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8화. -비밀 (11)-
수경이가 다 씻고 나오자 예림이는 갈아 입을 옷들을 들고 샤워실로 향했다. 그 중간에 예림이는 수경이에게 뭔가 이야기를 전해 줬는데 내 생각에는 선희에 관해서 어느 정도 나에게 알려 주라고 하는것 같았다. 아니나 다를까 머리에 수건을 얹은 수경이는 자리에 앉자 마자 오렌지 쥬스를 한잔 시원하게 들이키더니 나에게 선희에 관한 이야기를 해줬다.
"예림이 한테 선희에 관해 어느정도 들었다고 했지?"
"응"
"그래. 선희도 혜린이 네가 엄청 마음에 들어 하는것 같으니까 선희에 관해서 어느정도는 알아도 될거야. 내가 대신해서 이야기 해 줄게"
"괜찮아. 조금전에 들은 정도면 됐어"
괜찮다고 했지만, 그래도 수경이는 내가 궁금해 하는 것 보다도 자신이 말하고 싶은 이유가 더 큰 것인지 내 말을 무시한체 말을 하기 시작했다.
"아냐 그래도 들어봐. 나중에 실수라도 할까봐 미리 이야기 해 주는거야"
니가 떠벌리고 싶어서 그러는게 아니고? 라는 말이 무심결에 툭 튀어 나올뻔했다. 우하 큰일날뻔 했네.. 자나 깨나 입 조심 닫힌 입도 다시 보자.
"선희네 엄마는 선희를 낳고 나서 집안 사정 때문에 바로 일자리를 구하셨데. 원래 유능하셨던 분이셨기에 일을 구하는 것은 쉬웠는데.. "
수경이의 말을 들으니 선희네 엄마는 정말이지 엄청 대단한 사람이라는 것을 알수 있었다. 남들은 하나 따기도 힘들다고 하는 간호사 면허증. 조리사 자격증(조리사 자격증은 한식. 양식. 중식 모두 가지고 계신다고 한다). 영양사 자격증 등을 가지고 계셨고, 그 밖에도 미용사 자격증이나 인테리어 자격증 등등 몇 가지의 다른 자격증도 가지고 계시다는 것이다. 게다가 대학교를 졸업하고 대학원 까지 나오신 분이셨기에 요즘 시대의 말을 빌리자면 소위 말하는 신 지식인 여성 이라고 할 수 있는 분이셨다. 아마 집안의 사정만 생기지 않았으면 석사를 거쳐서 박사 학위까지 따려고 했을 것이라나?
아무튼 그런 분이셨기에 어딘지 모를 대단한 곳에 취직을 하시게 됐다고 한다. 그러나 사업 관계상 어디서 일하는지는 가족 중에 선희네 아버지 빼고는 아무도 모르고, 평소에도 집에 오기전에는 연락조차 한번 없다고 하는 것이다.
그 덕분에 선희네 집안에는 가족들이 단란하게 찍은 가족사진 조차 없다는 것이 수경이의 설명이였다. 확실히 수경이의 말을 듣고보니 그랬다. 아까 황량하게 느껴졌던 거실에선 어느 가정집에서나 볼 수 있는 가족사진이 단 하나 없었던 것이다. 어쩌면 그것 때문에 더욱더 집안이 황량하게 느껴졌던 것일지도 모를 일이다.
그러한 연유로 인해서 선희네 아빠가 선희랑 선희의 오빠를 어렸을 때 부터 키우며 집안 살림을 도맡아 하셨다고 했다. 아무래도 선희네 엄마가 버는 돈이 어마어마 하다 보니. 선희네 아빠는 다니던 회사를 그만 둘 수 밖에 없었다고 하는 것이다. 그러다가 선희네 아빠가 다시 직장을 다니게 된 것은 얼마 되지도 않았다고 한다.
선희는 어렸을때 부터 그렇게 엄마의 사랑조차 받아보지 못해서 엄마를 그리워 하지만, 한 편으로는 그런 엄마를 미워한다고 수경이는 그랬다. 그러니 나에게 집안 사정이나 엄마에 관한 이야기를 선희에게 묻지 않는게 좋을 것이라는 충고도 잊지 않았다.
나 또한 그다지 눈치가 나쁜 편은 아니였기에 그 정도 쯤은 진작에 알 수가 있었다.
수경이의 이야기가 끝나고 난 잠시 숙연해 지는 분위기를 느낄 수 있었다. 밝고 명랑한 수경이 마져 그다지 좋지 않은 일들을 말했기 때문인지 조금 씁쓰름해 하는것 같았다. 그제야 나는 내가 얼마나 행복한 녀석인지 다시 한번 깨닫게 되었다. 엄마의 사랑조차 받고 자라지 못한 선희에 비해 나에게는 엄마라고 부를 수 있는 분들이 세 분이나 계시니 이 얼마나 행복한 것인가.
내가 씻을 차례가 되어 1층 목욕탕으로 들어 갔을때. 난 선희네 집이 상당한 부자라는 것을 다시 한번 느낄 수 있었다. 두 명은 들어가도 될 정도로 커다란 대리석으로 만든 욕조라니.. 역시 평범한 가정집은 분명히 아닌 것이다. 도대체 선희네 엄마는 얼마나 많은 돈을 버시기에 빚더미 쌓였었다는 집안을 이렇게 까지 일구어 놓은 것일까? 아무튼 대단하다는 생각과 함께 존경심까지 들려고 할 정도다.
예전의 나 였다면 이런 곳에 왔을때 분명히 기가 죽었을 것이다. 아니 기가 죽지 않더라도 부러워 하기라도 했었을 것이다. 그러나 지금까지 하도 어마어마한 곳에서 생활을 했었기 때문인지 기가 죽거나 부러워 하기는 커녕. '아! 잘사는구나' 하는 정도의 감흥 밖에는 떠오르질 않았다. 그러고 보면 나도 참 별 희한한 것에 빠른 적응을 보인것 같다.
물질적인 적응은 이렇게 쉽게 되는데 왜 육체가 바뀐것에 대한 적응은 이리도 어려운 것일까? 시간이 지나야 해결이 될려나?
샤워를 끝 마친뒤 선희가 입으라고 꺼내준 옷으로 갈아 입었다. 원래 크게 입는 옷들이였기에 입는데 그다지 불편함 같은 것은 없었다.
그런데 내가 또래의 여자애가 살고 있는 집에 와서 샤워를 하게 되고 그 여자애가 입던 옷들을 입게 되는 날이 올 줄이야. 꿈에서 조차 생각해 본적이 없는 일인데. 막상 그런일이 현실로 닥치고 나니 기분이 묘했다. 성환이나 태규 같은 녀석들이 알게 되면 무지 부러워 하겠군. 아니.. 그런데 이게 과연 부러워 할 일인가?
선희가 내어준 옷으로 갈아입고 방으로 들어가자 아이들은 내가 올때를 기다리며 참외를 깍아서 먹고 있었다. 방금 전까지 냉장고에 있기라도 했었던 것 처럼 한입 베어 물은 참외는 정말이지 얼음 못지 않게 차갑게 느껴졌다.
내가 참외의 시원함을 한껏 만끽하고 있을때 수경이가 나에게 질문을 던졌다.
"아참 혜린아. 근데 저번에 받은 편지들 중에 누구 만나본 사람있니?"
"응?"
"왜 그거 있잖아. 네가 받은 연애 편지들. 그중에 마음에 들었던거 있냐고"
난 참외를 입에 물고 고개를 저으며 대답했다.
"아니.. 읽어 본 적도 없어"
"왜?"
"그거야.. 그냥"
"나는 왜 그러는지 알지"
수경이는 자신만이 나에 대한 비밀을 알고 있다는 투로 눈을 새초롬하게 뜨더니 날 바라보며 고개를 끄덕이고 있었다. 난 저 녀석이 또 이번에는 어떠한 말로 날 놀릴까? 싶어서 조금 조마조마한 심정으로 왜 그런지에 대해서 물었다. 그러자 한다는 소리가
"혜린이 너 좋아하는 애가 있는거지?"
"뭐?"
"내가 볼때는 혜린이 너 좋아 하는 애가 있다구. 아마 석현이가 분명할 걸?"
우하.. 놀래라. 난 또 뭐라구. 그런데 갑자기 왜 여기서 석현이의 이름이 튀어 나오는거지?
"무.. 무슨 소리야. 석현이는 그냥. 어렷을때 부터 알고 지냈던 친구라고"
"어머? 그래? 그것 참 이상하네. 난 분명히 혜린이가 석현이를 좋아 한다고 생각하고 있었는데. 너가 우리반에서 잘 대해주는 남자애라고는 석현이 밖에 없잖아. 석현이도 뭐.. 우리반에서 잘 대해주는 사람이라고는 너 밖에 없지만"
"바, 바로 그거야. 우리는 어렷을때 부터 알고 지냈었기에 서로에게 잘 대해주는 것 뿐이라구"
내 말이 구차하게 들렸던 것인지 수경이는 과연 그럴까? 하는 눈 빛으로 날 쳐다 보고 있었다. 난 그래서 그런 수경이의 쓸데없는 의혹을 잠재우기 위해 연극을 조금 해야 했다.
"난 석현이랑 정환이랑 어렷을때 부터 알고 지냈어. 그런데 조금 오랜 시간 동안 헤어져 있다가 돌아와 보니까 정환이는 다시는 돌아 올 수 없는 곳으로 가버렸고, 석현이는 반 아이들과 친하게 지내지 못하는거 같아서 마음이 아파 잘 대해주는 것 뿐이야. 그래서 말인데. 너희들은 왜 석현이를 싫어 하는거야?"
말 하던김에 나는 얘들이랑 친해지게 되면 언젠가 물어 볼려고 했던 말을 이때가 기회다 싶은 심정으로 물어봤다. 내 질문이 조금 갑작스러웠던 것인지 선희와 수경이는 뜨끔 하는 표정을 지었다. 선희가 대답했다.
"아냐. 싫어 하는건.. 석현이가 조금 무서울 뿐이야. 오히려 걔가 자기 곁으로 누구도 못 다가오게 벽을 만들고 있어. 그리고 얼마전에는 정학도 맞았었고"
"응?"
"아. 너는 모르겠구나. 석현이 말이야. 한동안 정학을 맞은적도 있었어"
무슨 소리야 이게? 정학이라니..
"저, 정말이야?"
"그게.. 처음 혜린이 네가 왔을때 그런 이야기까지 해주면 겁 먹을까봐 말 안했었는데. 정환이가 죽고 나서 얼마뒤에 정환이 자리에 진호 라는 애가 앉은 적이 있었거든. 근데 그 애가 무슨 말 실수를 한 모양이야. 그것 때문에 석현이가 화가 나서 진호를 마구 때렸는데. 넘어지다 잘못해서 팔이 부러져 버렸어. 그래서 잠시 정학을 맞았었고"
어?.. 어? 몰랐던 일이다. 석현이가 나 때문에 정학을 맞았을 줄은.. 누구 하나 이야기해 주는 녀석들이 없으니 그런일이 있었는지 알 턱이 없지 않은가. 제기랄. 그 자식은 왜 그런 쓸데없는 짓을 해서 나에게 부담감을 느끼게 만드는 거야 대체. 오늘 석현이를 은근히 피했던 내 자신이 미안해 지잖아.
그런데 설마 하니 그 녀석에게 그런 일이 있었을 줄이야. 난 뭐 하나 석현이에 대해 제대로 알고 있는게 없구나. 으아 미안해서 내일 그 녀석의 얼굴을 어떻게 보지?
"너희들 혹시.. 석현이랑 친하게 지내고 싶은 생각은 없는거야?"
난 눈 딱 감고 사형대에 올라가는 심정으로 물었다. 과연 이 아이들은 내 소중한 친구 석현이를 받아들여 줄 수 있을까?
"석현이는 너희들이 자신을 어려워 하고 있다는 것을 알고 있어. 그래서 쉬는 시간이나 점심 시간마다 자리를 비우는 거고, 또 학교에도 종 치기 바로 직전에 들어오고.."
"그건.. 우리도 알아"
"맞아. 혜린아. 우리도 이미 알고 있었던 일이야. 그렇지만, 그것 때문에 오히려 석현이에게 가까이 갈 수가 없어. 마치 우리한테 담을 쌓고 있는것 같거든"
선희의 말에 난 뭔가 희망이 보이는 것을 느꼈다.. 이 애들이 멀리 한다기 보다도 석현이가 먼저 담을 쌓고 있다고 한다면, 석현이에게 먼저 다가가게 하면 될것 같았기 때문이였다.
"저기.. 그러면 석현이가 먼저 다가와 주면 너희들은 석현이를 받아 들여 줄 수 있다는 말이야?"
내 물음에 선희가 조금 난처해 하며 입을 열었다.
"그, 글쎄. 솔직히 말해 잘 모르겠어. 석현이가 싫지는 않은데. 조금 무서워서.."
"아냐. 석현이가 얼마나 착한데. 그 녀석 키만 예전보다 조금 커졌다 뿐이지 내가 있을때랑 다를바가 하나도 없다고"
"응?"
아차.
"아니 그러니까. 어렷을때랑 하나도 변한게 없다는 말이야 내 말은.. 아! 맞다. 너희들중에 남자 친구 필요한 사람 없어? 석현이 정도면 어때? 그 정도면 괜찮지 않아? 의리도 있고 꽃 미남은 아니지만 잘생긴 편이긴 했잖아? 남자답고"
아직 이 애들이 석현이를 받아 들여 줄 수 있는지 조차 모르는데 내가 너무 앞서갔나? 동그랗게 눈을 뜬 수경이가 나에게 물어 왔다.
"혜린아. 너 정말 석현이를 좋아 하는거 아냐?"
"에이. 아니라니까 그러네. 내 소중한 친구인 것은 맞지만, 그런 감정 같은것은 없어"
"으음.. 그래? 네가 처음 등교한 날 좋아 하는 사람이 있다고 해서 난 여지껏 그 사람이 석현이라고 생각하고 있었는데.. 석현이도 널 마음에 두고 있어 하는거 같고"
"무슨 소리야. 아냐 아냐. 그냥 어렸을때 부터 알고 지낸 친구라서 그런것 뿐이야"
하물며 내가 예전에 남자였다는 걸 알고 있는 녀석인데 나한테 다른 감정을 품을리가 없잖아? 나 역시 석현이에게 그런 징그러운 감정을 품을 리가 없고.
아무튼, 이 기회에 석현이에게 친구와 애인을 동시에 만들어 줘야겠다고 생각한 나는 아이들에게 석현이의 좋은점을 주욱 나열했다. 원래의 예정은 지현이랑 석현이를 맺어 줄려고 했었지만, 아무리 생각해도 유명 연애인이랑 사귀게 되면 석현이가 힘들거 같으니 포기할 수 밖에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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쬐끔 수정 되었습니다. ^^. (내용의 변화는 없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