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 경계안의 뱀파이어.(10)
3. 경계안의 뱀파이어.(10)
정신을 잃거나 내가 아니게 되는 것은 아니다.
그저 필요 이상으로 흥분하게 되는 것.
아무래도 이놈의 광기는 적정이상의 피를 보게 되면 골수까지 미치는 모양이다.
특히, 과도한 뇌기를 사용했을 때 말이다.
여전히 달아오른 몸이 가라앉지는 않지만, 그래도 어느 정도 상태를 조절할 정도는 되는 것 같다.
“야. 강인한. 괜찮은 거냐?”
걱정스레 다가와 어깨에 손을 얹은 성기형을 보며 고개를 끄덕인다.
주변을 살펴보니 머리가 터져 늘어진 괴물들과, 일행들이 쓰러트린 거대백사와 내가 쓰러트린 거대백사가 보인다.
대단하다는 말밖에 나오지 않는 모습.
“괜찮아. 후우... 후우...”
“인한아... 너 눈이 너무 충혈 됐어.”
뒤에서 안고 있던 나연누나가 떨어져 나와 내 얼굴을 바라보며 말한다.
마른세수를 하고 싶지만 손에 범벅된 구울들의 피와 뇌수에 차마 가져가진 못했다.
“상태들은 어때?”
“크르르~ 누구 하나 부상도 없다. 저런 뱀 따위는 나에게 문제없다고. 크허허허~ 그나저나 대단하군. 저 큰 놈을 그렇게 빨리 처리하다니. 역시 내가 인정한 사내다워~”
마치 저 혼자 처리한 것처럼 떠들어 대는 장수언.
저 호랑이놈은 처음의 이미지와는 너무나도 갭이 크다.
단단한 체구에 짧은 스포츠머리 각진 얼굴은 무뚝뚝한 배태랑 군인 같은 포스였는데.
지금의 그는 말 많고 허세가 강한 중년의 아저씨 같다.
“어이~ 아저씨~ 누가 보면 아저씨가 혼자 처리한 줄 알겠수?”
“크르르~ 크허허허~ 맞다 맞어~ 자네도 제법 도움이 되었지~ 아차! 물론 여기 아가씨들하고 저기 뱀파이어놈도 도움이 되기는 했어. 그나저나 아저씨가 뭔가~ 그냥 편하게 형님이라 부르게~”
껄껄거리며 성기형의 어깨를 툭 치며 능글맞게 웃는 장수언.
머리만 떼어 놓고 보면 정말 호랑이와 같다.
말하고 웃는 호랑이라니.
아무리 봐도 저 모습은 쉽게 적응되지 않을 것 같다.
성기형은 그런 장수언의 손을 털어내며 불만 섞인 눈으로 쏘아본다.
“거~ 건드리지 좀 마쇼. 우리가 언제부터 친했다고.”
두 덩치가 티격태격하는 것도 꽤 볼 만한 광경이긴 하지만.
지금의 분위기를 몰아 한 번에 몰아쳐도 될 것 같다.
“수쿡.”
“말씀하십시오. 주인이시여.”
“그 말투는 어떻게 안 돼?”
“죄송합니다. 고쳐보도록 하겠습니다.”
“여기서 로드년이 있는 곳까지는 얼마나 걸리지?”
“한 시간이면 충분합니다.”
나는 수쿡의 말을 들으며 지척이라 볼 수 있을 정도로 가까워진 왜곡을 바라본다.
저것을 처음 보는 순간 알 수 있었다.
경계에서 나갈 수 있는 방법은 저곳에 있다고.
그리고 수쿡의 말로 확신했다.
광기로 상기된 기분을 꾹꾹 눌러가며 성기형과 장수언을 바라본다.
내 눈빛의 의미를 알아들은 듯 고개를 끄덕이는 곰과 호랑이.
성기형은 원래 웨어베어가 아니었을까?
이어서 나연누나와 이은지를 향해 시선을 옮겼다.
괴물들의 피와 흙먼지로 범벅된 모습이지만, 두 여자의 미모를 가리지는 못 하는 것 같다.
그리고 후각으로 파고드는 진한 체향.
극도로 예민해진 오감은 그녀들의 체향을 진하게 전해주었다.
더불어 이를 맡은 뇌기가 음기를 강하게 원하고 있었다.
이제는 왜 그렇게 강한 성욕을 느끼게 된 것인지 알 것 같다.
뇌기는 지독하리만치 강한 양기에 속해 강한 음기를 본능적으로 찾게 되는 것.
날뛰는 양기를 잠재우기 위해서 음기가 강한 여자를 원하게 되는 것이다.
‘무슨, 무협지의 음양합일 이런 거야?’
그렇다고 지금 당장에 누구 하나 끌고 가서 일을 치를 수는 없고.
날뛰는 양기를 배출할 방법은, 이 주체 못할 힘을 마구 발산하는 것이다.
당연히 그 주체는 뱀파이어들이고.
“문제없어.”
“저도 문제없어요.”
나연누나를 바라보는 내 눈은 걱정으로 물들지만, 그녀의 눈은 괜찮다는 듯 부드럽게 휘었다.
경계에 휘말리고 수십 일이 지났음에도 전혀 변하지 않는 눈빛.
그녀의 눈에는 꼭 함께 이곳을 빠져나가겠다는 삶의 의지가 엿보인다.
나연누나는 내가 생각한 것 이상으로 강한 여인임에 틀림이 없다.
그 옆에서 여전히 생글거리며 나를 바라보는 이은지를 보고 있자니 잠시 감상에 빠져 있던 정신이 현실로 돌아온다.
‘쯧쯧쯧~’
나는 혀를 차며 이은지를 힐끔 바라봤다.
지금까지 보아온 이은지의 성격은 생각이외로 무뚝뚝한 면이 없지 않아 있다.
그런 그녀의 눈이 나를 향할 때면 항상 저렇게 해맑게 생글거린다.
무언가 나사하나 빠진 것 같은 얼굴이랄까?
하긴, 사냥꾼이 제정신으로 할 일은 아니지.
어쩌면 두 번이나 죽음에서 살아남으면서 머리에 문제가 생겼는지도 모른다.
어찌 되었든 웃는 얼굴에 침 못 뱉는다고.
이제는 제법 귀여워 보이기까지 한다.
아무래도 미운정이라도 들기 시작한 모양이다.
***
“이곳만 지나면 로드가 기거하는 성이 나옵니다.”
그가 말하지 않아도 저 멀리 제법 큰 성체가 눈에 들어온다.
이곳에서 어떻게 저러한 건물을 올렸는지는 모르겠지만, 어딘가 중세의 성을 닮은 모습에 낮은 감탄을 흘린다.
영화에서 나온 드라큘라 백작의 성과 흡사한 모습이다.
성으로 향하는 길목에 하나의 마을이 더 존재했다.
이 전의 마을과 마찬가지로 우리를 향해 공격해 오는 뱀파이어는 없었다.
거대백사가 나타난 것처럼 마을을 지나면 공격해 오려나?
활짝 열려 있는 문과 마을 전체에서 맡아지는 혈 향.
-흐으으으으...-
-아아아아아...-
-우으으으으...-
사방에서 들려오는 낮은 신음 소리에 얼굴을 찌푸린다.
다른 곳과는 달리 제법 번듯하게 지어진 판자 집들과.
그 안에서 새어 나오는 소리.
“바로 로드의 성으로 향하는 것이 어떤지요.”
조금은 불안한 수쿡의 눈빛이 보였다.
“도대체 무슨 소리야 이건?”
“크르르~ 피 냄새로군. 흥! 이곳에서 네놈들이 마실 피를 뽑아내는 것인가?”
장수언의 말에 수쿡이 곤란한 표정으로 시선을 외면한다.
그의 짐작대로 이곳은 뱀파이어들이 마실 피를 조달하는 곳인가 보다.
끼이이익.
말없이 다가가 판자 집의 문을 열어젖히는 나연누나.
안을 들여다본 그녀의 얼굴이 일순 와락 하고 일그러진다.
이내 원래의 차가운 표정으로 돌아온 그녀가 안으로 들어가 버린다.
우리도 안의 상황이 궁금했기에 열린 문으로 살펴봤다.
“하... 제기랄.”
나도 모르게 튀어나온 욕지기.
벽에 매달려 늘어져 있는 관.
관의 윗부분은 뚫려 있어 사람들의 얼굴이 드러나 있는데, 그들의 표정은 탁하게 풀려 낮은 신음을 흘리고 있었다.
그 위로는 우리가 배를 채웠던 으깨진 고구마 같은 것이 물과 섞여 통에 들어 있었고, 사람의 입과 이어진 관을 통해 그들의 입에 강제로 주입되고 있었다.
관의 옆쪽으로는 구멍이 뚫려 있고 주먹크기의 관이 나와 있었는데, 그 관을 통해 배설물들이 흘러내리고 있었다.
관의 밑 부분 또한 구멍을 통해 관이 연결되어 있었고, 그 관은 땅에 놓여 진 오크통과 이어져 있었다.
관으로 흐르는 혈액이 오크통으로 흐르며 그 통을 피로 채우고 있다.
“끔찍하네요.”
이은지가 이를 보며 몸을 부르르 떨었다.
“이런 쓰벌. 개 같은 뱀파이어 새끼들.”
“크르르~ 수년의 사냥꾼 생활동안 이런 장면은 처음이군.”
나연누나가 닫혀 있는 관 뚜껑을 조심스럽게 열었다.
-으으으으으...-
목구멍 속으로 음식이 강제로 주입되는 와중에도 고통스러운 듯 커진 신음 소리.
끼이익.
이윽고 관이 전부 열렸고, 그 안의 모습에 다시 한 번 치를 떨 수밖에 없었다.
사람의 몸에 연결된 링거 바늘들이 혈관에 촘촘하게 꽂혀 있는 모습은 절로 눈살을 찌푸려지게 만들었다.
링거를 통해 빠져나온 혈액들이 하나의 관으로 모여들고 그 관을 빠져나와 오크통으로 옮겨지는 중이었다.
이 건 가축보다도 못한 취급이나 마찬가지다.
너무나 강한 혈 향에 머리가 지끈거리는 것만 같다.
강렬하게 뛰는 심장 소리가 귀까지 들리는 듯하다.
으르르르릉.
날뛰려는 뇌기를 억지로 잠재우며 후다닥 밖으로 빠져나왔다.
피 냄새를 계속 맡다가는 완전히 미쳐 버릴 것만 같았기 때문이다.
그런 나를 재빠르게 뒤따라 나오는 이은지.
“괜찮으세요?”
“후우... 걱정하지 마. 그런데 왜들 안 나와?”
“사람들을 관에서 꺼내려는 것 같아요.”
“으음...”
관에서 꺼낸다고 저 사람들이 제대로 살 수나 있을까?
그런다고 해서 희망적으로 보이진 않지만, 죽을 때까지 피를 뽑히는 것보다는 낫겠지.
“힘드시면... 잠시 앉아서 쉬고 계세요. 저는 사람들 좀 돕고 올게요.”
고개를 끄덕이자 이은지가 후다닥 판자 집으로 들어간다.
문 안쪽으로 무언가 대화를 나누는 일행들의 모습.
간간이 찌푸려지는 성기형의 얼굴이 보였다.
아마도 이 사람들을 어떻게 해야 할지 대책이 서지 않는 모습이다.
잠시의 대화를 나누면서 낙담한 그의 얼굴이 보였다.
‘어쩔 수 없는 일이지.’
우리가 이들을 구할 수는 없다.
이 전의 마을에서 그랬던 것처럼 그저 이대로 놓아 둘 수밖에 없는 일.
저 안에서 꺼내주면 어떻게든 이 땅에서 살아가지 않을까?
물론, 뱀파이어 새끼들을 전부 쳐 죽여 놓아야겠지만.
내가 영웅은 아니지만 최소한 살 길은 마련해 줄 수 있지 않을까 싶다.
뱀파이러로드만 처리한다면 괴물들 처리하는 것은 누워서 떡 먹기다.
이미 많은 시간이 흘렀지만, 예상대로라면 이곳과 밖의 시각은 10배 차이.
걱정하고 있을 밖의 사람들에겐 미안하지만, 며칠 정도 들여서 최대한 청소를 한 후 빠져나가기로 마음먹었다.
물론, 모든 것이 계획대로 된다는 전제하에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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