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88화 〉평창동 아르바이트를 시작하다
하지만 할아버지는 조국의 근대화에 기여하지 못했다.
사장님은 사위를 살려내고
바로 홧병으로 돌아가셨다.
할아버지는 술독에 빠졌다.
아들이 자라고 있었으나
할아버지는 신경쓰지 않았다.
모든 일을 귀찮아 했다.
그런 남편을 지켜보던 아내는 목숨을 끊었다.
엄마 없이
술독에 빠진 아버지같지 않은 아버지 손에서 큰 아이가
바로 내 아버지였다.
아버지 역시
할아버지의 유전자를 딱 빼닮아
내게 신경쓰지 않았다.
나는 거친 들판에서
방목되어 자랐다.
생각이 여기까지 미치자
나는 할아버지에게 따지고 싶어졌다.
"할아버지가 해준게 뭔데 왜 갑자기 내 인생에 끼어드는거에요?"
"뭐긴 그냥 네 할아버지이지"
"할아버지가 아버지로서 역할을 제대로 하셨으면, 할아버지가 말했던 어두운 가정환경이 제겐 없었을 거에요."
"네가 나에 대해 아는게 있니?"
"동네 사람들에게 들었어요. 할아버지가 쌀가게 망해먹은 거며, 사람 죽인 거며..."
"그건 그때마다 다 이유가 있어서야...자랑스러운 기억은 아니다만...너도 그런 비슷한 일을 겪을 수 있다. 조심하지 않으면 네가 감당하기 힘든 고난을 당하는거야. 나는 그러고 싶어서 사람을 죽였겠니?"
"변명하지 마세요. 전 할아버지 덕분에 형편없는 아버지 밑에서 암울한 날을 보냈어요."
"그런건 탓하지 마라...네 인생은 네가 개척해야지..."
"내가 개척할테니까 이젠 내 앞에 나타나서 이러쿵 저러쿵 이야기 하지 마시라고요!!!"
나는 아버지에 대해 잊었던 서운한 감정이 폭발하여
할아버지에게 소리를 질렀다.
원장실 문이 벌컥 열렸다.
동생간호사와 언니 간호사가 뛰어 들어왔다.
"괜찮으세요 원장님?"
나는 눈을 떴다.
온 몸이 땀으로 젖었다.
"괜찮아요...죄송합니다. 잠깐 졸았나봐요."
"네...알겠습니다."
간호사들이 문을 닫고 나갔다.
아무래도 기분이 이상했다.
불길한 얘감이 들었다.
새 원장에게 전화를 걸어
만남을 취소해야할까 생각했다.
전화기를 만지작거렸다.
그때 전화기가 울렸다.
새 원장이었다.
"형님..오늘 좀 더 일찍 가셔야 할 것같아요. 회장님 스케줄이 바뀌었다고 사모님이 일찍 오라시는데...한 네시에 출발할 수 있을까요?"
"......"
나는 고민 되었다.
우선 꿈자리가 사나워
그 사모님인지를 만나고 싶지 않았다.
게다가 진료시간을 지키는 것은
가정의학과 원장과 나의
기본적인 신뢰 문제였다.
나는 여자 원장님과의 믿음을 깨고 싶지 않았다.
새 원장은 재빠르게 내 속을 읽었다.
"형님 지금 휴가중이신 원장님 때문에 그러시죠? 괜찮아요 형님...지금 애기 낳느라 정신 없을 거고요...간호사들은 제가 책임질게요...절대 말 안할 거에요...막말로다가 그 원장이 알았다 쳐도...사람이 어떻게 한달 내내 계속 일할 수 있겠어요. 형님은 휴가도 없잖아요. 그런 불공정한 계약이 어디있어요. 형님 그러니까 불공정한 계약을 운영의 묘를 발휘해서 공정하게 만드는 거라 생각하세요. 혹시라도 그 여자 원장님이 물어보면 몸이 안 좋아서 한시간 일찍 퇴근했다라고 하면 되잖아요. 그거 한 시간때문에 야박하게 줄 돈 안 주고 그러진 않을 거에요. 형님 하루 겨우 한시간이에요. 너무 신경쓰지 마세요."
"운영의 묘..."
새 원장은 나이답지 않게 옛스러운 말을 써 가면 나를 설득했다.
나는 그 설득에 넘어갔다.
"그럼 형님 4시에 정확하게 병원 앞으로 갈게요. 준비하시고 내려오세요..."
전화를 끊고
환자들을 보다보니
금세 4시가 되었다.
"제가 오늘 몸이 안 좋아서 일찍 가봐야 할 거 같습니다."
나는 데스크에 있는 언니 간호사에게 말했다.
차마 그녀의 눈은 쳐다보지 못했다
"네 원장님 아까 악몽 꾸시고 식은땀 흘리느게 몸이 많이 안 좋으신거 같아요. 얼른 들어가 쉬세요. 저희들은 문 닫는 시간까지 있다가 갈게요."
새 원장 덕에 언니 간호사와의 관계가 부드러워져서 기뻤다.
그녀는 진심으로 나를 걱정하는 것 같았다.
나는 옷을 갈아입고
병원을 나와
밑으로 내려갔다.
빠빵~~
자동차 크랙션이 울렸다.
새 원장이
까만색 벤츠에 타고 있었다.
나는 조수석에 앉았다.
"형님 축하합니다. 제 배에 오른 첫번재 선수입니다. 제 배에 아주 그냥 제대로 타신겁니다. 자 그럼 신세계로 모험을 떠나보실까용~ 뾰로롱~~"
"......"
나는 팔려가는 새색시마냥
다소곳이 차에 앉아 있었다.
새 원장은 운전 하는 내내 조용했다.
나는 그가 무슨 말이라도 해 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네시 즈음의 평창동은 조용했다.
담장높은 동네에서는 무슨 일이 일어나도 모를 것 같았다.
새 원장이 빨간 벽돌집 앞에 차를 세웠다.
"올라가세요 형님...좋은 시간 되세요."
"......"
나는 무슨 말을 할 지 몰라
그냥 차에서 내렸다.
새 원장은 아무말 없이
차를 몰고 사라졌다.
나는 대문으로 올라갔다.
초인종을 누를지 말지
여러번 망설였다.
초인종을 눌렀다.
"네..."
"소개 받고 찾아왔습니다."
"이비인후과 선생님?"
교양있는 톤의 여자목소리가 들렸다.
"네 맞습니다."
"올라오세요."
문이 열렸다.
문 안쪽으로 들어가니
계단 옆으로 키 큰 나무가 늘어섰다.
계단을 올랐다.
넓은 잔디밭이 나왔다.
잔디가 긴장한 사람처럼
노랗게 잔뜩 웅크리고 있었다.
잔디밭 뒤로 넓은 수영장이 보였다.
경사진 파란 바닥엔 낙엽만 가득하고 물이 없었다.
주택은 현대식 감각으로 디자인한 삼층 빌딩이었다.
전면 통유리를 하고 있었다.
출입문 앞에 섰다.
출입문이 열렸다.
출입문 안에서 사모님이 나를 맞아 주었다.
"만나서 반가워요...윤석영 선생님?"
"아 네..초대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사모님은 삼십대 후반에서 사십대 초반정도로 보였다.
내 마음을 들뜨게 할 정도의 미인이었다.
어쩌면 한때 연예인이었는데 내가 기억을 못 할 수 도 있었다.
단발머리는 흔히 말하는 청담동 사모님 머리였고,
파란색 원피스는 실크 소재인지
움직일 때 마다 반짝 반짝 했다.
가슴 가까이 파인 원피스 위로
촌스럽지 않은 진주 목걸이가 걸려 있었다.
"이리 들어와 음료수 한잔 하세요."
그녀는 거실로 나를 이끌었다.
거실에는 원목으로 된 커다란 탁자가 놓여 있었다.
의자는 두손으로 들기 힘들 정도로 무거웠다.
나는 겨우 의자를 뒤로빼고 앉았다.
"이거 일하시는 아줌마가 만든 건데...아주 맛이 좋아요..."
그녀는 받침도 없이 컵 한잔을 탁자 위에 내려 놓았다.
나는 그녀가 시키는 대로 컵을 들이켰다.
시큼하고 쓴 맛이 밀려 왔다.
나는 얼굴이 일그러졌다.
사모님은 두손으로 얼굴을 가리고 웃었다.
"초면에 거짓말 해서 미안해요. 맛이 만만치 않죠? 그래도 몸에 좋대요...특히 남자한테 좋다네요.."
사모님은 내가 내려놓은 컵을 잡으러 내게 다가왔다.
사모님의 웃는 얼굴이 예뻤다.
사모님은 컵을 들고 한참을 걸어
씽크대에 컵을 내려 놓았다.
다시 내게 돌아와
자연스럽게
내 어깨 위에 손을 올렸다.
"어떤 음악 좋아해요?"
"전 다 듣습니다."
"노래도 잘 하신다면서요?"
"아주 조금 합니다..."
"노래 한번 해 봐요."
"사모님이 어떤 노래를 좋아하시는지..."
"사모님이라고 부르지 말고 누나라고 불러요...나중에 더 친해지면 내 이름 부르고."
내가 예습한 바에 따르면,
대기업 회장의 부인들은
대부분 대기업 가문의 딸들이다.
어릴적 부터 부족함 없이 자라서
참을성이 부족하고
타인에 대한 배려가 없다.
나는 작두를 타는 기분으로
그녀의 마음을 읽으려 노력했다.
누나로 부르란 말에
너무 무리수를 두지는 않기로 했다.
"어떤 노래 잘 하는데...."
"성악도 하고, 가요도 하고 그렇습니다."
"나 성악 좋아하는데 잘 하는 곡 뭐 있어요?"
나는 잠시 망설였다.
듣는 귀를 가진 사람에게
허접한 노래를 했다간 망신만 당한다.
교회 성가대 지휘자에게 개인 레슨을 받은 적 있는
남몰래 흘리는 눈물이 생각났다.
"우나 푸르티바 라그리마 하겠습니다."
"오~~ 나 그 노래 좋아해요...얘기가 재밌잖아요. 얼마나 아디나를 사랑했으면 군대에 자원입대를 하고 약까지 사먹고 이야기가 정말 낭만적이지 않아요? 나도 한때는 나 없으면 죽는다는 사람 많았는데....그럼 진지하게 진짜 네모리노가 되서 나를 아디나라고 생각하고 불러봐요...그리고 나 이거 반주 해 봤어요...내가 반주해 줄게 이리와요..."
나는 내가 선곡한 그 노래에 사모님이
이렇게 열렬히 반응할 지 예상도 못했다.
나는 사모님의 손에 이끌려
그랜드 피아노 옆에 섰다.
"잠깐만요...손좀 풀고요..."
사모님은 피아노 덮개를 열고 빨간색 커버를 치웠다.
그리고 피아노 의자를 꺼내 앉았다.
비장한 표정으로 손을 우드득 우드득 꺽더니
쇼팽의 프렐류드 24번을
정말 간지나게 치기 시작했다.
그 곡은
피아노좀 치는 남자들이
여자들을 꼬시기 위해 치는
대표곡중 하나였다.
여자가 그 어려운 곡을 손 푸는 용도로 친다는데
나는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사모님의 손가락들이 다족류의 발처럼 부드럽게 움직혔다.
건반을 포인트 있게 다루는게 프로 연주자 같았다.
그 짧은 순간에 사모님은 혼신의 힘을 다했다.
그건 단순한 손풀기가 아니었다.
사모님은 몸을 들썩들썩 거리며 이미 연주에 취해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