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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음날, 또다시 성진과 일행은 월마트 측과 협상을 시작했다.
정현숙은 통역을 하면서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 알게 되었고, 성진이 미국에 공장까지 세우려고 한다는 것을 알고 놀라워했다.
월마트 측과 다 같이 점심을 먹고, 공장부지를 돌아보았다.
땅의 크기와 입지 등 대체적으로 성진의 마음에 들었다.
월마트 측이 보여준 땅의 시세가 있었지만, 성진은 자체적으로 시세를 알아보기로 하고 최종 결정은 다음날 하기로 하고 헤어졌다.
땅의 시세를 정확히 알아야 땅 가격을 자산으로 잡고, 성진이 투입할 자금 규모와 비교해서 지분을 나눌 수 있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 일은 그나마 미국에서 오래 산 정현숙이 맡게 되었다.
성진과 일행은 호텔로 돌아와 오늘 조건을 가지고 다시 회의를 벌였고, 정현숙은 땅 시세를 알아보러 돌아다니게 되었다.
저녁에 모인 자리에서 정현숙은 자신이 알아 온 땅 시세를 전해주었다.
월마트 측이 조금 비싸게 책정한 경향이 있었지만, 대체적으로 만족할 만한 수준이었다.
다음날, 성진은 미국 공장에 50억을 투자하기로 결정했다.
지분은 성진 대 월마트가 51 대 49로 가져가기로 했고, 특이하게도 미국 지사 사장을 성진이 뽑기로 했다.
월마트 측이 그 부분은 강하게 반발을 했지만, 성진은 미국 지사장으로 정현숙을 앉히기로 밀어붙였고, 월마트 측에서 부사장을 추천하기로 했다.
월마트 측은 그저 통역 일을 하는 여자로 알고 있던 정현숙이 사실은 UCLA 경영학 박사라는 말을 듣고는 깜짝 놀라며 성진의 요구를 바로 수용했다.
정현숙은 오늘 벌어진 일에 대해 정신이 하나도 없었다.
회사를 운영해 본 적도 없는 자신에게 느닷없이 좋은세상 미국 지사장이라니, 전혀 현실감 있게 다가오지 않았던 것이다.
“현숙씨. 제가 무슨 말 하는지 이제 대충 감이 오세요?”
계약을 마치고 호텔로 돌아온 성진은 정현숙을 옆에 앉혀 놓고 빙글빙글 웃으며 말을 했다.
“도대체 뭐가 뭔지 아직도 꿈만 같아요. 저에게 갑자기 이런 믿기지 않을 일들이 생기다니.. 성진씨는.. 정말 대단하신 것 같아요.”
“하하.. 아직 제대로 된 일은 시작도 안 했는데 무슨 그런 말을.. 크크..”
성진이 갑자기 음흉하게 웃자 정현숙이 의아한 얼굴로 바라보았다.
“이제 계약도 체결됐으니 본격적으로 당신을 그 변태 남편한테서 뺏어올 겁니다.”
“네? 그.. 그게 무슨..”
“내 말 잘 들어봐요. 그리고 무조건 내 말만 믿고 그대로 해야 돼요. 알았죠?”
그리고 성진이 자신이 꾸미고 있는 일에 대해 설명을 시작했다.
이야기가 진행될수록 정현숙의 얼굴이 근심스러워 졌다가, 경악으로 물들다, 결국 혀를 내두르며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하아.. 정말 그렇게까지 해야 해요?”
“그럼요. 저도 현숙씨 착한 마음은 이해를 하지만, 저는 절대로 제 여자를 때린 그 남자를 용서할 수 없어요. 마음 같아서는 확 죽여버리고 싶지만, 그건 불가능하니까 이렇게 하는 거예요. 현숙씨. 내 말대로 할 거죠? 절대 나만 믿고 따라와요. 당신 뱃속에 있는 우리 아이를 위해서.. 알겠어요?”
정현숙이 아이를 위해서라는 말을 듣자 눈에 서서히 독기가 어리기 시작했다.
그리고 한 편으로는 재밌겠다는 생각도 들었다.
정현숙은 성진을 보며 피식 웃어버리고는 알겠다고 고개를 끄덕였다.
성진과 계획을 세운 정현숙은 그날 늦게 집으로 돌아갔다.
집에는 정현숙이 그렇게 도망치듯 떠나버리고 난 후, 남편인 김성일이 머물고 있었다.
“여.. 여보. 내가 미안해. 정말 잘못했어. 어디 갔다 오는 거야?”
자신을 버리고 집을 나가버릴 때는 언제고, 또 그렇게 자신을 때리고 겁박할 때는 언제고, 정현숙이 고작 이틀 집을 나가버리자 이렇게 금세 태도가 바뀌다니, 정현숙은 김성일의 모습에 치가 떨렸다.
그리고 반드시 이 남자랑 헤어져야겠다고 확신을 하게 되었다.
“저기 여보.. 할 말이 있어요.”
정현숙이 또 김성일이 어떻게 변할 지 몰라 눈치를 보며 조심스럽게 말을 꺼냈다.
“응? 무슨 말?”
무슨 이중인격자도 아니고 김성일은 입가에 미소까지 띠며 그렇게 친절할 수가 없었다.
그도 그럴 것이 이상하게 오늘따라 김성일의 눈에 정현숙이 무척이나 아름다워 보였기 때문이다.
분명 새로 머리도 하고, 옷도 명품으로 바뀌어 있었는데도 김성일은 그런 부분은 알아차리지 못했다.
그만큼 아내에게 무관심하고, 온전히 다른 생각만 하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제가 월마트에서 통역 일했던 거 기억나죠?”
“으.. 응. 그.. 그랬지.”
역시 정현숙이 뭐하고 다녔는지 전혀 모르고 있었던 얼굴이다.
“제가 이번에도 그 일을 또 했어요. 그러면서 아주 큰 일을 알게 됐어요. 아니 글쎄 한국의 HK그룹의 좋은세상과 월마트가 손을 잡고 미국에 물티슈 공장을 크게 세운다지 뭐예요.”
김성일의 눈이 순간 반짝이기 시작했다.
“그.. 그래서?”
“그래서 제가 그 HK그룹 회장을 단도직입적으로 찾아갔어요.”
“뭐? 그.. 그러면 며칠 동안 그.. 남.. 자랑 있다가 온 거야?”
‘그 남자’라고 말을 하는 김성일의 얼굴이 무참히 일그러졌다.
그런데 목소리는 예전처럼 그렇게 화가 나 있지는 않았다.
정현숙은 그런 김성일의 반응을 보며 어이가 없었고, 왠지 소름이 끼치는 것만 같았다.
“뭐.. 아니지. 지금 그게 중요한 거예요?”
정현숙이 화가 나려는 마음을 참고 퉁명스럽게 말을 했다.
“크흠.. 뭐.. 암튼 그래서 어떻게 됐어?”
“제가 그 공장 사장으로 당신을 추천했어요.”
“뭐? 진.. 진짜?”
김성일의 몸이 튀어 오를 듯 벌떡 상체를 일으켜 세웠다.
그리고 뭔가 잔뜩 기대하기 시작한 얼굴..
“네. 그랬더니 회장님이 내일 얼굴 보자고 하는 데.. 당신은 어때요?”
“가. 반드시 가야지. 나 잘할 자신 있어. 반드시 성공할 자신 있다고.. 나 UCLA 경영학 박사야. 그까짓 회사 경영쯤은 일도 아니라고.. 하하하..”
이미 김성일의 머릿속에는 정현숙이 다른 남자의 아이를 갖고 있다 거나, 몸로비를 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들은 멀리 사라지고 없었다.
그저 끝 모를 자신감을 보이며, 흐릿해진 눈으로 사장이 되어 있는 자신의 모습만 그리고 있었다.
정현숙은 가뜩이나 못 생긴 남편이 성진과 확실하게 비교가 되면서 오늘따라 진짜 못 생기고, 한심해 보였다.
“여보.. 고마워. 그리고 미안해. 내가 그동안 더 잘했어야 하는데, 당신 걱정만 끼쳤지?”
김성일이 은근히 말을 하며 정현숙의 손을 잡았다.
정현숙은 소름이 끼쳐서 슬그머니 손을 빼내었다.
“내가 앞으로 더 잘할게. 나는 당신이 필요해. 당신은 내 복덩어리라고.. 하하하..”
김성일 혼자 신 났다.
김성일은 흥분해서 정현숙을 확 끌어안았다.
정현숙은 도저히 참을 수가 없었다.
원래라면 오늘은 이렇게 김성일과 대화를 하고 집에서 잔 후 내일 시간 맞춰서 같이 움직일 생각이었다.
하지만 도저히 이 인간이랑 일분일초도 같이 있고 싶지가 않았다.
“그.. 그래요. 여보.. 미안한데요. 저.. 가 봐야 해요.”
“응? 그.. 그게 무슨 말이야. 오늘 나랑 같이 있는 거 아니야?”
“당신을 꼭 사장 자리에 앉히려면 어쩔 수 없잖아요. 휴우..”
김성일의 얼굴이 무참히 일그러졌다.
하지만 그의 입에서 나오는 말은 전혀 얼굴과는 달랐다.
“그.. 그래? 그렇다면.. 할.. 할 수 없지.”
“걱정하지 말아요. 그 회장이란 사람이랑 특별한 일 없으니까요. 그냥 비위를 맞춰주고, 늦게라도 들어올 거예요. 혹시.. 늦어지면 못 들어올 수도 있으니까.. 내일 저녁 6시까지 그랜드 호텔 레스토랑으로 와요. 최대한 깨끗하게 하고 와야 해요. 알았죠?”
김성일이 인상을 잔뜩 찡그린 채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정현숙은 가방과 차키를 챙겨 부리나케 집을 나와 버렸다.
성진의 방으로 돌아온 정현숙은 이제서야 안심이 되었다.
정현숙은 이렇게 마음의 안정이 될 정도로 자신이 성진을 얼마나 의지하고, 사랑하고 있는지 깨달을 수 있었다.
“아니.. 현숙씨. 왜 벌써 왔어요? 내일 남편이랑 같이 약속 장소로 오기로 했잖아요.”
정현숙은 아무 말없이 성진의 품에 안겼다.
분명 김성일은 10년이 훨씬 넘게 살 맞대고 살아온 남편이었다.
하지만 그와 있으면 답답하고, 무섭고, 불안했다.
아까도 마찬가지였다.
그동안 그와 어떻게 살았었나 싶게 너무나 소름 끼치고, 혐오스러웠다.
하지만 불과 만나지 몇 달 되지 않은 성진은 달랐다.
이렇게 성진과 함께 있기만 해도 너무나도 편하고, 행복했다.
“도저히.. 도저히 그 남자랑 한 공간에 있고 싶지가 않았어요. 그리고 확실히 알았어요. 저한테는 오직 성진씨밖에 없다는 것을요..”
성진은 그 말에 환하게 웃고는 정현숙을 번쩍 공주님 안기로 들어서 침대에 조심스럽게 내려놓았다.
그리고 몸을 겹치고 누워 정현숙의 입술에 키스를 하며, 그녀의 배를 사랑스럽게 쓰다듬었다.
마치 뱃속의 아이를 반드시 지켜주겠다고 다짐하듯이..
정현숙은 성진의 키스가 너무나 달콤했고, 그의 손은 너무나 따뜻했다.
벌써 며칠째 성진과 같이 지내고 있지만, 이 꿈만 같은 느낌은 전혀 줄어들지가 않았다.
“성진씨.. 사랑해요. 그리고.. 이렇게 저를 찾아줘서 고마워요.”
성진의 볼을 쓰다듬으며 정현숙이 눈물을 글썽거리자, 성진은 그저 따뜻하게 웃어줄 뿐이었다.
그리고 두 사람은 너무나 행복한 마음으로 서로를 꼭 끌어안았고, 그렇게 잠이 들었다.
다음날, 김성일은 약속 시간보다 무려 한 시간이나 일찍 호텔에 나타났다.
호텔 로비에 있는 거울에 말끔하게 양복을 차려입은 자신을 비춰보며 어디 이상한 곳은 없는지 확인하면서, 안절부절못하고 로비를 걸어 다니며 시간이 가기만 기다렸다.
10분 정도가 남았을 때, 레스토랑으로 들어선 김성일은 예약되어 있는 곳으로 안내를 받아 자리를 잡았다.
예약된 곳은 이 비싼 최고급 레스토랑에서도 특별한 사람만 들어갈 수 있다는 안쪽 밀실이었다.
냉수를 벌써 몇 잔이나 마신 지 모른다.
장소가 주는 부담감에 반드시 오늘 잘 보여야 한다는 압박감까지 김성일은 계속 손을 비비면서 긴장을 하고 있었다.
정확히 6시가 되자 밀실의 문이 열리며 키가 훤칠하게 크고, 무척 잘생긴 남자가 들어왔다.
그리고 그의 뒤를 따라 정현숙이 들어왔다.
정현숙은 오늘도 한껏 꾸미고 있어서 빛이 날 정도로 아름답기 그지없었다.
김성일은 그런 정현숙을 보면서 눈빛이 바뀌며, 저절로 입꼬리가 올라갔다.
마치 저 여자가 자신의 아내라고 자랑이라도 하는 듯이 말이다.
김성일은 성진을 보며 HK그룹 회장이라고 들었는데, 생각보다 젊은 사람이 들어서자 놀랐다.
성진이 김성일의 앞에 가서 앉고, 정현숙은 다소곳이 김성일의 옆에 가서 앉았다.
“안녕하십니까? HK그룹 회장을 맡고 있는 이성진이라고 합니다.”
“네. 안.. 안녕하십니까? 김성일이라고 합니다. 여기.. 제 이력서..”
성진이 자리에 앉으며 인사를 하자 김성일이 얼른 고개를 숙여 인사를 하고는 밤새 준비를 했는지 바로 봉투에서 서류를 꺼내서 성진에게 내밀었다.
장황하게 쓰여 있는 자기소개와 UCLA 대학 졸업장, 박사학위증 등 하루 만에 준비했다고는 믿어지지 않을 정도로 많은 서류였다.
성진은 대충 훑어보는 척하고는 서류를 옆에 내려놓았다.
“뭐. 정현숙씨 남편이신데 어련하시겠습니까? 우선 식사부터 하시죠.”
김성일은 정현숙이 아주 제대로 자리를 만들었다는 확신이 들었다.
성진의 말투가 매우 부드러웠고, 분위기가 꽤 좋았기 때문이다.
김성일은 테이블 밑으로 옆에 앉은 정현숙의 손을 꽉 잡아주었다.
여러 가지 의미가 담긴 행동이었다.
성진에게 정현숙이 자신의 여자라는 것을 보여주려는 의도도 있었고, 정현숙에게 잘했다고 칭찬해 주는 동시에 어디 도망 갈 생각하지 말라는 의도도 있었다.
정현숙은 깜짝 놀라 성진의 눈치를 살피고는 몰래 손을 빼냈다.
김성일은 괜히 그런 정현숙의 행동조차 예쁘게 보였고, 입가에 은근한 미소가 어렸다.
식사 시간은 화기애애했다.
성진은 여러 가지 주제로 대화를 이어나갔고, 김성일도 입가에 미소를 머금고는 어려운 용어까지 써가면서 아는 척, 잘난 척을 무지하게 해댔다.
성진에게 잘 보이려고 그러는 것도 있지만, 오늘따라 아름다운 정현숙이 자꾸 눈에 밟혀서 아내에게 멋있는 남편으로 어필하고 싶었기 때문이다.
식사가 끝나고 자리는 자연스럽게 와인을 마시는 술자리로 이어졌다.
성진의 태도는 너무나 매너가 좋았고, 정현숙을 별로 쳐다보지도 않는 것이 정현숙에게 별 관심이 없어 보이자 김성일은 기분이 너무나 좋았다.
성진과 정현숙의 태도를 보아하니 두 사람이 그렇고 그런 관계는 아닌 것 같았다.
두 사람의 나이 차이가 너무 많이 나기까지 하는데 설마 저 잘난 회장이 나이 든 자신의 아내를 넘볼 리가 없다는 생각도 들었다.
그렇게 생각되니 김성일은 이건 순전히 자신의 능력으로 얻어낸 자리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자신이 사랑하는, 오늘따라 더 예쁜 아내를 다른 사람에게 줄 필요도 없었다.
김성일은 돈과 명예와 사랑까지도 다 챙길 수 있다는 희망에 부풀었다.
이제 다시 원래대로 돌아가 자신이 정현숙에게 더 잘 하기만 하면 되는 것이었다.
아내가 다른 남자의 아이를 임신하고 있지만, 어차피 아이도 없었고, 자신은 아이를 가질 수도 없는데 까짓 거 내 아이라고 생각하고 키우면 되는 거 아닌가?
김성일은 오늘따라 와인이 달게 느껴졌다.
그렇게 시간이 꽤 흘러서 김성일이 화장실을 다녀오겠다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콧노래까지 부르며 기분 좋게 화장실을 다녀온 김성일은 자리로 돌아오다 그대로 굳어버리고 말았다.
========== 작품 후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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