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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굴 속 복수계약자-18화 (18/384)

018화

분노의 여파 (1)

주인의 채찍과 당근이 끝난 지금.

나는 광활한 광장과 같은 지형에서 모닥불을 지피고 앉아 대화를 나누고 있었다.

대화 상대는 작은 쥐.

쪼그마한 생쥐와 대화를 나누는 광경은 다른 사람이 보면 퍽 미친놈으로 보일지 모른다.

하지만 주인이 만들어낸 세 번째 괴물, 생쥐를 조종할 수 있는 아사쿠를 알고 있다면 그리 이상한 광경은 아니다.

“주인은 내 죄를 사해주셨다. 피로를 느끼지 못하는 몸이건만 숙면이 그립더군. …정말로 도망치고 싶었다.”

찍찍.

무미건조한 울음소리.

그 작은 울음소리가 위로인지 조롱인지는 알 수 없었으나, 내 한탄을 조용히 들어줄 것만으로도 감사할 따름이다.

“그리고 네가 봤듯이 리스의 복수는 매듭 짓지 못했다, 오히려 부추긴 꼴이 됐지.”

리스를 살리는 선택 자체는 후회하지 않는다.

단지 실패를 후회하고, 반동을 두려워할 뿐이다.

“부질없는 구원 그리고 때를 가리지 않은 복수 때문에 네 계획에 차질을 빚어서 미안하다.”

아사쿠는 울지 않고 나와 같이 모닥불을 바라봤다.

“파견지를 몰살했으니, 분명 덴마우스 측에서도 사태 파악에 나설 터. 운 나쁘면 동굴의 정체가 세상 밖으로 드러나겠지.”

리스는 둘째 치고, 나는 다른 실수를 범했었다.

삼목산의 동굴.

이곳은 인디 상회의 반감을 사고, 통제를 벗어난 힘을 가진 이들을 처리하는, 상회의 말을 빌려 소위 쓰레기통으로 사용돼왔다.

“언젠가는 그들과 결판을 지었어야 했지. 그게 지금은 아니었지만.”

쓰레기통의 관리자, 십인장의 목적을 알고 있는 이상 그들을 처리해야 했다.

그러나 때가 너무 일렀다.

예전에 토의했을 때, 주인과 아사쿠는 아직 동굴의 정체를 은폐해야 한다고 단정 지었다.

지금은 힘을 축적해야 했다.

하지만 내가 감정적으로 행동한 바람에 주인, 아사쿠, 넘어서 복수에 위기를 불러왔다.

복수가 복수를 낳듯, 힘은 힘과의 충돌을 불러온다.

동굴의 모습이 드러난다면 막으려는 대항 세력이 쳐들어올 게 뻔하다.

동굴은 아직 영웅에 대적할 힘이 부족하고, 세계를 구하는 용사의 발치에도 못 미친다.

그러니 내가 벌인 문제는, 내가 만회해야 한다.

“이 문제를 처리할 수 있겠나? 도울 게 있으면 돕겠다.”

아사쿠는 고개를 갸웃했다.

그리고 작은 다리를 굴려 다른 곳으로 향했다.

나는 몸을 일으켜 쥐를 쫓아갔다.

한 치의 오차 없이 정사각형으로 펼쳐진 하얀 모래판.

아사쿠는 거기에 올라가 발을 구르기 시작했다.

주인과 달리 쥐의 말을 알아들을 수 없는 나를 위해 아사쿠가 전갈을 쓰는 중이었다.

다소 시간이 걸리는 작업이기에 잠시 기다리기로 했다.

그나저나 주인은 쥐의 말을 잘도 알아듣는다.

그 편리한 능력이 마족의 특성일 리는 없다.

짐승은 짐승의 말을 알아듣는 법, 말투부터 성욕까지 평상시의 주인은 짐승과 다를 바 없으니 개인 능력일 것이다.

가치 없는 추론 끝에 주인은 짐승이란 당연한 결론을 냈다.

그때쯤 작은 쥐도 전갈을 다 적었다.

인간 시절이었다면 읽지 못했으나, 지금은 주인의 교육으로 읽을 수 있게 됐다.

이럴 때만큼은 주인이 유용하게 느껴진다.

절대 감사하지는 않지만.

나는 모래판에 쓰인 글자를 조합했고, 하나의 명령을 전달받았다.

[덴마우스.]

삼목산 인근에 있는 영지를 가리키는 단어.

“알겠다.”

그게 무슨 의미를 가졌는지도 알고 있기에 큰 고민 없이 승낙했다.

십인장의 뒷모습, 나의 복수, 동생의 행방. 이는 모두 아사쿠의 정보력이 필요했고, 앞으로도 필요하다.

그러니 거절할 이유가 없다면 따르는 게 좋다.

또한…….

“주인이 허락만 한다면 곧 가겠다.”

“안 돼!”

내가 덴마우스로 간다고 말하자, 주인은 거절 의사를 내비쳤다.

그것도 강한 어조와 빠른 속도로 말했다.

“제 그릇된 판단 때문에 누를 끼쳤습니다. 그러므로 이 일은 제가 직접 마무리 짓겠습니다.”

“남타르가 가면 동굴에 나 혼자 외롭게 있잖아. 그것도 엄청 외롭게!”

내 알 바 아니다.

“그리고, 어떻게 일을 마무리 지으려고? 가서 고양이 목이라도 가져올 거야?”

“누스의 딸, 리스의 건이라면… 제 생각이 짧았습니다. 그녀를 상처 입히는 한이 있더라도, 다신 동굴에 얼씬거리지 않게 하겠습니다.”

“다를 게 뭐람, 결국 죽일 생각 없다는 거잖아.”

나는 고개를 숙였다.

“다시 한번 말하지만 저는 파견지의 병사들이 죽었습니다. 그 안에 연락병이 있었는지는 모르나, 어찌 됐든 오랜 시간 연락이 두절된다면 덴마우스에서도 사태 파악에 나설 겁니다.”

“그래서 사전에 차단하겠다, 그 말이야?”

“방법을 알고 있다면 행하겠지만, 저는 아사쿠처럼 총명하지 못합니다.”

다시 고개를 치켜세웠다.

“제가 할 수 있는 일은 아사쿠를 도와 주인님의 계획을 앞당기는 것.”

주인의 계획은 현재 준비단계에 있다.

현 단계에서 최우선시되는 건 물자와 보급 경로, 그리고 생산 시설이다.

아사쿠는 그것들을 확보하기 위해 동굴을 벗어나 덴마우스에 거점을 틀었다.

계획 초기인 만큼 그 일은 보다 면밀하게 진행한다.

하지만 내가 계산할 수 없는 문제를 떠넘겨서 그 녀석의 발등에 불이 떨어졌다.

나는 이를 만회하기 위해 문제를 덮을만한 성과를 내야 한다.

“저는 그것밖에 하지 못합니다. 그러니 허락해 주시길 바랍니다.”

“글쎄.”

하지만 주인은 달갑지 않게 눈살을 찌푸렸다.

“어차피 우리 아사쿠가 해결할 텐데, 우리 남타르는 왜 그리 조바심을 낼까.”

“아사쿠가 아무리 정치, 협상, 계략에 빠삭하다고 할지라도 일손이 부족할 겁니다. 저는 그걸 돕겠다는 겁니다.”

“내 눈에는 남타르가 다른 속셈이 있는 것 같은데.”

“…그래 보이십니까.”

아사쿠를 돕기 위해선 덴마우스로 가야 한다.

“마치 내게서 도망치려는 것 같단 말이야.”

또한… 덴 마우스에 있는 약간의 시간 동안 주인에게서 벗어날 수 있다.

그러나 주인 아니랄까봐 숨겨두고 있던 속마음을 훤히 들여다봤다.

“오해십니다. 제가 어찌 주인님의 곁을 벗어날 수 있겠습니까.”

“흥, 남타르는 말로만……. 어라?”

투정 부리던 주인은 불현듯 말을 멈췄다.

청각을 곤두세우려는 걸까, 역 안을 눈꺼풀로 닫고 귓등으로 손을 가져가 소리에 집중했다.

주인의 이상 행동을 본 내 머릿속에 의아함이 감돌았다.

나는 무슨 일이냐고 물으려 입을 열었다.

하지만 질문을 올리기 이전에 주인의 기이한 행동의 이유를 깨달았다.

들썩이는 지면.

이리저리 튀기는 먼지.

이윽고 요동치는 동굴.

잠시 후 동굴 입구에서 하늘을 찢어발기는 우렛소리가 주인의 방을 덮쳐 들려왔다.

어느 때나 일어날 수 있는 대지의 변덕, 지진을 주인은 먼저 알아냈었다.

“…결국.”

단순한 지진이었건만.

주인이 비추는 표정은 급변했다.

씁쓸하게 내려간 입꼬리, 미약하게 흔들리는 역 안, 짓눌린 이맛살.

나는 주인의 얼굴에서 슬픔이란 감정을 엿보았다.

“아무래도 우리 남타르가 때를 잘 본 것 같네. 그래, 네 말대로 계획을 앞당길게.”

나는 주인의 승낙 하에 잠시나마 벗어날 수 있게 됐다.

그러나 승낙을 얻어냈다는 기쁨보다 불안감이 더 컸다.

어린아이가 생떼 부리듯 의견을 굽히지 않던 주인이 거절을 번복했다.

그것이 내 의견을 타당하게 여겨서 번복한 것이라면 괜찮다.

하지만 불길한 예언 같은 지진이 일어난 후에 갑작스럽게 변심하는 건 이야기가 다르다.

“어찌 슬픈 표정을 짓고 계십니까?”

안중 따위를 헤아릴 정은 없지만, 이유는 물어봐야 했다.

그러자 주인은 어깨에 손을 올리고 골똘히 생각에 잠겼다.

“…그냥 옛날 생각나서.”

침묵 끝에 무난한 대답을 내놓고.

“아, 위로는 몸으로 받을게. 그러니까 바지 내려! 그리고 세워!”

평소의 장난기 어린 모습으로 돌아왔다.

“죄송합니다. 괜한 걸 물어봤습니다.”

“괜한 거라니! 어쩜 그렇게 무심하게 말할 수 있어?! 주인님의 걱정은 그 정도밖에 안 돼?!”

“예.”

“…우리 남타르, 어째 더 차가워진 것 같아.”

주인이 말하고 싶지 않다면 하는 수 없다.

화제를 바꾸려는 촌극에 어울려줬다.

그때. 탁, 하고 작을 발소리가 들렸다.

쥐 한 마리 한 마리가 방으로 들어오더니.

연이어 쓰나미처럼 쥐 무더기가 주인의 방으로 들어왔다.

모두 아사쿠다.

“어머, 어쩐 일로 다급하게 몰려온 거야?”

필사적인 쥐 울음소리가 수없이 겹쳐져 주인의 방에 시끄럽게 울렸다.

“음, 음. 진짜? 으응, 큰일이네.”

쪼그마한 생쥐와 대화를 나누는 광경은 다른 사람이 보면 퍽 미친년으로 보일지 모른다.

실제로 미친년이 맞다.

“뭐라고 합니까?”

열심히 떠들어대던 주인에게 물었다.

“산에서 숨어 있던 괴물이 튀어나온 것 같대.”

나는 눈살을 찌푸려 주인을 노려봤다.

삼목산에 괴물이 남아 있을 리 없기 때문이다.

“개조 당한 이래, 아사쿠가 급하게 아뢸 정도로 위협적인 괴물은 전부 처리했습니다. 저는 2년을 허투루 보내지 않았습니다.”

“알아, 알아. 남타르가 고생한 거 나도 알고 있어.”

그냥 고생이 아니다.

산채로 사지가 찢기고 온몸이 갉아 먹히는, 이른바 개고생을 해가며 삼목산의 괴물을 처리했다.

그런데 또 나타나다니.

아사쿠가 떠받드는 주인에게 거짓을 고하지는 않을 테지만, 믿으래야 믿을 수 없었다.

“어디에 나타났지? 그리고 형태, 크기, 개체 수는?”

쥐 무더기가 나를 한번 쳐다보고는 너 나 할 것 없이 찍찍하고 울어 대면서 주인에게 정보를 전달했다.

그러나 주인도 소음을 버틸 겨를이 없었는지 점차 표정이 찌푸려졌다.

“그만! 하나만 말해! 목소리가 겹쳐서 뭐라는지 하나도 모르겠어!”

결국 폭발했다.

그제야 아사쿠는 울음소리를 줄이고, 단 한 마리의 쥐에 의존해 말을 이어갔다.

주인은 흥미로운 표정으로 쥐의 울음을 경청했다.

“알겠어. 그럼… 오랜만에 몸 좀 풀어볼까.”

“설마 나서시려는 겁니까?”

“응. 남타르 혼자는 위험할 것 같아서.”

인간 시절의 내가 괴물과 조우했다면 필시 하루도 버티지 못하고 죽었다.

하지만 지금은 불사를 표방하는 생명력과 일개 병사 따위는 쉽게 짓뭉개는 힘을 가지고 있다.

그러니 괴물 대부분은 주인의 힘을 빌리지 않고 직접 처리할 수 있다.

무엇보다 감정과는 별개로, 주인은 죽거나 다치면 안 된다.

“주인님까지 나서지 않아도 괜찮습니다. 저 혼자 처리하겠습니다.”

“센 척하기는. 내가 만들어준 남타르 몸이 아무리 강하더라도, 목이 잘리거나 머리가 박살나면 그걸로 끝이야. 아무리 나라도 그건 못 살려.”

“그렇다면 훔바바와 동행하겠습니다. 그놈이 있다면 충분히 처리할 수 있을 겁니다.”

“맞아, 우리 훔바바가 있다면 큰 도움이 될 테지.”

“알았으면 동굴에서 몸을 보존하시길 바랍니다. 자칫 위험할 수 있습니다.”

“생각해주는 마음은 고맙지만 다시 한번 생각해봐. 내가 남타르에게 보호받는 처지일까.”

만류에도 불구하고 주인은 무거운 몸을 일으켜 나와 아사쿠를 재치고 나아갔다.

“…어째서 이리도 고집 피우시는 겁니까?”

“아직도 모르겠어?”

뒤돌아선 주인의 얼굴에는 미소가 만연됐다.

마치 놀이터에 놀러 가는 어린아이 같았다.

“우리 남타르 혼자서는 상대할 수 없어.”

주인은 여전히 장난스러운 미소를 띠고 있었지만, 패배를 단정 짓는 목소리는 진중했다.

“알겠습니다.”

나는 한숨을 내쉬고 동행을 허용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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