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64화 〉열다섯번째 이야기. 헬조선에서 살아남기 (29)
- 길이 힘들고 멀어도
같이 가는 동행이 있었기에
힘들 줄 몰랐다.
모든 것이 얼어붙는 추운 길도...
같이 체온으로 녹이고...
허기도 조금씩 나눠먹으면서...
농담으로 웃으면서 힘을 돋구었다.
그런데....
한명 한명...
떠나고 나 혼자 만이 남았을때....
앞에 펼쳐진 먼 여정을 보고 있자니...
발길을 옮길 용기를 잃어버렸다.
처음부터 혼자 왔으면 몰랐을텐데....
이젠 혼자라는 것을 견딜 수 없게 되어버렸다.
264.
그래도 이렇게 민호를 보내는 것은 아니라고 생각했다.
강희는 어렵게....
억지로 말을 만들며 입을 열었다.
" 인...인연이 아니었나 보지.... 다정이하고는.... 그리고 사실을 얘기해줘도.... 그런 남자한테 목을 거는 여자인데.... 왜 니가 힘들어야 되냐? 왜에... 니가 더 힘들어서 죽으려고 그러는 거야!? 엉? "
말도 안되는 비난일수도 있었다.
하지만 그렇게라도 민호가 아픔에서 벗어나길 바랬다.
그러나....
" 그게 다 나 때문이니까!!! 내가 그녀를 잡을 수 있었음.... 잡고만 있었으면.... 그딴 새끼하고 어울리지 않았을 거고..... 그녀의 눈에서 눈물 따위는 흘리지 않았을 테니까......!!! "
강희의 말이 끝나기 무섭게 민호가 으르릉 대듯 작게 소리쳤다.
목구멍에서 울리는 소리가 갈기갈기 찢어지듯 울렸다.
" 정말.... 나도.... 미칠 거 같더라.... 내가 해줄 수 있는 게.... 전혀 없다는 게..... 정말..... 미칠거 같더라.... 나...나도 누군가를 좋아하게 될 줄은 몰랐다. 이미.... 진작에 포기했었다고...... 연애라니.... 내 주제에... 결혼? 여친? 알아.... 힘들다는 거.... 그래서 아싸리 생각조차 안했었어. 근데.... 근데 말이야. "
민호가 이글거리는 눈으로 강희의 손을 잡고 말했다.
그의 굵은 손가락이 유난히 거칠게 느껴졌다.
" 누군가를 좋아하게 되는 건.... 어떻게 할 수 없더라.... 정말... 억지로 지우려고 했는데.... 그 애를 모르던 시절처럼.... 돈 벌고 공부만 하고.... 열심히 사는 나로 돌아가려고 했는데.... 그렇게만 살려고 발버둥 쳤는데.... 젠장.... 안되더라고..... 나도 하하... 이렇게 될 줄 몰랐어... 내 마음인데... 내 마음대로 안 되더라.......정말... 안되더라고...... "
피를 토하는 듯 쏟아내는 그의 말을 어떻게 받아야할 것인가.
강희도 뭐라고 더 말을 할 수 없었다.
속이 타서 찌개 국물을 마셨는데 밍밍하기만 했다.
하긴 찌개에 하도 물을 부어서 빈 물통이 상 위에 가득했다.
침묵....
답답했다.
답이 없는 미로에서 헤매일 수 밖에 없는 것이.
어렸을 땐....
옳은 것과 그른 것....
해야 할 일과 하지 말아야 할 일....
모든 것이 분명했었다.
그런데...
언제부터 이렇게 <>을 찾기 어려워진 것일까.
강희는 한숨을 쉬고 자신의 잔을 채웠다.
잔을 비워도 이젠 전혀 달지 않았다.
쓴맛 만 가득한....
독주가 되어 버렸다.
" 그래도.... 학기는 마치고 가도 되잖아...... 그간 쌓아온 게... 너무 아깝잖아..... "
중얼거리듯 강희는 말을 내뱉었지만 이건 차라리 탄식과 같았다.
민호는 잔을 만지작거리며 말을 받았다.
조금 진정이 되었는지 쉰 목소리로 느리게 말을 이어갔다.
" 시간 낭비야..... 공부도 안 되고.... 멀리서 다정이만 보여도 정말 심장이 천 갈래 만 갈래로 찢어지는 기분이야. 이대론..... 못 버티겠어. 차라리 군대에 가서..... 나를 다시 개조도 하고 강화 좀 하고.... 돌아올련다. 빡시게 군생활 하면 나도 좀 변해서 새롭게 시작할 수 있을 것 같다. "
" 민호야.... 이건.... 이건... 그냥..... 군대로 도망치는 거잖아...... "
강희는 갈라지는 목소리로 토해냈다.
식도를 타고 넘어오는 울림이 눈시울을 뜨겁게 달구었다.
" 그게... 머.... 그래 강희 니 말이 맞아. 도망가는 거야.... 근데 뭐.... 도망이 뭐 어때서....? 이길 수 없는데.... 도망이라도 가야지.... 깨져서 산산히 부서지면 누가 장하다 잘했다고 박수라도 쳐주냐? 흐흐... 이미 시험도 조졌고.... 성적은 뻔할 뻔자고..... 마음도..... 지쳤다. 너무 지쳐서.... 당장이라도 쓰러질 거 같아...... 요새 군대 월급도 많이 올랐다며......? 그래서 가는 거야. 가서.... 이년간 열심히 나만 생각하고 올 거다. 그리고 다시 해보려고.... 공부. "
이미 마음을 정하고 발걸음을 내딛은 사람에게 돌아서라고 말하는 것은 도리가 아니었다.
강희는 이렇게 그를 보내야만 하는 것이 너무도 아프게 느껴졌지만.....
말을 섞으면 섞을수록 그도 더이상 뭐라고 말할 수 없었다.
거기에....
민호의 한마디 한마디는....
자신도 고민했던 것이었다.
일하면서 공부한다는 것....
온종일 공부에 매달리는 애들에 비하면....
이길 수 없는 경기를 하는 느낌이었다.
난....
출발선에 제대로 서있는데....
그들은 이미 50미터 앞에서 뛰기 위해 준비하고 있는 듯한 느낌이랄까.....
죽어라 뛰고 있는데....
헉헉 거리는 숨이 목구멍 바로 앞까지 올라와 쓰러질 거 같은데....
그네들은 자전거 타면서 휙휙 달려나가는 기분이었다.
성적을 제대로 받기 위해 얼마나 더 노력해야 된다는 것인지...
알 수 없었다.
인간에게 공평하게 주어지는 것이 있다면 시간이었다.
돈이 많든...
금수저든...
가진 것 하나 없는 흙수저든...
24시간....
하루 주어지는 시간은 동일했다.
그렇기에...
공평하지 않았다.
누구는 그 24시간을 그대로 공부에 투자할 수 있는데....
누군가는 돈도 벌고 공부도 하고 누군가를 돌보면서
시간을 쪼개 써야 했다.
그 누구도 시간을 늘릴 수는 없는 일이었다.
노력하지 않아서 그래...
높은 눈을 낮추라는 말들.....
들을 때마다...
화가 치밀어 올랐다.
평생 노력을 하고도 어느 정도 이상은 올라갈 수 없는 사람도 있었다.
눈을 낮추면 그만큼 나의 생활수준도 낮아졌다.
그렇게 계속 바닥 인생을 살면서 만족하라는 건가?
화가 나지 않으면 이상한 거 아니었나?
강희는 고개를 숙이고 한숨만 내쉬는 민호의 어깨에 손을 올리고 가만히 토닥거렸다.
그의 넓고 단단했던 어깨가....
지금은 너무나 연약하게만 느껴지고 있었다.
**************
허우적거리면서 손을 흔들고 걸어가는 민호.....
새벽...
아직 해가 뜨지 않은 거리 저편으로.....
비틀거리며 그가 걸어가고 있었다.
강희는...
그가 사라질 때까지 지켜보았다.
슬프다....
사람을 좋아해서...
그래서 상처를 입고....
작아진 자신을 깨달아서 도망치는 그.....
그는 판도라의 상자를 열어버린 것일까.
다정을 만나지 않았다면...
차라리...
자신이 걸어왔던 길에서만 계속 있었다면...
그는 목표한 길 위로만 계속 걸었을까...
아마도 그랬을 가능성이 높았을 것이다.
그러나...
그게 무슨 삶의 모습이련가...
하루종일..
일하고...
학점을 따서...
조금 나은 급여의 직장에서
또다시 죽어라 일을 한다...
나중에 사회에 나가서
또 집을 사기 위해선...
얼마나 빡시게...
일해야 하고...
학자금 대출에 또 다른 대출금들이 쌓여서...
그것을 갚기 위해선..
또 얼마나 돈이 되는 일을 해야 할까...
결혼이라는 것을 포기해도....
무엇을 위해 돈을 벌고 일을 한다는 것일까.
대체...
삶이라는 게...
무엇일까.
이런 게 정말 인생을 살아가는 방법일까...
평소에도 계속 묻고 있던 질문이었다.
끝없이..
일...
일...
일...
그 일을 하면서도 내심 자신에게 물었다.
대체...
우린 왜 사는 거지.....?
심란한 마음으로 어지러운 생각이 머릿 속을 헤집는 동안.....
이미 어둠이 깔려있는 저편 속으로 민호는 사라져버렸다.
밝게 빛나는 불빛.
거리에 켜져 있는 빛무리들이 유난히 차갑게 느껴졌다.
도시의 야경은....
별무리가 지상으로 내려온 모습이라고 하던데....
그러기엔 지금 보이는 풍경은....
너무도...
차갑고 무심했다.
**************
" 으으...... "
목이 말랐다.
강희는 일어나자마자 냉장고를 열었다.
고작 문 하나 열었을 뿐인데 덜컹 거리는 느낌에 작은 냉장고 전체가 흔들리는 듯 싶었다.
' 하아... 안에 뭐.... 들어있는 게 있어야지..... '
가뜩이나 작은 냉장고 이었는데 그 안에도 별로 들어가 있는 것도 없었다.
텅빈 뱃속에 바닥도 울퉁불퉁하니 냉장고가 춤을 출만도 했다.
사다놓은...
작은 봉지의 김치 하나.
생수 두통.
그나마 하나는 거의 비어 있었다.
할인한다고 사다놓은 맥주 다섯 캔.
갑자기 먹고 싶어서 시장에서 사다놓은 반찬 봉지.
그나마 맥주 다섯 캔만 없으면 한쪽에 몰아두면 반이상 텅텅 비고도 남을....
썰렁한 냉장고....
생수 페트병을 꺼내서 물을 마셨다.
아예 병나발을 대고 꿀꺽꿀꺽 끝까지 비웠다.
텅 빈 패티병.
그렇게 뱃 속에 찬 물을 들이붓고 나니 정신이 좀 드는 듯 싶었다.
시계를 보니....
고작 9시 40분을 넘어가고 있었다.
그렇게 술을 마셨는데....
푹 잤다고 생각했는데...
시간은 예상 외로 얼마 지나지 않았다.
수업은 오전 11시부터 있었다.
씻고 올라가도 넉넉한 시간이었다.
아마 조금 서둘러 올라간다면 학생식당에서 아침식사도 가능할 것이었다.
그러나....
마음이 울렁울렁 거리며 안정을 잡을 수 없었다.
싱숭생숭 하다고 할까....
어수선하고 갈피를 잡을 수 없는 기분.
그 와중에....
새벽에....
그렇게 보내버린 민호 모습이....
스멀스멀 머리에서 떠오르고 있었다.
" 으...... "
머릿 속을 꿰뚫고 지나가는 통증.
아직 술기운에 덜 깨서인가....
속도 안 좋고...
두통도 느껴졌다.
" 씻자.... 우선 씻고 생각하자..... "
욕실이라고 부를 수도 없는 화장실 겸 욕실.
계단 밑 공간이라 서서 씻을 수도 없었다.
강희는 쭈그려 앉아 샤워를 했다.
그래도 이전 자취방은 이런 공간도 없어서 부엌에서 씻었다.
많이 발전했다고도 할 수 있었다.
하지만....
보일러 상태가 안좋은지 뜨거운 물이 잘 나오지 않아서
길게 씻기라도 하면 마지막엔 거의 찬물만으로 씻게 되었다.
그러나 어떻게 보면 지금은 차라리 그게 나았다.
숙취에는 정신이 반짝 들었다.
후다닥 나와서 물기를 닦으며 거울을 보았다.
마구 삐쳐있는 머리카락.
푸석해 보이는 얼굴.
퀭한 눈동자.
" 최강희.... 너도 지쳐 보인다....... "
-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