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 흑곰파.
5. 흑곰파.
사실 김나연에게 있어 한 남자가 여러 명의 부인을 얻는 것이 새삼스럽게 다가오지는 않는다.
이미 가문에서 누누이 보아왔던 일이기에.
거기서 더 나아가 가문의 혈통을 위한다는 명목 하에 자행했던 근친간의 결합.
보통 사람이라면 생각조차 못 할 일을 아무렇지 않게 행하는 가문에서 자란 것이다.
더군다나 그녀는 삼영가 주현성의 첩으로 들어갈 운명에 놓였던 상태.
강인한과 이루어지지 않는다면 어차피 주현성의 첩 중 한 명이 될 운영이었다.
대부분의 초인가문에서는 일부다처제가 당연시 되고 있다.
오히려 김나연의 아버지가 특이하다면 특이한 경우일 뿐.
그러했기에 강인한이 여러 여자를 만나는 것을 어느 정도 수용할 수 있었다.
그렇다고 질투가 나지 않는다는 것은 아니다.
한 가지 위안이라 한다면, 자신이 사랑하는 이를 선택했다는 것.
사랑하지 않는 이와 강제로 이어지는 것보다는 훨씬 나은 상황이었다.
“누... 누나. 그런 말이 아니잖아. 그냥 너무 갑작스러워서...”
그런 상황임에도 서운한 것은 어쩔 수 없나보다.
자신은 아버지가 강인한을 만난다는 것만으로도 희망을 얻어 이렇게 달려왔거늘.
그는 저렇게나 곤란하다는 표정을 내보이었다.
“아니야... 미안... 나도 너무 내 생각만 한 것 같아...”
너무나도 서운한 나머지 눈물마저 찔끔 나올 것만 같았다.
이를 강인한이 볼까 싶어 고개를 돌린 김나연은 황급히 현관으로 향했다.
글썽이는 얼굴을 보이느니 한시라도 빨리 이 자리를 벗어나고 싶었다.
덥썩.
그런 김나연의 팔목을 잡아채는 두터운 손.
제법 강한 악력이 느껴지지만, 그녀의 능력으로 벗어나지 못할 턱이 없다.
그런데도 잡힌 손을 뿌리치지 못하고 몸을 멈추고야 말았다.
“그런 거 정말 아니야. 잠깐 이야기 좀 들어 줘.”
어쩌면 그의 변명이라도 들어 보고 싶은 마음이 강했는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그녀의 고개는 쉽사리 돌려지지 않았다.
그런 그녀의 몸을 강인한이 끌어당기며 강제로 몸을 돌려 세워 두 손으로 양팔을 잡는다.
주르륵.
숙여진 고개 밑으로 투명의 이슬이 흘러 떨어져 내린다.
참는다 했지만 결국은 흘러내린 눈물.
이에 강인한은 심장이 철렁 내려앉는 기분을 느꼈다.
차갑고 도도한 김나연의 눈에서 눈물이 흐르리라곤 생각도 하지 못했다.
작은 것에도 감수성이 풍부한 것이 여자다.
강인한은 한순간 표정 관리를 하지 못한 자신을 탓하며 입을 열었다.
“나연아... 잠깐 앉아서 내 말 좀 들어 줘. 응? 부탁이야...”
“흑... 흑...”
애써 참으려 하지만 한번 터진 둑은 쉽사리 막을 수 없었다.
그런 그녀를 겨우 달래 소파에 앉히고는 그녀의 앞에 한쪽 무릎을 꿇고는 손을 꼬옥 쥐여 주었다.
손 등 위로 떨어져 내리는 굵은 눈물방울.
서러운 듯 흐느끼는 김나연의 어깨를 조심스레 감싸며 등을 토닥여 준다.
그녀가 가문에 있는 동안 마냥 수련만 할 수 있었던 것은 아니다.
아버지가 최대한 방패막이 되어 주었지만.
은근히 다가온 가문의 원로들은 알게 모르게 그녀에게 압박 아닌 압박을 가해 왔다.
오로지 강인한에게 돌아갈 것이라는 다짐으로 꿋꿋하게 수련에 임하며 버텨 내었던 김나연.
그리고 마침내 아버지에게 강인한을 만나 보겠다는 말을 접하고는 신나게 돌아왔는데.
그 말을 들은 강인한의 얼굴에 드리워진 것은 부담감이었다.
“아... 아니야... 내가 너무 내 입장만 생각했어... 미안... 후...”
마음을 달래려 울음을 참아보지만 음성에 섞인 물기는 전부 지우지 못했다.
“누나.”
“말해...”
“그거 알아?”
“.......”
“누나가 내 첫사랑이라는 거?”
강인한의 말에 평생 들리지 않을 것 같던 그녀의 고개가 번쩍 들렸다.
눈물로 얼룩진 모습을 보이고 싶지 않았음에도.
너무나 황당한 말에 저도 모르게 고개를 들어 버린 것이다.
이건 무슨 신박한 개소리란 말인가?
아니, 너무나 어이가 없어 방금 전까지의 서러움도 잊을 정도였다.
“너... 너... 나를 바보로 아는 거야?”
“내가? 아닌데? 진짜 누나가 내 첫사랑이라니까?”
이런 상황에 이런 뜬금없는 첫사랑 고백이라니.
“이... 이게!? 네가 예전에 만났던 여자가 얼마나 되는지도 모를 거 같아?”
“아는 거 알고 있는데?”
“그런데 그런 말이 나와?”
“그런데 누나가 첫사랑인건 진짜라니까?”
김나연은 황당하다 못해 기가 막힐 지경이었다.
아무리 자신을 달래려 경황이 없더라도 저런 말이나 마구 지껄여대다니.
“그냥 만나자고 해서 만났던 애들이 전부야. 전부 걔들이 먼저 다가왔고. 걔들이 알아서 사라져 줬어. 서로에 대한 신뢰나 사랑 같은 건 없었던 것 같아...”
그렇게 말하는 강인한의 눈은 어딘가 공허해 보이기도 했다.
“도대체 그런 말이 어디 있...”
“나름 재미있기도 했고... 사실 내가 그렇게 잘난 건 없었잖아. 한 가지 잘난 거라곤 튼튼한 몸뚱이? 좋은 척 가식 떠는 성격? 그나마 있는 건 몸뚱이라고 진짜 몸 가꾸는 것만은 열심히 했다? 얼굴이 특출 나게 잘난 것도 아니고, 그렇다고 뒷배가 든든한 것도 아니고. 그래도 그 덕뿐인지 이상하게 여자들은 잘 꼬이더라. 내가 숨겨진 매력이 치명적이기는 하지?”
강인한의 말에 김나연은 절로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물론, 자신의 남자가 얼마나 매력적인지는 알고 있지만, 저렇게 제 입으로 말하니 괜스레 반발이 생긴 것이다.
“핏~”
“왜 그런 애들을 다 만났는지 알아? 말한 대로 재미있어서 그랬어. 돈 많다고 으스대는 놈들이... 잘났다고 으스대는 놈들이... 나를 거쳐 간 애들한테 목을 매는 것이... 솔직히 걔들이 잘나고 돈 많은 놈들을 택할 거란 걸 알았거든. 나보다 잘난 놈들이 결국은 내가 먹다 싼 것을 주워 먹는 것에 희열을 느꼈던 걸지도 모르겠어. 난 그런 것에 희열을 느낄 정도로 삐뚤어진 놈이었어. 그런데 그런 나를 바뀔 수 있게 해 준 것이 누나야.”
문득 마엔이 했던 말이 생각이 났다.
자신의 성향에 영향을 끼친 것은 어디까지나 그의 숨겨진 본성 탓이라는...
“누나도 짐작하고 있잖아. 내가 사실은 착한 놈이 아니라는 걸.”
김나연이 그 말에 동의한다는 듯 천천히 고개를 끄덕인다.
보통의 평범한 사람이 강인한의 실체를 본다면 사이코패스 살인마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니리라.
그는 자신을 해하려 한 사냥꾼들을 때려죽였으며.
어릴 적 죽마고우까지 냉정하게 때려 죽였다.
그럼에도 지금 그는 어떠한 가책도 느끼지 않고 있었다.
무슨 이유로 주무성과 주현성을 살려 두었는지는 모르겠지만.
강인한이 어떤 식으로든 생지옥을 겪게 할 것이라는 것은 짐작할 수 있었다.
물론, 지금도 경계 안에서 생사를 오가는 지옥을 맛보는 중이기도 했다.
“그래도... 나한테는 다정하잖아...”
“그야 당연하지. 누나는 내 첫사랑이자 평생 내 옆에 있을 여자인데. 누나를 처음 본 순간부터 재미있다고 여겨지던 것들이 재미없어 지더라. 처음에는 흔들어 보려고 누나 앞에서 일부러 여자 만나는 걸 보여주기도 했지. 그런데 그것도 못 해 먹겠더라. 그만큼 누나에 대한 내 마음이 컸던 것 같아.”
“흥! 누가... 평생 있는데?”
“싫다고 하면 강제로라도 붙잡아 놓을 거야.”
“핏... 그러면서... 왜... 아... 아니 됐어...”
“우리 나연이 삐지면 이렇게 귀엽구나?”
강인한이 손으로 볼을 꼬집듯이 잡고는 살살 흔들었다.
“이... 이게? 누나한테?”
“생각해 봐. 만약에 우리 부모님이 살아계시고 입장이 반대로 되었다고 가정해 보자. 그러면 누나는 마냥 웃으며 바로 좋다고 할 수 있어?”
“어...? 그건...”
“부담되지?”
“으... 응...”
“싫은 건 아니고?”
“절대 아니야! 그래도 주... 준비가 필요하지 않을까?”
“무슨 준비?”
“마음의 준비나... 뭐... 그런...”
그 말에 강인한이 실망했다는 표정을 지어 보이자 김나연은 눈에 뛸 정도로 당황했다.
“그... 그게 아닌데...”
이를 본 강인한이 입가를 말아 올렸다.
“내 마음이 그 마음이었어. 이제 조금 이해할 수 있겠어?”
“응...”
“너는 내가 갖고 싶었던 최초의 여자야. 그 말은 하늘에 있는 우리 가족을 걸고 맹세할 수 있어. 그리고 내 손에 들어 온 너는 내 숨이 붙어 있는 한 절대로 날 벗어날 수 없어.”
김나연은 그리 말하는 강인한의 눈에서 강한 집착을 느낄 수 있었다.
끈적하게 들러붙는 그의 눈빛이 그녀를 향해 짙은 열기를 뿜어내고 있었다.
두근.
그가 드러내는 저 집착에 이상하리만치 가슴이 두근거렸다.
거미줄에 걸린 나비를 보듯 온몸을 옭아매는 그의 눈빛은.
먹이를 향한 포식자와도 같았다.
“아버님은 나를 한 번 본다고 하셨지. 그렇다고 그 말이 너와의 관계를 완벽히 허락했다고는 생각할 수 없어. 그래서 나에게는 시간이 필요해. 최소한 발악은 할 수 있을 정도가 되어야 당당하게 말할 수 있겠지. ‘장인어른~ 딸을 저에게 주십시오.’ 하고 말이야.”
그 말에 김나연의 얼굴이 붉게 달아올랐다.
그가 자신을 향해 보내는 그 감정.
집요할 만큼 자신을 원하는 그 소유욕구가 올올이 전해진다.
그리고 그것은 착각이 아니라는 듯 조금씩 커져가는 연결고리.
첫 관계이후로 알쏭달쏭하게 느껴지던 그 연결고리가 더욱 튼튼해진 느낌.
“느껴져...”
나직한 그녀의 말에 강인한도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나도 네가 느껴져.”
희미하게 피어오르는 서로의 기운이 실처럼 이어졌다.
성기와 성기가 결합되어 이어진 것처럼 아찔한 쾌감이 서로를 강타한다.
마주친 시선에서 서로를 향한 갈망이 짙어져갔다.
“보고 싶었어...”
은은하게 열기를 품기 시작한 김나연의 시선.
그 시선에 화답하듯 강인한의 입술이 열렸다.
“보고 싶고, 만지고 싶고, 먹고 싶었어.”
그리 말하는 강인한의 손은 어느새 김나연의 몸을 더듬어가고 있었다.
그의 손이 훑어가는 부분은 어김없이 보라색으로 물든 부위들.
“하아...”
그의 손이 지나쳐 갈 때마다 마법처럼 몸이 뜨거워져 갔다.
절로 벌어진 입에서 뜨거운 숨이 토해진다.
행여 좋지 않은 냄새라도 날까 싶어 고개를 돌리려는 그녀의 입술을 강인한의 입술이 틀어막는다.
“후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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