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 329화 〉열아홉번째 이야기. 인스턴트 러브 (Instant Love) (6) (329/335)



〈 329화 〉열아홉번째 이야기. 인스턴트 러브 (Instant Love) (6)

- 직장 생활이라는 것은....
학교와는 또 다른 세계였다.

내 힘과 능력으로 일하고....
그 대가로 돈을 받는 곳.

하지만...

그런 것보다도
이제는 맺어야하는....
인간관계 또한 전혀 다른 곳이었다.

내가 원하지 않아도
얽혀야 하는 관계 속에서
누군가에게 스트레스를 받고....
힘들어해야 하는....
학창시절에는
그런 사람과는 보지 않으려고 하면
최대한 멀리 할 수 있었다.
하지만 직장은 그럴 수 없었다.
그건 조직에 몸담는다는 것이 사회생활의 시작이었다.

그렇기에....
특히나 누가 내 상사가 되는 것은
중요한 일이 아닐 수 없었다.



329.

어쩌다가 정우섭 과장과 얽히게 되었을까.

분명....
처음 그가 우리 부서에 오기 전부터
여직원 사이에선 여러 가지 얘기가 돌곤 했었다.
새로운 누군가의 등장이라는 것이
호기심을 일으키는 소재이기도 했고.....
누군지 알 수 없는 소문이랄까.
어디서 시작된 것인지도
알 수 없는 이야기가 그 관심을 더욱 키웠다.

본사그룹....
잘나가는 부서에서 현장 경험을 위해
일부러 우리 협력사로 지원해서 오는 엘리트라는 얘기부터....
인사 기록에서 본 사진이 사내 메신저에 돌면서부터는
과장이라는 직함에 어울리지 않게
동안에다가 잘생긴 증명사진으로 인해
설마 남자도 뽀샵한 거 아니냐는 소리까지.....
하다 못해서 이른 나이 승진하는 것을 봐서는
회장님의 숨겨진 핏줄이라는 출생론까지 흘러 다녔다.

그리고 마침내 실제 그가 출근했던 날....
우리 부서 근처에 못 보던 여직원들의 발길이 괜히 많아지기는 했었다.

실물로 화제의 정우섭 과장을 본 감상은....
나름 키도 훤칠하고 말끔한 인상을 보여주며
그를 본 대부분의 여직원이 입을 가리고 작은 탄식을 흘렸다.
메신저에서 떠돌았던 조그만 증명사진 안의 모습
그대로 아니 그 이상을 보여주는 용모에 뽀샵 논란은 금세 사라졌다.

나 또한 그의 외모 만은 인정할 수 밖에 없었다.
다만 쓰고 있는 은테 안경에서 풍기는....
깐깐해 보이는 눈빛이 조금 마음에 걸리긴 했지만
그의 밑에서 일해야 하는 긴장감에 불러오는 나만의 편견이기를 바랬다.

그러나....

그 뒤 보여준 그의 모습은 제법 위트 있고 선을 지키는 태도.
깔끔하고 능력 있는 일처리로 긴장으로 굳어져 있던 마음은 조금씩 안정을 찾을 수 있었다.

물론....
여직원들에게 쉽게 흘리는 미소와 친절은 쫌....
다른 경계심을 불러왔지만....

어쩌면 그때 그 경계심이 지금의 관계를 만들었을지도 모르겠다.
경계하고 자꾸만 거리를 두려는 내 태도가 그를 움직이게 한 것인지도....

하지만....
원인이 어찌 됐든 그와의 이 위험한 관계는 이제 끝을 내야했다.

어제...
아니 지난 주말....
하늘과 함께 시간을 보내며....
자극적이고 쾌락 만이 가득한 관계에서
빠져나와야겠다는 생각만이 내내 내 머리를 채우고 있었다.

**************

역시 저녁때 퇴근 후 조용히 얘기하는 편이 낫겠다고 생각하며 일을 하면서도 정우섭 과장 쪽을 살폈다.
넉살 좋은 미소와 간간이 들여오는 통화 속 그의 목소리가 연신 신경이 곧추세우게 만들었다.

간간히 내 자리에 와서 업무 지시를 하고 가곤 했지만
평상시에는 사내에서 일 외에 전혀 사적인 대화는 나에게 건네지 않았다.

그도 사무실 안에서는 티가 나도록 행동하지는 않았다.
처음에는 작은 스킨십이라도 하지 않을까 걱정했었지만
타인의 시선이 전혀 미치지 않는 장소가 아닌 이상 절대 그 선을 넘는 일은 없었다.

모든 여직원에게 친절하고 우스갯소리를 할 지언정 딱 거기까지가 그의 모습이었다.
그리고 그건 나에게도 마찬가지였다.

하지만....

비상계단 같은 곳에서 스치듯 만났을 때
자신의 품 안으로 끌어당겨서 갑자기 벼락처럼 키스하는 모습
또한 정우섭 과장의 또 다른 면이기도 했다.
계단 위 들리는 누군가의 구둣발 소리에 화들짝 놀라서 뒤로 떨어지면
그런 내 모습에 킥킥 웃으며 이내 멀어져가는 그의 뒷모습을 보면서 얼마나 가슴 떨렸는지 모른다.
설레임이 아닌....
당혹함으로.

아무튼 한 치도 그 앞을 알 수 없는 남자였기에....
지금이 평안함도 그 아래에는 팽팽하게 당겨진 실처럼 긴장감을 품고 있었다.

그렇기에....
저녁시간대....
퇴근 후 그와 자리를 만든 뒤
내가 건네는 말에 어떻게 반응할지 짐작이 되지 않았다.

능글맞은 표정으로....
그리고 언변 좋은 유려한 말솜씨로 나를 설득하며
계속 만남을 유지하자고 하면 어떻게 되는 걸까....
아니면 나 같은 여자는 이제 흥미가 없다고 쿨하게 알았다고 해줄 것인가....
말로는 헤어진다고 하고 괜히 사무실에서 상사라는 직함을 이용해서
나를 힘들게 하는 것은 아닐까.....

그간...
보여줬던 신사적인 모습과 달리
숨겨진 또 다른 얼굴이 있으면 어떻게 할까.....
-하는 생각에 걱정이 되는 것도 사실이었다.

남자답고 쿨한 성격을 보여주던 남자일수록....
자신의 마음이 거절되는 순간 더욱 찌질해졌던 일을 겪은 적이 있었던 터라....
더욱 마음이 무거웠다.

하지만 그렇다고....
지금의 이런 관계를 유지할 수는 없었다.
오랜만에 만났던....
하늘이에게도 미안한 일이고....
직장 내 상사와 이런 식으로 부적절한 관계로 얽히는 것 또한
목에 걸린 생선가시처럼 계속 내 마음을 건드렸다.

그리고....

대개 이런 관계는 그 끝이 별로 좋지 못했다.
짜릿한 시간을 가지면 가질수록....
그 시간이 길어지면 길어질수록....
나중에 치러야할 대가를 그만큼 커지고 쓰디쓴 결과로 이어졌다.
또한 종국에는 둘 다 회사를 그만두거나 최소한 한명은 쫓겨나듯 내몰리기 마련이었다.

이미....
사원들 사이 떠돌아다녔던 소문 중에서 비슷한 얘기들만 여럿 듣지 않았던가.

그 주인공으로 내 이름이 올라가는 것을 상상해보면...
역시 여기에서 그만두는 것이 맞았다.
어렵게 들어온 이 직장을 그만두고 싶은 생각은 전혀 없었다.
나름 대우도 좋고.....
급여도 좋고....
별다른 문제없으면 오랫동안 다닐 수 있는...
이런 일자리는 이제 구할 수 없을테니....

" 얘! 어머 멀 그리 멍하니 생각하고 있니? "

갑자기 들리는 목소리에 깜짝 놀라 고개를 돌리니
옆 부서 정미 언니가 내 옆에 서있었다.

열심히 도표를 보면서 타이핑 하는 손가락이
진작에 키보드 위에서 멈춰진 것도 모르고 생각에 빠져 있었던 모양이었다.

상상하고 있었던 내 생각이 그녀에게 읽힌 것처럼 볼을 붉히며 이내 어색한 미소를 답했다.

" 아.. 아무것도. 무슨 일이에요? "

" 아무것도 아니긴... 후후훗.... 하경이 너 완전 수상하다? 주말에 무슨 일 있었구나? 남친 하고 싸우기라도 한거야? "

" 싸...싸우긴여? 정말 아무 것도 아니에요. "

하지만 나를 보고 있는 정미 언니의 눈매가 가늘어지더니 영 풀린 생각을 하지 않았다.
도톰한 입술도 길어지더니 그 입 꼬리 또한 한쪽이 살짝 위로 올라갔다.

" 훗.... 말하기 싫으면 하지 않으면 되지. 멀 그렇게 호들갑이니? 점심시간이 됐는데도 그것도 모르고 자리에서 멍하니 있는데 무슨.... 쿡쿡.... 됐으니까 어서 일어나! 애들은 먼저 식당으로 내려갔어. 후훗...... "

순간 그녀의 말에 모니터 화면 아래를 바라보니 정말 시간이 그렇게 되어있었다.
고개를 들어 옆을 보니 이미 정우섭 과장을 비롯해서 다른 남자직원들도 모두 자리를 비우고 식사하러 가고 없었다.

민망함에 바로 자리에서 일어나서는 옷매무새를 고쳤다.
그 사이 정미 언니는 킥킥 거리며 엘리베이터를 향해 걸어가고 있었다.

**************

구내식당에서 간단히 식사를 마치고 우리는 회사 근처 공원으로 나와 있었다.
빌딩이 밀접한 가운데 이면 도로 하나만 건너면
자리잡고 있는 시민 공원은 이미 근처 회사원들이 하나둘 들어와서는 남은 점심시간의 여유를 누리고 있었다.

나....
정미 언니 그리고 소은이와 은주....
네 명은 함께 점심을 먹는 멤버였다.

사무실 근처 파티션이기도 했고 탕비실에서 서로 마주치는 사이였던 터라 친하게 지낼 수 밖에 없는 사이였다.
실제 업무도 서로 얽혀서 서로에게 상부상조하는 사이이기도 했고.
물론 모임의 주도는 안정미....
옆 부서 선배 맏언니가 맡고 있었다.

서로의 손에 시원한 음료 한잔 들고 공원에 있는 자리 하나를 골라서 앉아 얘기를 나누는 중이었다.
소나무들 아래 그늘 진 곳에서 살랑살랑 불어오는 바람과 함께
시원한 자연의 느낌을 만끽하는데 어느새 얘기가 이상한 곳으로 흘러가고 있었다.

" 근데 얘들아.... 장우섭 과장 말이야..... 우리 하경이를 은근히 좋아하는 거 같지 않니? "

헉!
순간 마시던 아이스커피가 목에 탁 걸리는 줄 알았다.
간신히 아무렇지 않게 삼키며 애써 표정관리는 하는데
그런 내 기색을 살피는 정미 언니의 눈동자에 웃음기가 가득했다.

" 에이... 장과장님이야.... 여직원들한테 다들 친절하잖아요! 너무 친절해서 부담인걸요? "

은주가 입술을 삐죽거리며 내게 도움의 동아줄을 내려주고 있었다.
그녀의 말에 까르르 웃으며 소은이가 맞장구를 쳐주었다.

" 맞아... 그 얼굴 어디 갈까..... 완전 바람둥이 같잖아? 그렇지? "

" 으응! 말할 때 살살 눈웃음치는 것 보면 정말 딱 바람둥이 같아! 호호호호!!!! "

무엇이 그리 좋은지 둘이서 시선까지 맞춰가면서 구슬 굴러가듯 웃고 있었다.
하지만 정미 언니의 입가에 여전히 의미심장한 미소가 머물렀다.

" 그러니까! 같은 부서 우리 하경이를 더 챙겨주는 거 아니겠어? 저번 전체 회식 때에도 자기 옆에 딱 앉히고는 알뜰살뜰하게 하경이 신경써주는 거 봐. 보는데 샘이 다 나더라. "

" 쿡쿡쿡.... 언니도 참.... 그게 그렇게 부러웠어여? "

소은이가 눈을 반짝이며 입술을 모았다.
금세라도 정미 언니의 옆구리를 콕콕 찔러댈 듯 어깨가 움찔거렸다.

나는 어쩔 줄 몰라 하며 급히 말을 받았다.

" 그거야... 같은 부서니까 그런 거죠.... 언니도 참.... 그리고 나... 남친도 있는 걸요? "

" 아! 맞다. 그러고 보니까 지난 주말 남친 만난다고 하지 않았어? 근데 그렇게 애지중지한 낭군님을 봤으면서 뭘 그렇게 생각에 빠져 있니? 오랜만에 상봉했는데.... 낭군님 반응이 영 별로였어? "

역시나 결국 궁금한 것을 참지 못하고 쿡 찔러오는 정미 언니의 말에 난 할 말을 잃고 말았다.
작은 한숨.

그 사이 은주와 소은이 정미 언니를 향해 입을 모으고 있었다.

" 응? 무슨 일인 데여? 하경 언니 무슨 일 있어요? "

" 정미 언니 멀 봤길래 그래요? 하경이가 어땠는데요???? "

두 명이 더 가세하게 되면서 절로 소란스러워졌다.
정미 언니는 피식피식 웃음까지 흘려가면서 나를 보고 있었다.

" 점심시간이 됐는지도 모르고 자리에 앉아서 완전.... 삼매경이 빠져 있잖니.... 내가 옆에 갔는데도 전혀 눈치도 못 채고.... 무슨 생각을 하는지 살짝 미간에 주름도 잡혀 있고 말이야....... 자자...어서 말해봐. 이 언니가 상담해 줄 테니! "

가느다란 눈매 사이 보이는 그녀의 눈동자에 반짝반짝 장난기가 가득 빛났다.







-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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