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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장성그룹은 이번에 신규 이동통신사업에 진출할 것임을 선언합니다.”
홍라경 여사의 마지막 핵폭탄이었다.
연초에 대통령의 신년사에서 이동통신사업자를 늘리겠다는 말이 있기는 했지만, 기존에는 대기업, 특히 장성그룹과 현재그룹의 진출은 극도로 막고 있었던 사업이었다.
그런데 안 될 줄을 알면서도 진출하겠다고 발표를 하다니 대기업 회장들 중 알만한 사람들은 홍라경 여사가 너무 의욕만 앞선다고 피식 웃어버렸다.
“제 말이 무리라고 생각되시는 분들도 계실 겁니다. 하지만 제가 방법이 없다면 이 자리에서 말씀드리겠습니까? 전 반드시 반드시 된다고 확신하고 있습니다. 구체적인 사항은 곧 다시 발표하는 자리를 만들도록 하겠습니다.”
홍라경 여사의 입가에 진한 미소가 맺혀 있었다.
사람들은 그런 홍라경 여사의 자신감 넘치는 모습에 감탄을 터트렸고, 이 모든 연설문을 작성해 준 성진은 그런 홍라경 여사의 모습이 사랑스러울 뿐이었다.
그 이후로 장성그룹이 앞으로 무상급식사업에 힘을 쏟겠다는 둥 여러 가지 이야기들이 발표되었고, 당당하고 자신감 있게 발표하는 홍라경 여사의 모습은 꽤 인상 깊게 사람들에게 각인될 수 있었다.
이어서 홍라경 여사는 장소진을 단상 앞으로 불러서 모두에게 인사를 시켰고, 장소진의 앳되고 빛이 나는 아름다움에 사람들, 특히 젊은 남자들은 열화와 같은 환호가 터져 나왔다.
모든 식순이 끝나고 다시 파티가 시작되었다.
귀빈석 테이블 돌아다니며 인사를 하던 홍라경 여사와 장소진은 다시 어머니에게 와서 살갑게 아양을 떨며 다른 귀부인들에게 끌고 가 버렸고, 성진도 대기업 회장들과 모여서 이야기를 나누게 되었다.
이미 국내 정보에 빠삭한 회장들이라 HK그룹의 실질적인 회장이 성진인 것을 다들 알고 있었던 것이다.
하지만 성진과 어머니가 그렇게 즐겁게, 바쁘게 사람들을 만나고 있을 때, 김소영은 오직 성진만 바라보며 마음고생을 하고 있었다.
어떻게든 다시 가서 오해를 풀고 싶고, 성진이 자신을 바라보면서 웃어 주기를 바랬지만, 김소영 또한 사교계에서 신부감으로 세 손가락 안에 드는 여자다 보니 주변의 남자들이 김소영을 가만히 놔주지를 않고 있었다.
성진은 아까 대화가 신경이 쓰여 몇 번 김소영을 쳐다보았지만, 사람들에게 둘러싸여 바쁜 김소영의 모습을 보고는 결국 관심을 돌려버리고 말았다.
자신의 여인인 홍라경 여사가 회장의 취임하는 날이고, 장소진이 사교계에 등장하는 날인데 여기서 다른 여자랑 연애질이나 하고 있을 수는 없었기 때문이다.
한참 그렇게 서로 엇갈린 가운데 성진은 생각보다 바쁘게 사람들과 대화를 나누었고, 간신히 틈이 나 파티장 구석으로 가서 숨을 돌리게 되었다.
“하아.. 사람 상대하는 것은 역시 힘드네. 아고.. 죽겠다.”
“저기.. 성진씨?”
성진이 음료수를 단번에 마시며 목을 축이고 있는데 갑자기 가느다란 목소리가 성진을 불렀다.
어찌나 목소리가 작은지 시끄러운 파티장 안에서 자칫하면 못 듣고 넘어갈 뻔했을 정도였다.
성진이 잔을 내리고 고개를 돌리다 뒤에 서 있는 여자를 보고 눈을 동그랗게 떴다.
그리고 이어지는 기쁨.
“어? 미연씨. 미연씨 맞죠?”
“네. 헤헤.”
성진의 눈앞에 무릎까지 오는 화사한 하늘색 드레스를 입은 최미연이 생글생글 웃으며 서 있었다.
이 얼마 만이란 말인가?
산부인과에서 말없이 사라진 이후 연락이 되지 않았었고, 나이트클럽에서도 자신을 무시하고 다른 남자와 나가버렸던 최미연.
그런 최미연과의 만남은 성진에게 있어서 매번 가슴이 아팠던 일이었다.
하지만 그렇게 가슴이 아프면서도 이상하게 성진은 최미연이 많이 생각났었다.
처음으로 갖고 싶다는 간절한 생각이 들었던 최미연, 그런 가슴 아픈 그리움은 성진에게 특별한 여인으로 느껴지게 만들었다.
나이트클럽에서 너무 변해버린 최미연의 모습을 보고 난 이후 성진은 최미연을 찾아보려고 했었다.
하지만 대통령과 미국 순방 동행, 장건호 회장 사건 등 성진은 정말 정신없는 연말을 보내면서 최미연을 찾을 수가 없었다.
그런데 지금 그 최미연이 자신의 눈앞에 웃고 있는 것이었다.
그것도 나이트클럽의 그 퇴폐적인 모습이 아닌 처음 만났을 때 그 순수한 모습으로 말이다.
“미연씨, 그동안 어떻게 지냈어요? 정말 보고 싶었어요.”
성진은 덜컥 최미연의 손을 잡았다.
마음 같아서는 격하게 끌어안고 키스를 해 주고 싶었지만, 주변에 사람이 너무 많아 그럴 수가 없었다.
“저도요. 헤헤..”
최미연은 여전히 작은 목소리로 대답을 하고는 수줍게 웃었다.
“우리 이러지 말고, 여기 너무 시끄러우니까 바람 쐬러 밖으로 나가요.”
성진은 흥분해서 말을 하고는 최미연의 손을 잡고 밖으로 나갔다.
그런데 그런 두 사람의 모습을 바라보고 화를 내고 있는 사람이 있었다.
그 사람은 두 사람이 나가는 모습을 보고는 주머니에서 휴대폰을 꺼내 어딘가로 전화를 걸었다.
“나다. 지금 당장 병호보고 실라호텔로 뛰어오라고 그래. 당장. 알았어? 에잉..”
그 사람은 다름 아닌 럭키진성 그룹의 회장 고봉수였다.
한창 미래의 사돈 될 최미연의 아버지인 검찰총장 최재성과 대화를 나누고 있던 고봉수는 최미연이 성진과 웃으며 대화를 하더니 손을 잡고 나가는 모습을 보고 배알이 뒤틀렸던 것이다.
감히 자신의 권력 기반이 될 검찰총장의 딸을 듣도 보도 못한 놈이 건드린단 말인가?
고봉수는 검찰총장한테 양해를 구하고 입구 한쪽에 대기하고 있던 자신의 비서실장에게 다가갔다.
그곳은 고봉수의 비서실장만이 아니라 여타 회장들의 비서들이 모여 있는 자리였다.
다른 비서진들과 대화를 하면서도 자신의 회장인 고봉수의 일거수일투족을 바라보고 있던 비서실장은 회장이 다가오자 허겁지겁 뛰어서 회장에게 다가갔다.
“방금 최미연과 같이 나간 놈이 누군지 알아봐. 그리고 허접한 놈이면 적절히 손 좀 봐 놔. 무슨 말인지 알지?”
“네. 알겠습니다. 회장님.”
비서실장은 후다닥 밖으로 뛰어나가면서 어딘가로 전화를 걸었다.
성진은 최미연의 손을 잡고 뛰다시피 하며 호텔 밖으로 나왔다.
이미 날은 저물어서 하늘은 어두컴컴했다.
아직 2월 초라 그런지 날씨는 쌀쌀했지만, 드디어 최미연을 만났다는 생각에 성진은 심장이 두근거리며 차가운 공기가 상쾌하게 느껴졌다.
“흐읍.. 하아.. 시원하다. 복잡하고 시끄러운 데 있다가 나와서 그런지 기분 좋네요.”
최미연도 기분이 상쾌한지 성진을 따라 크게 호흡을 하고는 성진을 바라보다가 싱긋 웃었다.
“우리 미연씨 어떻게 지냈어요? 네? 제가 얼마나 보고싶었는 줄 아세요?”
“저.. 저는 잘 지냈어요. 헤헤..”
“흐음.. 혹시 지금도 밤에 변신하고 나이트클럽 다니고 그러는 거 아니죠?”
“네? 아.. 아니에요. 그때 이후로 다시는 가지 않아요.”
“엥? 왜요? 그때 미연씨 모습이 충격적이긴 했지만, 나쁘지 않았는데.. 무대 위를 휩쓸면서 현란하게 춤추는 모습.. 캬하.. 죽였는데..”
“아악.. 말하지 말아요. 그때만 생각하면 창피해 죽겠어요.”
성진은 최미연을 놀리듯 웃으며 최미연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아.. 맞다. 미연씨 그때 나 버려두고 어떤 남자 따라나갔잖아요. 혹시..”
“네? 아.. 아니에요. 절대 아니에요. 절대 아무 일도 없었어요?”
“응? 누가 뭐라고 했어요? 혹시 아는 사람이냐고 물어보려고 했는데.. 크크크..”
“아!!! 이.. 못 됐어요.”
성진은 지금 기분이 너무 좋았다.
마치 잃어버렸던 소중한 물건을 우연히 청소하다가 발견한 그런 기분이었다.
“미연씨. 우리 좀 걸을까요?”
“네.”
“자.. 가요. 여기..”
성진이 최미연에게 손을 내밀었다.
최미연이 성진의 손과 눈을 번갈아 바라보더니 활짝 웃으며 성진의 손을 잡았다.
“어? 미연씨 지금 내 손 잡은 거예요? 이거 이제 잡으면 절대 못 도망갈 텐데.. 흐흐..”
성진의 농담에 최미연은 계속 흐뭇한 미소만 짓고 있었다.
이 기분이었다.
최미연은 그동안 성진을 그리워하며 성진을 만나 이런 행복한 기분을 너무나 느끼고 싶었었다.
자신의 처음을 가져간 사람, 처음으로 여자의 기쁨을 알게 해준 사람, 이상하게 같이 있으면 즐겁고, 행복한 사람..
최미연은 그 나이트클럽 이후 거의 상사병을 앓듯이 성진을 그리워했었다.
성진을 잊어보려고 그렇게 밤에 미친 듯이 나이트클럽을 다녔었지만, 결국 한 번 마주친 것만으로 마음이 무너져 내렸었다.
집으로 돌아간 최미연은 성진에 대한 그리움을 도저히 참을 수 없어서 먼저 연락이라도 하기 위해 성진에 대해 알아보기 시작했다.
그리고 알게 된 성진의 정체..
스무살 젊은 나이에 프랜차이즈 대기업을 일구고 키토산, 물티슈 등 획기적인 신제품을 개발해 낸 엄청난 남자였던 것이다.
그 이후로 최미연은 성진에게 연락하는 것을 포기하고 오직 공부에 매진했다.
사법고시든 아니면 국제변호사든 뭐가 됐든 성공하고 싶었다.
꼭 성공해서 당당히 성진의 앞에 나타나고 싶었다.
그러다 보니 이제 고병호는 눈에도 들어오지 않았다.
고병호가 뭔 짓을 하고 다니든 신경도 쓰고 싶지 않았다.
아니 정확히 말하면 신경이 쓰이지 않았다.
한순간에 고병호는 최미연에게 잊혀진 존재가 되고 말았던 것이다.
그리고 오늘, 오랜만에 아버지를 따라서 장성그룹 신임 회장 취임식에 참석했다.
거기서 그리도 그리웠던 성진을 보게 되었다.
한걸음에 달려가 그의 가슴에 안기고 싶었지만, 오늘 본 성진은 불과 몇 달 사이에 더욱더 대단해져 있었다.
검찰총장인 자신의 아버지조차 중앙이 아닌 그 옆 테이블에 자리를 배정받았는데, 성진은 제일 중앙의 테이블에 당당히 자리를 잡고 앉아 있었던 것이다.
그렇게 중앙에서 스포트라이트를 받고 있는 성진이 최미연은 눈이 부셨다.
그때부터 최미연은 성진에게서 단 한 순간도 눈을 뗄 수 없었다.
그러다 성진이 잠깐 구석으로 빠지자 최미연은 바로 그에게 달려갔다.
그리고 이렇게 그와 손을 잡고 날아갈 것만 같은 기분을 느끼고 있는 것이었다.
두 사람은 천천히 어두운 호텔 주변을 걸었다.
호텔 정면을 벗어나 건물 옆으로 돌아가자 언덕을 올라갈 수 있는 오솔길이 보였다.
두 사람은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그곳으로 발걸음을 움직였다.
어느새 성진의 손을 잡고 있던 최미연은 성진의 손을 잡은 채 다른 손으로 성진의 팔을 감싸 가슴에 안고 있었다.
누가 보면 오래된 연인이라고 할 정도로 자연스러운 모습이었다.
“미연씨. 진짜 보고 싶었어요.”
아까처럼 농담 반 진담 반이 아닌 정말 진지한 어투로 성진이 말을 꺼냈다.
“네. 저도요.”
“진짜요? 진짜 저 보고 싶었어요?”
“네. 진짜 보고 싶었어요.”
“아니. 그럼 연락이라도 하던가 하지. 연락처도 안 가르쳐주고 그렇게 잠수를 타버리면 어쩌란 말입니까?”
성진의 목소리가 살짝 올라갔다.
“미안해요. 성진씨. 그때는 솔직히 제 감정을 몰랐었어요. 하지만 지금은 확실히 알아요. 저 성진씨 많이 좋아해요. 헤헤..”
“어? 갑자기 그렇게 훅 치고 들어오면.. 너무 좋아요. 미연씨 나도 좋아해요.”
성진은 너무 기쁜 기분에 최미연을 꽉 보듬어 안았다.
여리여리한 최미연의 몸이 부서질 듯 느껴졌다.
성진의 격한 반응에 기분이 좋은 최미연도 성진의 가슴에 얼굴을 묻으며 꼭 끌어안았다.
성진은 솔직히 최미연이 거부할 줄 알았는데 이렇게 적극적으로 반응을 해 오자 팔에 힘을 풀고 고개를 숙여 최미연의 얼굴을 내려다보았다.
그런 성진의 시선을 느낀 건지 최미연도 고개를 들어 성진을 올려다보았다.
누가 먼저랄 것도 없었다.
두 사람의 눈이 마주친 순간 기다렸다는 듯이 두 사람은 격정적으로 입술을 겹쳤다.
입술을 빨던 성진이 최미연의 입안으로 혀를 집어넣었다.
최미연은 그런 성진의 혀를 허겁지겁 빨아들이며 자신의 혀를 마주쳐갔다.
아직 어색하기만 한 최미연의 키스였다.
성진은 나이트클럽에서 그렇고 놀고, 남자를 따라가기까지 했던 최미연이 이미 닳고 닳았을 것이라고 생각했었다.
하지만 키스하는 것을 보니 남자 경험이 거의 없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그리고 그것이 성진을 더욱 기쁘게 했고, 이 사랑스러운 여인을 정말 가지고 싶다는 흥분을 다시 일게 만들었다.
한참 동안 정신없이 키스를 하던 성진은 빠르게 주변을 돌아보았다.
두 사람은 지금 나무 계단으로 만들어진 언덕을 오르는 산책로 중간지점에 서 있었는데, 주변에 나무가 우거져 더욱 어두운 곳이었다.
조금 위쪽을 바라보니 계단에서 안쪽으로 쏙 들어간 곳에 벤치가 놓여있는 것이 보였다.
“미연씨 우리 저쪽으로 가요.”
성진은 최미연을 이끌고 으슥한 벤치로 가서 최미연을 번쩍 들어 자신의 무릎에 앉혔다.
“어머.. 성진씨. 이.. 이러시면..”
최미연이 부끄럽다는 듯이 말을 했지만, 성진의 무릎에서 일어날 생각은 하지 않았다.
얼마나 기다려오던 일이던가?
최미연은 오히려 성진의 목에 팔을 두르며 어깨에 머리를 기대었다.
========== 작품 후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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