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다시 그 여름으로 3부-11화 (341/38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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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봉수 회장이 책상을 주먹으로 내리치며 일갈을 터트렸다.

“하아.. 그 새끼. 요즘 이쪽에서 입방아에 좀 오르더니 뵈는 게 없나? 감히 내 것을 건드려?

자네는 병호 그놈 지원해서 무슨 수를 써서든 최미연 마음 돌려놓도록 해. 그리고 물티슈 바로 출시해. 광고도 대대적으로 때리고.. 최대한 이성진 그놈한테 타격을 줘서 최미연 아니 최재성의 마음을 우리 쪽으로 돌려야 해. 알았어?”

“네. 알겠습니다. 회장님.”

“흠.. 물티슈만으로는 약한데.. 혹시 다른 건 없나?”

“진성화학에서 키토산 제품 출시하려다가 그것도 판매가처분으로 시판 못한 것이 있습니다. 그 키토산 제품도 이성진의 미래건강식품이 특허를 가지고 있습니다.”

“그래? 그럼 그것도 출시해. 이성진의 사업에 타격을 줄 수 있는 것은 다 출시해.”

“네.. 알겠습니다. 저.. 그런데..”

뭔가 불편한 얘기를 꺼내려는 지 비서실장이 주춤거리며 고봉수 회장의 눈치를 살폈다.

“무슨 일인데 그래?”

“저.. 소문에.. 이번에 장성그룹 장건호 회장을 몰아낸 게 이성진이라는 소문이 돌고 있습니다. 그래서 혹시.. 문제 되지 않을까 조심스럽습니다.”

고봉수 회장은 깜짝 놀랐다.

재계에서는 이번에 장성그룹 사건, 일명 ‘홍여사의 난’이라고 부르는 남편을 몰아내고 아내가 회장에 오른 사건을 두고 엄청나게 말이 많았다.

‘반정’도 아니고 ‘난’이라고 부르는 것을 보니 아직도 여자가 회장이 되는 것을 인정하지 못하고 있는 모양이다.

혹시 장건호가 다시 회장으로 돌아올 것을 기대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뭐.. 어제 홍라경 여사의 취임사 발표를 보고 그럴 만했다고 어느 정도 납득이 되기는 했지만, 정말 있을 수 없는 일이 일어나긴 한 것 같다.

그런데 그 배후에 이성진이 있다니..

그렇다면 그건 이성진의 배후인 청와대가 개입했을 수도 있다는 얘기와 다를 바가 없었다.

작년 금융실명제의 여파로 대통령에게 얼마나 시달렸던가?

있는 돈 없는 돈 비자금 싹 긁어서 대통령에게 바쳐야만 했었다.

고봉수 회장은 어쩌면 대통령에게 돈을 적게 바쳐서 장건호 회장이 밀려난 것일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고봉수 회장은 등줄기에 소름이 쫙 끼쳤다.

만약 대통령이 자신을 죽이려고 덤빈다고 생각하자 탈탈 털리고 검찰에 출두하고 결국 감옥에 가는 상상이 되었던 것이다.

“뭐? 그.. 그거 확실한 거야?”

“확.. 확실하지는 않습니다. 그냥 그런 소문이 돌고 있을 뿐입니다. 그리고 예전에 병호 도련님이 관리하던 강남 조직을 없애 버린 일에도 이성진이라는 이름이 자꾸 거론되고 있습니다.”

“뭐라고? 아니 도대체 그 새끼 뭐하는 새끼야? 여기저기 안 끼는 데가 없어? 자네.. 지금 말하는 거 확실해?”

“네. 이건 병호 도련님한테 직접 확인한 겁니다. 병호 도련님이 병원에 입원했던 것이 이성진 때문이라고 했습니다.”

고봉수 회장이 조금 심각하게 생각에 잠겼다.

솔직히 강남의 조직(이제는 이름조차도 생각나지 않고, 그따위 것에는 신경도 쓰이지 않는)은 당시에 조금 아쉽긴 했다.

뒤로 더러운 일에 좀 써먹어 보려고 고병호 몰래 자금까지 지원했는데 하루 아침에 박살이 나 버렸으니 말이다.

수습하려고 했으면 수습할 수 있었고, 그런 흔한 조직이야 얼마든지 새로 만들 수 있었다.

하지만 꽤 규모가 되는 조직이라고 들었는데 그런 조직이 하루 만에 사라졌으니 그 당시에는 조금 놀라기는 했었다.

고봉수 회장은 괜히 마른 침을 삼키며 헛기침을 남발했다.

“크흠.. 그렇다고 이대로 자존심 상한 채 물러날 수는 없잖아. 일단.. 좀 전 일은 그대로 진행해. 문제 생기면 알지?”

대답을 하며 고개를 숙이는 비서실장은 속으로 쌍욕을 내뱉었다.

지금 고봉수 회장이 말하는 것은 중소기업의 기술을 훔칠 때 많이 써먹는 수법으로 중소기업이 피땀 흘려 연구개발해 제품을 출시하면 그 제품과 비슷하게 만들어서 대기업 이름 달고 시장에 출시, 어마어마한 광고로 밀어붙여 매출에서 죽여버리는 것이었다.

그리고 중소기업이 특허다 뭐다 해서 소송을 걸면 법무팀이 나서서 소송을 질질 끌고, 판사 등을 매수해 뻔한 재판 결과를 오히려 뒤집어 버리는 것이었다.

중소기업은 이미 매출 감소로 피해를 보고, 소송 기간이 길어지면서 소송비용으로 피해를 보고, 나중에 패소하면서 결국 회사가 부도나게 만드는 것이다.

그러면 그때 가서 헐값에 기업을 인수해 버리고 시장을 독점해 버리는 짓을 하는 것이었다.

HK그룹이 중소기업같이 작은 회사가 아니니 이번에는 그 정도까지는 아니더라도 분명 럭키진성에서 물티슈를 출시해 대대적으로 광고를 때리면 좋은세상의 매출에 막대한 타격이 올 것은 뻔했다.

그리고 그쪽에서 소송을 걸어도 시간만 질질 끌면, 나중에 재판에 지더라도 배상금 몇 푼 내면 그만이었다.

아주 더럽고 치사한 방법이었다.

그런데 굳이 고봉수 회장이 직접 언급까지 하는 것을 보니 본인도 겁이 나긴 하는 모양이다.

“크흠.. 오늘부터 내 주변에 경호 인력 더 확충하고, 자네는 병호 일이나 목숨 걸어. 최미연 마음을 무조건 돌려야 해. 알았어?”

“네. 알겠습니다.”

고봉수 회장은 비서실장을 내 보고 자신의 의자에 깊숙이 몸을 기대었다.

하지만 왠지 등줄기가 스산해지는 것은 혼자만의 착각인 것일까?

성진의 설 명절이 지나고 꼭 데이트하자고 했던 최미연과의 약속은 지킬 수가 없었다.

명절이 시작하는 수요일.

성진의 집은 이번 명절에도 시끌벅적했다.

특히 이번 명절은 회사가 HK그룹으로 개편되고 처음 맞는 명절이라 어찌나 인사오는 사람이 많은지 예전처럼 성진의 여자들만 모여서 지낼 수가 없었다.

그나마 다행인 점은 이제 성진의 여인들이 음식을 직접하지는 않는다는 점이었다.

명절 전부터 각층에 일하는 일꾼들이 모여서 음식장만을 했고, 어머니는 감독만 하면 되었고, 나이가 있는 여자들은 인사 온 손님들을 맞이했다.

그렇게 바쁘고, 정신없이 명절을 보내고 있는데 갑자기 영희 누나가 다급하게 다가오더니 성진을 불렀다.

“성진아. 회사에서 전화 왔어. 전화 좀 받아봐.”

“응? 좋은세상? 명절에 쉬는 거 아니었어?”

“쉬기는 뭘 쉬냐? 이번 명절이 5일나 돼서 3일씩 돌아가면서 쉬고 공장 그대로 가동 중이야. 지난번 미국 수출 물량 급하게 맞추느라 국내 물량 스톱시켜놨더니 지금 그 물량 맞추느라 고생이지. 지금 마음 같아서는 24시간 공장 돌리고 싶은데 그러면 너한테 혼날까 봐 못하고 있구만..”

출시된 지 이제 2년이 지난 물티슈는 말 그대로 대박 중의 대박 상품이었다.

삶의 편리함이란 한 번 맛보면 절대 뒤로 후퇴할 수 없는 법이다.

걸레대신 물티슈를 사용하고, 식당에서 행주대신 물티슈를 사용했다.

물티슈가 있는데 누가 힘들게 손으로 빨고, 삶고, 말려야 하는 것들을 사용하겠는가?

언제든지 가방에 넣고 다니면서 지저분한 것을 닦고, 손을 닦을 수 있는데 여자들, 아이 엄마들이라면 누가 사용하지 않겠는가?

이제 물티슈는 여자들에게는 필수품이요, 남자들에게도 가장 편리한 물건이 되어 있었다.

만드는 방법도 간단하고, 원가도 적게 드니 다른 회사들, 특히 대기업들 조차도 군침을 흘리며 출시하고 싶은 제품이었다.

하지만 이미 성진이 이런 것들을 노리고 아주 꼼꼼하게 특허작업을 해 놓은 상태고 최소 독점기간이도 아직 3년이나 남아 있어서 다른 기업들은 그냥 바라만 보고 있는 중이었다.

그러니 성진의 좋은세상은 성남에 크게 공장을 확대했음에도 불구하고 명절에도 쉬지 못하고 전 기계를 풀로 돌리면서 물티슈를 생산해야만 할 정도 바쁜 상황이었다.

“그래? 그건 그렇고 갑자기 무슨 일이야?”

“응. 미국에서 연락이 왔데. 급하니까 빨리 연락 좀 달라고..”

“엥? 미국이면 월마트?”

“그런가 봐. 직원이 영어가 짧아서 제대로 통화를 못한 것 같아. 그러니까 얼른 통화 좀 해 봐.”

손님들을 접대하고 있던 성진은 어머니와 손님들에게 양해를 구하고 방으로 들어가 좋은세상으로 전화를 걸었다.

[네. 회장님. 제가 미국 담장자 번호 받아놨습니다. 그리고 최대한 빠르게 연락한다고 말해 놨습니다.]

좋은세상 직원의 목소리는 흥분 반, 죄송함 반이었다.

미국에서 급하게 연락이 왔다면 좋은 일일 가능성이 컸기 때문이고, 대신 제대로 통화를 못해 정확한 내용을 전달하지 못한 것이 죄송했던 것이다.

“영희 누나. 누나 영어 공부 많이 했지?”

“응. 호호호.. 걱정 마. 내가 학원까지 다니면서 공부했잖아. 내 자랑 같지만, 나 외국인들과 영어로 대화도 할 수 있어. 에헴..”

“그래. 크크크.. 그럼 가자.”

“엥? 사람들 저렇게 많이 와 있는데 어딜 가?”

“어디긴 어디야? 일하러 가야지.”

“명절 끝나고 통화하는 거 아니었어?”

“명절은 우리만 명절이지 미국은 명절이 아니네요. 얼른 따라 와.”

그렇게 성진은 사람들에게 양해를 구하고 영희 누나를 앞세우고 회사로 갔다.

영희 누나의 영어 실력은 생각보다 괜찮았다.

하지만 딱 거기까지, 전문적으로 거래를 할 정도는 아니었다.

그래도 상대방이 급하다 보니 성진이 옆에서 도와주고 해서 어찌어찌 통화를 마칠 수가 있었다.

“성.. 성진아. 지.. 지금 이게 사실이야?”

“당연하지. 왜 방금 본인이 직접 통화해 놓고 안 믿어져?”

“응.. 아무리 생각해도 우리 사랑하는 서방님은 정말 대단한 거 같아. 사랑해. 정말 사랑해. 어디서 이런 보물덩어리가 나타났을까?”

영희 누나는 격하게 성진의 목을 끌어안고 마구 키스를 해댔다.

“뭐.. 뭐야. 갑자기? 크크크...”

미국에서 온 소식은 정말 대박 소식이었다.

성진은11월에 대통령 따라서 미국 순방 가서 일단 시험삼아 팔아본다고 LA지역 상인들과 월마트 서부지역 담당자와 적은 물량만을 계약하고 돌아왔었다.

그리고 한 달 후 미국에 물건이 풀렸고, 겨우 2달도 안 된 지금 그 물량이 전부 소진되어버린 것이다.

게다가 선진국답게 물티슈의 편리함을 금방 알아본 소비자들이 물티슈 내놓으라고 계속 회사로 전화가 오니 월마트 측에서 물티슈의 잠재력을 알아보고는 자신들이 독점 수입, 공급처가 되어서 미국 전역으로 확대 판매하겠다고 이렇게 연락이 온 것이었다.

당연히 2000년대 중반이나 돼서야 판매되는 물건을 10년이나 앞서서 만들어냈으니 당연한 결과였다.

성진은 명절이 끝나고 바로 미국으로 가겠다는 약속을 할 수밖에 없었다.

“누나, 아무래도 엄청 바빠지겠다. 직원들한테 전부 전화 돌려. 명절이라도 출근할 수 있는 사람 있는지 알아봐.”

“응. 알았어.”

영희 누나는 바로 밖으로 나가서 제일 높은 사람에게 말을 전했고, 성진도 그 사이 비서에게 전화를 걸어 월요일에 바로 출발할 수 있도록 비행기를 예약하도록 했다.

흥분으로 얼굴이 빨갛게 상기된 영희 누나가 다시 사무실로 들어왔고, 비서와 통화를 하고 있는 성진의 눈치를 보며 수상한 태도를 보이기 시작했다.

“뭐야? 누나.. 나한테 뭐 할 말 있어?”

“저기.. 서방. 니이임~~”

“헐.. 누나 말꼬리를 다 늘리고.. 평소에 하시던 대로 하시죠? 왜 안 하던 짓을 하고 그럽니까? 크크..”

“아잉.. 자기이~ 나도 자기 따라서 이번에 미국 가면 안 돼?”

역시 목적이 그것이었나?

“크크크.. 누나.. 그렇게 애교 부리니까 예쁘긴 한데, 내 대답은 뭘 거 같아?”

“히잉.. 안 되겠지? 나도 미국 가보고 싶은데..”

“누나 그럼 좋은세상 사장 자리 내놓을래? 그러면 내가 미국 데려가 줄게..”

영희 누나의 이마에 골이 생기며 갑자기 심각하게 고민하기 시작했다.

“헐.. 누나 지금 고민하는 거야? 진짜 사장 그만두려고?”

“음.. 잠깐만. 나 심각해. 어차피 여기 사장 그만둬도 우리 서방님께서 나 먹여 살리실 거고.. 미국에도 가고 싶고.. 하아.. 그렇다고 회사 일 안 할 수도 없고.. 진짜 고민된다.”

“이 누나가 진짜.. 고민은 뭐가 고민이야? 지금 효선이 출산도 얼마 안 남아서 일 할 사람 없는 거 뻔히 알면서.. 진짜 이럴 거야?”

“아잉.. 자기.. 나도 아는데.. 미국에 진짜 가보고 싶다고..”

“그래.. 알았어. 이번에 바쁜 일 끝나면 여름 방학쯤 같이 가자. 됐지? 그러니까 누나 이번에 개학하기 전까지 빡시게 일 좀 하자.

만약 이번에 미국하고 계약하게 되면 진짜 타이트하게 공장 돌아가야 할 거야. 어쩌면 진짜 누나 말 대로 24시간 공장 돌려야 할 수도 있어.

이럴 때 누나가 제대로 계획 세우지 않고, 일정관리 안 되면 죽도 밥도 안 될 수 있으니까 누나가 진짜 잘 해 줘야 해. 알지?”

“칫.. 나도 알아. 그냥 해본 소린데 자기 너무해. 여자 마음도 몰라주고..”

영희 누나가 입술을 불룩 내밀며 고개를 휙 돌렸다.

대학교를 다니며 어린 애들하고 놀아서 그런가 어째 갈수록 더 천진난만해지고, 애교가 많아지는 영희 누나였다.

========== 작품 후기 ==========

추천, 코멘트, 쿠폰 주셔서 너무 감사합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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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야행 // 철야행님 오랜만에 댓글 너무 감사합니다. ^^

다크젤리님 보고 싶어요. ㅠ.ㅠ

황혼의노년 // 앗.. 오타 지적 감사합니다. 수정했습니다. ^^

야지롭 // 흐음.. 김소영은 어떻게 될까요? 힌트 살짝.. 미국입니다.

더 이상은 안 알려드림.. ㅎ

다시, 그 여름으로... 400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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