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67화 〉새로운 삶
"이제 전 어떻게 되는거죠? 자신이 없네요."
"뭘 자신이 없어 한번 죽었다 살아난 샘 치고 덤으로 잘 살 면 되지."
"뭘 하면서 살까요?"
"네가 하고 싶은 걸 하면 돼. 설마 네가 이종격투기 선수를 할 것도 아니고, 심장에 무리 안 가게 살살 걷고 살살 살아가면 된다."
"이제 여자들은 안되겠죠?"
"여자라.....진짜 너를 이해할 수 있는 여자라면 널 지켜주지 않을까?"
"그게 누굴까요?"
"그걸 내가 어떻게 아니?"
"할아버진 이 세계 사람보다 더 아는게 많다고 했잖아요."
"그렇다고 내가 모든 것을 다 아는 것은 아니다."
"나는 삶의 목표가 뚜렷했어요. 더 많은 여자들과 잠을 자는 것."
"그렇게 좋은 목표는 아니구나."
"할아버지가 그렇게 말 해도 어쩔수 없어요. 그게 분명 내 확고한 목표였으니까요. 이제 끝을 내야 한다는게 허무하네요."
"좋은 목표는 아니지만....그렇다고 한번 마음 먹은 것을 쉽게 바꿀 필요는 있겠니?"
"이제부터 저는 환자잖아요."
"이전부터 너는 환자였어"
"그럼 이전보다 건강해지는 건가요?"
"건강은 모르겠고, 아마 수술 하고 나서는 죽을 확률이 떨어질 거야. 의사인 네가 더 잘 알거다."
"무슨 말인지 알겠어요."
할아버지는 사라졌다.
나는 차가운 우주속으로 빨려들어갔다.
블랙홀인지 모를 암흑속을 지나
무한함 속으로 이동했다.
내 심장의 박동이 멈췄다.
심장의 피가 모두 빠져나갔다.
내 가슴과 배가 열리고
장기들이 밖으로 빠져 나갔다.
무중력속에서 심장과 폐가 둥둥 떠 다녔다.
커다란 간이 하늘로 솟아 올랐다.
나는 내 장기들을 붙잡을 수 없었다.
기다란 소장과 대장이 자꾸 솟아 올랐다.
장간막이 찢어지며 소장이 마치 순대처럼 길게 늘어났다.
내가 할 수 있는게 없었다.
내 생명이 붙어 있는것 자체가 기적이었다.
우주 속에 떠 다니는 내 몸뚱아리는
저점 얼어갔다.
극한의 추위가 내 피부를 얼어 터지게 했다.
극한의 추위가 느껴졌다.
절대온도 -273도 보다 더 낮을 것 같은 추위.
이론적으로 온도가 그보다 낮을 수 없지만
그 이론이 틀릴 수도 있겠다는 생각을 했다.
내 몸의 모든 것이 얼어붙고
내 눈마저 얼어붙었다.
내가 할 수 있는게 없었다.
나는 동면을 하는 건지
동사를 하는 건지
알 수 없는
상태로
갔다.
길고 긴 시간이 지났다.
"야 정신차려봐...야 일어나 이제..."
나는 눈을 뜨기 어려웠다.
너무 추웠다.
이가 부딪히며 얼굴이 찌푸려졌다.
"야 정신차려...수술은 잘 되었다."
"고마워."
나는 떨어지지 않는 입을 겨우 움직여
대답을 했다.
"인제 내 할 일은 다 했으니까. 지금 부터 네 몫이다."
"알았어."
"아 그리고, 너 레이어스 하고 울나에 핀 박혀 있는거 그거 마취된 김에 제거 했다."
"고마워."
"몸조리 잘 하고 이제 난 가볼게."
"그래 고마워"
장교수가 방을 나갔다.
방 안에는 나 혼자 있었다.
친구놈들이 나를 위해 마련해 준 건지
특별한 개인실이었다.
장교수가 나가고
방안에는 고요함만
가득했다.
나는 몸을 움직여 보려 했지만
뜻대로 되지 않았다.
몸 전체가 침대에 묶여 있는 느낌이 들었다.
수술뒤에 그럴 수도 있지...
나는 긍정의 마음을 먹기로 했다.
시간이 그렇게 흘러갔다.
몸은 매일 매일 회복되어 갔다.
이젠 무료함이 병실을 채웠다.
그렇게 하루 하루 시간이 흘러갔다.
가끔식 동기들이 올라와
옛 추억을 떠올리게 해 줬다.
새 원장은 가끔씩 내게 전화를 걸어 안부를 물었다.
지은도 한번 면회를 왔다.
하지만 병실 내에서 지은과 섹스를 하진 못했다.
그렇게 2주가 지나고 나는 병원을 나왔다.
몸이 완전하지는 않았지만
병원이 갑갑해서
정신적으로 마이너스라는 생각을 했다.
집으로 돌아온 나는
여전히 할 일이 없었다.
하루종일 집중에서 하는 일이
세끼 밥먹는일
약 챙겨 먹는일
그게 다였다.
약이 많았다.
진통제, 항생제, 새로 먹기 시작한 와파린, 아스피린
이 많은 화학물질들의 언젠가 내 간과 내 신장에 문제를 일으킬 것은
분명했다.
그래도 약을 먹으면서 하루 하루 연명하는 것이
바로 죽는 것 보단 낫다는 생각을 했다.
점심을 먹고 저녁 먹기 전
운동을 했다.
운동이라고 해봐야
걷는 것이었다.
수술하기 전에
많이 걱정이 되었지만
걷는 운동 정도는
부담스럽지 않았다.
오히려 이 전보다
가슴에 압박감이 적었다.
마치 오랫동안 엔진오일을 안 갈고
운전하다가
새로 엔진오일을 갈고 운전하는 기분이었다.
살짝만 악셀을 밟아도
씽씽 엔진 알피엠이 올라갔다.
앞으로 인생은 무얼 위해 살아야 하는가
생각이 번득 떠오르지 않았다.
공원을 산책하다보니
생각보다 많은 사람들이
건강을 위해
몸들을 움직이고 있었다.
나도 땀이 날 정도로
걸었다.
나는 몸을 새로 얻었다 생각하고
운동하면서
잘 챙겨먹고
잠을 충분히 잤다.
2주가 지나자
몸은 아주 많이 좋아졌다.
가슴에 생긴 수술자국은 완전히 아물었다.
가끔씩 유령통이 있었지만
크게 문제될 정도는 아니었다.
수술후 한달간
거의 혼자 지내다보니
나를 찾는 사람도 없어졌다.
한번은 사모님 부름에
용기내어 방문했지만
사모님은 내 가슴의 흉터에
기겁했다.
사람이 그렇게 쉽게 변한다는 것을
다시 한번 깨달았다.
사모님은 냉랭한 표정을 지으며
내게 나가라고 말 했다.
이해 한다.
나는 사모님들에게
단지 비싼 고깃덩어리같은 존재였다.
사모님들은 비싼 고깃덩어리를 소비했고
고깃덩어리에 흠결이 생겼을땐
더 이상 소비하지 않았다.
사모님들은 합리적인 선택을 할 뿐이었다.
나는 그 업계에 발을 담그자 마자
발을 뺄 수 밖에 없었다.
새 원장은 꾸준히
능수 능란하게
그 업계에서
주가를 올리고 있는 듯 했다.
그는 항상
여유있고
재미있고
괘활했다.
나는 그 업계에서 일자리를 잃고
다시 하기 싫은 본업으로 돌아왔다.
강남에 있는 이비인후과에 원장으로 취직했다.
성형외과 피부과 치과 원장들이 공동으로 설립한
메디컬 빌딩에 이비인후과는 마이너 과목으로
일종의 깍두기 신세였다.
깍두기여도 괜찮았다.
메디컬 빌딩 안에는
탄력있고 키큰 여자들이
많이 드나들었다.
그런 여자들을 보는 것 만으로
내게 큰 힘이 되었다.
감히 그런 여자들을
어떻게 해보고 싶은 생각은 없었다.
그저 보는 것 만으로도 즐거웠다.
다행히 이비인후과의 환자들은
많지 않았다.
나는 출근하자 마자
퇴근을 꿈꿨다.
이비인후과은 내게 감옥이나 마찬가지였다.
9시부터 6시까지 시간이 정해진
시한부 감옥
퇴근하고 나는 곧장 집으로 왔다.
집에 와서 간단히 밥을 먹고
도산공원을 걷거나
한강을 따라 걷고 싶을 때까지 걸었다.
그렇게 일상을 즐기며
8개월이 흘렀다.
겨울이 지나고 봄과 여름이 지나
다시 가을이 왔다.
떨어지는 낙엽에
버버리 코트를 입은 여자들의
하이힐이 내 시선을 끌었다.
그때 내 숨어 있던 욕망이 다시 살아났다.
하이힐 위로 보이는 스타킹이
나의 용암같은 정렬을 되 살렸다.
생각이 바뀌었다.
조심 조심 평화롭게 살기를 바랐지만
나는 원래 글러먹은 놈인 것 같았다.
어차피 글러먹은 인생
다시 예전처럼 즐겁게 살고 싶은 생각이 들었다.
내가 살고 있는 강남의 오피스텔은
젊은 여자들에게 접근하기 좋은 전진기지였다.
죽기 전에 딱 천명의 여자를 공격하리라
나는 일생일대의 목표를 세웠다.
오늘부터 일일
나는 새로운 다이어리를 샀다.
몸에 새로운 기운이 솟는 것 같았다.
수술 이후에 무기력하던
내 삶이 후회되었다.
할아버지도 이해 하실 것이다.
내가 즐겁게 사는 걸 더 기뻐 할 것이다.
그래 결심했어.
나는 내 방을 나와
스타벅스에 가서 제일 비싼 커피를 주문했다.
자바칩 푸라푸치노
그리고 죠스 떡볶이로 가서
치즈 떡볶이 1인분을 포장했다.
그리고
다이어리를 샀던 편의점에 갔다.
내 마음에 쏙 드는
여자아이가 거기 있었다.
나는 편의점에 들어가자 마자
떡볶이와 커피를
계산대에 내려 놓았다.
"이 안에 독 같은 건 없습니다. 오직 제 정성만 있습니다. 맛있게 드세요."
그리고 돌아 나왔다
엄청 챙피했다.
그래도 재미 있었다.
안되면 말고
잘되면 좋고
나는 내 방으로 돌아 왔다.
돌아와서
기억나는 장면을 되새겨 봤다.
그 아이는 눈이 동그래졌다.
나를 계속 쳐다봤지만
나는 그 아이의 눈을 외면했다.
"저기요..."
그 아이는 무언가 말 하려 했지만
나는 바로 돌아 나왔다.
나는 당분가 그녀와 말을 섞지 않을 것이다.
자기를 관심 있어 하는 남자가
스타일 괜찮은 놈이라는 걸
각인 시켜주고
방심하고 있는 틈을 노려
한방에 실신시키려는 전략을 구사할 것이다.
떡볶이는 미약하나
그 끝맛에는 아쉬움이 가득하리라
자바칩 프라프치노는 소박하나
그 단맛은 오랫동안 남으리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