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아.. 아니야. 그러니까 나.. 나는 저 인간 소문이 안 좋잖아. 그런데 우리 희선이한테 그랬다니까.. 그래서..”
“누나. 내 눈 똑바로 봐. 무슨 일인지 사실대로 말해.”
성진이 인상을 살벌하게 굳히며 말을 하자 수영 누나가 안절부절못하다가 할 수 없이 말을 꺼냈다.
“그.. 그러니까. 저 인간이 좀 많이 추근거려서. 며칠 전 저 인간하고 키스씬이 있었거든.”
그러면서 수영 누나가 성진의 눈치를 살폈다.
괜한 일로 걱정시키고 싶지 않은 수영 누나였다.
“누나. 내가 그런 키스씬 하나 이해 못 하는 속 좁은 놈인 줄 알아? 이건 누나의 일이지 누나가 다른 남자랑 연애하는 게 아니잖아. 그러니까 편하게 눈치 보지 말고 말해봐.”
“그.. 키스씬을 찍는데.. 저 변태 새끼가.. 막 내 엉덩이까지 주무르고 하면서..”
수영 누나의 목소리가 점점 줄어들며 성진의 눈치를 살폈고, 성진의 얼굴은 더더욱 굳어졌다.
“그래서? 뿌드득..”
성진이 이빨이 깨지도록 갈아댔다.
“성.. 성진아. 무.. 무서워.”
“응.. 알았어. 누나한테는 절대 화 안 내니까 걱정 말고 계속해봐.”
“내가 너무 과한 거 아니냐. 하지 말라고 하니까.. 뭐.. 연기를 하다가 자신이 몰입했다나.. 정말 어이없는 변명을 하더라고.. 그래서 엔지가 얼마나 났는지 몰라.
그러더니 끝나고 나니까 자기랑 식사나 하면서 다음 씬에 대해 얘기나 하자면서 막 꼬시는 거 있지. 그래서 내가 싫다고 하니까.. 참나.. 어이가 없어서..
자신한테 이렇게 대하면 앞으로 재미없을 거라고 협박해대는 거 있지.”
수영 누나도 말을 하다 보니 열이 받는지 말이 점점 빨라지고 거칠어지고 있었다.
그런 반면 성진의 눈은 더욱 차분해지고, 얼굴도 어느새 입가에 차가운 미소를 띠고 있었다.
분명 성진이 지금 웃고 있었지만, 성진을 바라보는 나머지 사람들은 지금 성진이 얼마나 화가 많이 나 있는지 확실히 느낄 수 있었다.
“야.. 김두식.”
“네.. 네. 회.. 회장님.”
“저 새끼 뒤 봐주고 있다는 그 썩을 여편네 누구인지 확실히 알아내. 절대 가만 안 둔다. 알았어?”
“허억.. 네.. 네. 알겠습니다. 회장님.”
그런 성진의 모습을 바라보는 진소라, 수영 누나, 박희선은 흐뭇하니 행복한 미소를 짓고 있었다.
성진의 명령에 김두식이 어딘가로 전화를 하더니 한 시간도 안 돼서 이성재의 스폰에 대해서 알아왔다.
그 사이 점심을 먹고 쉬고 있는데 김두식이 자신이 알아 온 사실을 성진에게 보고했다.
“회장님. 이성재 뒤를 봐주고 있는 그룹 사모님이 럭키진성 그룹 사모님이라고 합니다.”
김두식의 말에 진소라는 마시던 커피를 뿜어버렸고, 수영 누나와 박희선은 눈이 휘둥그레졌다.
진소라는 ‘또 럭키진성이야?’하고 낮게 중얼거리면서도 성진을 바라보며 무슨 뜻인지 충분히 알 수 있을만한 미소를 짓고 있었다.
“그래? 그렇단 말이지..”
성진이 대꾸를 하고 잠시 생각을 하더니 핸드폰을 꺼내 어딘가로 전화를 했다.
“홍 여사님. 저 이성진입니다. 지금 통화 괜찮으십니까?”
성진이 핸드폰에 대고 홍 여사님이라고 하자 진소라는 그러면 그렇지 하고 씨익 미소를 지었고, 수영 누나와 박희선은 ‘누구야? 누구야?’를 연신 외쳐댔다.
그러자 진소라가 두 사람에게 가까이 오라고 하고는 머리를 숙여 장성그룹 홍라경 여사라고 알려주었고, 수영 누나와 박희선은 입을 떡 벌렸다.
김두식도 누군지 궁금해하다가 진소라의 홍라경 여사 소리를 듣고는 소스라치게 놀랐다.
[어머. 서방님. 지금 밖이신가 봐요? 저한테 안 하시던 높인 말투를 다 쓰시고.. 호호..]
홍라경 여사가 웃으며 말을 건네자 성진이 얼굴을 붉히며 헛기침을 해댔다.
그 소리에 홍라경 여사는 또 재밌다는 듯이 깔깔거리며 웃었다.
“됐고요. 홍 여사님 혹시 럭키진성 그룹 사모님이랑 친합니까?”
[럭키진성 신 여사요? 뭐.. 친한 것은 아니고, 모임에서 가끔 얼굴 보기는 했지요. 왜요? 그 여자가 서방님께 무슨 잘못 했어요? 어머.. 그러고 보니 또 럭키진성이네요. 이것들이 아주 죽으려고 용을 쓰네요. 호호호..]
뭐가 즐거운지 홍라경 여사의 웃음소리가 높아졌다.
“아.. 뭐 큰 일은 아니고요. 그 사모님이 이성재 뒤를 봐주고 있는 모양인데 그 새끼 아주 몹쓸 새끼 같아서요.”
[어머.. 어머.. 우리 서방님께서 새끼라고 부를 정도면 이성재가 아주 큰 잘못을 했나 봐요. 그래서요? 제가 어떻게 해 드릴까요? 서방님? 호호..]
마구 웃으며 호들갑을 떠는 홍라경 여사의 목소리를 들으니 지금 무슨 표정을 짓고 있을지 성진은 안 봐도 보이는 것 같았다.
아마 재밌고, 신 나서 온 얼굴에 웃음꽃이 폈으리라.
“뭐.. 별건 아니고.. 그 럭키진성 사모님 좀 살짝 밟았으면 하는데요.”
[흐음.. 그렇단 말이죠? 알겠어요. 우리 서방님 말씀이신데 제가 손 좀 써볼게요. 아마 그 럭키진성 신 여사는 앞으로 사교계에서 얼굴 들고 다니지 못할 거예요. 그리고 이성재는 당연히 스폰 끊어질 거에요. 됐죠?]
“크크크.. 그 정도면 됐어요. 고마워요.”
[우와아.. 우리 서방님 입에서 고맙다는 말 들었다. 기분 너무 좋네요. 서방님 앞으로도 뭐 더 시키실 일 있으시면 시키세요. 제가 이것들 아주 작살을 내놓을게요. 헤헤..]
“그래요. 알았어요. 조만간 봐요.”
성진은 이렇게 무한한 사랑을 보내는 홍라경 여사의 말에 자신도 모르게 미소를 지었다.
성진이 통화를 마치자 수영 누나와 박희선이 바로 얼굴을 디밀었다.
김두식도 성진이 그 무시무시한 장성그룹 회장과 이렇게 서슴없이 통화하는 것을 보고 잔뜩 긴장할 수밖에 없었다.
“오빠. 오빠. 홍 여사님께서 뭐래요?”
확실히 아직 어린 박희선이 호들갑스럽게 성진에게 질문했다.
“응? 앞으로 럭키진성 그룹 사모님은 사교계에서 얼굴 들고 다니지 못할 거라는데..”
“우와.. 오빠.. 대단하다. 아니 언제 장성그룹 사모님.. 아니 이제 회장님이시지? 그 회장님과 그렇게 친하게 되신 거예요?”
그 예쁜 눈을 동그랗게 뜨고, 뭐가 그렇게 궁금한 게 많은지 호기심 가득한 얼굴로 성진을 바라보는 박희선이었다.
정말 언제 보아도 이 인형같이 예쁜 박희선은 성진의 심장을 거칠게 뛰게 만드는 것만 같았다.
“그런 게 있어. 쬐끄만 게.. 넌 몰라도 돼.”
성진이 웃으면서 박희선의 이마를 콩 때리자 박희선이 손으로 이마를 만지며 입술을 삐죽 내밀었다.
수영 누나는 역시 그러면 그렇지 하는 표정으로 흐뭇하게 고개만 끄덕였다.
진소라는 뭔가 알고 있다는 듯이 음흉한 미소를 짓더니 성진을 사랑스러운 눈으로 바라보며 당장에라도 꼬리를 흔들 것 같은 표정을 지었다.
성진은 저 멀리 앉아서 이쪽을 힐끔거리며 대본을 보는 척하고 있는 이성재를 분노의 시선으로 노려보았다.
그리고 성진은 저 이성재를 어떻게 괴롭힐까 고민하게 되었다.
그런데 그런 이성재에게 한 방 먹여줄 수 있는 기회가 너무나 빨리 찾아왔다.
오후 촬영은 이성재의 액션씬이었다.
형사인 이성재가 조폭 무리와 한바탕 격투 활극을 벌이는 장면이었다.
오후 촬영에는 수영 누나와 박희선의 촬영분이 없어서 한쪽에서 그것을 구경하게 되었다.
이성재가 옷을 갈아입고, 분장까지 마치고 카메라 앞에서 몸을 풀고 있었다.
이미 스턴트맨들과 합을 다 맞춰 놓은 상태인데도 괜히 수영 누나와 박희선에게 잘 보이고 싶은지 이쪽을 쳐다보면서 주먹을 휘둘러보고, 발을 높게 차보고 있었다.
성진이 보기에는 그런 동작들이 어설프기 그지없었다.
그런데 갑자기 누군가 허겁지겁 뛰어오더니 감독에게 다가가 급하게 말을 전하는 것이었다.
“감독님. 큰일 났습니다. 중간 보스 역을 맡아서 지금 격투씬에 메인으로 들어갈 조연 배우가 아까 오다가 교통사고가 크게 나서 지금 병원 응급실에 있다고 합니다. 이제 어쩌죠?”
“뭐가 어째? 빨리 다른 대역 알아봐. 어차피 싸우는 씬이니까 연기 안 되도 되니까 몸만 잘 움직일 수 있는 배우 찾아봐. 얼른..”
감독이 급하게 지시를 내리자 이성재가 감독에게 다가갔다.
“감독님 무슨 일입니까?”
“아.. 이 배우. 그게.. 미안해서 어쩌지? 아무래도 오늘 촬영 힘들 수도 있겠는데?”
“네? 그게 무슨 말입니까? 촬영이 힘들다니요? 저 스케줄 바쁜 거 모르세요? 오늘 이 촬영 못 하면 언제 다시 할지 모르는데.. 하아.. 진짜 짜증 나네.”
“에이.. 이 배우 왜 이래? 배우가 오다가 교통사고가 났다잖아. 조금만 이해해 줘. 응?”
확실히 이성재가 요즘 잘 나긴 잘 나가는 모양이다.
감독이 저렇게 설설 기는 걸 보니 말이다.
그때 마침 이성재가 성진의 일행 있는 쪽을 보더니 갑자기 눈을 빛내며 이쪽으로 다가왔다.
그리고 느닷없이 성진에게 말을 걸었다.
“야.. 매니저, 너.. 이참에 영화배우 한 번 데뷔해 볼래? 보니까 키도 크고, 얼굴도 그 정도면.. 음.. 괜찮고, 몸도 운동 좀 한 거 같은데.. 어때? 이런 기회는 흔하지 않다. 해 볼래? 이 정도면 내가 진짜 신경 많이 쓴 거야. 무슨 말인지 알지? 흐흐흐..”
말은 성진에게 하면서도 눈은 박희선을 핥아(?)보고 있었다.
확실히 이성재의 말은 일반 나이 어린 매니저였다면 혹할만한 말이었다.
대부분 이렇게 연예인들 로드 매니저를 하는 사람들 중에 배우를 하고 싶은데, 할 기회가 없어서 먹고살기 위해 매니저 일을 하는 사람도 꽤 있었다.
그런 면에서 보면 이성재의 지금 제안은 꽤나 파격적인 것이나 다름없었다.
이성재의 그 말에 김두식이 화들짝 놀라서 이성재에게 주의를 주려고 성진의 옆으로 다가왔다.
성진이 그런 김두식을 보고는 손을 들어 말리고는 이성재를 보고 씨익 웃었다.
이미 아까부터 상황을 보고 있던 성진은 무슨 일이 벌어진 지 전부 알고 있었고, 벌써 옳다구나 하고 계산이 끝나있는 상태였다.
“와.. 성재 형님. 진짜 저에게 그런 기회를 주시는 겁니까?”
성진의 입가가 씨익 올라가면서 능청스럽게 연기가 들어가기 시작했다.
“야.. 당연하지. 하하하.. 그러니까 이따가 저기 희선이랑 자리나 한번 만들어 봐라. 알았지. 응?”
화통하게 웃던 이성재가 슬그머니 성진의 목에 팔을 걸면서 은근히 귀에다 대고 속삭였다.
“아.. 그럼요. 여부가 있겠습니까? 가능하시다면 자리를 만들어 보겠습니다.”
“그래? 좋았어. 넌.. 내가 확실히 밀어준다. 하하하..”
이성재가 좋다고 웃었지만, 성진은 속으로 이를 뿌드득 갈 뿐이었다.
‘가능하다면이라고.. 이 멍청한 새끼야.. 크크크..’
여전히 성진의 목에 팔을 두르고 있던 이성재가 그대로 성진을 끌고 감독에게 다가갔다.
“감독님. 이 친구로 그 배우 대신하죠. 이 친구가 운동도 잘해서 액션 연기 좀 합니다.”
이성재가 잘 알지도 못하면서 감독 앞에서 허풍을 떨어댔다.
느닷없는 이성재의 행동에 감독이 어이없는 얼굴로 이성재를 바라보다가 한숨을 쉬고는 성진을 바라보았다.
그런데 성진을 바라본 감독의 눈이 갑자기 반짝이는 것이 보였다.
아까 진소라를 부를 때 잠깐 봤을 때는 몰랐는데, 지금 자세히 보니 몸이 장난이 아니었던 것이다.
“오오.. 자네. 일단 외모는 합격이구만. 키도 이 배우만큼 크고, 얼굴도 그 정도면 잘 생겼고.. 특히 자네 몸이 장난 아니구만. 흐음.. 그런데 어디서 본 것 같기도 하고..”
벌써 성진이 올림픽에 나가서 금메달을 딴 지도 몇 년이 지나 사람들의 기억에서 잊혀졌다.
그래도 이렇게 얼굴을 알아보고 낯익어하는 사람들이 가끔 있었다.
성진이 가만이 감독의 말을 들으며 그저 웃고만 있었다.
“좋아. 일단 한 번 해보지. 왠지 느낌이 좋구만..”
이성재의 안하무인 한 행동에 못마땅해하던 감독이 의외로 성진을 꽤 마음에 들어 했다.
감독이 조감독을 불러 성진이 조연 대타라고 말을 하며 인계를 해 주자 조감독은 성진을 데리고 가서 옷을 갈아 입히고, 분장을 해 주었다.
그런 성진을 보면서 김두식은 안절부절 어찌할 줄을 몰랐다.
연기는 한 번도 해보지 않았을 것이 분명한데 갑자기 연기라니, 더구나 밑에 사람 입장에서 회장님이 저러다 다치기라도 하면 어쩐단 말인가?
김두식은 무조건 성진을 말리고 싶었지만, 성진이 저러고 나서는데 도저히 어쩔 수가 없었다.
‘하아.. 형님이 도대체 어쩌시려고 저러시는 거냐고.. 이러다 다치는 거 아닌지 몰라. 그러면 큰일인데..’
다칠지도 모른다는 김두식의 걱정은 절대로 성진에 대한 것이 아니었다.
성진이 누구던가? 전국구 최고 주먹 광식형님조차 한 수 접어주는 무시무시한 주먹이요, 올림픽에 나가서 당당히 KO로 금메달을 따온 사람 아니던가?
분명 성진이 가볍게 움직여도 누군가가 그 주먹에 맞는다면 보통 크게 다칠 게 아닐 텐데, 김두식은 그게 걱정이었다.
분장을 마친 성진이 스턴트맨들과 카메라 앞에 섰다.
무술 감독이 와서 스턴트맨들과 합을 알려주고 잠시 연습을 시켰다.
이미 촬영 준비가 다 끝나 있는 상태라 감독부터 시작해서 모든 사람이 성진과 스턴트맨들을 주목하고 있었다.
“응? 야.. 촬영감독.. 저거 계속 찍어 봐. 저 친구 움직임이 장난이 아닌데..”
성진은 무술 감독이 알려주는 대로 몇 번 몸을 움직여보고는 바로 스턴트맨들과 합을 맞춰보았다.
그런데 첫 번째만 조금 어색했을 뿐 두 번째부터는 마치 진짜 조폭들과 싸움을 하는 것처럼 성진이 몸을 현란하게 움직이기 시작한 것이었다.
두 번째 연습을 마치자 스턴트맨들이 ‘와아’하며 성진의 움직임에 탄성을 터트리고 다들 잘한다고 와서 성진의 어깨를 두드리며 난리를 피웠다.
성진은 오랜만에 화끈하게 몸을 움직여보니 기분이 너무 좋았다.
더구나 이런 다수의 싸움을 진짜 오랜만에 겪어보니 몸이 마치 예전에 싸우던 감각을 살려낸 것처럼 피가 끓어올랐다.
========== 작품 후기 ==========
추천, 코멘트, 쿠폰 주셔서 너무 감사합니다. ^^
다시, 그 여름으로... 429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