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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돌아가서..
신규 이동통신사업 계획을 발표하고, 정부에 신청서까지 제출한 지 벌써 한 달 가까이 지나가고 있었다.
그런데도 이상하게 정부 측에서는 아무런 반응이 없었다.
계속해서 관계 부처에 문의를 해도 지금 심사 중이니 기다리라는 소리만 하지, 명확한 답변이 없었던 것이다.
고병호의 수사가 끝나고, 재판을 앞두고 있던 어느 날, 뜻밖에 성진에게 김소영의 전화가 걸려왔다.
그때 장성그룹 홍라경 신임 회장 취임식에서 마지막으로 봤을 때, 더는 그녀를 못 볼 줄 알았다.
그런데 그녀에게서 먼저 전화가 걸려온 것이었다.
[성진씨. 잘 지내셨어요?]
왠지 김소영의 목소리에는 힘이 없어 보였다.
“네. 저는 잘 지내고 있습니다. 소영씨는 어떻게 지내셨어요?”
[네. 저도 바쁘게 지내고 있어요.]
“네. 그렇군요. 그런데 무슨 일로 전화하셨습니까?”
[저.. 혹시 시간 좀 내 주실 수 있어요? 오랜만에 성진씨 얼굴 보고 싶어요.]
마지막에 조금 그렇게 헤어지긴 했지만, 성진이 김소영을 싫어하는 것은 아니었다.
그녀의 아빠인 김진철만 아니라면, 오히려 김소영만 놓고 본다면 성진은 김소영을 좋아한다는 게 맞을 것이다.
“소영씨가 보고 싶다는데, 없는 시간이라도 만들어야죠. 하하..”
김소영의 아름다운 자태와 시원한 성격이 생각나면서 은근히 입가에 미소가 걸리는 성진이었다.
[네. 그러면 조만간 시간 좀 내 주세요.]
성진은 그렇게 김소영과 만날 약속을 하게 되었다.
며칠 후, 김소영과 약속한 날.
성진은 한 호텔의 고급 레스토랑에서, 오랜만에 김소영을 만난다는 생각에 기분 좋게 김소영을 기다리고 있었다.
정확히 약속한 시간에 김소영이 나타났다.
“소영씨. 어서 와요. 오랜만이네요.”
확실히 훤칠하게 잘 빠진 김소영이 나타나자 레스토랑의 VIP실이 환해지는 느낌이었다.
성진은 반가운 마음에 입가에 미소를 지으며 자리에서 일어나 김소영을 맞이하며 그녀의 손을 살포시 잡았다.
김소영도 성진이 기분 좋게 반겨주자 성진에게 손을 맡기며 환하게 미소를 지었다.
하지만 이내 그 미소를 걷고는 약간 시크한 표정을 지었다.
성진은 조금 의아한 생각이 들긴 했지만, 그때 일도 있었고, 그동안 연락도 없이 오랜만에 만나서 그런가 보다 하고 생각했다.
“요즘 바빴나 봐요? 연락도 없고..”
“네. 조금요. 저보다는 성진씨가 더 바쁘긴 거 아니에요?”
“하하하.. 사업하는 놈이 바쁘면 좋은 거죠. 그만큼 일이 잘되고 있다는 소리 아니겠습니까?”
“하긴 그렇네요. 그러고 보면 성진씨는 참 대단하세요. 이번에 미국에 좋은세상 공장도 지으셨다면서요? 그룹 상장도 엄청나게 성공하셨고요.”
“네. 운이 좋았습니다. 하하하..”
“전 이렇게 소영씨가 연락을 주셔서 솔직히 기뻤습니다. 왠지 그날 취임식장에서 분위기가 안 좋다고 느꼈거든요.”
성진이 웃으면서 너스레를 떨었는데, 갑자기 김소영의 얼굴이 시무룩해졌다.
“응? 소영씨 왜 그러세요? 제가 무슨 말실수라도 했나요?”
“아.. 아니요. 그.. 그런 게 아니라.. 하아..
성진씨 오늘도 죄송해요.”
김소영이 갑자기 자리에서 일어나더니 성진을 향해 고개를 푹 숙이는 것이었다.
“소.. 소영씨. 왜 이래요? 갑자기 무슨 일이에요?”
김소영이 다시 자리에 앉았고, 김소영은 그때부터 성진과 눈을 못 마주치고 고개를 숙이고만 있었다.
성진이 갑자기 이게 무슨 상황인지 몰라 어리둥절하고 있는데, 갑자기 레스토랑 VIP실 문이 열리며 누군가 허락도 없이 들어왔다.
“성진군. 그동안 잘 지냈는가?”
들어온 사람은 김소영의 아버지 김진철이었다.
성진의 인상이 순간 구겨졌지만, 얼른 얼굴을 풀고 자리에서 일어나 인사를 했다.
“안녕하십니까? 어르신. 어떻게 연락도 없이 이렇게 갑자기..”
“아!! 그건 미안하게 됐네. 내가 두 사람 사이를 방해하고 싶지 않았는데 말이야. 아무래도 내가 연락을 하면 자네가 안 만나줄 것 같아서 말이야. 후후..”
성진은 씁쓸하게 미소를 지었다.
김진철의 말대로 김진철이 만나자고 했으면 무슨 핑계를 대던, 미국으로 달아나던 해서 만나지 않았을 것이다.
대통령의 아들이라고는 하지만, 정부의 직책 하나 없으면서 소통령이니, 황태자니 하고 불리면서 무소불위의 권력을 휘두르는 사람이었다.
그런 사람이 아무 이유 없이 성진을 만나려 하지 않을 것이다.
분명 성진에게 원하는 것이 있을 것이고, 그것은 분명 성진이 가볍게 생각할 수 있는 것이 아닐 게 분명했다.
한부철강 사태만 보아도 알 수 있다.
한부철강이 5조가 넘는 자금을 대출을 받았는데, 정작 자신들이 쓴 금액은 몇천억도 안 된다.
그러면 나머지 5조가 넘는 돈은 어디로 갔단 말인가?
그런데 그 돈을 은행으로부터 대출받을 수 있도록 주선한 사람이 바로 김진철이다.
나중에 김진철이 감옥에 가기는 하지만, 죄목은 정말 어이없게도 중간에 소개해 주고 소개비 정도 받은 것이라는 것이었다.
나중에 한부철강이 부도나고 세무조사를 했을 때도 그 돈 5조는 찾을 수가 없었다.
무슨 일, 이백억도 아니고 무려 5조다.
그런데 그 돈이 공중에서 사라졌던 것이다.
그 돈이 어디로 갔는지는 지금까지 아무도 모른다.
그런 사람이라는 것을 뻔히 아는데, 성진이 김진철을 만나고 싶겠는가?
그리고 그걸 또 이 김진철이라는 사람은 뻔히 알고 있었다.
그래서 성진을 만나기 위해 이렇게 자기 딸을 이용해 비열한 방법을 쓴 것이었다.
성진은 김소영을 만날 수 있다는 기대감이 순식간에 차갑게 식어버렸다.
김소영이 왜 저렇게 미안한 표정을 지은 건지 이해가 되었다.
분명 그날 취임식장에서도 이런 부분이 싫다고 어필했었던 성진이었다.
“음.. 앉아도 되겠는가?”
“아.. 네. 죄송합니다. 앉으시지요.”
김진철은 입가에 미소를 머금고 자리에 앉더니 옆에 앉은 김소영을 잠깐 바라보고는 성진을 바라보았다.
“우리 소영이가 성진군을 많이 생각하고 있더군. 두 사람 사이가 꽤 좋다지? 후후..”
“네? 글쎄요.”
성진이 차가워진 시선으로 김소영을 힐끔 쳐다보며 애매하게 대답을 했다.
그런 성진의 모습에 김소영의 얼굴이 크게 실망하는 것이 보였다.
하지만 성진은 김진철이 나타난 순간 이미 마음속으로 김소영을 정리해 버린 상태였다.
성진이 김소영을 만난 것은 대통령의 손녀라서 만난 것이 아니었다.
그녀의 아름다운 외모와 화끈한 성격, 깊은 이해심 등 꽤 매력적인 여자라서 만난 것이지, 김소영에게 뭔가를 바라고 만난 적은 한 번도 없었다.
“응? 대답이.. 좀 그렇군. 흠.. 흠..
자네 옆에 생각보다 여자가 많더군. 장성그룹의 장소진도 있고, 최근에 최 검찰총장의 영애인 최미연도 있고 말이야. 흠.. 흠..”
성진은 아무 대답도 안 하고 그저 묵묵히 김진철의 말만 듣고 있었다.
김진철은 자신의 딸을 미끼로 성진의 복잡한 여자 관계를 들먹여 압박을 하려고 한 것 같았다.
하지만 성진이 처음부터 김소영과의 관계를 애매하게 만들어 버리자 김진철이 억지로 얘기를 꺼냈다가 뭔가 방향이 안 맞았는지 헛기침만 해댔다.
“어르신, 하실 말씀이 무엇입니까? 바쁘신 분께서 딸을 앞세워 저를 만나고자 하신 데는 그만한 이유가 있을 거라 생각합니다. 저는 충분히 들을 준비가 되어 있으니 편하게 말씀해 주십시요.”
성진이 예리하게 김소영을 이용했다고 비꼬면서 단도직입적으로 말을 꺼냈다.
이 인간과 오래 앉아 있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다.
“흠.. 흠.. 이 사람. 뭐가 그렇게 바쁘다고.. 같이 식사도 좀 하면서 천천히 얘기해도 되는데..”
“아.. 미처 제가 그 생각을 못 했네. 식사하시겠습니까? 저는 빨리 어르신의 말씀을 듣고 싶어서..”
김진철의 이마가 살짝 일그러졌다.
어떻게 나이도 어린놈이 꼬박꼬박 한마디도 지지 않고 있었다.
그렇다고 틀린 말도 없었고, 예의에 어긋나는 것도 없어서 화를 낼 수도 없었다.
“큼.. 아.. 아닐세. 뭐.. 내가 밥 얻어먹자고 나온 게 아니니까.. 난 그저 우리 소영이 아빠로서 그냥 자네를 한 번 제대로 보고 싶었을 뿐이네.”
“네. 그럼 이 자리에서 확실히 말씀드려야 겠군요. 소영씨를 몇 번 만난 것은 사실입니다. 하지만 제가 확실히 말씀드릴 수 있는 것은 저는 소영씨랑 사귈 마음이 전혀 없습니다. 그러니 어르신께서는 걱정하지 않으셔도 될 것 같습니다.”
성진의 단호한 말에 김소영의 얼굴이 하얗게 질려버렸다.
김소영도 이제서야 뭐가 단단히 잘못됐다는 것을 깨달은 모양이다.
설마 성진이 이렇게까지 나올 줄은 꿈에도 몰랐을 것이다.
김소영 자신이 성진을 사랑하는 만큼 성진도 자신을 사랑하고 있을 거라고 믿고 있었다.
그래서 솔직히 김진철이 무리한 요구를 하는데도 어느 정도는 성진이 이해하고 넘어가 줄 것이라고 생각했었다.
그런데 지금 성진의 태도는 북풍한설보다도 더 차가웠고, 김소영도 이제서야 성진과의 관계가 완전히 깨져버렸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 그래? 허흠.. 그.. 그렇다면야..”
“그런 남녀관계 같은 하찮은 얘기보다는 저는 어르신께서 저에게 하실 말씀이 궁금합니다. 아까도 말씀드렸지만, 저는 어르신 말씀을 충. 분. 히. 들을 준비가 되어 있습니다.”
회귀하기 전의 성진의 나이가 40대 중반이었다.
남녀 사랑놀음에 마음이 휘둘리기에는 너무나 메마른 삶을 살았었다.
한번 김소영을 아니라고 마음을 먹자 성진은 너무나 냉정하게 말을 뱉어낼 수 있었다.
성진의 단호하고 차분한 말에 김진철도 생각보다 얘기가 잘 통할 것 같은 생각이 들었고, 그제서야 웃기 시작했다.
“그.. 그런가? 하하.. 이 친구 생각보다 말귀가 통하는구먼. 괜히 아버님께서 그렇게 칭찬하신 게 아니야. 하하하..”
성진은 당장 눈물이 나오려는 것을 입술을 악물며 참고 있는 김소영은 쳐다도 보지 않고 오직 김진철만 바라보았다.
“크흠.. 그럼 내가 단도직입적으로 말하지. 이번 신규 이동통신사업 말이야, 내가 좀 알아보니 장성그룹이 주가 아니라 HK그룹 다시 말해 성진군 자네가 주더군. 맞나?”
“네. 맞습니다. 이미 대통령님께서 저에게 선물로 주시겠다고 허락하신 일입니다. 그런데 이제 햇병아리 같은 제가 갑자기 이동통신사업하겠다고 나서면 여기저기 반발이 심할 것 같아서 장성그룹을 끼워 넣은 것입니다.”
“그래. 역시.. 그렇군. 그래서 내가 장성 쪽하고 접촉을 했는데 아무도 자세히 모르고 있었던 것이군. 자네 참 나이답지 않게 영악하구먼. 아주 맘에 들어.”
“어르신, 좋습니다. 피차 바쁘기도 하고, 어르신께서 왜 저를 찾아오셨는지도 대충 알 거 같으니 원하시는 것을 말씀하십시오.
저는 대통령님께 충성하는 사람입니다. 분명 대통령님 퇴임 후 쓰실 것을 마련하시려고 그러시나 본데 제가 당연히 드려야지요.
제가 대통령님께 입은 은혜가 얼맙니까?”
“뭐.. 뭐? 하하하하하...
이 친구, 진짜 명물이구만.. 내가 말도 하지 않았는데, 이미 다 알고 있다니..
자네 진짜 내 딸 소영이 관심 없나?”
“네. 아까 말씀드렸습니다. 저는 소영씨한테 전. 혀. 관심 없습니다.”
성진은 딸인 김소영의 마음도 모르고 저런 질문을 철없이 해대는 김진철이 참으로 한심했다.
상류층이라는 사람들은 다 저런 것일까?
검찰총장도 최미연을 그저 정략의 도구로 사용하려고 하더니, 김진철도 김소영을 그런 식으로밖에 보지 않는 것 같았다.
하지만 뭐 어쩌겠는가? 이런 아버지를 둔 것도 김소영의 업보인 것을..
성진은 더 이상 이런 사람들과 어울려 줄 생각이 전혀 없었다.
“얼마를 원하십니까?”
“좋네. 10% 어떤가?”
“흐음.. 그건 너무 많습니다.”
“응? 출자금의 10%로 200억 정도인데 그것도 힘들다는 건가?”
“네? 지분의 10%를 말씀하신 거 아니었습니까?”
“허어.. 이 친구. 내가 무슨 날강도인 줄 아는가? 지분까지 요구하게..”
날강도 맞는 거 같은데.. 성진은 그렇게 속으로 생각했다.
“그 정도 금액이면 당장이라도 드릴 수 있습니다. 하지만, 대통령님 퇴임 후도 생각하셔야죠. 연금이라고 생각하시고 제가 지분의 5%를 드리겠습니다.”
“뭐.. 뭐? 정말인가?”
“네. 대통령님께 입은 은혜도 있고, 그리고 앞으로도 잘 부탁드린다는 인사차 드리는 겁니다. 지분은 어른신 앞으로 해 드리겠습니다. 어르신께서 대통령님 좀 잘 보필해 주십시요.”
“하하하하.. 뭐.. 이런 화통한 청년이 다 있나? 정말 대단하군. 대단해.
걱정하지 말게. 이게 전부 나라와 대통령님을 위한 일일세.
그리고 지금 다른 대기업들이 여론전까지 하면서 반대가 심한 걸로 알고 있네. 걱정하지 말게 그것도 다 잠재워 주고, 이번 주 안에 바로 승인 떨어질 걸세.”
“하하.. 감사합니다. 역시 제가 좋아하는 대통령님의 아드님 다우십니다.”
성진은 마음에도 없는 말을 하려니 속이 뒤집히려고 했지만, 어차피 정치자금으로 나가야 할 돈이었다.
지금 뭉텅이 돈이 나가느니 이렇게 지분으로 나가는 게 훨씬 적게 들고 효과적이었다.
“이렇게 기분 좋은 자리는 오랜만이구먼. 성진군 우리 술이라도 한 잔 하겠는가?”
김진철은 성진이 단단히 마음에 든 모양이다.
지금 같으면 김소영을 달라고 해도 바로 준다고 할 기세였다.
“아.. 이런.. 저는 오늘 이 자리가 그저 소영씨하고 식사나 하는 자린 줄 알고 이따가 사람 만날 약속을 잡았습니다. 죄송합니다. 다음에 시간을 내주시면 제가 크게 한 번 대접하겠습니다.”
“아.. 그.. 그런가? 하긴 바쁜 사람이니.. 그러지 다음에 술이나 한잔 같이하지. 그럼 나는 이만 가보겠네. 우리 소영이랑 식사 맛있게 하고.. 하하하..”
김진철이 기분이 좋아진 채 자리를 떠나며 그제서야 김소영을 신경 쓰는 척을 했다.
========== 작품 후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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