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81화 〉네번째 이야기. 억세게 운수 좋은 날 (6)
- 너무도 빨리 타오른 불꽃은
미처 활활 타오르지 못하고 시들어가곤 했다.
그건....
내가 보냈던 청춘과도 같았다.
무언가 화려하게 타오려는 찰라....
물벼락을 맞은 듯 화급히 꺼져버렸다.
그리고 정신없이 달려왔다.
이 나이까지....
먹고 살기 바빠서....
전쟁과 같이 치열하게 싸워가면서....
시간이 그 당시엔 그렇게 느리고 지겨웠는데
이렇게 뒤를 돌아보니
허망하게 느껴졌다.
특히 요근래....
텅 빈 집에 혼자 있을 때면
더욱 그런 감정이 몰려오곤 했다.
81.
잠시 침묵이 흘렀다.
무겁기 그지없는 침묵의 시간이 나를 짓눌러왔다.
순간적인 기분으로 말을 내뱉은 뒤....
잠시 좋았던....
엄밀하게 말하면 나만 그렇게 느꼈던....
한예진과의 관계를 망쳐버린 것이 아닌가 하는
후회를 막 하고 있는 참이었다.
아침에 고작 ID카드 하나 빌려준 것으로
너무 황당한 제안을 하고 있는 모양에 나 자신도 어처구니가 없었다.
미친 거야...
젠장....
역시나 예진은 갑작스런 내 말에 당황한 듯 잠깐 눈이 커지더니 이내 어색한 미소를 지으며 답했다.
" 훗..... 죄송해요.... 과장님. 좀 힘들 거... 같아요..... "
고운 입술에서 흘러나오는 거절의 답변.
날카로운 비수가 되어 가슴을 후벼 팠다.
윽...
당연하겠지....
하아....
이거 괜히 여사원한테 찝쩍대는 유부남 과장으로 찍히는 거 아냐......?
회사에 있다 보면 끊임없이 어린 여사원이 들어왔다.
보통 남자들이 여유로워지고 한가해지면 슬슬 딴 생각이 나는데....
이런 여사원들을 볼 때였다.
총각 시절보다야 유부남들이 어쩌면 쪼들릴 수도 있지만
그래도 모두 은근슬쩍 딴 주머니도 차고 비상금도 운용하고 있었다.
친구들과 어울리며 또는 자신 만의 쏠로 라이프를 즐기며 쪼들려 사는 총각보다
자산 운용의 묘미도 어느 정도 있겠다 또 가정에 목매여 어디 마음대로 나다니지 못하는 유부남들이
이런 싱싱한 여자들을 보면 허튼 수작을 부리고 싶어지는 건 당연한 일이었다.
지갑 사정도 어느 정도 여유 있겠다...
슬슬 옆에 있는 마누라는 우악스러워지겠다.....
허파에 바람이 솔솔 들어가는 시기....
거기에다가....
신입사원 시절에는 힘든 시기가 꼭 한번 이상은 찾아오기 마련인데
그럴 때면 직함 하나 들고 있으면서 직장 상사라고 위로해주네 도와주네....
어쩌구 옆에 들러붙기도 좋은 법이었다.
꼭 그런 것이 아니더라도 온갖 방법으로 유혹할 수 있었다.
물론 여사원들도 바보는 아니기 때문에 이런 껄떡남들을 경계하고 있겠지만....
생각해보라....
초원의 얼룩말들이 경계를 하지 않아서 사자들에게 잡아먹히겠는가....
결국 노리는 자의 손아귀에서 벗어난다는 일이 그리 녹록하지는 않았다.
특히나 사회생활 초년생들은 더욱 더 손쉬운 먹잇감이었다.
약간의 관심.
약간의 행동력이면 목표한 바를 이룰 수 있었다.
그리고....
엄밀하게 말하자면 그 대상은 신입 사원 뿐만이 아니었다.
한번 맛들린 것들은 시도 때도 없이 닥치는 대로 마수를 뻗어댔다.
뭐...
나와는 상관없는 일이었지만....
그래도 은연 중에 여러 소문을 듣기 마련이었다.
어디 과장이 신입 여직원이랑 드라이브 가는 것을 봤다는 등
유부녀 대리와 유부남 대리가 서로 눈이 맞아서 아주 뜨겁다는 등
좀더 들어가면 와우 입이 쩍 벌어지는 환장의 드라마가 펼쳐지곤 했다.
들으면서 솔직히 말하자면....
부러운 면도 있었다.
즐기면서 사는 삶.
난봉꾼의 모습에 눈살을 찌푸리긴 했지만 한편으로는 남자의 욕망 속에서 조금은 부러워하기도 했다.
빽 없는 삶이 위태롭기는 했지만 그런 즐기는 라이프 스타일을 동경할 수 밖에 없었다.
다만 그 위험을 감당할 용기도 배짱도 없었을 뿐.
어쩌면 성인군자 같이 나를 위장하면 살고 있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어찌 됐든 이전에도 얘기했던 것처럼 알게 모르게 입담이 순식간에 불어나는 곳이 직장이었다.
역시나....
여사원들 사이 괜히 찝쩍대는 유부남으로 찍혀서 좋은 건 없었다.
추하기도 하고 그런 입방아에 오르락내리락 하다보면 주변에서 쏘아대는 시선 또한 장난아니게 쏟아질 것이다.
하지만 그간 꽤 여자 문제에 대해서는 순백의 드레스처럼 깨끗하다고 자부하고 있었는데 오늘 그 오점을 찍을 것 같았다.
추잡한 소문이 주렁주렁 따라붙은 과장으로 내 자신이 포장되는 것도 별로 바라지는 않는 일이었는데 입맛이 쓰게만 느껴졌다.
더군다나 그 대상이 한예진이라는 것이 더욱 그랬다.
에휴....
젠장....
이런 식으로 예진이한테 찍히면 곤란한데....
너무 서둘렀어....
후회에 후회를 거듭하고 있는데 그녀의 맑은 목소리가 들려왔다.
" 비가 많이 온다고.... 남자친구가 데리러 온다고 했거든요..... 죄송해요... 과장님. "
뜻밖의 부연 설명.
눈을 깜빡이며 시선을 맞추니 예진은 얼굴에 미안한 기색을 가득 띄우며 말을 이었다.
연신 고개를 까딱거리는 것이 정말 진심으로 어쩔 줄 몰라 하는 모습이었다.
그리고 그 와중에 들리는 단어 하나.
나...남자친구.....?
하긴 그녀 정도 되는데 애인이 없을 것 같지는 않았다.
나는 나름 표정관리를 하며 괜찮다는 듯 하하하 소리 내어 웃었다.
" 하하.... 아니야. 내가 좀 무리한 부탁을 했지.... 오히려 내가 미안하지.... 뭐. "
내 말에 예진이 깜짝 놀라는 표정을 지으며 급하게 손을 휘저었다.
" 아...아니에요! 그럴 리가요.... 저도 과장님하고 한번 얘기 나누고 싶었는걸요.... 오늘은 어쩔 수 없지만.... 다음에 밥 사주세요. 후후..... 그땐 같이 식사하면서 저한테 많이 알려주셔야 해요? 저.... 궁금한 거.... 과장님께 물어보고 싶은 게 많이 있거든요. 훗....... "
반쯤 남자친구 애드리브는 내 갑작스러운 제안에 대한 거절을 만들어내기 위한 핑계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그런데....
열심히 설명하는 예진의 모습도 그렇고....
다음에 밥을 사달라고 하는 그녀의 말을 들으니 꼭 그런 것만은 아닌 듯 싶었다.
특히나 나중을 기약하는 듯한 지금 발언....
과연 무엇을 의미하는 걸까.....
거기에다가 나한테 얘기 듣고 싶은 것이 많다라....
후후후....
왠지 <> 이라는 단어가 상당히 매력적으로 들리고 있었다.
비록 거절은 당했지만.....
환한 미소를 지으며 쑥스러운 듯 말하는 그녀의 모습이 너무도 아름다웠다.
살짝 머리를 귀로 넘기는 것 또한 회사 제일의 미녀라고 할 만 했다.
여기까지인 듯 싶었다.
난 시원스럽게 그녀를 놔주기로 했다.
사실....
다른 방법이 있는 것도 아니었다.
" 그래요.... 하하... 어서 가봐요. 고생했어요. "
" 네에~ 과장님도 수고하세요. 너무 무리하시지 마시고요... 훗. 먼저 들어가 보겠습니다. "
꾸벅 다시 절을 하고는 몸을 돌려 파티션 사이 자리가 늘어선 통로로 가벼운 걸음과 함께 걸어 나가고 있었다.
살랑살랑 거리는 긴 웨이브 진 머리카락과 좌우로 탄력있게 흔들리는 혜진의 히프 라인이 절로 한숨이 흘러나오게 만들었다.
말 그대로 콜라병 같은 그녀의 뒷태가.....
가슴은 짜릿하게...
아랫도리는 후끈하게 만들어주고 있었다.
섹시한 한혜진의 육감적인 몸이 절로 마른 침을 목구멍 아래로 꿀꺽 삼켰다.
마음 한구석 음탕한 생각이 날개를 펼쳤다.
남자친구라.....
그럼....
처녀는 아니겠군.....
저 정도 몸매면....
남자가 고자라면 모를까 그냥 두었을 리도 없고.....
바보가 아닌 이상 당연히 섹스도 하겠지....?
히야....
지금도 저렇게 매력이 철철 넘치는데...
밤에는 얼마나 뜨거울까....?
옷을 싹 벗겨놓으면 참....
볼만 할 꺼야....
하아...
꿀꺽.....
나는 그녀가 사라진 문을 바라보면서 입맛 만을 쩝쩝 다시고 있었다.
실로 오랜만에 느껴보는 봄날 같은 유혹이었다.
**************
한예진이 사무실을 나서고 혼자만 달랑 남겨진 뒤....
나는 다시 자리에 앉아서 자료를 뒤적거리고 있었다.
그런데.....
마우스를 클릭하는 손가락만 움직이고 있을 뿐 전혀 집중을 하고 있지 못했다.
짧은 시간이었지만 그녀가 뿌리고 가버린 페로몬(pheromine)의 영향으로
마음만 싱숭생숭 해져서 괜히 도표만 켰다가 껐다 하면서 예진의 섹시한 자태만을 떠올리고 있었다.
실로....
오랜만에 아랫도리가 불끈 거리는 느낌을 받았다.
마음대로 그녀의 옷을 벗겼다가 입혔다 하며 끓어오르는 성욕의 마수에서 갈증만 느끼고 있는 중이었다.
마음이 둥둥 떠다니고 어지러운 느낌이었다.
나는 어느새 긴 한숨을 내쉬며 자신도 모르게 소리 내어 중얼거렸다.
" 하아..... 집에 가기가.... 싫구나...... 후우....... "
여기서 말하는 집은 가족이 기다리는 그런 곳이 아니었다.
나 혼자 지내고 있는 원룸을 말하는 것이었다.
결혼한 지 14년차를 넘기고 있는 유부남이었지만 지금은 혼자 살고 있었다.
이혼한 것은 아니고....
아내와 아이들은 따로 떨어져 살고 있는 주말 부부였다.
아이들의 학교 교육을 위해 그들은 서울에 남아있고 나만 회사가 있는 이곳으로 내려왔다.
회사 이전으로 인한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다.
처음....
가족 모두 함께 내려올까 고민도 했었다.
그러나 그건 나만의 생각이었다.
아무래도 회사가 옮기는 곳이 지방이다 보니 아이들도 그리 달가워하지 않았고 특히 애 엄마는 절대 결사 반대였다.
가뜩이나 뺑뺑이로 들어간 아이의 학교가 마음에 들까 말까 하는 상황이었는데
지방으로 가면 입시하고는 완전히 멀어진다고 전혀 타협의 여지도 볼 수 없게 반대하고 있었다.
뭐....
엄밀하게 말하면 그녀가 그간 쌓아올린 자신의 생활이 깨지는 것도 나름 이유라고 생각은 하지만....
애들의 교육 문제를 전면에 내놓고 반대하는 상황 속에서는 나만 외톨이였다.
결국 자의반 타의반 나 홀로 내려올 수 밖에 없었다.
와이프와는.....
옛날 대학입학 후 새내기 시절.....
둘 다 한눈에 반해서 사귀게 되었다.
불타오르는 일학년 공식 씨씨....
그게 바로 우리들이었다.
무엇이 그렇게 좋았는지 서로 보기만 해도 가슴 설레이고 두근거리는 시절이었다.
결국....
그 불씨가 화르르 타올라서 사고까지 치고 말았다.
그녀도 나도 젊었다.
동정이었던 나.
처녀였던 와이프.
둘이서 같이 넘어선 금단의 문.
그 새로운 세계는 황홀하고 치명적인 쾌락이 함께 하는 곳이었다.
대놓고 성욕에 불타던....
전형적인 남자와 은근히 호기심을 가지고 있던 여자가 만나서 미친 듯이 불타올랐다.
펠라티오(Fellatio).
커닐링구스(Cunnilingus).
정상위.
후배위.
좌위.
서로 함께 섹스에 대한 여러 탐구를 함께 하며 사랑이라는 이름 아래 많은 것을 함께 했다.
대학교에 왔다는 해방감 속에서 당연히 이런 것이 어른의 사랑이고 누릴 수 있는 권리라고 생각하고 점점 더 깊숙이 빠져들었다.
실물로 접한 여자의 몸.
오감 모든 것을 이용해서 탐닉할 수 있는 대상.
그리고 너무도 찰떡궁합으로 들러붙는 우리의 몸.
하루 종일 자취방에서 여섯 번 일곱 번 사랑을 나누며 불타올라도 젊음 속에서 싱싱했던 체력은 마르지 않았다.
하지만...
나와 그녀 모두 한 가지....
간과하고 있는 것이 있었다.
당연히 쫓아올 수 있는 문제를 어떻게 그리 까맣게 잊어버릴 수 있었는지....
참 지금 생각해보면 어처구니 없는 일이었다.
-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