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92화 〉갑자기 바빠진 스케쥴
나 역시 환자에 대한 연민이나 기대가 없다.
기계적으로 정해진 수순에 따라
약처방을 하고
내가 빠져나갈 안전판을 설치하면 그게 끝이다.
나는 윤리적으로 뛰어난 의사가 되고 싶은 마음이 없다.
다른 수단으로 돈을 벌 수 있다면
의사란 직업은 굳이 하고 싶지 않은 일이다.
지지리 궁상인 환자들과
대화하기도 싫다.
차라리 인공지능이 나와
의사대신 환자들과 대화할 수 있다면
나는 그 인공지능 시스템을 구입할 것이다.
나는 뒷전에 물러나
인공지능의 처방을
검토나 하고
돈을 벌고싶다.
내가 환자 만나길 혐오한다고
내 직업윤리가 혐오받아야 한다고 생각하진 않는다.
요즘은
모든 직업군에서
직업윤리가 사라졌다.
편하게 돈만 잘 벌면
그게 최고의 직업이 된다.
돈 잘버는 똑똑한 인간들이
무지한 사람들을
속이고
그들을 파멸의 구렁텅이로 빠트릴 지라도
정부는 책임을 지지 않는다.
정치인들도 책임이 없다.
불쌍한 백성들은 각자 도생만이 살 길이다.
정부관료들이 정부의 자리를 차지하는 것은
그저 수익률 높은 직업으로서 다달이 월급을 받고
특권을 누리고
권력을 이용해 경제적 이득을 얻으려는 것 뿐.
그들은 자리를 차지하는데 전문가일뿐
사회를 발전시키는데는 무지하다.
그들이 학창시절 하던 버릇대로
외국의 사례를 카피 앤 페이스트해서
새로운 비전이랍시고 제시한다.
힘없는 백성들은 그들의 행태가 역겹지만,
딱히 그들을 견제 할 수 있는 방법이 없다.
헌법과 법률에 의해 그들의 자리는 보존된다.
그들을 견제하라고 뽑아준 국회의원도, 판사들도
다 그들의 동기동창 친구들이다.
그들의 카르텔은 무너지지 않는다.
정치인들도 비전을 제시하지 못한다.
그들은 비전할 제시할 능력 자체가 없다.
방송 카메라가 돌아가면 뛰어난 연기를 하는 배우일뿐.
대본대로 연기하는 그들은 창조적 사고를 할수 없다.
누군가 창조적 사고를 하면 그 아이디어를 도둑질 하거나
인기 끌만한 자리에 뛰어가 선점하고 앉아 있는데는 도사들이다.
그들도 그들이 무능하다는 사실을 안다.
하지만, 그들은 국회의원이라는 직업이 주는 꿀물을 잊을 수 없다.
온갖 정보를 먼저 가져갈 수 있고,
정부정책을 자기들에게 유리한 쪽으로 바꿀 수도 있다.
머리좋은 그들은
일반인들보다 몇배는 빠른 속도로 재산을 증식하고,
자기 패거리들에게 콩고물을 떨어뜨려준다.
우리는 이 모든 사실을 다 알면서
민주주의에 대한 미련을 못 버린다.
민주주의는 평등을 보장하는 제도가 아니다.
멋모르는 불쌍한 사람들이 피를 흘리며 불합리한 제도를 돌려 놓아도,
결국, 그 과실은 탐욕스러운 돼지들이
어떻게든 가져간다.
사람의 능력은 출발부터 불평등하다.
형식적 평등이니 실질적 평등이니
태생적인 불평등을 평등하게 만들 수 있는 것처럼
무지한 사람들을 미혹시키려 하지만,
그것은 불평등한 현실을 달콤하게 누리는 자들의
면죄부같은 것에 불과하다.
"절차대로 공평하게 했는데 내가 너보다 백배 부자네? 왜 너는 노력을 안 했니?"
사실 똑똑한 돼지들은 개개인의 능력을 무시한
평등 자체를 경멸한다.
어떻게든 자연이 부여한 자신들의 우월성에 기대어
대가를 받아야
그들은 그것이 정의라고 믿는다.
소위 좋은 대학이라고 일컬어지는 대학의 학생들이
게시판에 써 갈기는 글의 내용을 보면,
불평등을 즐기는 그들의 부모들 생각까지 미루어 짐작할 수 있다.
"내가 열심히 공부했는데, 왜 내가 그 회사에 취직이 안되고...수능점수도 나보다 낮고 노력도 안한 애들이 왜 그 회사의 정규직이야?"
그들이 말하는 평등은
오로지 수능점수와 시험점수이다.
시간을 얼마나 쏟아 부었나가 그나마 평등을 가늠하는 잣대이다.
하지만, 시험점수를 얻는 능력자체가 시작부터 불평등이다.
공부하는데 특기가 있는 사람들은 쉽게 점수를 얻고,
그렇지 못한 사람은 노력을 두배 세배 해도 점수를 얻을 수 없다.
하지만 기업에서의 업무 능력은
시험점수 얻는 능력과는
다른 영역의 능력을 요구한다.
그런 능력 역시
태어날 때 부터 각각 불평등하게 갖고 태어났다.
시험성적 잘 올리는 것이 모든 것인양
착각하고 있는 이들은
인재팀이 요구하는 능력개발은 하진 않고
자기가 성취하기 유리한 시험성적
심지어 수능성적을 언급하며
한심한 한탄을 하고 있다.
그동안 시험점수 얻기라는 불평등에 기대어
달콤한 과실을 맛보았으나
또 다른 불평등의 패러다임에는 적응하지 못해서
나오는 결과이다.
세상은 불평등해 왔고,
지금도 불평등하고,
앞으로도 불평등 할 것이다.
이것은 절대로 안 뒤집혀진다.
수천년의 역사속에
기득권을 얻지 못한 자들이
저항하고 세상을 뒤집고
피흘리고 전쟁하고
노력했지만...
시간이 지나면
불평등의 질서가 다시 자리 잡는다.
나는 이런 깨달음에 이르러
마음 속이 혼란으로 가득했다.
불평등 구조 속에
내 위치는 어디인가.
어떻게 하면
편안하게 살면서
자본주의의 과실을
즐길 수 있을까.
이런 망상을 하는 사이
간호사들이 출근 했다.
원장실 문이 열리고
언니간호사와
동생간호사가
얼굴을 들이밀고 인사했다.
"안녕하세요 원장님."
"네 어서오세요."
간호사들은 원장실 문을 닫고 나갔다.
나는 자리에서 일어나 스트레칭을 하고
진료실로 자리를 옮겼다.
평소대로
똑같은 말을 반복하며
환자들게게 처방전을 내렸다.
오전동안 40명 정도의 환자가 왔다.
대부분 감기 환자였다.
특별히 헐리가 안 좋은 할머니는
2차 진료기관으로 진료의뢰를 했다.
오랜만에 많은 환자들과 이야기를 하니
말을 아끼려고 노력했음에도
목이 아팠다.
점심시간엔 돈까스 곱배기를 배달 시켰다.
일찌감치 식사를 끝내고
의자에 깊이 앉았다.
졸음이 몰려왔다.
점심시간이 거의 끝날 때쯤
전화벨이 울렸다.
지은이였다.
"자기야 오랜만이야...잘 지냈어?"
"응 잘 지냈지..."
"별일 없고?"
"응 별일 없어"
"팔은 괜찮아?"
"응 괜찮아. 지금은 깁스 풀었어."
"잘 됐네. 그냥 어떻게 지내나 궁금해서 전화 해 봤어...근데 혹시 낼 모레 주일예배에 우리 교회 올래?"
"왜 무슨 일 있어?"
"응. 소개 시켜 주고 싶은 애가 있어서...네 얘길 하니까 널 보고 싶대서."
"어떤 사람인데?"
"응. 초등학교 선생님인데 엄청 이쁘다...키도 크고 멋쟁이야."
"응 그런데 왜 날 보고 싶대?'
"뭐 그런건 만나서 알아보고."
"알았어."
"그래 그럼 주일예배에 오는 걸로 알게."
"응"
나는 지은과의 전화를 끊고
예전만큼 흥분되지 않았다.
혹시
그녀와 섹스를 하더라도
내가 밥값 내고 술값내고
방값까지 낼 게 뻔하다.
이쁘고 교양까지 있는
사모님에게
이천만원이라는 거금을 받고 나서는
내 몸값이 한시간에 이천만원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내가 왜
그 여교사에게 돈을 지불하며
만남을 한단 말인가.
나는 피곤함을
달래기 위해
의자 깊숙하게 파고 들었다.
다시 잠이 오지는 않았다.
일어나 스트레칭을 했다.
오후진료가 시작되어
또 다시 고난의 행군을 시작했다.
똑같은 단어, 똑같은 표정,
웃음기 없는 평탄한 어조의
대화를 이어갔다.
50명이 넘는 환자를 대하고
나는 지쳐버렸다.
원장실 의자 깊숙히 앉아
아무것도 하지 않았다.
전화가 왔다.
미술관 선생님이었다.
"원장님 잘 지내셨어요?"
"네 잘 지냈죠."
"어쩜 그동안 연락도 없으셨어요."
"좀 바빴습니다."
"우리 작업한 거 인제 완성되었어요."
"아 잘 되었네요."
"내일 작품전시 시작 할까 하는데...원장님이 주인공이시니까 자리해 주시면 좋겠어요."
"내일 몇시인가요?"
"오후 두시에 개막식을 할 까 하는데..."
"그때까지 진료를 해야 해서 시간에 맞춰 갈 수 없을 것 같아요."
"좀 일찍 오시면 안 돼시죠...원장님?"
"맡은 일이 있어 죄송합니다. 제가 부지런히 가도 4시나 되어야 할 것 같아요....그것도 아직은 확답들릴 수는 없고요."
"원장님 안 계시면 서운한데...알겠어요 원장님."
미술관 선생님의 전화를 끝냈을때
5시 30분이 되었다.
나는 용수철 튀어나가듯이
지긋지긋한 병원에서 도망쳤다.
차를 몰아 집으로 돌아왔다.
침대에 피곤한 몸을 눕혔다.
전화기가 울렸다.
새 원장이었다.
"형님 오늘 컨디션 어떠세요?"
"뭐 그냥 보통인데. 왜?"
"음...우선 뉴스 하나는 내일 제가 개원식 하려고요...조촐하게 떡도 맞추고 파티 하려고요...당연히 형님 오실 거죠?"
"가야지. 몇신데?"
"형님 병원 마치는 시간이 2시니까 그때 시작할 게요."
"그래 좀 일찍 병원 마무리 하고 갈게."
"그리고 이건 꼭 안 하셔도 되긴 하는데....지금 한 타임 하실래요?"
"한 타임이라니?"
"아..오늘은 30대 재벌은 아닌데...그래도 브이아이피 명단에 있는 고객이에요...갑자기 급하게 요청이 와서....거절해도 되긴 하는데...형님 특별히 하실 일 없으시면 한번 가 보실래요?"
"장소가 어디야?"
"똑같아요 평창동."
"그래 가지 뭐."
"그럼...지금 어디 계세요?"
"집에 누워 있어..."
"제가 집에 모시러 갈테니까...샤워도 하고 꽃단장 하고 계세요."
"꽃단장? 하하 알았어. 그런데 내가 저녁을 안 먹었는데 어쩌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