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다시 그 여름으로 3부-19화 (349/38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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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으로 돌아오는 비행기 안, 성진은 벌써부터 정현숙이 보고 싶었다.

그녀와 뼈가 녹아버릴 것 같은 섹스는 할 수 없었지만, 미국에 머무는 동안 서로의 사랑을 확인했고, 정말 마음이 충만해지는 시간이었다.

굳이 섹스가 아니더라도 충분히 사랑이 깊어질 수 있다는 것을 새롭게 깨닫게 된 기회였다.

“하아.. 벌써 우리 현숙씨 얼굴이 보고 싶네. 라경씨한테 얘기해서 빨리 화상통화를 할 수 있는 스마트폰을 만들라고 하든지 해야지. 이거 영 답답해서..”

성진은 정현숙과 자주 통화하기로 했지만, 얼굴을 보지 못한다는 것이 이렇게 답답한 것이라는 것을 처음 알게 되었다.

그렇게 성진이 정현숙에게 푹 빠져 있는 동안 최미연에 대한 생각은 잊어버리고 있었다.

그런데 또 웃긴 게, 성진이 김포공항에 내려서 게이트를 빠져나오자 그렇게 보고 싶던 정현숙은 잠시 뒷전으로 밀려나고 서울에서 해야 할 일, 만나야 할 사람들이 생각나기 시작한 것이다.

사람 마음이 간사하다더니 지금 성진이 딱 그랬다.

불과 열 몇 시간 전만 해도 정현숙이 보고 있어도 보고 싶을 정도였는데, 바다 하나 건너왔다고 그새 공항 밖으로 나오자 최미연부터 생각난 것이다.

“흠.. 오늘은 시차 적응 때문에 일단 집에 가서 쉬고, 내일 미연씨한테 연락해 봐야겠다. 흐흐..”

하지만 무슨 마가 낀 건지 성진이 최미연을 만나게 되는 것은 또다시 한참의 시간이 지나고 나서였다.

성진은 차에 타면서 한국으로 돌아왔다는 보고를 하기 위해서 어머니한테 전화를 걸었다.

[성진아. 마침 잘 됐다. 얼른 병원으로 와. 효선이 진통 와서 병원으로 갔어.]

“네? 뭐요? 벌써 그렇게 됐어요? 알.. 알겠어요.”

그러고 보니 효선 아줌마의 예정일이 2월이었다.

그동안 하도 정신없이 바쁘게 지내다 보니 곧 효선 아줌마가 성진의 아이를 낳는다는 것을 잊어버리고 있었던 것이다.

그런데도 자신은 최미연과 정현숙을 다시 만났다는 데 흥분해 있었다니, 괜히 효선 아줌마한테 미안해졌다.

“저기 빨리 00종합병원으로 가 주세요.”

성진이 기사에게 말을 하고는 자신의 무심함에 반성하며 차창 밖을 바라보았다.

어째 하늘이 우중충한 게 비라도 올 것만 같았다.

운전기사의 실력이 좋아서인지 김포공항에서 한 시간도 안 돼서 강남에 있는 병원에 도착할 수 있었다.

성진은 차에서 내리자마자 급하게 뛰어서 산부인과 분만실로 뛰어갔다.

지금 성진이 있는 병원은 꽤 큰 종합병원이었는데, 정희 아줌마와 혜정 아줌마 모두 아이를 낳은 곳이었고, 그러다 보니 마치 성진의 집안 병원화 되어서 성진의 가족을 위한 VIP병실에 가족 전담 의사까지 갖추어져 있었다.

최근에 어머니가 제안을 해서 이 병원을 HK그룹 병원으로 인수를 하자는 얘기까지 나오고 있어서 아무래도 조만간 그룹차원에서 인수를 하지 않을까 예상되어 진다.

그래서 그런지 성진이 병원 정문을 뛰어들어가자 성진을 알아본 안내데스크 직원이 묻지도 않았는데 빠르게 뛰어와 성진을 안내했다.

병원 직원은 성진을 분만실 앞으로 데려간 것이 아니라 근처에 있는 한 방으로 데려갔고, 작은 휴게실처럼 꾸며진 공간에는 어머니를 비롯해 정희 아줌마, 혜정 아줌마, 영희 누나, 정아와 성애 고모, 진희까지 초조하게 앉아 있었다.

성진은 순간 방안으로 들어가려다 움찔하고 말았다.

방안의 여인들이 전부 너무나 아름답고 나름의 매력을 발산하면서 순간 방안이 환해지는 기분이 들었기 때문이다.

어머니를 비롯한 중년파 여인들은 젊고 아름다워진 것에 더해서 전부 명품으로 치장까지 해서 그런지 연륜에서 묻어 나오는 농후함과 요염함이 더해져 있었고, 영희 누나를 비롯한 정아, 진희는 20대와 10대의 밝고, 환한 아름다움이 이제 만개를 해 폭발적으로 뿜어져 나오고 있었다.

성진이 들어가자 앉아있던 여인들이 벌떡 일어나 성진을 반겨주었고, 마치 여인들의 대표라도 되는 것처럼 어머니가 다가와 성진의 품에 안겼다.

“아니.. 회사는 어떡하고 다들 여기에 있는 거예요? 이렇게 사장단이 다 빠지면 어떡해요?”

성진이 화를 내듯 말을 했지만, 오랜만에 본 여인들의 모습에 입가에 미소가 절로 지어졌다.

“넌 지금 일이 문제니? 효선이가 드디어 아이를 낳게 됐는데..”

어머니가 성진의 품에 안겨 있다가 뾰로통하게 쳐다보며 가슴을 툭 쳤다.

성진의 어머니의 허리를 꼭 끌어안으며 입에 키스를 쪽 했다.

“에이.. 농담인 거 아시면서.. 오랜만에 보니 다들 너무 반가워서 그랬어요. 하하..

그건 그렇고 효선이는 들어간 지 얼마나 됐어요?”

“이제 들어간 지 세 시간 조금 넘었어. 오빠.”

진희가 그새를 못 참고 쪼로록 달려오더니 자신도 엄마처럼 안아 달라는 듯이 성진의 팔에 매달렸다.

성진이 그런 진희도 같이 안고 입술에 키스를 해주고는 두 사람을 풀어주었다.

나머지 여인들은 그저 성진을 바라보며 흐뭇한 미소를 짓고 있었고, 성진이 안으로 들어가 가운데 앉자 그제서야 다들 자리에 앉았다.

마치 왕의 귀환 같은 광경이었다.

전쟁에 나갔다 돌아온 왕을 왕비가 맞아들이고, 왕이 자리에 앉자 주위에 왕비와 후궁들이 정렬해 앉는 것 같았던 것이다.

앉은 지 10분이나 지났을까? 휴게실 문이 벌컥 열리며 녹색 가운을 입은 여자가 방으로 들어와 효선이 딸을 낳았고, 아이와 산모 모두 건강하다고 기쁜 소식을 알려주었다.

다들 잘 됐다고 환호성을 지르며 좋아하고는 우르르 밖으로 몰려나갔다.

효선 아줌마는 30분 정도 회복실에 있다가 VIP 병실로 옮겨졌고, 다들 병실로 들어가자 효선 아줌마가 품에 아기를 안고 핼쑥해진 얼굴로 침대에 등을 기대어 앉아있는 것을 볼 수 있었다.

효선 아줌마는 다른 누구보다 성진을 보고는 환한 미소를 짓고는 눈물을 주르륵 흘렸다.

“주인.. 님. 여기.. 우리 아기예요. 흑.. 흑.. 예쁘죠?”

성진이 효선 아줌마에게 다가가 침대에 걸터앉자 효선 아줌마가 아직 눈도 제대로 못 뜨고 가끔씩 입을 오물거리는 아주 조그마한 아기를 성진에게 조심스럽게 건네주었다.

성진은 만지면 깨질까 조심하면서 팔로 아이의 목을 받치고 손으로 밑을 받쳐 가슴에 안아 들었다.

이미 어머니를 비롯해 정희 아줌마, 혜정 아줌마와의 사이에서 세 명의 딸을 길러봐서 그런지 성진의 자세가 무척 안정적이었지만, 성진의 얼굴만큼은 빨갛게 달아올라 감격에 겨운 얼굴이었다.

“흑.. 흑.. 주인님. 저는.. 정말 기뻐요. 제가 이렇게 주인님 아이를 낳을 수 있다니.. 흑.. 주인님. 저 같은 것을 사랑해 주셔서 너무 감사해요. 그리고 사랑해요.”

효선 아줌마는 격하게 울면서 말을 했지만, 몸이 온전히 못 한지 성진에게 안겨오지는 못했다.

그런 효선 아줌마의 모습을 본 성진은 조금 더 효선 아줌마에게 다가가 앉으며 손으로 그녀의 눈물을 닦아주고는 볼과 입술에 키스를 해 준 후 머리를 꼭 안아 주었다.

“우리.. 효선이. 진짜.. 수고했어. 나도 사랑해.”

다른 여인들은 차마 오늘 태어난 아이에게 다가오지는 못하고 서너 발짝 떨어져서 감동한 얼굴로 두 사람을 쳐다보고 있었다.

“어? 밖에 눈 온다.”

진희의 천진난만한 맑은 목소리에 사람들은 다들 창밖을 바라보았다.

성진이 올 때 날이 우중충하더니 기어이 눈이 내리는 모양이다.

여전히 감격해 울고 있는 효선 아줌마도 성진의 가슴에 머리를 댄 채 밖을 바라보고 있었다.

잠시 다들 말없이 창밖을 바라보고 있는데, 성진이 분위기를 깼다.

“그래. 우리 딸 이름, 정했어. 이 아이 이름은 설희야. 이설희.”

사람들은 모두 성진을 바라보았고, 이내 다들 환하게 웃었다.

원래 성진과 효선 아줌마는 미리 딸이 태어나면 예람이와 예랑이를 따라 예원이라고 짓기로 했었다.

하지만 지금 성진이 괜히 묘한 감성에 젖어 아이 이름을 설희로 바꿔버린 것이다.

이렇게 되면 아이들 이름 뒤에 ‘희’자는 성진의 아이라는 표시가 되어버리는 것이었다.

성진이 자기 멋대로 이름을 설희라고 바꿔버리고 효선 아줌마를 바라보았지만, 효선 아줌마는 그저 성진을 바라보며 황홀하다는 시선을 보낼 뿐이었다.

더구나 성진이 ‘이설희’라고 성까지 붙여주자 효선 아줌마는 이루 말할 수 없는 감동을 받은 상태였다.

물론 호적에는 엄마 성을 따서 김설희라고 올라가겠지만, 이제부터 집안에서는 이설희라고 불릴 것이다.

성진은 갑작스럽게 찾아온 새로운 자신의 핏줄 때문에 기분이 너무 좋았다.

설희 외에도 이미 소희, 연희, 경희, 효정이까지 네 딸 아이가 있었지만, 새롭게 자신의 자식이 늘어난다는 것은 너무나 기쁘고, 감동적인 일이었다.

성진은 지금 해야 할 일이 산더미처럼 쌓여 있는데도 불구하고 매일 퇴근 시간 전에 효선 아줌마한테 찾아가서 설희와 셋이서 시간을 보냈다.

성진이 효선 아줌마와 설희에게 정신을 못 차리자 어머니를 비롯한 유부녀 군단은 또 성진을 아이를 갖겠다고 들이대는 바람에 달래느라 곤욕을 치러야 했다.

성진이 이렇게 정신이 딴 데 팔려 있는 사이 어느새 성진의 머릿속에서 최미연은 사라져 있었다.

한편 최미연은 오늘도 고병호를 만나고 있었다.

“미연아. 내가 진짜 잘할 게. 이제 술도 안 마시고, 다른 여자는 만나지도 않을 게? 응? 그리고 미연이가 원하는 일이면 내가 뭐든지 다 할 게. 제발 헤어진다고 하지 말아줘? 응?”

벌써 몇 날 며칠째인지 모르겠다.

설 명절 내내 집에 와서 부모님께 아양을 떨더니 하루가 멀다하고 이렇게 찾아와 최미연을 괴롭히고 있었다.

“오빠. 진짜 이제 그만 해요. 전 이미 오빠한테서 마음 떠났다니까요? 왜 이렇게 저한테 매달리세요? 밖에 나가면 오빠 좋다고 따라다니는 여자 많잖아요. 이제 그만 찾아왔으면 해요. 네?”

고병호는 벌써 2주가 넘게 이렇게 공을 들이고 있는데, 이 독한 년은 꿈쩍도 하지 않고 있었다.

‘아.. 짜증 나. 이 씨발년아. 내가 우리 아버지 명령만 아니면 미쳤다고 나 싫다는 년한테 매달리겠냐? 너랑 헤어지게 되면 당장 집안에서 쫓겨나게 생겼는데 이렇게라도 해야지.

넌, 이 개 같은 년, 결혼만 해 봐. 아주 입에서 곡소리 나게 만들어 줄 테니까. 흐아아.. 열 받아.’

고병호는 지금 생사의 기로나 다름없는 상황에 놓여있었다.

럭키진성 그룹의 회장이고 고병호의 아버지인 고봉수 회장이 고병호를 불러다 놓고 얼마나 두드려 팬지 모른다.

그리고 마지막 내린 최후의 명령, 최미연과 결혼하지 못하면 집안에서 쫓아내겠다는 것이었다.

럭키진성 그룹이 재벌로써 다른 재벌들보다 약한 부분이 법조계와 언론이었다.

분명 장성전자 보다 물건의 질도 좋은 거 같은데, 이상하게 번번이 제품을 출시하면 장성전자에게 밀리는 것이다.

그렇다고 비열한 수를 쓰자니 장성전자는 전혀 먹히지가 않는 거대한 공룡이었다.

법조계와 언론계까지 꽉 쥐고 있는 장성그룹이다 보니 이길 수가 없었던 것이다.

그래서 고봉수는 심혈을 기울여 오래전부터 현 검찰총장과 인연을 맺어오고 있었던 것이다.

검찰총장 최재성이 대단한 것도 있지만, 그것보다 더 대단한 건 그 집안이었다.

최재성의 아버지는 전대 대법원장, 작은아버지도 검찰총장을 역임했었고, 지금 최재성의 형은 대법관, 동생은 부장판사였다.

한 마디로 집안 모든 사람이 법조계 인사들이었고, 집안 대대로 우리나라의 법조계를 담당해 온 진정한 로열패밀리였던 것이다.

최씨 집안에서 한국에 이런 법이 필요하다고 하던 그 법이 만들어지고, 최씨 집안에서 무슨 얘기가 나오면 그게 법원 판결로 결정되어지는 정말 무서운 집안이었다.

그런 법조 권력의 핵심 중의 핵심인 검찰총장의 딸과 어렸을 때 혼약을 맺어 놨는데, 이 병신 같은 고병호가 지금 그걸 다 말아먹게 생긴 것이었다.

고봉수 회장은 농담이 아니라 만약 이 혼약이 깨진다면 진짜로 고병호를 쫓아낼 생각이었다.

그러니 고병호는 지금 무슨 수를 써서든 최미연을 잡아야만 했다.

마음 같아서는 성진에게 린치라도 가해 죽여버리고 싶지만, 이미 한 번 제대로 당해본 고병호는 그것이 불가능하단 것을 잘 알고 있었다.

성진과 그의 주변에는 실력 좋은 경호원들이 철통같이 보호하고 있었다.

그리고 우리나라 최고 주먹 중의 하나인 장광식이 성진의 형으로 있었고, 그를 따르는 조직도 성진을 보호하고 있었다.

물론 성진이 별 볼 일 없다면 자객을 보내서 몰래 암살해 버리면 그만이었다.

하지만 고병호는 성진이 바로 전설의 그 이성진이라는 사실을 알고 있었기 때문에, 웬만한 놈을 보내서는 어떻게 해 볼 수 없다는 것을 너무나 잘 알고 있었다.

잘못했다가는 역추적 당해 오히려 자신의 목숨도 위험해질 수 있었다.

그러니 지금 이렇게 오직 최미연에게 목을 맬 수밖에 없었고, 최미연 앞에 무릎까지 꿇는 수모를 겪어야만 했다.

“그러지 말고 미연아. 우리가 알고 지낸 지가 얼만데 이렇게 단칼에 잘라낼 수가 있어? 너 나 많이 좋아했잖아. 나도 너 많이 좋아한 거 너도 잘 알잖아.

나 진짜 완전히 변했어. 진짜야. 예전에 니가 알던 고병호가 아니야. 그러니까 조금만 더 지켜봐 줘. 다시 한 번만 기회를 줘. 응? 미연아.”

고병호가 최미연의 손을 양손으로 잡고 자신의 이마에 대고 마구 비볐다.

최미연은 하루 이틀도 아니고 벌써 2주가 넘게 이러는 고병호가 조금, 아주 조금 불쌍해지기도 했다.

그리고 왠지 집안의 눈치도, 특히 아버지의 눈치가 왜 괜히 혼약을 틀어서 주변을 시끄럽게 하냐는 눈치였다.

최미연은 이제 성진을 사랑하게 되었기 때문에 이미 마음에서 고병호를 지워버렸고, 그런 집안의 눈치도 묵묵히 이겨 나갈 생각이었다.

그런데 성진은 명절 끝나고 데이트하자 더니 갑자기 미국으로 가 버렸고, 지금쯤이면 분명 돌아왔을 것인데, 아직까지 아무 연락이 없었다.

이런 상황 속에서도 오매불망 성진의 연락만 기다리고 있는 최미연은 슬슬 성진에게 불만이 생기기 시작했다.

========== 작품 후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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흐음.. 뭔가 촉이 좋으신 분이네요. 정슬기 곧 나옵니다. ㅋㅋ

다시, 그 여름으로... 408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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