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89화 〉다시 그녀
내 전화기는 다행히 무음으로 설정되어 있었다.
후보3녀는 통화 시도에 실패하고
악에 받쳐 문자를 남겼다.
[인생 그렇게 사는 거 아니에요. 경찰서에서 봐요.]
무슨 뚱딴지인가
경찰서라니...
지가 스스로
스모키 화장을 하고
요상한 차마를 입고
호텔방까지 들어와
자기를 가져달라더니
경찰서라니...
호텔 카메라도 있고
문자 주고 받은 기록도 있고
나는 쫄 이유가 하나도 없었다.
아니 하나는 있었다.
호텔 체크인이 내 이름으로 되지 않은 거.
경찰이 꼬치꼬치 캐 물으면
쪽팔리게 초대남 활동 사실까지 드러날 것이다.
초대남에 대한 것만 아니라면
내가 쫄 필요가 없었다.
드러난다 하더라도
내가 불법적으로 한 일은 아니므로
창피하다 뿐이지
두려워 할 필요는 없었다.
물론 수영장이며
브런치며
같이하지 못한것은
약간 미안했다.
나는 대충 씻고
설렁탕집을 향해
집을 나섰다.
길거리엔
상큼한 여자들이 넘쳐났다.
어디서들 강남으로 몰려오는지
계속 눈이가는 여자들이
꼬리에 꼬리를 물었다.
이게 강남에 거주 하는 남자의
커다란 즐거움 아니겠는가.
나는 그 즐거움을 만끽하며
설렁탕집에 들어갔다.
점심시간 설렁탕집은 북적북적
정신이 없었다.
종업원의 지친 손놀림에서
제대로 대접받기란 불가능했다.
그래도 어쩌랴
제일 무난한 한끼 식사로
이만한 거도 없으니
첫끼니로
피자를 먹거나
씨리얼을 우걱거린다는건
최악의 선택이다.
그것들음 잘 못 먹으면
플라스틱을 먹는 기분이 들기 때문이다.
나는 무난한 첫끼니를 먹고
입안에 박하사탕을 문채
식당을 나왔다.
일요일 오후
특별한 계획 없이
강남역 주변을 배회 했다.
넘쳐나는 이쁜이들이 내 눈을 즐겁게 했다.
이럴줄 알았으면
좀 차려입고 나올 걸 잘 못했다.
길거리 헌팅이라도 해보게 말이다.
한때 픽업아티스트라는
우스꽝스러운 말이 있었다.
직업을 가리키는 말도 아니고
취미생활을 가리키는 말이라고 하기엔
누구나 할 수 있는 일은 아닌거 같고...
아무튼 제 정신을 가진 사람이
할 만한 일은 아닌것 같았다.
남자들의 주체할 수 없는 정욕을
약점 잡아
돈을 받고
기술을 전수 한다는 곳도 있었다.
여자들의 정신을 혼란하게 만들면서
무의식적으로 라뽀를 형성한 다음
훅 치고 들어가
여자를 따먹는다는게
그 이론의 대강이었다.
그들이 서식하며
그들이 시험장으로 쓰는 곳이
강남역 근처였다.
강남역 근처를 걷다보면
말끔하게 차려 입은 남자들이
곳곳에서
얌전히 앉아있는 여자들에게 다가가
다양한 아양을 떨며
전화번호를 따기 위해 노력하는 게 보였다.
픽업아티스트 수업이거나
자습시간이리라.
아니면 독학으로
수업받는자들을 능가하는
능력자들의 향연일수도.
그들의 눈에는 욕정이 이글 이글 불탔다.
어떻게 하면
자지를 보지에 넣어볼까 하는 생각뿐
여자들이 생각하는
로맨틱한 개념따윈 그들의
계획엔 없었다.
오직 섹스를 위한
인스턴트 이벤트가 몇번 준비될뿐.
몇번 따먹고 나면
여자들의 연락에 시큰둥함을 보여
스스로 떨어져 나가게 하는
프로세스가 이어질 뿐.
그런 허무한 거짓에 속아
다리를 벌려주는 여자들도 참
센스 없다고 해야하나...
아님
그녀들도
삶이 외롭고 허무해
잠깐만이라도
인스턴트일지언정
그 남자들의 아양을 즐겼을 수도 있다.
나는 편의점에 들어가
스프라이트 한병을 사서
벌컥벌컥 들이켰다.
시원한 트림을 한번하고 나니
나는 벌써 내 집앞에 서 있었다.
집으로 올라가
침대에 누워
창밖에 떠가는 구름을 봤다.
허무한 시간이 흘러갔다.
폰을 만지작만지작하다가
돌싱조건녀에게
전화를 했다.
"여보세요?"
"안녕하세요. 잘 주무셨어요?"
"네."
"오늘 그쪽이 자꾸 생각나네요...어쩌죠?"
"뭘 어째요. 생각나면 봐야죠.."
"제가 그쪽으로 갈게요. 저녁이라도 드실래요?"
"네, 좋아요."
"그럼 지금 출발할게요. 어디로 갈까요?"
"제 집 찾아오실 수 있겠어요?"
"아...네..."
"그럼 이리로 오세요."
"네 알겠습니다."
나는 밝은 색깔 옷들을 찾아 갈아입었다.
이십대처럼 보이면 좋겠는데
거울 속 내 모습은 그렇지 않았다.
그중 밝은 자켓을 골라 몸에 대어 보았다.
하얀 면티를 안에 받쳐입고
블랙진을 입었다.
대충 촌스럽게 보였지만
지저분 해 보이진 않았다.
이미 잡아 놓은 물고기를 먹는데
패션에 신경쓸 것까진 없지 않은가.
내가 골라입은 옷은
잡힌 물고기에 대한
예의로 충분했다.
나는 차를 몰아 그녀의 집에 도착했다.
현관 문을 열자
신혼부부 집들이라도 하는 듯
음식 냄새가 진하게 풍겼다.
아무 것도 준비하지 못한
두 손이 부끄러웠다.
"잠시만 나갔다 올게요."
나는 현관 문 밖으로 다시 나갔다.
아파트 단지에서 가까운 수퍼에 들러
제일 비싸보이는 샴페인과
제일 비싸보이는 쵸콜릿 박스를 샀다.
두가지로는 허전한 느낌이 들었다.
비싸보이는 와인 한병을 더 들었다.
수퍼 입구에 포장된 장미다발들이 놓여 있었다.
한송이 들어
다른 물건들과 함께 계산했다.
그제서야
두 손이 부끄럽지 않았다.
나는 다시
현관문을
부끄럽지 않게 들어갔다.
"뭐에요... 어디가셨나 했더니..."
"뭘 살지 몰라 고민했습니다."
"그냥 들어오셔도 괜찮은데..."
"여기 장미 한송이만 샀습니다."
"빨간 장미 예쁘네요."
그녀는 장미를 받아
코를 킁킁거렸다.
"향기가 좋아요."
코를 찡그리고
과장되게 킁킁거리는 모습이
귀여웠다.
"원래 이런 꽃 선물 잘 안하시죠?"
"어떻게 아셨어요?"
"그냥 그런게 느껴져요. 그래서 더 고마워요."
"그런 것도 들통이 나는군요."
"하하...제가 무슨 탐정이에요? 얼른 식탁에 앉으세요."
"네.."
나는 그녀가 차려 놓은 식탁 앞에서
할 말을 잃었다.
"이걸 다 하신거에요?"
"약소한데..많이 드세요.."
약소하지 않은 식탁이었다.
나는 뚝배기에서 보글보글 끓고 있는
청국장에 눈물이 날 뻔 했다.
한 숫가락 담가
국물 맛을 봤다.
기가막히다는 표현도 모자를 정도.
"청국장도 직접 하신거에요?"
"제가 직접 콩으로 만든 거에요...괜찮으세요?"
"이거 만드실때 냄새좀 피웠겠는데요."
"하하 테러수준이었어요. 윗집에서 컴플레인할까봐 얼마나 조마조마했던지."
"엄청 깊은 맛이 나요. 고향의맛 다시다같은 거 쓰셨어요?"
"전 조미료 안써요. 다시마하고 소고기만 있어도 그 맛이 나요."
"너무 멋집니다."
"처음부터 너무 과장되게 칭찬하는 거 아니에요?"
"과장 아닙니다."
나는 그 맛있는 청국장 국물을 연거푸 퍼 먹었다.
쌀밥의 단맛이 더 달게 느껴졌다.
청국장 옆에는
손 많이가는 잡채가
참기름과 깨를 뒤집어쓰고 있었다.
초록의 시금치와
빨강과 노랑의 피망이
기름진 당면 사이에 언뜻 언뜻 보였다.
노르끼리한 계란 지단과 어묵도 보였고
주황의 당근
까무스름한 버섯도 보였다.
나는 젓가락으로 듬뿍 당면 한 무더기를
들어올려 입 안으로 밀어 넣었다.
입안에 가득 퍼지는 향기
씹을 때 마다 뿌듯이 감기는 찰진 당면
분명 예사 솜씨가 아니었다.
"정말 맛있어요. 어떻게 된 거에요?"
"뭐가요?"
"직업이 요리사에요?"
"아뇨. 취미로 이것 저것 하다보니 실력이 느네요? 맛이 괜찮아요?"
"어이구야...괜찮은 정도가 아닙니다. 일반인의 도를 넘기셨는데요."
"하하하... 과찬에 황송하옵니다."
나는 넋을 놓고 줄곳 젓가락질을 이어갔다.
희안하게 일반 잡채가 주는 퍽퍽한 느낌도 없었다.
간장의 짠맛도 없고 오히려 상큼한 맛이 났다.
잡채에 레몬을 넣었나?
나는 잡채 한 그릇을 게눈 감추듯이 먹어버렸다.
"어이구 잡채 더 드릴까요?"
"네 너무 맛있네요. 좀 더 주세요."
"그럼 더 가져올게요. 이거 대하 몇개 구웠는데 드시고 계세요."
그녀는 군대에서 휴가나온 아들 대하듯
나를 살뜰이 챙겼다.
그녀가 소금에 구운 대하는
빨갛게 잘 익었다.
나는 손으로 새우의 머리를 잘라내고
천천히 껍질을 벗겨냈다.
껍질 벗기는게 꽤 쾌감있는 작업이었다.
나는 그녀가 올 때까지
접시에 있던 네마리를 모두 벗겨
접시 한 쪽에 내려 놓았다.
"왜 드시지 않고...."
그녀가 내 앞에 잡채 접시를 내려 놓났다.
"같이 먹고 싶어서요."
"참 로맨틱 하기도 하셔요."
"앉아서 같이 드세요."
"네."
그녀는 의자에 앉아
내가 얌전히 내려 놓은 새우를 집어
입 안에 넣고 오물거리기 시작했다.
나도 새우를 들어
입안에 넣었다.
새우는 언제 먹어도 그 감칠 맛이
나를 홀린다.
남은 두개의 새우를 각자들고
새우 건배를 했다.
그리고 각자 한입에 꿀꺽하고
서로 웃었다.
웃는 모습이 더 예쁜 그녀
내 신부였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