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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5화. -비밀 II (3)- (106/110)

 105화. -비밀 II (3)-

눈을 동그랗게 뜨고 놀란 얼굴을 하고 있던 인혜는 옆에서 우리의 이야기를 듣고 있던 유모가 웃기 시작하자 그제서야 내게 놀림을 받았다는 것을 눈치 챘는지 날 마구 꼬집기 시작했다. 

"뭐야. 뭐야. 씨이. 놀랬잖아. 그렇지 않아도 긴장돼 죽겠는데" 

"긴장하지 말라고 농담한거야. 농담" 

"그래도.. 긴장이.. 된단 말야" 

잠깐 발끈해서 목소리를 높였던 인혜는 다시금 기가 죽는 것인지 고개를 숙이며 기어 들어가는 목소리로 말끝을 흐렸다. 그런 인혜가 귀엽기도 했지만, 한편으로는 착잡한 기분도 동시에 느껴야 했다.   

언제나 밝고 명랑했던 동생이. 어디서나 웃고 떠들기를 좋아했던 동생이.. 마치 울 것 같은 얼굴로 내 팔에 매달려 손가락만 꼼지락 거리고 있다. 

기분이 좋지 않은 것은 당연한 일이다. 예상대로 동생이 기죽어 하는 모습을 보는 것은 그다지 유쾌한 경험이 될 수 없었던 것이다. 

역시 데리고 오지 말았어야 옳은 일일까? 아니면 아까 차 안에서 어떻게든 내가 '사상그룹' 과 관련 있다는 것을 믿게 만들었어야 하는 일일까?  

알 수 없었다. 인혜가 기 죽어 하리라는 것을 예상 못했던 바는 아니지만, 그런 인혜를 본 내 기분이 생각했던 것 이상으로 꿀꿀해 지리라고는 예상치 못했다. 만약 지금의 심정을 예상 할 수 있었더라면 어떤 조치를 취하든 미리 취했을 것이다. 

지금 인혜의 심리적 불안감을 알고 있음일까? 옆에 서 있던 유모는 웃는 얼굴로 다정하게 말을 걸어 왔다. 

"아가씨. 그리고 인혜양. 저녁 식사는 아직이시죠?" 

"예. 먹지는 않았는데요. 그다지 배가 고프지 않네요. 인혜야. 뭔가 먹고 싶은 것 있어?" 

"..." 

인혜는 대답대신 고개만 살래살래 저었다. 하긴 배가 고플리가 없겠지. 아니, 보다 정확하게 말해서는 배가 고파도 그걸 느끼지 못하는 상태라고 말하는 것이 맞을려나?  

"일단 안으로 들어가자. 바깥에 있으니까 춥다" 

말을 마친 나는 건물 안으로 들어 섰다. 내가 들어서자 내 팔에 매달려 있던 인혜는 어쩔 수 없이 건물 안으로 따라 들어오게 됐다.  

이중으로 된 현관문을 지나쳐 홀이라 생각해도 될 정도로 넓은 내부로 들어서면 양쪽에서 원을 그리며 2층으로 올라가게 만들어진 계단이 정면으로 보인다. 그리고 원형을 그리며 양쪽에서 올라가게 되어있는 계단의 교차점이자 1층과 2층의 중간 지점에 놓여 있는 거대한 괘종시계가 한눈에 확 들어 온다.  

인혜 역시 그 거대한 괘종시계가 제일 먼저 눈에 띄었는지 눈을 동그랗게 뜨더니, 나에게 소근거리는 목소리로 괘종시계에 대해서 물어왔다. 

"있잖아. 저 시계. 저 것도 시간마다 큰 소리로 울려?"  

인혜도 내가 저 괘종시계를 처음 봤을때 처럼 저게 울린다면 굉장히 시끄럽겠다고 생각한 모양이다. 하긴, 저 만한 괘종시계가 정각마다 뎅~ 뎅~ 거리며 울린다면 저택 전체는 물론이거니와 시계 옆을 지나가는 사람의 골이 다 울릴지도 모른다. 그 때문인지 저 시계는 시간만 갈 뿐. 이제 껏 단 한번도 울어본 적이 없다.  

"아니. 저건 안 울려. 그냥 시간만 가" 

"그래?" 

"응. 저런게 울린다고 생각해 봐. 옆에 지나가는 사람은 매일 같이 두통에 시달릴 걸? 그리고 밤에는 얼마나 무섭겠냐? 완전히 공포영화지. 아마 인혜 너는 밤에 화장실도 혼자 못 갈 거다" 

내 말에 인혜는 쌜쭉한 표정을 지었다. 

"피이. 그건 언니도 마찬가지 아닌가?" 

"무슨~. 난 그런거 하나도 겁 안나" 

"정말?" 

"그러엄~. 당연하지" 

동생 앞이라서 말은 그렇게 했지만, 솔직히 말 해서 겁나지 않을리가 없다. 밤마다 뎅~ 뎅~ 거리는 소리가 이 큰 저택을 울리고 있다고 생각하면, 화장실을 가기는 커녕 이불을 푹 뒤집어쓰고 이불 밖으로 고개도 내밀지 못할 가능성이 더 크다. 아니. 그전에. 매일 밤마다 유모 방에 찾아가서 유모랑 함께 자려고 할 걸?  

그런 내 생각을 눈치 챘는지 옆에서 우리의 이야기를 듣고 있던 유모가 묘한 표정을 지으며 가만히 웃고 있었다. 웃음이 나올 수 밖에 없을 것이다. 비오는 날 천둥번개가 치면 무서워서 밤에 잠도 못자고 도망치듯이 유모 방으로 찾아가는 나를 알고 있으니 웃음이 나오시기도 하겠지. 그렇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나와 유모만 아는 비밀이다. 설마하니 유모가 인혜에게 그런 비밀을 발설 하기야 할라구.  

난 그래도 혹시 몰라 유모에게 비밀을 감춰 달라는 듯이 한쪽 눈을 찡끗해 보였다. 유모의 얼굴에 그려진 웃음은 더욱 짙어졌을 뿐 특별히 대답을 하지는 않았다.  

거대한 괘종시계 곁을 지나치며 난 인혜에게 이 시계에도 이름이 있다고 말해줬다. 인혜의 얼굴에 호기심으로 물들었다. 커다란 괘종시계에 이름이 있다고 하니 궁금한 모양이다. 

"궁금하지?" 

"응. 가르쳐 줘" 

"이 시계 이름은 캔디 괘종 시계야" 

"엥?.. 왜?" 

"잘 들어 봐. 외로워도 슬퍼도 나는 안 울어. 참고 참고 또 참지. 울긴 왜 울어" 

"킥킥. 뭐야 그게.. 그거 혹시 언니가 이름 지었지?" 

"어? 어떻게 알았어?" 

"언니의 작명센스야 뻔하잖아" 

"우.. 너무해" 

"킥킥킥" 

그래도 내 작명센스 때문에 인혜의 긴장감이 어느정도 풀린 모양이다. 그게 다행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기죽어 하는 인혜를 보는 것도, 겁 먹은 아이처럼 잔뜩 긴장을 하고 있던 인혜를 보는 것도 전부 내키지 않았었기 때문이다.  

2층을 지나쳐 3층의 내 방까지 가는 동안 인혜는 감탄사를 쉴새 없이 뱉어냈다. 2층에선 무슨 방이 그리도 많은거냐며 신기해 했고, 3층에선 대부분이 값비싸 보이는 원목으로 되어 있는 것을 보고 고급스럽다는 둥. 엄청나다는 둥. '우와' 라는 감탄사와 '세상에' 라는 단어를 입에 달고 있었다.  

그렇게 내 방 앞에 도착한 인혜는 그동안 많은 것에 놀랐기 때문인지 이 안에는 무엇이 있을까? 라는 호기심 가득한 얼굴을 하고 있었다. 마치 미지의 세계를 탐험하는 탐험가의 눈빛이라고나 할까? 내가 그런 인혜를 보며 -혜린이 방- 이라는 팻말이 붙은 내 방의 문을 열려고 하자 인혜는 내 손을 잡고 잠시 심호흡을 하더니 '놀랄 준비 끝' 이라고 중얼 거리고는 이제 문을 열어도 괜찮다고 했다. 

그러나 막상 문을 열었을때 인혜의 얼굴에는 실망감이 가득했다. 넓기는 굉장히 넓은 방이었지만, 커다란 침대와 사용하지도 않는 자그마한 화장대. 그리고 한쪽에 놓여 있는 컴퓨터 책상만 보일 뿐. 옷이 한 가득 들어 있을 것 같은 옷장이나, 책이 잔뜩 꽂혀 있는 책장 같은 일반적인 가구는 있지도 않았고, 텔레비젼이나 음악을 들을 수 있는 오디오 시스템 같은 것도 없었다. 그렇다고 여자애들 방에서 흔히 볼 수있는 인형 같은 것이 있었냐 하면 그런 것도 아니었다. 말 그대로 황량할 정도로 썰렁한 방. 그것이 지금 내가 사용하는 방의 진실이었다.  

나는 '뭐야? 이게'.. 라는 얼굴로 허탈해 하고 있는 인혜를 보며 웃음을 머금고 말을 걸었다. 

"실망했지?" 

"어?.. 아니" 

"얼굴에 써 있어. 난 지금 대단히 실망중 이라고" 

"아, 아냐.. 그냥 조금.. 놀랬을 뿐이야" 

말은 그렇게 했지만 인혜는 보물 상자가 가득 들어있을 것이라 짐작되는 상자를 간신히 열었는데 그 안에 '꽝. 다음 기회를' 이라는 쪽지를 발견한 사람의 얼굴 표정을 하고 있었다. 그 표정이 우스웠지만, 난 애써 웃음으 참으며 인혜를 내 방으로 데리고 들어갔다. 

"들어가자" 

"응" 

방으로 들어온 인혜는 볼 것도 없는 방을 연신 흝어 보기에 여념이 없었다. 그러다 자신이 매고온 가방을 어디에 놔야 하는지 나에게 물어왔다.  

"이거.. 어디에 놔야 돼?" 

"아무곳에다 놔" 

"그래도.." 

인혜는 말 끝을 흐리며 내 옆에 서 있는 유모를 쳐다봤다. 인혜의 그런 행동이 처음에는 의아했지만, 잠시뒤에는 아차 싶은 심정이었다. 아무래도 유모가 어른이다 보니 나름대로 신경을 쓰고 있었던 것이다. 게다가 인혜는 이 집의 모든 것이 낯설다. 나에겐 이미 친숙한 사람들도 익숙한 풍경과 배경들도 인혜는 오늘 처음 보는 것들 뿐이다. 믿고 의지할 사람이라고는 나 밖에 없을텐데, 나에게 너무 편한 것들이다 보니 인혜의 심정을 헤아리지 못하고 있었던 것이다.  

인혜와 내가 아무리 가족이라고 할 지라도, 이 집은 인혜에게 있어서 엄연히 남의 집이 되는 것이다. 그러니 함부로 할 수 있을리가 없다. 내가 아무데나 놓으라고 한다고 정말로 아무데나 휙 집어 던져 놓을 수가 없는 노릇이다.  

아아~ 난 왜 이렇게 바보 같을까? 동생의 심정도 헤아리지 못하다니.. 

인혜에게 미안한 마음이 들어 난 인혜가 매고 있던 가방을 받아 한쪽에 놓아 두었다. 그리고 유모에게 저녁은 조금 있다가 먹을테니 일단 마실 것을 가져다 달라고 부탁했다. 유모는 알겠다고 말 한뒤 방을 나갔다. 난 유모가 내 방에서 멀어진 것을 확인하고 인혜를 조용히 불렀다. 

"인혜야" 

"응?" 

유모가 나가자마자 침대에 걸터앉아 여기저기를 기웃거리고 있던 인혜는 날 돌아 봤다. 인혜의 표정을 보아 아직까지는 내가 숨기고 있었던 '진실'에 대해 깊게 생각해 보지 않고 있었던게 틀림없다. 그러니 나중에라도 인혜가 깊게 생각할 수 있는 심적 여유가 생겼을 때. 혼자서 이런 저런 생각 끝에 안 좋은 '결론'을 짓고 날 원망하게 만들게 하기 보다, 내가 먼저 선수 쳐서 조금더 올바른 '진실' 쪽으로 접근 시키는 것이 나을 것 같아, 난 판도라의 상자를 여는 기분으로 입을 열었다.  

"미안해. 이제까지 말 하지 않아서" 

"뭐가?" 

"지금의.. 내 배경이나, 뭐.. 그런걸 말하지 않은거 말야" 

내가 진지한 얼굴로 말을 하자 인혜는 그제서야 내가 이제껏 감추고 있었던 진실에 관해서 떠올린 모양이다. 지난 몇 개월 동안 가족들에게 숨겨왔던 일. 어찌보면 가족들을 기만하고 속여왔다고 생각될지도 모르는 일.  

"인혜야. 화내지 말고, 그리고 너무 깊게 생각하지 말고 내 말을 우선 들어줘" 

"...응" 

난 인혜의 옆자리에 걸터 앉았다. 그리고 제대로 된 설명을 하기 위해서 생각을 정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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