밑에서 보는 것만으로도 이리 아찔한데, 막상 올라가면 얼마나 아찔할지 걱정이긴 하다.
물배를 채우기는 했지만 사람이 물만 마시고 살 수는 없는 법.
올라가야 뭐라도 먹을 생각을 할 터였다.
그런데 올라간다고 먹을 게 있기는 한 건가?
‘다른 사람들이 걱정이군.’
물론, 사냥꾼 놈들을 걱정하는 것은 아니다.
그놈들이 죽든 말든 오로지 나연누나와 성기형에 대한 걱정이었다.
“야. 단검 줘 봐.”
“다... 단검이요?”
이은지가 불안한 눈빛으로 되물었다.
마치 단검을 빼앗기면 큰일이라도 날 것 같다는 눈빛이다.
“누가 버리고 갈까 봐 그래? 그냥 달라면 줘 봐.”
내가 윽박지르자 마지못해 단검을 내밀어온다.
나는 빼앗듯이 단검을 낙아 채고는 절벽으로 다가 갔다.
지속해서 물이 닿았던 모양인 듯.
날카로운 부분들 없이 참으로 매끈매끈한 것이 올라가는 처지에서는 불쾌하기 그지없다.
파악!
단검을 휘둘러 매끈한 돌을 향해 찔러 넣었다.
카캉.
“오옷! 씨발.”
젊의 때의 혈기로 욕설이 나올 수는 있으나 나이를 먹으며 점잖아져야 정상이거늘.
어찌 된 것이 입에서 욕이 마를 날이 없다.
이러다가 평생 입에 달라붙는 건 아닌지 모르겠다.
“이... 인한님... 저도 데리고 가실 거... 죠...?”
벽을 보며 집중하는 중 들려오는 음성.
“아 진짜! 그러니까 이렇게 작업하고 있잖아.”
“죄... 죄송합니다.”
누가 사냥꾼 아니랄까 봐 의심은 많아서는... 쯧쯧.
나는 혀를 한 번 차고는 단검에 뇌기를 집어넣었다.
이렇게 뇌기를 두르면 더욱 단단해지고 날카로워진다는 것을 몇 번의 경험으로 깨우쳤다.
‘내 주먹도 바위를 부술 정도로 엄청 단단해지지.’
뇌기를 씌운 단검을 다시 한 번 벽을 향해 쑤셔 넣었다.
푸욱.
“오호!”
뇌기가 소모되는 것은 어쩔 수 없지만 구멍을 파며 올라가면 될 것 같았다.
이은지는 그 구멍을 잡고 올라오면 될 일.
내 의도를 알았는지 이은지의 표정은 어느새 환하게 바뀌어 있었다.
“너 5m 정도는 뛸 수 있지? 한 번 힘껏 뛰어봐.”
이은지는 내 요청에 벽 앞에 서서 땅을 박차고 힘껏 뛰어올랐다.
“오오~”
그녀가 뛴 높이는 5미터를 훌쩍 넘은 것 같다. 못 해도 6미터 이상.
바닥에 착지한 이은지가 자신도 놀란 듯 눈을 껌뻑였다.
그 모습이 생각보다 깜찍해 보여 눈을 후벼 파고 싶어진다.
머리를 흔들어 상념을 털어내고는 낮게 호흡을 가다듬었다.
뭐든지 처음은 무서운 법이다.
나는 꼭대기에서 떨어져도 죽지 않는다고 몇 번이나 되뇌고는 마음을 다잡았다.
“으으... 진짜... 좆같네...”
그렇다 해도 두려움이 쉽게 가실 리는 없다.
괴물들하고 싸우던 것과는 또 다른 두려움.
이 높이도 이렇게 무서울 진데, 어떻게 까마득한 절벽에서 두 번이나 몸을 날렸는지 나 자신이 존경스러울 정도다.
“하아... 하아...”
절로 차오르는 호흡을 애써 무시하며 두 다리로 땅을 박찬다.
타앗.
붕 하고 떠오르는 부유감을 느끼며 힘차게 단검을 벽에 꽂아 넣는다.
가가각!
“어어! 안 돼!”
너무 긴장한 나머지 단검을 비스듬하게 잡아 겉면만 긁어 버렸다.
나는 황급히 반대쪽 단검을 휘둘러 벽을 향해 쑤셔 넣었다.
푸우욱.
떨어져도 이상 없는 높이였지만 긴장했던 탓인지 심장이 절로 벌렁거린다.
단검을 꽂아 넣은 상태로 대롱대롱 매달린 나는 잠시 숨을 골랐다.
그러곤 팔을 위로 쭉 뻗어 벽을 몇 번이나 찍어 손잡이 형태로 만들었다.
‘충분 하겠군.’
단검 하나를 품 안에 갈무리하고 뚫어놓은 구멍에 손을 끼워 넣었다.
그리고 반대 손에 쉬고 있는 단검을 쑤욱하고 뽑아낸다.
나는 그렇게 몇 번이나 반복하며 조금씩 위로 향했다.
점점 익숙해지는 손놀림.
당연히 아래쪽으로는 고개도 숙이지 않았다.
구멍을 뚫을 때마다 쑹텅쑹텅 빠져나가는 뇌기.
혹시나 몰라 아낌없이 뽑아내는 통에 허기가 진 듯 몸에 힘이 빠져나간다.
하지만 기어코 내 손은 절벽의 끄트머리에 도달했다.
“흐흐흐~ 살았다~”
낑낑거리며 절벽위로 올라온 나는 거친 숨을 내뱉으며 벌러덩 드러누웠다.
뇌기를 많이 소모한 이유도 있지만, 긴장이 풀리며 몸이 늘어져 버린 것이다.
“하아... 하아...”
인생 참 스펙타클 하다는 생각을 하며 몸을 일으켰다.
슬쩍 얼굴을 가져가 밑을 바라보니 굳어진 얼굴로 열심히 올라오는 이은지가 보였다.
그리고 아찔하게 느껴지는 높이.
“허... 20미터든 100미터든 까마득하기는 마찬가지네.”
어느새 꼭대기까지 올라온 이은지가 손을 척하고 올렸다.
기듯이 몸을 쓸며 올라와 그대로 벌러덩 자빠지는 그녀.
“하악... 하악... 하악...”
얼굴 위로는 구슬땀이 송골송골 맺혀 있었다.
아마도 힘들다기보다는 긴장으로 인한 것이겠지.
“힘드냐?”
“아니... 하악... 하악...”
“아니는 반말이고.”
“하악... 죄... 죄송... 긴장해서요...”
그렇게 말은 했지만 나와 이은지는 동갑이었다.
여유를 찾은 나는 비척거리며 몸을 일으켰다.
주위를 살펴보자 역시나 넓게 펼쳐진 숲이 보인다.
이곳은 어째 죄다 숲밖에 없는 것인지...
구구구궁.
일부러 이은지에게 꼽을 먹이던 중 갑작스레 흔들리는 지면.
“어어?”
화들짝 놀란 나와 이은지는 본능적으로 두리번거리며 진동의 원인을 찾아본다.
“지... 지진?”
“일단 피하자! 이거 무너지면 다시 나락행이야!”
그렇게 외치고는 숲을 향해 마구 뛰었다.
“가... 같이 가욧!”
뒤늦게 출발한 이은지도 내 뒤를 따라 필사적으로 뛴다.
지진인지 뭔지는 모르지만 일단은 뛰고 보자는 생각이었다.
뒤에서 꿱꿱거리는 소리에 인상을 쓰며 슬쩍 고개를 돌렸다.
내가 있는 방향으로 뛰어오는 이은지의 모습.
그리고.
“저... 저게 뭐야! 씨발! 뛰어!”
드드드드드.
-쿠웨에에엑!-
우리가 서 있던 절벽이 무너지며 거대한 무언가가 높이 치솟는다.
새하얀 비늘을 둘러싼...
뱀...?
“왜... 왜요! 같이 가요!”
경악하는 내 음성과 표정을 본 탓일까?
필사적으로 뛰어오는 이은지의 얼굴은 뒤에서 들려오는 정체불명의 괴성으로 울상이 되어 있었다.
“도대체 저게 뭐야악!”
좀비? 점핑? 덩치? 요괴고 뭐고 간에 지금까지와는 비교도 안 되는 존재의 등장.
수 미터나 치켜 올라간 거대한 뱀의 몸통이 떨어져 내린다.
쿠웅.
드드드드드.
“꺄아아악! 제발 같이 가요!”
저건 지금까지 본 무엇과도 비교할 수 없는 재앙이다.
-캬아아아악!-
괴성하나로 고막이 터져 나갈 것 같다.
음파하나에 돌과 나무들이 꺾이며 미친 듯이 휘날렸다.
사람 두 세 명은 단숨에 입에 쳐 넣을 정도로 거대한 아가리.
그 안에 자리한 이빨이 내 팔뚝보다 커 보인다.
붉은 눈을 번들거리며 분노를 내뿜은 존재가 거대한 몸을 움직였다.
“튀... 튀어어!”
마치 불도저라도 되는 양 방해되는 나무 등을 그대로 밀어 버리며 우리의 뒤꽁무니를 쫓아온다.
“흐으윽! 왜요! 왜! 왜!”
차마 뒤돌아볼 용기가 없는지 이은지는 울부짖으며 나만을 뒤쫓았다.
“찢어져! 다른 데로 가라고!”
“시... 싫어요! 저도 데려가요!”
“가라고! 씨발! 그래야 살 가망성이 있어!”
“싫어! 책임져!”
“뭘 책임져 미친년아!”
“살아도 같이 살고! 죽어도 같이 죽어!”
“이런! 미친년!”
콰지직. 콰직. 콰직.
우리가 말싸움하는 상황에도 눈앞의 모든 것을 밀어 버리며 따라오는 백사.
씨발... 저게 백사라고 하는 게 맞는 거야?
실로 어마어마한 크기다.
절벽을 타고 올라오는 것이 조금이라도 늦었으면 그 안에서 저놈을 맞이했을까?
그 생각을 하자 절로 오한이 밀려든다.
내가 빠져만 나간다면 사냥꾼 웹이고 뭐고 간에 깡그리 뿌리를 뽑아버릴 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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